Photo by Marco Trassini on Unsplash

여름밤


8월의 마지막 주말. 여름방학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이놈의 더위는 가실 줄을 모른다. 분명 해는 서산 너머로 가라앉았고 하늘은 보랗게 물들다 못해 새까맣게 변했건만, 내쉬는 숨들은 죄다 뜨뜻미지근하다. 지금 날이 이만큼 무더운데 만약 해가 정중앙에 떴을 대낮에 밖을 돌아다녔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뜨거운 물에 담가진 수란처럼 미적지근한 몸을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걸음을 내딛자, 옆에서 신소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가 불만이냐, 하고 한소리 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보랏빛 눈이 나를 보고 있어 곧장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지평선 끝자락에 얼핏 보이는 그것과 비슷한 색이었다. 신소는 내 어색한 시선 처리를 알아채긴 했을까 싶은 평이한 어조로 버스에서 내린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더워하느냐 말을 건네었다. 다소 느리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는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것이었으나 티를 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부러 퉁명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러는 너도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는다?"

신소는 대답을 하는 대신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내 말에 부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나도 따라 빙긋 웃어주었다. 이번에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채였다.

"날이 더워서 그런가, 사람들이 꽤 있네."

지나가듯 흘린 말에 시선이 우리가 걷고 있는 다리 아래 강변으로 향했다. 열대야에 집 밖으로 밤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뽀얗게 불이 올라온 가로등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개중 벤치에 앉아 있는 커플 한 쌍에 눈길이 닿은 순간, 공교롭게도 아시도가 알려준 도시 괴담이 떠올라버렸다. 

'밤에 좋아하는 사람과 시내에서 학교 쪽으로 오는 다리를 건너면 이루어진대!'

괴담치고 유령은 하나도 나오질 않고, 비슷한 레퍼토리가 어느 동네 어느 곳을 가도 있을 법한 이야기였지만 아시도의 설레하는 목소리를 떠올리고 나니 도통 잊히지 않았다. 아시도의 목소리뿐일까, 내 옆에서 어깨를 맞추고 걷고 있는 한 존재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평소라고 그에게 아무런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괴담의 삼박자와 지금 우리의 상황이 맞물리자 괜히 이상야릇한 기분에 휩싸이는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여기 소문 유명하지 않아?"

"으응? 무, 무슨 소문?!"

지레 찔리는 바람에 소리를 지르듯 반응하고 말았다. 하필 그런 말을 하다니. 신소가 말하는 유명한 소문이라는 것이 내가 아는 것일까? 알고 보니 다른 이야기가 더 있을지도 모르잖아. 심박 수가 빨라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신소의 눈치를 살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신소는 나를 쳐다보았다가, 뒤에서 벨을 울리며 지나치는 자전거를 발견하고는 제 앞으로 나를 잡아당긴 것 같았다. 잡아 당겨진 팔뚝에서 신소의 손바닥 열기와 내 심장 소리가 그대로 느껴졌다. 맙소사, 짧은 소매를 입는 게 아니었는데.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제자리에 돌아가는데, 신소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

"다리를 건너면…어떻게 된다던가…."

"어떻게…뭐…죽는대?"

나는 끽하면 죽을 것처럼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겨우 시치미를 떼었다. 이 기분이 정확하게 어떤 감정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자이로드롭 꼭대기에서 카운트를 세는 그 순간처럼, 무섭지만 설레는 이중적인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어째서, 단둘이 걷고 있는 지금, 그것도 소문의 다리 위에서 그런 말을 하느냔 말인가.

나를 인도 안쪽으로 두고 차도에 바꿔 선 신소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내가 어떤 표정인지도 모른 채 마찬가지로 신소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주 짓곤 하는 미소를 보이며 나직하게 말해주었다.

"모르면 됐어. 뻔한 내용이야."

아마 그 뻔한 걸 내가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설마 하는 기쁨과 아쉬운 실망을 감춘 채 나는 싱겁게 왜 말을 하다 마냐며 평소처럼 신소에게 장난을 쳤다.

네가 모른 척 넘어간다면 나도 넘어갈게. 내가 너에게, 어쩌면 네가 나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ㅇㅅㅇ/

Edith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