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명한 창 너머로 아른거리는 아침 햇살은 딱 기분 좋을 만큼 눈부셨다. 이른 시간답게 상쾌한 공기가 밤 사이 평화로웠던 아스가르드 궁정의 대기를 가득 메웠지만, 그 청명한 새벽의 냄새는 궁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왕의 집무실까지는 와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몇 차례에 걸쳐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고 고하는 시종의 전갈에도 응답을 하지 않은 채, 홀로 방에 틀어박힌 커다란 왕의 인영은 도통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 안에서는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고요했다.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책상 위에 두 팔꿈치를 올린 채 커다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익숙한 자세였다.

이윽고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린 토르의 얼굴은 상당히 까칠했다. 요즈음 들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했으니 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하룻밤 새 몹시도 깊어진 눈빛은 그가 컴컴한 밤에서부터 이어진 깊은 번민에 잠긴 채,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다. 생기가 사라져 거뭇거뭇해진 눈밑을 제 손등으로 스윽 비빈 토르가 멍하니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 자세를 오래 취하고 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너른 집무실 안을 빙빙 돌기 시작한 토르였다. 그의 튼실한 어깨는 마치 감당이 안 될 만큼 거대한 짐을 짊어진 거인마냥 초라하게 축 처져 있었다. 보는 사람의 정신을 사납게 하는 걸음을 잠시 멈춘 채, 후우, 하고 깊은 숨을 몰아쉰 그가 손을 들어 제 덥수룩한 수염을 매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에 마주했던 동생의 모습과 말소리가 자꾸만 어른거려, 토르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자, 생각해 보자. 로키가 이토록 자신을 단호하게 거부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게 아니었다. 어릴 때의 로키도 종종 자신과의 접촉을 차단하고자 한 적이 있었다. 그래, 있긴 있었는데.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못 이긴 척 나를 받아주곤 했었지. 토르가 생각했다. 하지만 어제의 로키는 조금 달랐다. 그의 예민한 감이, 자신에게서 돌아선 동생의 어깨를 잡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경고음을 울렸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자신 앞에 실시간으로 세워진 거대한 옹벽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절대 부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단단한 벽이 로키와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로키와 그렇게 많이 다투었어도 제가 이런 느낌을 받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전사답게 선이 굵은 토르의 입술 새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몇 시간에 걸쳐 생각해 봐도, 역시 모든 게 어렵고 답답하기만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한 상념은 순식간에 과거까지 쭈욱 거슬러 올라갔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다시금 로키를 되살려낸 후, 그를 자신의 곁에 두면… 자신은 정말 그것으로 만족하고 끝을 낼 줄 알았는데. 아니다. 아니었다. 새로 재생된 고국의 왕 노릇만큼이나 사랑하는 동생을 대하는 것 또한 힘이 들었다. 자신은 그저 좋기만 한데, 로키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제는 너무 커 버린 동생의 머릿속을 알 수만 있다면. 그 작은 머릿속에서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자신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살아 계셨을 때 마법을 좀 더 열심히 배워 둘 것을! 이제 와서 땅을 치고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언제나 자신의 고민에 도움을 주셨던 아버지조차도 이제는 너무 먼 곳에 계셨다. 그러니 누구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걱정과 근심을 포함한 농도 짙은 진심이 어린 조언을 또 누구에게 들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미 너무나도 먼 곳에 계신 것을. 토르에게는 모든 것이 혼돈이었다. 잠시나마 정리되기가 무섭게 다시금 혼탁해진 제 머릿속 생각들 때문에, 분노와 체념의 한숨을 내쉰 토르가 다시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을 무렵. 커다란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시니컬한 목소리는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그의 것이었다.


"이봐, 토르! 바쁘냐?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왜 밖에선 코빼기도 안 보여?"

"…오, 토끼로군. 왔소?"

"오냐! 나도 생존 신고 겸 왔… 음?"


토르의 집무실 앞을 지키던 시종의 당혹스러운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 뜻하지 않은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자신 쪽을 보는 토르의 퀭한 눈빛에, 호기롭게 그의 집무실로 쳐들어온 로켓은 아연실색했다. 대체 이 꼴이 뭐야?! 요툰헤임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죽을 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자신도 아스가르드로 돌아오자마자 방 안에 처박혀 아무 것도 안 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폐인 같은 몰골을 하고 있지는 않은데! 한때 천사와 해적 사이에서 태어난 것 같은 남자라 불렸던 눈앞의 이는 숫제 온몸에서 생기란 생기는 다 빠져나간 인형 같아 보였다. 빈틈 없이 꽉꽉 짜여진 근육으로 울룩불룩한 몸의 윤곽과는 달리, 여전히 범죄에 가까울 정도로 매혹적인 잘생긴 얼굴에는 영혼이 없었다. 게다가 정돈되지 않은 머리칼과 덥수룩한 수염은 전반적으로 낡고 지친 인형을 연상케 했다. 왠지 아무 말이나 꺼내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로켓은 엉겁결에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그대로 읊고 말았다.


"너… 꼴이 그게 뭐냐?"

"…그게 무슨 말이오?"

"몰라서 물어? 오랜만에 자기 집에 돌아온 사람이, 왜 차가운 테란 길바닥에서 노숙 중인 거렁뱅이 같은 꼴을 하고 있냐는 거지."

"…아, 그래 보이나 보군."

"어, 지금 네 상태 졸라 구려 보여."


토르의 혼잣말 같은 대답에 명쾌하게 결론을 내려 준 로켓이 이내 앞발 끝으로 촉촉한 제 콧등을 문질렀다. …어라, 뭔가 더 말할 것 같더니 왜 말이 없어? 눈을 크게 뜬 너구리가 제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하는 게 느껴졌지만, 천둥의 신은 다시금 호수같이 깊은 침묵을 택했다. 아니 참, 고양이가 혀라도 뺏어갔나! 민첩하게 토르의 책상 위로 기어오른 로켓이 여전히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잘생긴 어깨를 툭툭, 건드려 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대에게서 반응이 없자, 기어이 욱한 너구리가 발을 쾅 구르며 왁왁거렸다.


"야! 너 진짜 이러기냐?! 다시 이 심심한 동네에 돌아오고 나서 오늘 처음 놀러왔구만! 날 이렇게 모른 척하기냐고!"

"…"

"답답해 뒤지겠네! 그 추운 데서 돌아오고 나서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둘 다 이렇게 멍청이가 됐냐? 엉? 뭐, 나 모르는 사이에 싸움질이라도 한 거 아냐?!"

"…음? 그게 무슨…"

"너나 사슴뿔 애송이나 똑같이 영혼이 빠져 있다고! 속 터져 죽는다 내가! 니네가 퀼처럼 허약한 테란이라서 총 맞고 뒈질 수 있는 놈들이었으면 당장이라도 다 쏴 죽여버렸을 텐데, 진짜!"


제가 몸 담고 있는 팀의 애꿎은 리더를 신랄하게 까내리고 있는 로켓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토르의 귀에 들어온 이름은 퀼과는 전혀 관련 없는 부분이었다. 로키도 자신 같은 상태인 것인가… 힘없이 아래로 내려앉아 있던 토르의 속눈썹이 그 순간 화득 뜨였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로켓은 그저 기가 찼다. 다시금 책상 아래로 풀쩍 뛰어내려가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팔짱을 낀 로켓이 혀를 끌끌 차며 입을 연다.


"말 해, 해적천사."

"…뭘 말이오?"

"너랑 애송이. 무슨 일이야?"

"…"

"얼른. …말 안 하냐?"

"…"

"내가 요즘… 장난 아니게 무료해서 말이야. 방구석에 처박혀가지고 하드론 인포서를 한 번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개조해 봤거든? 근데 아직 성능 실험을 안 했어. 이 참에 네가 제일 먼저 맞아 보는 건 어떠냐? 삶이 개똥같아서 뒈지고 싶을 때 아주 유용할 텐데."


물론 자신이, 고작 너구리의 손에 개조된 무기 때문에 발할라로 떠나게 될 리는 없었다. 비록 그게 즉석에서 행성 하나를 파괴할 만한 위력의 폭탄을 만들어낼 줄 아는 이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그래도 이 쪽을 쏘아보는 너구리의 눈초리가 그의 험한 입만큼이나 살벌했기에, 결국 토르는 알겠다는 뜻으로 가볍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왜인지 로켓의 말투는 아스가르드를 떠나기 전보다 상당히 많이 거칠어진 것 같았다. 가모라를 구하는 과정이 많이 힘들었던 걸까?


어쨌든 토르가 대화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나자, 방 안에 들어선 이후로 내내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던 로켓이 옆에 있던 의자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갔다. 커다랗고 초췌한 제 친구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을 기다리는 그의 갈색 눈은 아까보다 훨씬 초롱초롱해져 있었다. 그렇게 토르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몹시 긴 시간 동안 품어 왔던 제 동생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그리움, 그럼에도 자꾸만 자신을 피하는 것 같은 로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자꾸만 어긋나는 것 같은 상황에 시시각각 썩어들어가고 있는 제 마음까지. 한 번 시작하고 나니 마치 음유시인처럼 줄줄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너구리는 고개를 까딱이며 침울한 친구의 이야기를 끝까지 차분하게 들어 주었다.


제법 길었던 토르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도, 로켓은 예상 외로 덤덤한 표정이었다. 피가 섞인 것은 아니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왔던 동생을 사랑하고 있다는데, 돋는 이가 이렇게까지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조금 놀라웠다. 슬쩍 너구리의 눈치를 보던 토르가 어딘가 불편한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왜 놀라지 않는 것이오, 토끼?"

"왜 안 놀라냐고?"


쟤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내가 잘못 들었나? 흥, 하고 코웃음친 로켓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야, 내가 퀼 같은 머저리인 줄 아냐? 지금까지 네가 티내고 다닌 게 얼만데 그걸 몰라?"

"…정말이오?"

"뭐야, 얘 진짜 그런 줄 알았나 보네. 난 타이탄에서 네가 동생 얘기 처음 했을 때부터 졸라 유별난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

"…"

"어라? 얘 봐라. 야, 토르. 이 마을 두목이 자기 동생 너무 좋아 죽으려고 한다는 거 이미 모두 다 알고 있을 걸? 너희 두 멍청이들만 빼고!"

"?!!"


…내가 정말 그랬단 말인가? 로키에 대한 감정을 나름 잘 숨겨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믿겨지지가 않는군. 그야말로 포커페이스의 완벽한 실패였다. 뒤늦게 성난 해일처럼 몰려오는 자괴감에 저도 모르게 토르가 두 손으로 거칠게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지만, 그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고 있던 로켓은 홀로 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 둘밖에 없는 집무실 안에서는 단 한 점의 바람조차 불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몇 가닥밖에 안 되는 너구리의 수염이 가볍게 흔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떤 로켓이 다시금 대화의 물꼬를 튼다.


"잠깐… 그래, 정리를 좀 해보자. 음, 그러니까, 해적천사? 지금 네 문제가 뭐야?"

"…음?"

"문제가 뭔지 알아야 해결을 할 거 아냐! …그 예민한 사슴뿔이 줄곧 널 피하면서 꽁지 빠지게 도망다니고 있는 거? 그것도 아니면, 네 스스로가 그 녀석을 사랑… 흠… 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 설마 고작 그런 문제 때문에 이렇게 빌빌거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치?"

"오, 제발… 토끼!"

"왜? 내가 뭐 못할 말이라도 했냐? 내 말이 맞잖아. 그냥 저기 도망치고 있는 애송이한테 가서, 녀석을 꼭 붙들고 하고 싶은 말을 하기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 아니야? 말을 해. 하면 되는 거잖아! 근데 왜 그렇게 머저리처럼 속 터지게 굴고 있는 건데? 진짜 이해 안 되네!"

"그건…! 토끼, 그대 말처럼 그리 쉽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생각을 해 보시오!"


아까까지만 해도 축 처져 있던 토르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다. 그의 음성에는 옅은 고통이 담겨 있었다. 그에 로켓의 말문이 잠시 막히자, 아스가르드의 왕이 성난 얼굴로 말했다.


"모르겠소? 로키는 하나뿐인 나의 동생이란 말이오! 로키가 나의 친형제든 아니든, 어쨌든 우리는 천 년 여 동안 함께 자라 왔소. 같은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고, 같은 사람에게 마법과 검술을 배웠고, 언제나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생각을 하며 같은 곳을 누볐단 말이오! 서로를 지켜 주고,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존재요. 가족이란 그런 거잖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세상에 남아 있어 줄 유일한 나의 편 아니오?"

"…그거야 그렇지?"

"그렇소. 자, 이래도 이해가 가지 않소? 로키는 내게 하나 남은, 유일한! 그런… 가족이란 말이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로키를 잃고 싶지 않소. 그런데 내가 섣불리 나의 이 불경한 마음을 고백했다가, 하나 남은 동생이 또다시 내 곁을 떠나 사라지고 만다면… 혹은 또 다시 목숨을 잃기라도 한다면…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그건 정말이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단, 아니, 못 하겠단 말이오! 그렇게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는 주저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하나뿐인 동생의 연인이 되고 싶다는 내 마음을 로키가 순순히 납득할 거라고 생각하오? 그대가 로키라면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겠느냔 말이오!"

"잠깐만. 그게 말이 안 될 건 뭔데?"


천둥이 치는 듯한 토르의 고함을 묵묵히 듣고 있던 로켓이 어느 순간 냉정하게 반문했다.


"토르. 생각해 봐. 그렇다고 너희가 진짜 피가 섞인 친형제인 건 아니잖아. 엄밀히 따지자면 애송이랑 넌 남남이라고! 그리고 고작 그런 시시한 이유 때문에 네 동생을 그냥 동생으로만 생각하겠다고, 그 사랑인지 뭔지를 접을 거였다면… 기회는 진작부터 있었잖아. 그 때, 타노스 손에 애송이가 죽었을 때 말야!"

"…"

"곱게 죽지 못한 동생을 다시 살려내 지켜 주겠다는 것까지는 좋았지. 처음엔 나도 그러려니 했다고.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동생을 많이 아끼는 형이라 쳐도 넌 너무 유별났어, 토르! 그래, 난 네가 무슨 약혼자를 잃어버린 이야기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줄 알았다고. 아직 오지도 않은, 그리고 올 지 안 올지 알 수도 없는 미래가 두려워 애송이를 포기할 거였다면 그 때 했어야지. 그냥 잃어버린 네 분신으로서 가슴 속에나 묻어 두고, 가끔씩 먼 하늘 바라보면서 동생아… 그립구나… 이런 찌질한 말이나 툭 던지는 쓸쓸한 왕 노릇이나 했어야지! 근데 넌 어떻게든 애송이를 되돌려 놓겠다고 온갖 난리를 쳤잖아! 목숨, 아니, 나라까지 걸고 그 거인 놈들 땅에까지 다녀오고! 지금까지 그렇게 못 봐 줄 몰골로 낑낑대고 있으면서,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뭐라고?"

"…"

"진짜 최악이다, 토르. 지금 너… 완전 겁 먹은 머저리 꼬마처럼 보이는 건 알고 있냐? 그루트가 아기였을 때도 너보다는 용감했을 거다!"


냉철한 너구리가 날린 마지막 어퍼컷은 강렬했다. 세상에, 오딘의 아들이자 아스가르드의 왕인 내가 겁쟁이란 소릴 듣다니, 오딘의 수염에 맹세코 이렇게 굴욕적인 순간이 없었거늘! 정확히 문제의 핵심만 골라 푹푹 찔러 들어오는 그의 일침에, 말문이 막힌 토르가 몹시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하려던 차. 한숨을 푹 내쉰 로켓이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일단, 다 집어치우고… 자. 어쩄든 너도 궁금하긴 하잖아, 토르."

"…음?"

"너에 대한 애송이의 마음. 그걸 알면 널 왜 피해다니는지도 알 수 있을 테고… 하여간 네가 알고 싶은 건 다 알 수 있을 거 아냐."

"…"

"그러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구차하게 혼자서 우울하게 삽질이나 하고 있을 건데. 어? 너도 계속해서 이러고 있긴 싫잖아. 안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느덧 토르와 스스럼없이 마음 속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게 된 너구리는 아스가르드 왕의 마음을 제법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를 조련하듯 한 톤 낮아진 로켓의 목소리에, 결국 토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로켓이 무심하게 입을 연다.


"네 동생 마음을 아주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해."

"…정말이오?"

"그래, 그… 있잖아. 우리 팀에… 더듬이 달린 여자애. 너도 알지?"

"…아."


로켓이 말하던 그녀가 누구인지, 잠시 생각하던 토르가 이내 짧은 탄성을 냈다. 이름이… 뭐였던가. 타노스에게 로키와 헤임달, 백성들을 잃고 기절한 채 우주를 떠 다니던 자신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우주선에 구출되었을 때에도 거의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로켓이 지금 누굴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늘 조용했고 많이 소심해 보이던, 새까맣고 큰 눈의 소녀를 떠올린 그가 이내 반문했다.


"맨티스… 랬던가? 그녀 말이오?"

"어, 맞어."

"그런데 그녀는 왜…?"

"정 답답하면 한 번 걔 도움을 좀 받아 보자고. 너 걔한테 무슨 능력이 있는지 알아?"

"모르오. 들은 바가 없으니…"

"걘 자기 손이 닿는 사람의 감정을 조종할 수가 있거든. 그리고… 읽을 수도 있고."

"흐음…"

"그러니까 걔한테 사정을 얘기하고 도움을 한 번 받아 보자니까? 내가 적당히 구실을 둘러대서 애송이를 만날게. 둘이서 너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어떤 핑계를 대서 맨티스가 애송이의 몸에 손을 대게 하면 되잖아. 어차피 그 대화의 주제는 너일 테니까, 그럼 너에 대한 그 녀석 마음을 손쉽게 알 수 있을 거라고. 엄청 간단하고 쉽고 빠른 방법이잖아. 어때?"

"…"


분명 그 제안은 달콤했다. 몹시도 신속하고 정확한 방안을 내놓은 너구리의 묘안에, 토르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기를 몇 분, 하지만 그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그를 웬일로 제법 끈기 있게 기다려 주던 로켓이 결국 대답을 채근했다.


"충분히 기다린 거 같은데. 어때? 고민은 다 했냐?"

"…"

"어떻게 할래, 토르. 해 볼래?"

"…아니오, 토끼. 그대의 호의는 정말 고맙소만… 그 제안은 사양하겠소."

"…뭐? 왜?!"


예상 외의 단호한 거절에 너구리의 눈이 커졌다. 저도 모르게 앉아 있던 의자 위에서 뛰어 내려온 로켓이 보란 듯 날카로운 제 엄니를 드러내자, 단단히 무언가를 결심한 듯 굳어진 얼굴의 토르가 평소와 같은 톤으로 말했다.


"그냥… 내게는 이것이 옳다 생각되오. 원하는 그 곳까지 가는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후손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실 발할라의 선조들께서 적절한 때를 안배해주실 거요. 그럼 그 때, 나는 로키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소. …그것이 내가 줄곧 원해 왔고, 또 원하고 있는 바요."

"와… 진짜 미치겠네?! 진심이야, 토르?"

"그렇소."


회심의 제안이 거절당하자, 성난 너구리는 이제 숫제 아스가르드 왕의 책상을 때려 부수기라도 할 기세였다. 다시금 그의 집무실 책상 위로 뛰어 올라온 로켓이 발을 쾅쾅 구르며 꽥 소리를 질렀다.


"야, 그러니까 그게 언제냐고 대체!"

"…"

"그래, 네놈들은 꼴에 신이라고 몇천 년씩 산다는 거 알어. 아마도 나나 퀼이 다 늙어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겠지! 그거 알긴 아는데! …그래서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그 때까지, 그 오랜 시간 동안 계속 이렇게 삽질만 하면서 지내겠다고?! 동생이 널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 먼저 말도 못 꺼내고, 너를 대하는 걔 태도나 하나하나 자로 재고 따지는! 그런 쓸데없는 망상이나 줄곧 하면서? 이런 망할, 너 제정신이야?!"

"…"


속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세상에 이렇게 답답해 빠진 놈을 봤나!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로켓이 제 가슴을 퍽퍽 쳤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격하게 성질을 내도 눈앞의 커다란 에시르는 내내 묵묵부답이었다. 채 분이 가라앉지 않아 혼자 식식거리는 콧김을 내뿜던 로켓이 결국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좋아, 토르! 어디 그럼 네 맘대로 해! 평생 자기 동생 마음 하나 알아내지 못해서, 그렇게 찌질하게 방구석에 처박혀 있기나 하라고! 넌 진짜… 내가 아는 모든 애새끼들 중에서 제일 꽉 막힌 놈이야!"


이내 활짝 열린 집무실의 문이 곧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쿵, 하고 닫혔다. 아스가르드 장인들의 손길로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는 문이 부서지지 않은 게 용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큰 소음이었다. 최소 토르 스스로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로켓이 자신에게 이토록 크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가 저렇게까지 막말을 퍼붓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상처 받은 친구의 마음까지 헤아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다시금 제 책상 앞에 앉은 채, 한 손으로 힘을 주어 제 관자놀이를 꾹 누른 토르가 멍하니 생각했다. 이미 번민으로 꽉 차 있던 머리가 이제는 쾅쾅 울려 왔다. 심장이 활발하게 약동하는 리듬에 맞춰 두통이 엄습했다. 자신이 견디기 벅찰 정도로 너무 많은 것들을 생각할 땐 늘 그랬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그것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아무래도 제정신으로 있기는 그른 모양이었다. 문 밖의 시종을 부른 토르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술을… 좀 가져다 다오. 최대한 많이."


*


토르의 집무실 문이 부서져라 꽝, 닫고 밖으로 뛰쳐나온 너구리는 왕의 정원에 나와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도 날씨가 좋아, 아스가르드에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지만 극도로 짜증이 난 상태인 로켓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했다. 로켓의 까맣고 촉촉한 코에서는 끊임없이 분노에 찬 콧김이 뿜어져나왔다.


아니, 내가 대체 왜 저 새끼들 사이에 끼어들었던 거지?! 진짜 바보 같은 짓이었어! 성난 너구리의 발걸음에 소박하게 피어 있던 꽃잎들이 짓이겨졌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로켓이, 이내 제 발 밑에서 뜯겨져나간 꽃잎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은 새로 태어나기 이전의 거대한 그루트가 종종 피워내곤 했던, 소박한 꽃잎과 같은 색을 띄고 있었다. 갑자기 울적해진 그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진짜 맘 같아선 다 쏴 버리고 싶은데. 왜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거지? 낮게 숨을 몰아쉰 로켓이 연녹색의 잔디 위에 벌렁 드러누워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루트와 함께 온 우주를 누비고 다녔던 시절의 자신이었다면 전혀 참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나 마음을 쓰는 존재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일원들이 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살면 살수록 자꾸만 신경을 써야 할 범위가 넓어진다. 젠장, 이게 뭐람.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로켓은 가만히 토르를 처음 마주했던 그 날을 떠올렸다. 가족들과 친우는 저마다의 이유로 죽거나 살해당했고, 겨우 지켜낸 백성들조차 잃어버렸던 그 때에도 이렇게 혼 빠진 멍청이처럼 굴지는 않았었는데! 혼자서 비극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번민에 잠겨 있는 지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그럼에도 자신은 토르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그런 문제 하나로 이렇게 답답하게 굴 이유가 뭐가 있다는 건지, 로켓은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의 세계 안에서는 그랬으니까. 뭔가를 물어봐야 할 필요가 있으면 물어보면 되는 거고, 대답을 들어야 할 게 있다면 대답을 들으면 된다. 그러면 되는 것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어렵다는 거지? 이 간단한 명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래. 로켓은 기민하게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보기에 아스가르드에 사는 놈들은 쓸데없이 인내심이 강했다. 그것도 정말 불필요한 부분에서. 그것은 순혈 아스가르드인이든 서리 거인이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는 곰 같이 참는 법만 가르치는 건가? 겨우 서로의 곁에 있게 됐는데, 저렇게 멍청하게 굴 겨를이 어디 있어? 나라면 끝장을 보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아마 예전의 그루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난 절대 저렇게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을 텐데. 


역시 이렇게 저들을 보고만 있다가는 자신이 먼저 복장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예전에 비해 오지랖이 많이 넓어진 너구리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좋아, 그래. 어디 한 번 저 멍청한 형제가 제대로 된 끝을 볼 수 있게 해 주자고. 나도 궁금하니까. 벌떡 일어난 로켓의 입가에는 아주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 무슨 낯간지러운 짓인지 모르겠다. 평소에 퀼이 가모라에게 추근거리는 모습을 꽤 자주 목격한 바 있지만, 그 땐 정말 별 생각 없었는데, 이렇게 자신이 나서서 취향에도 맞지 않는 사랑의 메신저 짓을 하고 싶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 정말이지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 멍청이는 알아서 잘 하잖아. 적어도 토르보다는."


하, 하고 코웃음을 친 로켓이 낮게 중얼거렸다. 거듭 생각해봐도 자신은 정말 이런 짓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 답답해 빠진 아스가르드 형제를 이대로 뒀다가는, 자신이 죽는 그 날까지도 답답해서 소리만 지르다 숨을 멈추게 될 것 같았다. 


"이제는 나도 좀 즐거운 걸 보고 싶다고… 평화로운 행성, 비싸고 높은 빌딩, 멍청이들보다는 똑똑한 동물들 같은… 그런 거 말야…"


로켓이 제 아무리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강철 같은 이성을 담당하고 있다 해도, 실시간으로 주어지는 스트레스엔 그조차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원인이 뭔지는 알고 있으니, 그냥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낮은 신음과 함께 무언가를 생각하던 너구리가 순간 영민한 갈색 눈을 번뜩였다. 무언가가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탓이다. 그래,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된다지? 의뭉스럽게 실실 웃던 로켓이 이내 복슬복슬한 꼬리를 흔들어 거기에 묻어 있던 것들을 털어냈다. 일단은 가 볼 곳이 있었다. 애송이가 안에 있으려나, 제 꼬리를 바짝 세운 채, 로켓이 등을 돌려 발 빠르게 왕의 정원을 나섰다. 그의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채였다.


---------------------------------------------------------------------------------------------------


로키의 모든 것을 너무나도 아끼기 때문에 오히려 점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토르가 좋습니다 다른 방면에선 대범하지만 오직 로키에 관해서만!!... 그리고 로켓의 '내 사람'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것도.. 좋아요.. 얘들아 사랑해..

라알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