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어나는 많은 이들의 몸 어딘가에는 희미한 흔적이 존재했다. 이 흔적은 평생 그렇게 희미하게 존재할 수도 있고 흔적 위로 누군가의 이름이 새겨질 수도 있었다. 명확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느냐, 그러지 않느냐였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흔적은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느껴보지 못한 뜨거운 열기를 띄며 새겨지는 이름은 평생 서로가 함께 해야 한다고 잔인하고도 낭만적으로 속삭인다.


누구도 이 운명을 거부할 수 없다고.



2.

여자 친구 없이 커피숍에 와본 적 있던가, 학연은 멍한 표정으로 한산한 커피숍의 창가 테이블에 앉아서 그렇게 생각했다. 희미한 흔적 아래에 누군가 불쏘시개로 쑤시는 것처럼 뜨겁고 따끔한 고통이 이어졌다. 앞에 앉은 남자도 마찬가지겠지? 서로의 손목 아래의 흔적을 번갈아 바라보며 각자 고통을 삼켰다. 형이상학적인 문양이라고 생각했던 흔적이 또렷한 글자를 만들어냈다. 앞에 앉은 남자가 외자이길, 적어도 평범한 세 글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길 간절히 바라며 뚜렷해지는 글자를 지켜봤다.


" 아, 이름이 정택운 이시구나. "

" 네, 그쪽은 차학...연? 맞아요? "

" 네, 맞아요. "


손목 아래의 흔적으로 서로의 이름을 확인하며 학연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스물일곱, 이미 잘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벌써 3년째 사귀고 있었고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해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희미한 흔적을 볼 때마다 불안해했던 여자친구를 달래고 달랬던 시간들이 스쳐갔다. 불행하게도 그녀의 직감은 맞아떨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태어나 처음 만난 사람의 이름이 손목 아래 새겨졌다. 이 사람의 이름을 방금 알았는데 흔적은 우리를 운명이라고 말한다. 몇 살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심지어 결혼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상대방 남자도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점점 뚜렷해지는 이름을 몇 번이나 쓰다듬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평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여자친구에게 집에서 나왔다고 문자를 보냈다. 벌써 여름이 찾아왔나 싶은 햇빛을 받으며 면접장으로 향하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하루의 시작일 뿐이었다. 아, 면접! 학연은 자신이 회사 면접을 보기 위해 걷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 아, 죄송해요. 제가 지금 일이 있어서, 지금, 가봐야.. 아, 몇 시지? "

자리에서 일어난 학연은 급하게 제 짐을 들며 남자에게 말했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짐을 챙기고 나가려는 학연을 보던 남자는 제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학연은 남자의 명함을 들어 정장의 주머니에 넣고 커피숍을 나갔다. 택운은 통유리 밖으로 멀어지는 학연의 뒷모습을 가만히 쫓았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시선은 여전했다.

손목의 뭉근했던 열기는 학연이 멀어지는 만큼 차갑게 식었다. 이름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차학연, 이름의 주인과 참 잘 어울렸다. 그리고 손목에 새겨진 그 사람의 이름이 참 잘 어울렸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새겨져있던 이름처럼 금세 익숙해져갔다. 차학연, 차학연, 차학연. 차마 내뱉지 못한 소리를 입안으로 삼키며 이름을 몇 번이나 매만졌다.



3.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앉아있고, 또 무슨 생각으로 면접을 진행했는지 정신이 없었다. 면접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할 말 없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대답은 했던가. 준비하는 면접 중에 가장 입사하고 싶었던 곳을 아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면접장 문을 닫으며 소매 밑으로 보이는 이름을 얼른 감췄다. 면접 내내 아무렇지도 않던 이름이 다시금 조금씩 열기를 띄고 있었다.

인사팀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숫자를 가만히 지켜봤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높아질수록 손목 밑의 열기도 더해졌다. 와이셔츠 위로 전해지는 뭉근한 열기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여자친구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여자친구는 또 얼마나 불안해하고 절망할지, 모든 것들이 학연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남자가 내렸다. 손목 밑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남자, 내 손목 밑에 새겨진 이름을 가진 남자, 택운의 등장에 학연은 당황한 눈빛으로 한참을 쳐다봤다. 택운 역시 갑작스럽게 나타난 학연의 모습에 잠시 당황했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전해지던 손목의 열기를 납득할 수 있었다.


" 어? 어떻게 여기서 또....? "

택운은 대답 대신 학연이 급하게 명함을 집어넣었던 정장의 주머니 부분을 가리키며 자신의 정장 주머니를 툭툭 쳤다. 그제야 주머니 속에 넣었던 명함을 기억해낸 학연이 아- 하는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누르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닫히는 문틈 사이로 학연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사라졌다.

또 남겨졌다. 멍하게 학연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택운은 허전함을 느끼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두 번째 만남으로 익숙지 않은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낯설었다. 그렇게 한참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지켜보다 자신이 있어야 하는 원래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4.


  거의 떨어졌으리라 생각했던 곳에서 합격 통보를 받고 첫 출근 전까지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았다. 그러는 동안 정택운이라는 이름의 남자에 대해서 거의 잊은 듯 살았다. 여자친구 역시 이름의 존재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애써 손목을 쳐다보지 않는 여자친구를 위해서 여름이 시작됐지만 반팔 대신 긴팔을 고집했다.

인사팀 직원의 안내에 따라 근무하게 될 부서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학연에게 향했다. 이미 출근을 완료한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삼삼오오 학연의 주변으로 모였다. 김성우 과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주변 직원들에게 학연을 소개했다.



" 이번에 우리 팀에 경력직으로 입사하게 된 차학연 대리입니다, 정식 소개는 팀장님 곧 오시면 그때 해요. "



남자의 말에 주변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15명으로 구성된 팀은 제법 자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빈자리에 짐을 놓고 주변을 정리하고 있을 때 즈음 '팀장님 오셨어요?'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자, 팀장님 오셨으니까 정식으로 인사해요. 학연 씨? "



남자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 서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그날 받았던 명함을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전자 마케팅 전략 1팀 정택운 팀장,이라고 쓰여있겠지.


"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입사한 차학연 대리입니다. "



마치 처음 만난 것 같이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학연을 보며 택운은 미간을 좁혔다. 무의식적으로 소매 끝을 끌어내리는 바람에 와이셔츠 모양이 삐뚜름했다. 모르는 척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택운 역시 '반가워요.' 하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원한다면 초면인 척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김 과장은 각 부서에 학연을 소개하고 전반에 관한 업무 설명을 진행했다. 장시간 이어지는 업무 설명에 학연은 목 주변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 이제 초여름인데 안 더워요? 겉옷 좀 벗고 소매도 걷어요, 그 정도로 뭐라고 안 할 테니까. "



과장의 말에 학연은 괜찮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여자친구 때문이라도 한여름에도 긴팔을 입는 것은 이미 익숙했다.



" 학연씨도 우리 팀장님이랑 똑같네, 정 팀장님도 한여름에도 긴팔만 입으시거든. "



과장의 말에 학연의 시선이 택운의 소매에 잠시 머물렀다. 자신만큼이나 꽁꽁 싸매진 소매 끝 안으로 제 이름이 적혀있겠지, 지금 그 역시 손목 안쪽이 뭉근한 열기로 가득하겠지.



" 그래도 덥지 않겠어요? "

" 원래 긴팔을 즐겨 입어서 덥진 않습니다. "

" 팔에 뭐 보여주기 싫은 상처라도 있는 거예요? "



엄밀히 따지만 틀리지 않은 김 과정의 말에 학연은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서 과장은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듯 다시금 업무 설명을 이어갔다.

흔적 위로 이름이 새겨지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닌 세상, 운명이란 이름 앞에 성별은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하지만 학연은 자신의 여자친구가 너무 중요했다. 그래서 손목 아래 새겨진 이름 같은 건 싹 잊어버리고 싶었다. 면접 본 회사에서 만났을 때에도 굳이 마주치지 않으면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그가 건네준 명함을 보지 않았다. 허나 운명은 그런 학연의 노력을 비웃으며 같은 회사, 같은 부서, 같은 팀에서 만나도록 판을 벌렸다. 너희들은 운명이며 그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하며 학연의 노력을 비웃었다.




5.

일을 끝내고 나오던 여자는 회사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학연을 보고 놀란 표정을 했다.


"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

" 김 과장님이 업무 시작 전에 주어지는 마지막 정시 퇴근이라는 말에 너랑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


학연의 말에 여자는 행복하다는 표정을 하고 학연의 팔뚝을 껴안았다. 뭐 먹을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여자는 끊임없이 조잘거리며 학연에게 물었다. 입술에 걸린 예쁜 미소, 웃음기 섞인 목소리 모두가 좋았다. 난 다 좋아, 너 먹고 싶은 거 먹자. 학연의 말에 여자가 웃었다.


" 아, 저번에 얘기한 사람 있잖아. 나 입사한 곳 팀장이더라. 신기했어. "


행복한 듯 웃던 여자는 학연의 말에 그 자리에 그대로 멈췄다. 왜? 뭐 불편해? 학연의 물음에도 여자는 말없이 팔짱을 풀고 서있었다.


" 어디 안 좋아? 왜 그래? "

" 밥 안 먹을래, 안 먹고 싶어졌어. "


여자는 몸을 돌려 학연의 차로 향했다. 집에 갈래, 그냥. 데려다줘. 갑작스러운 여자의 태도에 학연은 당황한 표정을 했다. 여자를 조수석에 태우고 차를 출발시키자마자 조수석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 그래, 운명이라는 거지? 네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지? 헤어져줄까?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운명의 상대를 만났는데 나 때문에 얼마나 짜증 나겠어, 안 그래? "

" 왜 그렇게 말해, 응? "

" 너 기다렸잖아, 대학 내내. 날 몇 번이고 밀어냈던 거 똑똑히 기억해. "

" .... "

" 맞잖아, 너 기다렸잖아. 왜 대답을 안 해! "


운전대를 잡지 않은 손으로 여자의 손을 잡았지만 여자는 급하게 손을 쳐냈다. 닿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이 진저리 쳤다.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급한 마음에 이름이 적힌 손으로 그녀를 잡았던 것이 잘못이었다. 학연은 그저 말없이 차를 몰았다.



여자를 겨우 달래 여자의 집 소파에 앉혔다. 이름이 새겨진 손목을 보면서도 곧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길래 괜찮은 줄 알았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평소처럼 행동하는 여자를 보며 안심했고 여자는 혼자 숨어 아파하고 불안해했다. 학연은 뻐근해오는 목덜미를 잠시 매만졌다.


" 미안해, 그냥 네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한 거야. 정말 별 뜻 없었어. 정말이야. "

" ... "

" 미안해, 여주야. "


학연의 입안에서 발음된 자신의 이름에 여주는 학연의 품에 안겼다. 참았던 불안이 눈물과 함께 터져 나왔다. 씁쓸한 표정을 하고 안긴 여자친구의 등을 다독였다. 사귀는 내내 큰 소리치거나 눈물 한번 보인 적 없던 여자친구가 한없이 무너지는 모습이 슬펐다. 한참 동안 그렇게 묵묵하게 달래주며 여주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6.

입사하고 처음 있는 팀 회의에서 학연이 할 수 있는 것은 발표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 말고는 없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진행되는 주간 보고를 경청하며 일부러 더 택운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택운의 주간 보고가 진행되자 학연은 아예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노트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렇게 계속 별것 아니길 바랐다.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휘둘리고 싶지 않았고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 역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택운의 주간 보고가 진행되는 동안 학연은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 이상 주간회의는 마치겠습니다. 학연 대리는 오늘 주간 보고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 주 업무 방향 관련해서 보고서 작성하고 제게 확인받아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고개도 들지 않고 물건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택운이 먼저 회의실을 떠나고 팀의 다른 사람들도 뒤따랐다. 학연은 제일 끝으로 회의실에서 나와 간격을 두고 걸었다. 간격이 가까워질수록 손목 아래가 뜨끈해졌다. 눈을 감고 있어도, 쳐다보지 않고 있어도 얼마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5일간의 인수인계를 끝으로 바로 학연에게 업무가 쏟아졌다. 덕분에 회의 시간에 언급됐던 업무 방향과 관련된 보고서는 단 한 줄도 작성하지 못하고 퇴근 시간을 맞이했다. 하나둘 퇴근하는 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학연은 겨우 보고서 양식 파일을 오픈할 수 있었다.

간략한 양식 파일을 보니 작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듯했지만 문제는 이것 말고도 쌓인 다른 업무였다. 전임자가 퇴사한 후로 김 과장이 처리하던 일들을 드디어 후련하다는 듯이 학연에게 모두 몰아줬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퇴근하는 뒷모습을 보니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겨우 대략적인 업무 파악을 끝내고 한숨 돌리려고 할 때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 우리 여주 '라고 쓰인 핸드폰 액정이 열심히 발광했다. 학연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택운 역시 아직 퇴근 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 여보세요. "

- 어디야? 아직도 회사야?

" 응, 이제 업무 보고서 하나만 더 쓰면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아. 넌 집이야? "

- 밥 먹고 이제 들어와서 씻었어. 혼자 야근하고 있는 거야?


여주의 질문에 학연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거짓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분명 어떠한 의도도 없이 각자 남아서 야근을 하고 있었지만 이 상황마저도 여주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을까, 자신의 대답이 여주가 원하는 대답일까 생각했다.



- 왜 바로 대답을 못 해, 뭐 얼마나 어려운 걸 물어봤다고.

" 아, 미안. 잠깐 딴생각에 정신이 팔려서. "

- ... 제발 날 미친년으로 만들지 말아줘, 학연아.

" ... "

- 혼자 아니야? 나한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그래? 왜 말을 돌려, 너답지 않게. 영상통화하자, 내가 할까? 네가 할래?

" 아냐, 혼자야. 뭘 거짓말을 해. "

- 그 얘긴 아까 끝났잖아. 지금 전화 걸게. 사무실에서 받아, 어디 가지 말고.


너무 조용한 덕에 원하지 않아도 전화기 속의 여주의 목소리가 사무실 안으로 퍼졌다. 택운은 안절부절하는 학연을 대신해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난처한 표정을 한 학연이 택운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 내가 지금 걸게. 응, 바로 걸게. "


영상통화로 전환하자마자 바로 전화를 받은 여주는 여전히도 예뻤다. 머리카락이 젖어있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핸드폰에 비치는 여주의 머리카락에서는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 머리카락부터 말려, 그러다가 감기 들겠다. "

- 사무실 보여줘, 학연아. 그것부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학연이 핸드폰으로 사무실을 비췄다. 대부분은 불이 꺼져있어서 깜깜했고 불 켜진 몇몇의 모니터 앞은 텅 비어있었다.


" 이제 됐지? 그러니까 어서 머리 말려, 감기 들면 한참을 고생하면서. "

- 언제 퇴근할 거야?

" 모르겠어, 일 더 해봐야지. 넌 걱정 말고 피곤하면 먼저 자. 나도 퇴근하면서 문자 할게. "


응, 알겠어. 이따가 또 연락하자. 그제야 여주의 목소리가 한결 편안해졌다. 얼른 자라고 다독이며 전화를 끊자 알 수 없는 피로감이 몰려왔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야근을 하는 모든 상황을 불안해할 여자, 별것 아닌 일에도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 둘 중 누가 더 불행할까? 결과는 압도적으로 그녀였다.


통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든 택운이 돌아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들고 뒤를 지나치는 택운에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건넸다.


" 여자친구가 걱정이 많나 봐요. "

" 불안한가 봐요, 여러 가지가. "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로 향하는 택운을 보며 학연 역시 다시금 모니터에 집중했다. 하루 종일 날섰던 신경이 학연의 어깨를 묵직하게 눌러왔다. 자리에 앉은 택운의 시선은 모니터 대신 학연을 향했다. 한동안 뭉근한 열기로 택운을 괴롭히던 이름이 이젠 간지러웠다. 와이셔츠 소매단 위로 손톱을 세워 이름을 살살 긁었다. 업무에 집중한 학연의 숨소리가 커질수록 간지러움은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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