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꿈을 꾸었다.

펄럭이는 코트 자락과 제 뺨을 흐르는 선혈, 막이 씌워진 고함소리. 그 사이 어드매에 작은 몸을 옹송그리고 숨었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길 바라면서 숨을 죽이고 눈을 감았다. 그러면 어느샌가 자신은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어있었다. 나를 해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위협하는 이도 없었다. 모든 이야기가 상상하는 대로 움직였다. 나는 단단한 껍질에 쌓인 아가 새처럼 다음 이야기를 갈구했다. 놓고 싶지 않았다. 작은 나의 세상, 나의 영웅.

“나는 유중혁이다. 나는 유중혁이다. 나는......”

희미한 빛살에 눈을 찌푸리며 몸을 떨었다. 눈앞에 선 커다란 존재를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네가 여기 존재할 리 없다. 나는 너여야만 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너는 유중혁이 아니다.”

단단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내가 유중혁이다.”

심장을 찌를 것처럼 날카롭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가 그를 깊은 잠에서 깨운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라고 지금 이건 현실이라고.

“나, 나는, 나는.....”

나는 눈을 꽉 감고 어깨를 덜덜 떨었다. 이 세계를 마주한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마지막 발악이라고 하듯 무릎 사이로 고개를 숙이고 현실을 부정했다. 이건 환상이야. 이건 환상이야. 이건 환상이야.

“환상이 아니다.”

뒤에서 들리는 비명과 번쩍이는 스파크 소리.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 눈을 깜빡이자 나의 화신이 눈앞에 있었다. 흔들림 없는 의연한 자태로, 내가 상상했던 그 모습으로.

“너였군.”

아. 언어가 혀끝에 먹혀 나오질 않았다. 칼날을 먹은 것처럼 목구멍 안쪽이 쓰렸다. 마치 악몽이라도 꾸는 듯 심장은 크게 뛰고 사시나무 떨듯 온몸이 떨려왔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내는 차고 있던 칼을 조용히 빼 들었다. 칼날이 칼집을 스치며 낮고 거친 소리를 냈다. 이제 모두 끝이었다. 나는 있는 힘껏 눈을 감고 죽음의 시간을 기다렸다. 이 와중에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주문을 외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유중혁이다. 나는 유중혁이다. 정작 그 주인공이 눈앞에 있음에도 그렇게 행동했다.

순간, 머리 위로 무언가가 썰리는 소리가 났다. 서걱서걱. 그럴 때마다 사지를 옭아매고 있던 어둠이 하나둘씩 걷혔다. 어깨가 가벼워지고 주변이 고요해졌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왜? 어째서.”

흔들리는 눈동자가 눈앞에 사내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는 대답 없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하철 내에 노인이 보고 있던 신문에 눈이 갔다.

- 범죄자의 에세이를 출간하다.

그가 바라본 세상은 스타 스트림 이상으로 끔찍한 곳이었다. 타인의 이야기를 소비하고 방관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사회. 임산부 자리에 앉아서 넘어진 할머니조차 도와주지 않는 각박한 세계. 내가 역겨움에 눈을 찡그리자 사내도 동시에 눈썹을 까딱였다. 비극은 비극으로 덮을 수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힘든 시간이었다."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겁고 어두운 목소리가 그간의 고통을 이야기했다. 

"왜 나였을까 생각했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증오 어린 눈동자가 나를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증오를 넘어선 새로운 희망이 척추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내 몸은 공중에 붕 떠 있었다. 양 옆에서 우리엘과 이현성의 보드라운 손길이 느껴졌다. 서늘한 손등 위로는 따스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이지혜와 김남운의 손이었다.

“그만 눈을 떠라, 김독자.”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아, 아...”

눈 부신 빛과 함께 사내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찼다. 다부진 체격에 살짝 구불거리는 곱슬머리, 상처투성이의 얼굴. 내가 항상 그렸던 얼굴이었다. 나의 아버지이자 형이자 친구인 유중혁의 얼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뺨을 더듬자 거친 피부가 선연히 느껴졌다. 꿈이 아니었다. 같이 가도 돼? 정말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두어 번 끔뻑였다. 그 물음에 답하듯 그가 가볍게 손을 잡았다. 서투르지만 조심스럽고 상냥한 손길이었다. 나는 눈물이 고이는 걸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코끝이 묘하게 시큰거렸다.

나는 중혁의 품에 안겨 또 다른 세계의 유중혁과 김독자를 배웅했다. 그들은 아직 마지막을 보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냥 보내도 괜찮은 걸까.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중혁이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다.”

그들도 유중혁과 김독자니까. 누구보다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존재니까. 그들이 맞이할 마지막 또한 해피엔딩일 것이다. 원하는 결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김독자는 상상의 힘을 믿기로 했다. 자신이 했던 상상이 현실이 되었던 것처럼, 그들이 바라는 결말도 곧 현실이 될 것이다. 이야기가 가진 힘을 증명해준 사람이 바로 제 옆에 있지 않은가. 이렇게 자신과 손을 맞잡고 있지 않은가.맞아. 어린 독자가 살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괜찮을 거야."

그 한마디에 자신의 바람을 담아 실어보낸다.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모두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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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 깨서 갑자기 씀. 

아침에 현타오면 지울 가능성 높음.

감사합니다!! 지우지 말아달라는 요청이 많아서 그냥 놔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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