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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도 위무선이 잃고 고생도 위무선이 하는 이야기







위무선.. 남망기가 불의의 사고로 기억을 잃게 되자 제가 있으면 남잠이 혼란스러울 테니(ex. 아정한 함광군 모드의 남망기에게 남자 도려가?!) 저는 잠깐 유랑이나 하고 오겠다고 손 팔랑팔랑 흔들어주고 떠나고 적당한 곳에 집을 얻은 뒤엔 남희신에게 연통을 넣어 위치를 알려주기까지 했는데 막상 달포쯤 지나 기억을 되찾은 남망기가 허둥지둥 달려갔을 땐 이번엔 위무선이 장작 패다 절벽에서 굴러떨어져서 기억상실이 되는 게 보고 싶네.... 


그것도 딱 전날에 떨어졌대. 남망기가 떠난 제 도려를 찾아오기 바로 전날의 밤에. 


망기가 기억을 되찾은 건 저녁 무렵이었고, 정신을 가다듬자마자 곧바로 위무선의 부재를 눈치채고 운심부지처를 헤매다 남희신을 만나러 갔더니 남희신은 기억을 되찾은 걸 축하해주는 것과 동시에 남망기를 진정시켰어. 


비록 올 필요는 없다고 해서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었지만 위 공자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는 알고 있고 또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같이 만나러 가자고. 운심부지처에서 그리 먼 곳도 아닌 데다가 귀장군이 함께 떠났으니 위험한 일도 없을 것이라 달래서 겨우 불안에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억지로 잠들었는데, 하필 그날 밤에 산을 올랐던 위무선이 발을 헛디뎌 떨어지고 말았다네... 


기억을 되찾자마자 만나러 왔으면 위무선이 밤중에 장작을 줍겠다며 산을 오를 일도 없었을 테고, 그러면 이렇게 크게 다칠 일도 없었을지도 몰라. 어느 산, 어느 중턱에 있는 작은 암자에 있다는 위무선의 편지를 들고 남망기와 함께 산을 오르던 남희신은 작은 공터에 세워진 방 두 칸 짜리의 허름한 암자를 보곤 남몰래 곤혹스러워했어. 말이 좋아 암자지 사실상 움막이 아니냔 말야. 이래서 오지 말라고 했구나. 그런 생각도 했고, 조금 더 좋은 장소를 찾지 않고. 그런 생각도 했지. 


남망기가 저를 영영 잊을 리가 없다며, 이참에 코에 바람이나 좀 넣고 오겠다며 큰소리를 땅땅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운심부지처를 떠난 위무선에게야 여기가 제 지냄에 모자람 없는 곳이었겠지만 남희신이 보기엔 영락없는 빈곤한 피난처였거든. 꼭 기산에 쫒기던 나날을 떠올리게 하는.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어. 남망기 역시 지붕이 반쯤 기울어가는 낡은 가택에 말을 삼키고 섰을 무렵 풀을 뽑아낸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끓이고 있던 귀장군이 벌떡 일어나 둘을 맞이했기에. 


남망기는 당장 위무선부터 찾았지만 그 다급함을 알면서도 문앞에서 우물쭈물 말을 아끼던 온녕이 더듬더듬 일러준 사정이 바로 그것이었어. 위 공자가 어젯밤 절벽에서 떨어졌노라고. 제가 급히 뒤쫓아 업고 올라왔지만... 말을 흐리는 새도 더 기다릴 수 없어 무례하게 밀치고 들어간 방엔 납빛으로 창백하게 바랜 위무선이 누워있었어. 


얼굴의 반절을 가린 붕대에는 굳은 피가 점점이 묻어있고 이불 위에 놓인 손에도 온통 핏기가 가시지 않은 벌건 생채기가 가득이야.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훨씬 좋지 않아 놀란 남희신이 어찌 의원에게 찾아가지 않았느냐 안타까워하자 온녕의 대답이 또한 가관이었어. 


- ...위, 위 공자는, 이릉노조니까요... 


지금이야 남망기의 도려로서 운심부지처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지만 위무선은 세간에서는 여전히 '살아돌아온 이릉노조'였고 그에게 원한이나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샐 수 없이 많았어. 남망기가 기억을 잃고 위무선이 홀로 떠나온 지금, 위무선을 지켜줄 사람은 온녕 하나 뿐이었는데 무방비하고 무력하게 다친 위무선을 어찌 남의 손에 보일 수 있겠어. 


그나마 온녕도 한때 의술의 길을 걸었던 적이 있어 깨끗한 옷과 이불을 찢어 환부를 감싸고 얼굴을 가리고 약만 받아오는 게 전부였다고 더듬더듬 설명하던 온녕은 위무선의 곁에 바짝 붙어앉아 손목을 쥐고 기맥을 살피는 남망기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흉내를 냈어. 숨을 쉬고 싶어도 저야 죽은 몸이니.


머리를 제외하곤 어딜 다쳤느냐 묻는 가라앉은 음성에 온녕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남망기는 가볍게 손을 내저어 두 사람을 물렸어. 눈치가 빠른 남희신은 붕대와 갈아입힐 옷을 사오겠다며 산을 내려갔어. 


너덜하게 찢긴 옷을 벗겨내고 창백한 몸뚱이를 하나하나 살펴나가는데.... 참... 본래 보기 좋게 살이 올라 늘씬했던 몸은 어느새 어렴풋이 늑골이 떠오를 정도로 말랐고 팔은 보랏빛으로 퉁퉁 부어있었어. 다리는 크게 부딪히기라도 했는지 옷자락이 피로 얼룩져 손을 대기도 무서울 정도라. 


솔직히 위무선은 정말 잘 살았거든. 그야 매 끼니를 챙겨주는 이가 없고 심중 깊숙한 곳에 걱정이 깃들었으니 자연히 그리로 무의식이 쏠려 몸이 조금 마르긴 했어도 위무선은 남망기가 끝내 제게로 돌아올 것만은 염려치 않아서 온녕과 둘이서 산중생활을 그럭저럭 잘 꾸려냈었어. 


사람은 둘이고 먹일 입은 하나니 더 쉬웠지. 운심부지처에서 가까우니 언제든 돌아갈 수도 있고, 허름하긴 해도 비 막고 바람 막을 지붕과 벽이 있는 집도 찾았으니 난장강 생활에 비하자면 이 편이 훨씬 호강 아니겠어.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위무선이 전날 밤 혼자 어깨를 떨며 몸을 녹일 장작을 주우러 숲속으로 기어들어가지만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일이어서. 


혹은, 남망기가 기억을 되찾자마자 위무선을 데리러 달려왔었더라면 말이지. 


그래도 생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오래도록 위무선을 살핀 남망기는 마침내 근심어린 숨을 길게 뱉어냈어. 고소의 약과 붕대로 상처는 새로 보듬었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후 탕약까지 먹이자 위무선은 제법 볼만한 모양새로 돌아왔어. 창백했던 얼굴에도 활기가 돌았지. 


위무선이 눈을 뜨기 직전까지만 해도 사과의 말을 헤아리고 있던 남망기는, 어딘가 어긋나는 대화를 깨닫자마자 그만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고 말았어. 처음에는 바보처럼 기억을 잃었던 제게 심통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어. 너 왜 이리 늦었냐. 난 너 같은 사람은 모른다. 그리 장난치는 것으로만. 


그런데, '위영'이라는 부름에도 반응을 하지 않고 저더러 누구시냐 묻던 도려가 조그맣게 위영, 위영, 하고 따라 중얼거리다 '위..무선..?' 하고 제가 일러주지 않은 자를 서투르게 발음했을 땐... 그 어색함과, 그 낯설은 티가 역력한 행동은ㅡ 


남망기가 억지로 위무선을 돌려세워 조급하게 추궁하기 전에 온녕이 먼저 재빠르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어. 


- 위, 위 공자. 제가.. 누군지 아, 아시겠어요? 


반쯤 몸을 일으켜 앉아있던 이의 흐린 눈이 온녕의 얼굴을 향하더니, 천천히 명료한 빛을 되찾았어. 


- 당연히.. 알지. 온녕. 

- 그, 럼..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겠어요? 


주변을 휘 둘러본 위무선은 그 작은 동작에도 두통이 이는지 머리를 부여잡고 앓다가 바삐 눈을 깜박였어. 여기.. 여기가 어디더라.. 여기는.. 여기는, 내 집이야. 그렇지? 여기서 너랑 같이 살기로 했었잖아. 


- 맞아.. 내가 여기서 살자고 했었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온녕보단 마치 제 스스로에게 이해시키려는 것 같았어. 혼란이 역력해보이는 반응에 온녕은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고 위무선의 어깨를 눌러 다시 눕혔어. 기억에 혼선이 온 것 같으니 일단 자고 일어나서 다시 이야기하자고. 어쩌면 자는 동안 기억이 정리될 지도 모르니. 


남망기가 무어라 말을 하고 싶어해도, 온녕은 드물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말을 끊었어. 위무선이 기억을 잃은 남망기를 배려해 운심부지처를 떠났듯, 이번에는 남망기가 위무선을 배려해 줄 차례였지. 바로 지근거리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것을 모르는 환자는 밀려오는 노곤함에 순식간에 잠들었어.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위무선은 여전히 제 곁을 지키고 있는 남망기에게, 똑같은 목소리로 누구시냐고 물었어. 


남망기가 한참 만에 남잠, 하고 제 이름을 일러주자 위무선은 누운 채로도 묘한 얼굴을 했어. 그게 이름입니까? 남망기는 위무선의 낯선 존댓말보다도 더욱 낯선 제 두번째 이름도 위무선에게 알려주었어.  


- ...자는, 망기. 


위무선은 '남잠'과 '남망기' 중에서 제가 부를 이름을 '남망기'로 골랐어. 


하지만 이름을 알아도 위무선은 재차 같은 질문을 반복했어. 이번에는 그게 '당신 이름이 남망기인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누구시기에 제 옆에 계십니까?' 라는 의미로 들려 남망기가 머뭇거리는 사이 탕약을 달여온 온녕이 방문을 열었어. 온녕과 남망기를 번갈아 바라보던 위무선은 조금 굳은 얼굴로 온녕을 가까이 부르곤, 


- 저기, 잠깐 나가 있어 줄래요? 온녕이랑 할 말이 있어서요. 


남망기는 속수무책으로 방에서 쫓겨났어. 눈앞이 캄캄해 풀숲 위로 발을 내리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단단히 닫힌 문가 가까이로 되돌아가서 섰어. 남의 말을 엿듣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지금은 군자라곤 영영 되지 못해도 좋으니. 


온녕은 제 나름대로 위무선을 이해시키기 위해 애썼어. 남망기가 누구냐고 묻는 위무선은 제게도 몹시 낯설었지만, 그래도 온녕은 의원의 본능을 발휘해 우선 어설프게 위무선을 다독였어. 위 공자, 너무..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남, 남 공자는... 


- 위 공자의 도려예요. 


위무선의 표정은 묻지 않아도 명백했어. '그게 뭐?' 온녕은 제 실책을 깨닫곤 한 글자를 고쳐 말했어. 


- 그러니까... '반려' 말이에요... 


이번에야말로 위무선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랐어. 방문 밖과 제 가슴팍을 바삐 번갈아 가리키는 손가락이 차마 말로는 못할 '쟤랑? 나랑? 나랑?? 우리 둘 다 남자인데?!' 라는 경악을 대변하는 것 같아 온녕은 다른 의미로 눈앞이 깜깜해졌어. 위무선이랑 남망기가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는 걸 제 입으로 설명할 날이 오다니. 


차근차근 둘은 평생을 약속한 도려이고, 정식으로 혼례를 올려 운심부지처에서 함께 살았으며, 남망기가 기억을 잃은 사이 잠시 운심부지처를 떠난 사이 이런 변을 당했다. 더듬거리는 설명을 다 들은 위무선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진지하고 무겁게 변했어. 한참만에 느릿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조차 낮게 가라앉아 있었지. 


- 네 말은, 이상해. 

- 어, 어..어디가요..? 

- 내가 '남망기'의 도려라며. 정식으로 혼례를 올렸고, 벌써 몇 년이나 함께 운심부지처에서 살았던. 


그런 사람이 운심부지처를 떠나는데, 어째서 아무도 붙잡지 않았지? 

네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하지 않아? 둘이서 몰래 통정한 것도 아니고 혼례를 올렸다며. 그럼 나는 남망기의 도려일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겐 조카며느리였을 테고 누군가에겐 제수弟嫂가 되었을 텐데, 너 같으면 네 가족이 집을 떠난다는데 그냥 떠나게 두었겠어? 그것도 자기 도려가 절 잊은 마당에? 


- 우리 둘, 혼례를 올린 게 맞긴 해? 내가 남망기랑 밀통하는 정부따위로 운심부지처에서 억지로 눌러살던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반려였던 게 확실해? 


이번에야말로 온녕은 쉬이 대답할 수 없었어. 온녕은 그저 '밀통'이니 '정부' 같은 노골적인 단어에 놀랐을 뿐이었지만 그 침묵을 어찌 해석했는지 덩달아 입을 다물었던 위무선은 어쩐지 차갑고도 울적한 기색으로 마른 어깨를 움츠리며 낡은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렸어. 


- .....난, 그런 집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 뒤로 위무선은 요지부동이었어. 화들짝 놀란 온녕이 결코 그런 게 아니었다고 설명해도 듣지 않았고, 문 밖에서 이야기를 듣던 남망기가 더는 참지 못해 희게 질린 얼굴로 뛰어들어 저와 위무선은 혼례를 올린 게 맞고 남씨 족보에도 위무선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고 해도 듣지 않았으며 뒤늦게 이야기를 들은 남희신 역시 놀라서 제가 생각이 짧았다고 사과해도 듣지 않았어. 


이제 위무선에게 중요한 것은 저와 남망기가 도려였다는 게 아니라, 운심부지처에서 저를 가족으로 여기고 아껴주었던 이가 없었다는 게, 운심부지처가 '그런 사람들'로 가득찬 공간이었단 게 싫은 거야. 


남망기의 도려가 아닌, 남망기가 잊어버린 저는 의미도 가치도 없어지는 집이라니. 운심부지처가 어떤 곳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주제에 위무선에겐 그게 퍽 섬뜩하게 다가왔어. 남망기가 걸친 옷이 좋은 옷이고, 남희신이 예의바른 사람인 것으로 보아 운심부지처도 분명 좋은 곳일 테지만 그게 제게도 '좋은' 곳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낡은 문이 삐꺽거리고 지붕의 한켠이 움푹 내려앉은 이 작은 집이 훨씬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거지. 심지어 제가 여기서 사는 동안 그 운심부지처 사람들은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며? 어쩌면 모르지. 떠나는 내 뒷모습에 대고 춤이라도 췄을지. 


남망기야 기억을 잃은 잘못이 있다 쳐도, 남희신에겐 이 모든 일이 아닌 밤중의 날벼락이나 다름없었어. 사실 따져보면 그렇지. 먼저 떠나겠다고 한 것도 위무선이고, 먼저 괜찮다고 한 것도 위무선이고, 먼저 찾아오지 말라고 했던 것도 위무선이었는데 이제 와서 그 일로 저를 탓하다니 말야. 


그런데.. 그렇게 덩달아 혼란해진 머릿속을 차근차근 정리하다 보니.... 남희신도 자연히 깨닫게 된 거야. 위무선이 먼저 떠나겠다고 해도 말렸어야 했으며, 위무선이 먼저 괜찮다고 했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어야 했고,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더라도 저는 위무선을 살폈어야 했다고. 


위무선은 언제나 괜찮다고 했고 늘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었지만, '정말로' 그게 괜찮았을까? 설령 본인은 괜찮다고 했어도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말았어야지. 지금 위무선의 상황을 좀 보라지. 몇 년을 동거동락하며 살았던 남편은 저를 잊었고, 심지어는 은연 중에 피하기까지 했어. 


아정하신 함광군은 도저히 제 도려의 존재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 같고 그로 인한 혼란은 자꾸만 커져가니 위무선은 급기야 스스로 운심부지처를 떠났어. 이참에 혼자 유랑이나 좀 다녀오겠다고. 그리고 운심부지처의 누구도 그런 위무선을 붙잡지 않았지. 왜냐하면.. 


위무선은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 


온녕에게 그간 위무선이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 들었어.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냈대. 위무선은 남망기가 반드시 기억을 되찾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불안해하지도 않았대. 진심으로 잘 지냈대. 그런데 그렇게 태평했던 사람이 왜 부득불 운심부지처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이런 낡아빠진 집에 터를 잡고, 삼시세끼 잘 챙겨먹었다면서도 몸은 반쪽이 되도록 말랐을까. 


실은 위무선도 '괜찮은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스스로도 몰랐던 건 아닐까. 그럼,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이라도 이 사람을 붙들었었어야지. 남망기가 위무선을 잊었으면 저라도 보살폈어야지. 


'위무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위무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잊은 위무선은 운심부지처가 싫대. 그런 곳으로는 돌아가기도 싫대. 함께 산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저를 남망기의 도려로만 취급하는 집도 싫고, 떠나는 사람 붙잡는 손 하나 없는 집도 싫고, 아파도 남망기 없이는 의원도 함부로 찾아갈 수 없는 저도 싫고, 저를 잊어 이 고생을 하게 만든 남망기도 싫고, 이제와서 제가 생각이 짧았다며 사과하는 남희신도 전부 다 싫다네. 만일 위무선이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면 다 괜찮았을 일들인데.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들인데. 


기억을 잃은 위무선에겐 이 모두가 다 혼란스럽고 납득이 가지 않을 뿐이야. 왜 아무도 잡지 않았지? 왜 아무도 말리지 않았지? 나는 대체 뭐였지? 당신들은 대체 뭘 했어? 


몸이 아파. 배도 고프고. 방도 추워. 집은 낡았고, 이불에선 먼지 냄새가 나. 저기 귀퉁이엔 거미줄도 있네. 나는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나는 왜 이런 곳에서 살겠다고 한 걸까. 그렇게 고민하다 남망기의 얼굴을 보면 또 다른 의문이 들어. 네가 뭐라고. 네가 뭐였는데 내가.... 이렇게.... 


위무선이 떠난 건 온전히 남망기를 위해서였고, 그로 인해 남망기는 홀로 안정을 취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어. 여러 사람의 배려와 보살핌 속에서 무사히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지. 그리고 이제는 위무선이 기억을 잃었어. 그런데.... 


남망기와 달리 위무선에게는, 그런 배려와 보살핌을 베풀어 줄 존재가 없었나 봐. 


첫 수를 잘못 놓았어. 바늘을 빼고, 제대로 된 자리에 다시 수를 놓으려고 하는데, 잘못 찔린 자리를 감싼 사람이 잔뜩 웅크린 채로 손길을 거부해. 잘못 찔린 자리가 너무 아프대. 첫 수를 잘못 놓았으니 두 번째도 실수할 수 있겠지. 바늘을 쥔 사람을 믿을 수 없으니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말래. 비틀어진 천을 제대로 펴 보려고 해도 두 손가락 사이에서 얄팍하게 빠져나갈 뿐이야. 


절벽에서 굴러떨어져 다친 상처가 심각한데 지지부진하게 감정 싸움을 하는 동안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한 환부가 덧나 곪기 시작했어. 눈을 뜨고 있을 땐 문을 닫아 걸고 온녕을 제외한 모두의 방문을 거절하는 탓에 부러지고 찢긴 자리에서 열이 올라 위무선이 까무룩 기절한 후에야 남망기는 문을 열고 들어가 위무선을 간호할 수 있었어. 


어떻게든 운심부지처로 옮기려고 해도, 하다못해 몸이 다 나을 때까지만 좀 더 좋은 곳에서 지내자고 해도 위무선이 거부해. 떠나갈 때 붙잡은 손이 없었으니 이제 와서 돌아가자고 이끄는 손이 있어도 위무선이 붙잡아줄 리 만무해. 


기억이 온통 뒤죽박죽이야.

위무선은, 제가 왜 운심부지처를 떠나왔는지도 알지 못했고,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도 기억 못하는 주제에 이 낡아빠진 집 앞에서 '앞으로 여기서 살아야겠다' 라고 다짐한 것만 기억해서 무슨 수를 써도 그 집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어. 거기가... '내 집' 이래. 


내 집에서 살 거야. 내 집에서 나가. 그런 이야기를 숱하게 듣다보면 남망기도 그만 어쩔 수 없이 '위무선'이 그리워지고 마는 거야. 곰살맞게 제 손을 쥐어잡으며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며 제게 웃어주던 그 환한 미소가. 따스한 체온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 2021년 6월 17일에 풀었던 썰

잔불의 기사 / 마도조사 (프로필 사진 - 배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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