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ing : 본 게시글은 근친, 폭력 등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너는 얕은 듯한 바다였고.

 

 

 

2.

 

할리와 하퍼의 세계는 다른 채 공존했다. 섞이지 않고 비슷한 색채로, 그러나 좀 더 근사한 색과 그렇지 못한 색으로. 태어나 지금까지 늘 같았다.

 

블루 웨버 호텔의 파티홀은 밀러 가의 주최로 열린 신년 자선파티의 시작을 알리느라 한창 시끄러웠다. 큰 파티홀을 감싸는 부드러운 화음 속에서 참석한 귀빈들이 모두 새롭거나 익숙한 얼굴을 반기며 떠들었다. 드레스의 끝자락이 대리석 바닥을 쓸며 지나가는가 하면 지팡이를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벽에는 호화로운 장식들이 걸렸다. 금실 자수가 촘촘하게 놓인 붉은 공단 커튼이 테라스로부터 들어오는 겨울 바람을 걸러내었고 샴페인과 디저트를 장식한 테이블이 높은 벽 앞에 세 개씩 놓여있었다. 부유하고 고아하신 귀족가의 자제들은 늘 파티를 통해 사교계에 데뷔했기에, 한쪽에선 막 데뷔탕트를 끝낸 아가씨들이 모여 웃으며 떠드는 소리도 들렸다.

 

하트 가의 두 젊은 신사도 이 자리에 함께했다. 각자의 방에서 나와 마주쳤을 때 할리를 보며 인상을 구긴 하퍼는 향수 썼냐는 질문을 불쾌한 목소리로 한 것 외에는 이후 말이 없었다. 차안에서도 귀찮고 관심 없다는 듯 얼어 흐린 밖이나 보던 하퍼가 오며가며 인사를 건네는 귀빈들에게 정중히 미소지어주는 할리의 얼굴을 보고 결국 입을 열었다. 정말, 오늘따라 더 패주고 싶은 면상이네…….

 

“애정 표현이지?”

“처맞기 싫으면 다시 생각해봐.”

 

하트의 두 형제는 미인이었다. 특히나 평소와 다르게 머리를 말끔하게 넘기고, 로열 블루의 쓰리피스 정장을 모두 갖춰입은 할리 하퍼는 방금 데뷔탕트를 마친 어린 아가씨들조차 뒤돌아볼 만큼이나 수려했다. 하퍼는 평소에도 할리를 종종 끔찍한 것 보듯이 쳐다봤지만 그 또한 오늘 할리의 옷차림이 자신보다는 훨씬 더 이 파티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더라도 아주 잘생기고 눈길이 가는 모습이라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할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고, 건배하기를 원했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알 수 없는 목소리에 응답하듯 할리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며 사라졌고 그 덕에 테이블 옆에 서 있게 된 건 하퍼 뿐이었다. 대화 몇 번 나눌 새도 없이 바쁜 할리 하트라니 속이 꼬이는 것 같았다.

 

하퍼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게 다소 거친 표정으로, 빠른 걸음으로 불편한 상황에서 도망쳤다. 하퍼의 얼굴을 알아본 라일즈 박사가 그에게 인사라도 건네려는 듯 했으나 (“이봐, 하퍼! 역시 자네도 여기 왔군!”) 하퍼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테라스로 직행했다. 당장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욕지거리 대신 담배라도 씹고 싶었다.

 

 

 

3.

 

블루 웨버 호텔은 밖에서 보이는 외관이 아주 아름다웠는데, 그 외관에 치중한 나머지 파티홀의 테라스가 사람 한 명이나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때문에 이 호텔에서 파티를 즐기는 고객들은 담배를 피울 때에나 잠시 테라스를 사용했는데 지금은 그 중 한 명이 하퍼 하트였다. 달빛이 닿지 않는 이 방향의 테라스는 창 밖에 구경할 것도 많지 않아 하퍼 뿐이었다. 오늘은 바람까지 불어 어둠 속에서 밀금색 머리칼이 한참이나 흔들린다. 세 개비째였다. 곡이 바뀔 때마다 속이 박박 긁혔다. 테라스 난간은 그가 기대기엔 약간 낮아 하퍼의 몸은 좁은 테라스 벽에 기대어있었다.

 

사람들이 춤을 추고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빛났다. 그 빛 아래서는 누구나 반짝일 것처럼. 전쟁이니 군이니 하는 주제로 의기양양하게 수다를 떠느라 바쁜 몇 군인 무리의 목소리가 테라스에 가까워지다가 멀어졌다. 그러나 하퍼 하트에겐 모든 것이 아무런 상관 없었다. 아. 제발! 그는 그냥 이 끔찍한 기분이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담배 연기가 한숨을 감추듯 한참이나 입술 사이 흘러나왔고 불이 꺼진 후에 새로 켜지는 과정이 반복됐다. 손이 아린 감각이 추위 때문인지 너무 꽉 쥔 주먹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달빛은 유난히 아름다운데, 그가 있는 테라스까지는 올 생각도 없어 보였다. 빛나는 건 어둠 속에서 빨간 담뱃불 하나 뿐이다.

 

“하퍼.”

 

 

 

4.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하퍼가 휙 돌아섰다. 할리가 그의 어깨를 잡고 돌아세웠기에 반쯤은 자의가 아니었다. 돌아세워진 시야에 할리 하퍼가 웃으며 서 있었다. 자신과 똑 닮은 밀금색 머리칼을 말끔하게 올리고, 녹색의 눈으로 다정히 웃으며 말이다. 반쯤 비워진 칵테일 잔이 할리의 손에 들려있었고, 커튼 너머 좁은 테라스로 나온 바람에 둘의 몸이 너무 가까웠다. 채 입을 열기도 전에 할리가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니까…… 그건, 하퍼 하트가 단 한 번도 그와의 관계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접촉이었다.

 

두 사람이 서기에는 너무 좁은 테라스에서 하퍼는 말도 안 되는 상황 때문에 자신이 딛기에는 조금 낮은 난간에 겨우 기대어 서있어야 했다. 곧 추락할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그걸 인지하지는 못했다. 얼핏 웃는 듯한 녹색의 두 눈이 제 동생의 크게 뜬 눈을 가까이서 마주보았고 짧았던 입맞춤이 어느샌가 끝나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할리에게서 술 냄새가 여트막히 났다. 하퍼는 바쁘게 머리를 굴리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채려 했으나 그 사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또 하나의 익숙한 목소리가 커튼 너머에서 들려왔다. ―미세스 베인, 우리 그이 못 봤어요? 할리의 약혼녀였다.

 

“아, 이런.”

 

그 말이 끝이었다. 하퍼가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테라스엔 그 혼자였다. 여전히 어둡고, 여전히 춥고, 파티홀로부터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의 손끝이 자신도 모르게 제 입술을 더듬거렸다. 평소였으면 당장 주먹부터 내갈겼을 하퍼가 멍청하게 넋이나 놓고 있었던 건 그만큼이나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하퍼 하트의 머릿속에서 온갖 추측들이 뛰어다녔다. 손끝이 곱을 만큼 얼어가고 있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열 오른 얼굴에 찬 손끝이 아무리 닿아도 감각조차 없었다. 입안을 부드럽게 헤집던 불쾌와 쾌락 사이의 감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5.

 

한 차례 더 춤을 추는 시간이 되었는지 경쾌하고 빠른 템포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커튼을 걷고 나와 할리를 찾으려던 그가 우뚝 멈춰섰다. 잠깐의 침묵 후 하퍼는 그를 찾으러 가는 대신 제 앞을 지나가는 호텔리어의 술병을 낚아채 다시 테라스 커튼 너머로 사라졌다. 그가 홀을 둘러본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꼭 노린 것처럼) 가까운 방향에 약혼녀와 춤을 추는 할리가 있었기 때문에. 연보랏빛 실크 드레스를 입은 할리의 약혼녀는 그녀의 파트너와 지독하리만치 잘 어울렸다. 마치 자신들이 어울리는 한 쌍임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찰나 할리와 눈이 마주쳤던 하퍼에겐 있을 곳이 이 좁고 어두운 테라스 뿐이었다.

 

‘이 좆 같은 세상이 내 편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이건, ……씨발.’

 

하필이면 잡아도 낮은 도수의 샴페인이었는지 그가 아무리 인후에 술을 때려넣어도 도통 취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그래서 하퍼는 정신이 똑바로 박힌 채 자꾸 끝나 흩어진 과거를 떠올려야 했다. 단 한 번의 키스로 자신의 형을 사랑하던 마음을 막 깨닫게 된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 누군가 그런 글을 썼다면 정말 조잡하고 재밋대가리 하나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을테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명백하게 그의 이야기이다. 속이 뒤집힐 것처럼 심장 박동이 컸다. 하퍼는 자기 입을 틀어막고 인상을 찌푸렸다. 찬 손과 찬 얼굴에 아무런 감각도 없는데 누군가를 향한 감정을 깨달은 심장 깊은 곳만이 죽도록 뜨거웠다. 속이 울렁거리고 토악질이 날 것 같았다. 그가 아무리 성격 꼬이기로는 둘째 가래도 서러울 망나니라지만 하퍼에게도 상식은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 누가 볼 때마다 두들겨패고 상스러운 욕이나 씹어뱉던 대상에게, 그것도 핏줄이 이어진 형에게 사랑에 빠진단 말인가?

 

남자는 말로 못다 표현할 감정들에 막히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언 공기가 온 속을 찌르며 돌아다녔다. 구겨진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을 때, 눈가의 흉터가 손 끝에 툭 걸렸다. 할리에게도 비슷한 흉터가 있었다. 그가 낸 흉터가. 혼란스러웠다. 감정의 무게는 둘째치고 감정의 옳고 그름부터 문제였다. 자신이 지금 바닷속에 빠졌고 수면 위로 올라가려는 다리를 어떤 추악한 존재에게 붙잡혀 방해받는 상황이라고 설명하자면 하퍼는 지금 사랑에게 다리를 잡힌 것이다, 지독하고 역겨운 그 커다란 감정에게!

 

그는, 그저, 울고 싶었다……

 

 

 

6.

 

그 자식이 날 사랑하는걸까? 나를 아끼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주먹질을 날릴 때마다 다 받아줬단 말인가? 결국에는 너무 아끼기 때문에 혓속의 숨까지 가져갔고? 그럴 리가 없다. 그 누가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비뚜름한 불쾌감을 드러내는 사람을 사랑한단 말인가, 심지어 동생을. 아. 그래, 나는 그와 피가 같고, 그는 나의.

 

상상 이상으로 사랑을 확신하는 과정은 빨랐다. 차라리 느려터져서 이 파티가 끝난 후에도 복잡한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퍼 하트는 할리 하트를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울며 매달리고 싶은 의미로, 키스하거나 닿고 싶은 의미로. 모든 객관적 판단이 끝나자 울음이 물 밀듯 몰려왔다. 그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고 대리석으로 된 테라스 난간을 꽉 쥔 채 몸을 떨었다. 형을 사랑하는 일이 마치 추위에 혼자 버려진 것과 같다고 느끼며.

 

그는 불안하다. 술병은 테라스 아래로 떨어진지 오래였고 그를 취하게 하는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더 멀쩡할 만큼이나 제정신이 되게 했다. 마른 입술을 꽉 씹으면 피가 터졌고 희미하게 비릿한 냄새가 났다. 표정을 알 수 없는 뒷모습이 위태로웠다. 너무 오랜 침묵으로 사람이 없을 줄 알았던 테라스에서 작게 한 마디 울음 비슷한 독백이 터졌다. 나는 그 새낄 사랑할 수 없을텐데. 아. 아….

 

‘절대 그 자식을 똑바로 사랑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단 한 명의 존재일텐데.’

 

나는 허우적대는 뭍짐승이다.

 

 

 

7.

 

―그래서 하퍼는 몇 곡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할리가 혼자가 되었을 때, 멱살을 잡아끌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할리의 얼굴은 끌려가면서도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얼굴을 보이지 않는 하퍼의 표정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당장 할리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빠르게, 급하게 걸었다. 두 하트의 구두소리만 들리게 되었을 즈음 빈 객실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고 그 또한 할리에게 사태를 파악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았다. 똑같으면서 약간 다른 형태로 입술을 맞부딪힐 뿐이었다. 최악이었다. 차게 얼고 마른 하퍼의 입술에서는 마른 피의 비릿한 맛이 났다. 입술을 물고, 혀를 섞는 내내 하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앞에 있는 사람을 확인하기 두렵다는 양. 그 자신이 할리 하트보다 잘난 건 단 하나도 없음을 알고 있었는데도 분했다. 하퍼가 생각하기에도 그의 키스는 서툴고 급했다. 마음이 앞서나가 입술 새로 사랑한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사랑 고백을 울며 하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래서 입술이 떼어지고 시선이 마주했을 때, 목을 물린 어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나는 너한테 지고 사는 건 못 하겠거든. 붉게 열기운이 몰려 충혈된 두 눈을 할리는 모른 척 했다. 다만 팔을 뻗어 작게 웃으며 하퍼를 안아줄 뿐이었다. 그는 그 안락한 바다의 품에서, 숨 쉬지 못하는 육지 짐승처럼 한 모금의 숨도 내뱉지 못하고 주먹만 쥐었다가, 다정한 손길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최악의 밤이었다. 그리고 끔찍한 밤이었다. 달빛에도 닿지 못하는 추악하고 역겨운. 평생 잊을 수 없을 밤이었고, 평생 잊고 싶지 않은 뒤섞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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