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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고, 또 그들을 미혹하는 권세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20장 7-10절)







달이 모습을 숨긴 삭월의 밤.

“헉, 헉, 헉, 헉.”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가로등 하나 없는 빈민가를 미친듯이 달렸다. 무서운 것을 본 것처럼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허름하고 낡아빠진 건물이 즐비한 빈민가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해가 지면 빈민들은 곧바로 집에 들어가 자야 했다.

사람이 한 명도 나다니지 않는 캄캄한 거리였기에, 연약한 밝기의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달렸다. 손전등은 너무 밝아서 위험 부담이 커서 사용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미쳤어! 이건 진짜 위험해!’

30대 초반의 나이로 보이는 남자는 좋은 원단으로 만든 슈트를 입고 있었다. 옷차림으로 봐서는 빈민이 아닌 상류층으로 보였다.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으나 남자를 도와줄 수는 없었다. 전날에 비가 내린 탓에 질퍽질퍽한 진창이었고, 신발과 바지에 진흙이 튀어 더러워졌다.

‘김석진 신부님…… 우리는, 진짜 악마와 싸우고 있는지도 몰라요.’

남자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공포심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골목으로 도니 눈앞에 폐가가 있었다.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뒤쫓아오는 이의 유무를 확인하고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에 문이 없는 화장실과 망가진 변기가 보였다. 곧장 다가가 핸드폰 불빛과 전원을 끄고,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다른 무언가를, 준비해온 비닐 지퍼백에 넣고 변기 수조에 넣어 뚜껑을 조심히 닫았다.

거친 숨을 내쉬며 화장실을 나와 방구석에 앉았다. 날이 밝을 때까지 숨어있기로 했다.

‘주님, 주님…….’

남자는 성호를 그으며 절대자의 이름을 불렀다. 반쯤 부서진 창문이 끼이 열리며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

흠칫하며 창문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일어나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갔다. 잔뜩 경계하며 바깥을 살펴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 후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컥!”

갑자기 뒤에서 소리 없이 다가온 괴한이 와이어 줄로 남자의 목을 걸어 숨통을 조였다. 남자는 벗어나기 위해 손으로 와이어 줄을 건드리며 애를 썼지만, 제 손에, 목에 상처만 더 날 뿐이었다. 살기 위해 괴한의 얼굴로 손을 뻗어 할퀴었지만, 눈만 드러낸 스키 마스크를 쓴 탓에 소용없었다.

“커어…… 끅…….”

남자의 눈동자가 흰자를 보이며 위로 넘어갔다. 점점 발버둥 치던 힘이 빠지더니 곧 양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괴한은 남자의 숨통을 끊었음을 확인하고는 바닥에 눕혔다. 그의 몸을 뒤지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았으나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혀를 짧게 찼다.

입고 있던 긴 재킷을 열고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군용 나이프를 꺼냈다. 서늘한 은빛 날에는 원 안에 역오망성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안에 염소 얼굴을 한 바포멧(Baphmet)이 있었다.

네마 나타스(Nema Natas).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군용 나이프를 높이 들어 곧장 남자의 심장을 찔렀다.








Revelation 01








218개의 나라가 모여 기독교 사상과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따라 세운 세계 최대 국가 ‘서화연합국(西和聯合國)’.

정치와 경제는 나라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이, 종교는 서화연합국 내의 치외법권 지역인 ‘시온(Zion) 성지’의 교황이 정신적 지주가 되어 세계 각국에 신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

교황을 보좌하고, 전 세계 기독교 신도들을 통치하는 시온 성지는 크게 두 부류의 직업군으로 나뉜다. 하나는 신학을 전공하여 세계 각국으로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 또 하나는 군학을 전공하여 시온 성지를 안팎으로 지키는 군인.

시온 성지는 오직 남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엄격한 선발과 특별 시험을 통해서만 성지에 머물 자격이 부여되었다.

시온 성지는 깊은 자연 속에 위치하여 날마다 신의 사랑과 섭리를 느끼고 있었다. 높고 낮은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자연과 잘 어우러졌으며, 사람들은 모두 시온 성지 내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평화롭던 시온 성지가 오늘따라 떠들썩했다.

교황의 집무실에선 열어둔 창으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게 들렸다. 이마가 환한 흰 머리의 70대 교황은 책상 앞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았다.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소년이 바닥에 놓인 알현 방석에 엉덩이를 들고 무릎을 꿇고 앉아 공수한 자세로 싱긋 웃었다. 풍성한 까만 커트 머리카락과 대조적인 새하얀 수단을 입고, 허리까지 오는 하얀 로브 망토를 걸친 차림은 마치 천사 같았다.

따뜻한 봄 날씨였지만, 양손에 얇고 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다. 망토 왼쪽 가슴께에는 시온 성지 소속임을 알려주는 십자가와 헤일로 형상의 자수가 놓여 있었다.

교황은 그를 보며 손 쓸 도리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주름진 입술을 열었다.

“……정말 가야겠니?”

청소년은 싱긋 웃었다.

“네. 주님께서 길을 일러주셨으니까요.”

티끌이라고는 한 점 없는 맑고 영롱한 눈동자에, 온화함과 다정함이 감도는 낭랑한 목소리였다.

교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걱정되는구나. 아무리 시온 성지가 연합국의 비호를 받는 중립지대라 할지라도, 중북국(中北國)은 정반대 사상으로 국민을 통치하고 종교 탄압도 심한 곳이야.”

“알아요. 하지만 그곳이 아무리 위험한 사자 굴이고 독사굴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먼저 가셔서 길을 예비해 주시겠죠. 제게 소명을 주셨으니 그 일을 끝낼 때까지 지켜주실 것을 믿어요.”

교황은 확고한 믿음을 가진 청소년의 말에 마른세수를 했다.

“하아……. 당연하겠지만, 지민이도 함께 가는 거겠지?”

“네, 감사하게도 지민 경(sir)이 흔쾌히 수락해주셨어요.”

“수락은 무슨, 상사가 가자면 가야지. 마음껏 굴리고 그래. 네 전속이니까.”

교황의 말에 청소년은 순한 웃음을 지었다.

“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이만 가야겠구나.”

“네. 안수(按手)해 주세요.”

“주님의 권능이 내린 네게 내가 필요할까 싶지만.”

교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청소년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 위에 오른손을 얹었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신명기 33:12)

“아멘.”

완전한 보호와 안전을 기원하는 축복을 받은 청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교부에 언질을 했으니 그쪽에 연락이 갔을 거다. 그러니 너는 귀빈처럼 지내면 돼.”

“배려 감사합니다, 성하(聖下).”

“그리고 만에 하나 우려가 돼서 하는 말인데…… 석진 경과는 될 수 있는 한 접촉하지 말렴. 연락도 안 하면 좋고.”

“…….”

“잊지 마라. 호석이 네가 어떤 존재인지.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하면 바로 전쟁이야.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 위험하면 지민일 미끼로 삼고 무조건 도망쳐. 알겠지?”

“쿡쿡. 명심할게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에 청소년, 호석이 웃었다.

“잘 다녀오너라, 호석아.”

“네, 다녀오겠습니다.”

호석은 교황에게 환하게 웃어주고 집무실을 떠났다. 교황의 집무실이 있는 궁내원을 나서니 바깥에 이제 신학을 한창 공부 중인 어린 수도자들이 단체로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추기경님! 진짜 가시는 거예요?”

호석은 올해 18살로, 시온 성지에서 이례적으로 서품을 받은 역대 최초인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가시면 언제 오시는 거예요?”

“중북국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던데 어떡해.”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 제게는 주님의 권능이 있으니까요. 무사히 잘 다녀오도록 기도해주세요.”

호석은 장갑을 낀 양손을 보이며 걱정하는 어린 수도자들을 안심시킨다. 

“네네! 기도할게요!”

“다녀오세요, 추기경님.”

“지민 경도 다치지 마시고 잘 다녀오셔야 해요! 흥분해서 싸우다 다치지 말고요.”

“뭐? 이것들이 정말. 나 박지민이야. 세라핌 수석이자 작위까지 받은 군인이라고.”

“예이~ 예이~”

자신만만한 목소리의 지민이었다. 노랗게 염색한 금발에 사나운 고양이 같은 눈매인 그는 시온 성지 근위대 세라핌(seraphim)의 상징인 회색과 금색의 테두리가 섞인 군복에 군화를 신었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었다.

지민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대기 중인 승용차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이만 가시죠, 예하(隸下). 비행기 시간에 늦겠습니다.”

“네, 경.”

호석이 뒷좌석에 타자 지민이 문을 닫고 조수석에 탔다. 승용차는 곧바로 곧 시온 성지를 벗어났다.

“……성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지민이 뜸을 들이다가 넌지시 물었다.

“음…… 위험할 것 같으면 지민 경을 미끼로 삼고 도망가라고 하시던데요?”

“네!? 아, 그 영감님 진짜! 언제는 나더러 손자 같다고 글케 귀여워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뭐? 우와~ 새 손자 생겼으니 헌 손자 필요 없다 이건가? 진짜 너무하네, 영감님!”

지민이 펄쩍 뛰는 반응에 호석은 즐거워하는 얼굴로 쿡쿡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누구보다 서로를 생각하고 사이가 돈독함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때 지민의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들어왔다.

황영감님     다치지 말고 잘 다녀와라. 올 때 쪼꼬파이.

“…….”

지민은 핸드폰에 들어온 교황의 문자에 얌전해지더니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답장으로 거수경례하며 ‘라져!’라고 외치는 귀여운 고양이 이모티콘을 보냈다. 창밖을 바라보는 지민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서화연합국과는 정반대되는 중북국은 신을 부정하며 사회주의 사상과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기치로 삼고, 민족을 우선으로 하여 전체주의를 신봉했다. 절대 지배자인 총통이 나라를 압제한 탓에 경제는 망가지고, 종교와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1%의 지배층을 위한 89%의 빈민이 수공업과 농업에 종사했으며, 오직 국가에 충성을 맹세한 10%의 기회주의자만이 국가의 허락을 받아 개방된 시장경제 체제에서 연합국과 교역하며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정부에 밉보이거나 그들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회사를 바치고 물러나야 했다.

빈민은 감기에 걸려도 병원에 가보지 못하고 죽었고, 상류층은 그들을 외면하며 자신의 권리와 이익만 챙겼다. 중북국에는 인권이 없었다.

그러나 정부에 반발하는 지식인들이 생겨났고, 연합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이루기 위해 지하 조직을 이루고 혁명을 준비하는 레지스탕스들도 나타났다. 그들은 단단한 조직력과 치밀한 실행력으로 정부 청사에 테러를 일으키며 정부를 농락했다.

정부에서는 레지스탕스들을 색출하고 처단하기 위해 치안청(治安廳)을 설치하고, 특수 부대로 이뤄진 군인들로 치안대를 편성하였다. 치안대원들은 이제는 그들의 상징이 된 블레이저 형태의 검은색 군복을 입고 중북국 방방곡곡에 배치되어 경찰이자 군인의 임무를 수행했다.

중북국의 수도 평울.

빈민가로 접어드는 아치형 입구에 지난밤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 목을 맨 남자 시신이 매달려 있었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치안대가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공무용 지프를 타고 도착한 치안대 제1팀 팀장 남준은 조수석에서 내려 현장에 다가갔다. 붉은 용이 새겨진 검은색 군모를 쓰고, 검은색 군복 차림에 허리띠를 매고, 칼과 총을 휴대한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감과 권위를 동시에 느끼게 했다. 시동을 끈 운전석에선 부팀장인 정국이 내려 남준의 뒤를 따랐다.

“오셨습니까! 대령님! 대위님!”

이른 아침부터 사망 신고를 받고 출발한 1팀 대원이 남준과 정국을 보고 바로 서서 거수경례했다. 보통 살해 현장에는 감식반을 비롯한 20명이 출동했다.

남준은 칼자루에 왼손을 얹고 고개를 들어 매달린 시신을 바라보았다. 시신은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걸 확인하고 바닥을 바라보곤 중얼거린다.

“네 번째네.”

시신은 해부라도 한 것처럼 살가죽이 잘려서 장기가 모두 적출된 빈 몸에 두 눈도 파여 있었다. 하지만 아래에는 핏자국이 조금밖에 없었다.

“살해 현장은?”

“지금 특정 중입니다.”

감식반은 사진을 찍고 조심스럽게 시신을 내렸다. 사진을 찍은 뒤 휴대용 지문 검색 시스템에 오른손 손가락 지문을 찍어 신원을 확인했다.

“헉!”

지문 감식 시스템에 사진과 이름, 생년월일, 주소, 직업, 혈액형, 특이사항, 병명 등등이 모두 나와 있었다.

“누구야?”

“어, 그게…….”

직업을 본 감식원의 표정이 새하얗게 변했다.

“뭔데.”

“성직자입니다.”

“……뭐?”

성직자라는 말에 남준의 삼백안이 번뜩이며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모습이 위협적이라 감식원이 움찔했다.

“부제(Deacon)요.”

골치 아프게 되었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중북국이긴 했지만, 연합국과 교역하는 대가로 어느 정도 구색은 맞춰주느라 각 시, 도마다 하나의 교회만 설립하고 설교를 전하는 걸 허용해주었다.

물론 완전한 허용은 아니었다. 정부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거나 총통을 모욕하는 발언을 하거나 인민을 선동하는 일이 없도록 예배 시간에 비밀리에 감시원을 파견하고, 적발하면 곧바로 시온 성지로 환송하고 교회를 폐쇄했으니까.

사제는 모두 연합국 시민에 시온 성지에서 파견된 인물이었기에, 중북국에서 이런 식으로 처참하게 살해된 경우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수 있어서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소속은? 평울교회인가?”

“네.”

“목격자 찾아 진술받고, 살해 현장 특정하면 연락해.”

“네, 대령님.”

“전 대위, 평울교회로 간다.”

“…….”

정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석으로 갔다.










평울교회. 수도의 교회라 지방보다는 조금 더 건물이 컸지만, 본질은 낡고 허름한 목조 건물이었다.

평일 오전이라 신도들이 모두 일하러 간 탓에 예배당은 텅 비었다. 저예산으로 지은 탓에, 없느니만 못한 조악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살이 예배석에 앉은 신부를 비춰주었다.

정갈한 검은 수단을 입은 석진이 예배석에 홀로 앉아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 중이었다. 연예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끼이, 낡은 예배당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석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김석진 신부님?”

젊은 남자의 듣기 좋은 저음이 들리자 석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방문객은 두 남자였다. 그들이 입은 옷은 ‘레지스탕스 사냥개’라는 이칭으로 악명 높은 치안대의 군복이었다.

“와우.”

남준은 석진의 얼굴을 보고 짧게 감탄했다. 무릎 아래까지 오는 목이 긴 군홧발로 뚜벅뚜벅, 석진에게 걸어가 열 걸음을 남겨두고 섰다.

“신부님이 이렇게 미인인 줄은 몰랐네요.”

남준은 군모를 벗고 손으로 자신의 은발을 정리하며 웃었다. 왼쪽 볼에 보조개가 생겼다.

훤칠한 키에 은발과 대조되는 검은색 군복이 몹시도 잘 어울리는 남자라 생각한 석진이 생긋 웃었다.

“저 역시, 치안대가 이렇게 잘생긴 모델들로 이뤄진 줄 처음 알았어요. 얼굴 보고 뽑는 건가요?”

“칭찬으로 듣죠.”

“네, 칭찬이에요.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고해성사라도 하러 오셨나요?”

“그럴 리가요. 저는 치안대 제1팀 팀장 김남준 대령입니다. 이쪽은 부팀장 전정국 대위고요.”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신분증을 내보였다.

“박명진 부제가 사망했습니다.”

“……네?”

곧바로 본론을 말한 남준이었고, 석진의 표정이 멍해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남준은 서늘한 눈매로 입을 연다.

“살해당했습니다. 장기와 두 눈이 적출된 채 빈민가 입구에 목이 매달려 있었죠.”

“!”

끔찍한 말에 석진의 동공이 커졌다.

“거, 거짓말…….”

“혹시 박명진 부제가 왜 그렇게 됐는지 예상 가는 게 있나요? 평소에 원한 살 만한 일이 있다던가?”

사실 네 번째 연쇄 살인이었지만,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한 덕에 일반 국민들은 알지 못했다. 치안대에선 용의자조차 특정하지 못할 정도로 범인은 무척이나 치밀하고 빈틈이 없었다.

“어, 그게…….”

석진은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휘청거렸다. 남준이 재빨리 다가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부축했다.

“아, 감사합니다…….”

석진은 남준의 품에 안겨 생긋 웃고는 예배석에 앉았다.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심하다가 고개를 들어 남준을 응시했다.

“며칠 전부터 이상하기는 했어요.”

“이상하다니 어떻게요?”

“나흘 전인가? 김 의원님이 교회에 오셨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아도 별일 아니라고 하셨고요. 하지만 그거랑 그렇게 처참하게 살해된 거랑 관계있을까요? 대체 누가 우리 부제님께…… 언제나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온 좋은 분이셨는데.”

석진은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김 의원이라 하심은.”

“김주원 의원님이요.”

“아.”

“대령님. 범인, 꼭 잡아주세요.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제님이 편히 눈 감으실 수 있게요.”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석진이 눈물을 글썽이자 남준이 석진의 양손을 꼭 잡고 위로했다.

“시신은 정밀 부검이 끝난 후에 연락드리죠.”

“감사합니다. 대령님.”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당을 나서자 정국도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나가자 석진은 혼자가 되었다. 그때 단상 뒤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휴. 사냥개들 위압감이 장난 아니네요. 안 봐도 살 떨리더라. 특히 개 중에서도 독 품은 미친 개 ‘독광견’으로 유명한 1팀 팀장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하얀 셔츠에 체크 멜빵 바지를 입고 빵 모자를 쓴 20대 중반의 남자였다.

“김태형 형제님.”

석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물이 뚝 그쳤다. 남준에게 보여주었던 다정했던 얼굴이 차가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연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수집한 정보 말씀해 보세요.”

“넵. 현장 정보원에 따르면 몸에선 아무것도 안 나왔다고 합니다. 핸드폰도요.”

“범인이 가져갔거나 부제님이 숨겼거나 둘 중의 하나겠죠. 살해 현장은요?”

“살해된 현장에서 목 매단 현장까지 그리 멀지 않다고 하네요. 지금은 사냥개들이 지키고 있을 테니, 자리를 비우는 밤에 함께 가보시죠.”

“그래요. 부제님은 반드시 증거를 남기셨을 테니 살해된 현장부터 살피도록 합시다.”

 








 

김 의원의 저택으로 향하는 지프 안에서 남준은 오른팔을 창가에 올리고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미인이었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정국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일에 싸인 미인이라…… 위험한데 매혹적이야. 완전 내 취향.”

“?”

정국이 고개를 갸웃하자 남준이 보조개를 보이며 웃었다.

“손이. 곱게 자란 성직자의 손이 아니더라.”

잠깐 잡은 손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물론 사심이 있어 잡긴 했지만, 의도치 않게 발견하고 말았다. 그가 오래된 싸움꾼임을 반증하는 굳은살이 박힌 손을.

교회에 가기 전 감식반에게 석진의 정보를 받았을 때도 그에 관한 정보는 별것 없었다. 누락된 정보와 걸맞지 않은 증거. 그것만으로 남준은 석진에게 크나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좀 더 지켜봐야겠어.”

“…….”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인에게 약해서 곤란하다니까.”

쿡쿡 웃는 모습에 정국이 흠칫거렸다.










연합국을 출발한 비행기가 중북국의 평울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일어나세요, 예하.”

지민이 가볍게 호석의 어깨를 잡고 잠을 깨웠다.

“으음, 벌써 도착인가요? 경.”

“네, 이제 내리셔야 합니다.”

“하암~ 넨네. 역시 13시간 비행은 너무 지루하고 힘드네요.”

호석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귀엽게 하품하고는 지민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캐리어는 수화물로 보낸 탓에 빈손으로 내리면 되었다. 여권과 신분증, 지갑과 핸드폰이 담긴 도토리 모양의 미니 크로스 백만 빼고.

길고 지루한 입국 심사를 끝내고 공항 로비로 나온 두 사람이다.

“정부 측에서 마중 나온다고 했는데 아직 안 온 것 같네요. 여기서 만나기로 했으니 일단 기다려 보죠.”

“네. 근데 경, 저 목마른데 물 마셔도 될까요?”

“사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부탁드려요.”

지민이 묵직하고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호석의 곁에 두고 공항 내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호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공항은 연합국보다 더 깨끗하고 컸다. 이것만 봐선 빈부격차가 큰 나라라는 걸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상은 가장 깊숙한 곳을 봐야 알 수 있으니까.

“아, 맞아. 연락해야지. 석진이 형에게.”

호석은 장갑을 낀 상태로 도토리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지문 인식이 필요 없는, 장갑을 끼고도 누를 수 있는 구형 3G 폴더폰이었다.

형, 저 중북국에 도착했어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빨리 보고 싶다. 형.’

석진과 만날 생각을 하며 행복해하던 때에 누군가가 달려와 호석의 가방을 낚아채 도망쳤다.

그게 소매치기라는 걸 깨달은 건 수초 지나서였다.

“소, 소매치기!”

호석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빠르게 달려가 손을 뻗어 소매치기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뒤로 던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악!”

‘헉!’

소매치기는 비명을 질렀고, 호석은 놀라 얼음 상태가 되었다.

소매치기를 잡은 남자는 곧장 소매치기에게 가 재킷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 양 손목에 채웠다. 그가 훔쳐간 귀여운 도토리 가방을 들고 호석에게 다가갔다.

뚜벅, 뚜벅, 제게로 걸어오는 검은 군화를 보며 호석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여기.”

2음절이었지만, 위엄이 넘치고 남자다운 중저음이었다. 흑발에 검은 군모, 검은 군복에 칼과 총을 찬 차림에, 왼쪽 어깨에는 검은색 클라미스를 걸치고 있었다.

온통 검은색인 모습과 대조적일 정도로 피부가 하얬고, 고양이처럼 귀여우면서도 잘생긴 외모였다. 호석은 멍하게 상대의 얼굴을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가방을 받아들었다.

“덕분에 가방을 찾았네요. 감사합니다.”

봄 햇살을 받아 활짝 핀 꽃처럼 해맑게 웃었다.

“!”

그 웃음에 남자는 일순 움찔했다.

“청장님!”

곧이어 클라미스만 없는 치안대원 여럿이 클라미스를 걸친 남자에게로 우르르 달려왔다. 그는 치안청의 총 책임자인 청장이자, 중북국을 지배하는 총통의 뒤를 이을 외동아들 민윤기였다.

“중북국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공항에서 소매치기라니. 치안대의 명성이 날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군. 모두 지방 탄광으로 좌천하면 정신 차리려나?”

화가 난 듯 중저음의 싸늘한 목소리에 대원들은 입도 벙긋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연행해.”

“네!”

윤기의 명령에 대원들은 재빨리 소매치기를 데리고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청장님. 길이 막히는 바람에. 먼저 오셔서 다행입니다. 귀빈께선 아직 입국 심사 중이라 안 나오셨나 보죠?”

공무원으로 보이는 40대 남자가 윤기의 곁으로 다가왔다. 윤기 뒤에 가려진 탓에 호석을 보지 못한 듯했다.

‘무서운 외양인데 빛이 나네. 신기해.’

호석은 자리에 앉아 지민이 오길 기다리며 흥미롭다는 듯이 윤기의 옆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가 직접 모실 정도로 대단한 귀빈이 누굽니까? 이제는 좀 알려주시죠?”

윤기는 신경질적인 말투로 말했다.

“시온 성지의 추기경입니다.”

“추기경이 여길 왜.”

윤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개인 사정이라고 해서 저희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다만, 그 추기경이 연합국은 물론 시온 성지에서 매우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고 하니 국빈으로 잘 모셔주길 바란다는 요청이 왔습니다. 덧붙여, 그분의 신상에 조금이라도 위해가 가해진다면 전쟁이라고 하더군요.”

“뭐?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기에.”

전쟁까지 좌지우지한단 말이야? 윤기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그때 지민이 다가와 호석에게 생수병을 내밀었다.

“예하, 여기 물 드세요.”

“고마워요, 경.”

“!?”

호석이 생수병을 받아들자 공무원과 윤기의 눈동자가 커지며 단번에 몸을 돌려 호석을 바라보았다.

호석이 윤기와 시선을 마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제가 시온 성지의 추기경 정호석입니다. 머무는 기간 동안 잘 부탁드려요, 청장님.”









어제 점심 때 밥 먹다가 삘이 와서 부랴부랴 썼습니다. 가상의 국가에서 자유주의+유신론 vs 공산사회주의+유물론의 대결을 군부물과 종교물, 수사물도 적절하게 섞은 판타지로 가볼까 합니다. (그래요, 제 취향 다 때려 박았습니다.) 전반적으로 다크다크한 분위기겠지만, 우리 호비 덕에 밝아지겠죠?ㅎㅎㅎ

천주교와 개신교를 섞어 기독교로 통합했습니다. 그러니 현실의 교황청과는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를 겁니다.ㅎㅎㅎ어차피 이건 판타지니까요♥

재밌게 봐주시면 제가 막 행복할 것 같습니다.

벌써 추석 연휴가 끝이라니....ㅠㅠ 이제 저도 한숨 자고 출근해야겠네요. 좋은 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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