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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테드 공작가에서 온 서신입니다.”

“테드 공작이?”

 


민석은 집사가 내미는 편지를 받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테드 공작가, 제너럴 황실에 많은 병사를 배출해낸 가문. 그 업적에 걸맞게 황실 친위대를 육성하고 있는 막강한 세력의 공작가다. 물론 민석 또한 테드 공과의 인연이 얕은 것은 아니었다. 워낙에 무예가 뛰어나니, 황실에 입성한 테드 공작가 소속 병사들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테드와도 많은 왕래가 있었다.

 

허나 이 시점에서 제게 서신을 보낸 테드가 의아한 것이다. 지금 민석의 위치가 이전과는 다를뿐더러, 그 경위가 좋지 못했음을 귀족들은 모두 알 터. 또한, 민석의 공작가 안에는 황실 병사들이 수두룩하다. 테드 공이 이든 공에게 서신을 보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리의 귀에 들어가겠지. 그 순간부터 테드 공작가는 리의 눈엣가시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 위험을 무릅쓰고 서신을 보내다니.

 


“서신의 내용은?”

 


민석은 굳이 내용을 읽어보라 시켰다. 어떠한 허황된 소리도 나오게 하지 않기 위해. 사실 서신의 내용을 민석이 숨긴다 하여도 어떻게든 알아내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지만 말이다.

 


“최근 들어 병사 지원자가 많아진 탓에 교육자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공작께서 군사 인력 육성에 힘을 얹어주었으면 합니다.”

“…”

“제너럴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이들에게 더는 물러날 길은 없습니다. 제국의 굳건한 힘인 군사력 강화에 적극 지원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거절은 정중히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는 보름날,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만찬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떤지요.”

 


그럴듯한 내용에 민석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역시 테드 공이군. 서신이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거절은 사양한다니. 아주 요망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 테드도 이 모든 상황을 알기에 이런 같잖은 서신을 보낸 것이 분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만나봐야 알겠지만, 오는 보름은 3일 채 남지 않았다.

 


“서신에 대한 답신은 없는 것으로 하여라.”

“네.”

 


집사가 나간 뒤, 집무실에 혼자 남은 민석은 한참을 큭큭거렸다.

 


테드, 이번에는 얼마나 재밌는 제안을 하려고? 기대되는군. 내 사정은 그러지 못하지만 말이야.

 










 

“그래서 서신은 잘 받아보셨는지.”

“…”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없으시니 원, 긍정으로 받아들였는데… 폐를 끼치신 건 아닌지…”

“테드, 그만하지그래. 우스운 연기나 해대고 말이야.”

“하하… 공께선 여전히 장난도 재밌으십니다.”

“서신은 잘 받았다 마다. 답장하지 않은 것도 고의였고.”

“역시 이든 공은 하루가 다르게 뻔뻔하십니다!”

“그게 내 매력이라면 매력이겠지.”

 


약속한 보름날이었다. 하늘에 보름달이 뜨기엔 한참 이른 시간. 민석의 집무실에는 간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약속대로 이든 공작가를 찾은 테드는 연신 눈웃음을 지으며, 영양가 없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교육자 인력이 부족하다고?”

“그래도 서신을 다 읽어보셨군요. 저는 읽다가 중간에 찢어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내가 그 정도로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암요. 그럼 군사 교육 협력에 대한 것은…”

“아무리 그래도 맨입으로?”

“하하!! 역시 이든 공께서 그렇게 나오실 줄 알았습니다.”

 


테드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였다는 것 마냥.

 


“그래서 조건이 뭔가요?”

“황실 친위대를 총괄하는 테드 공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는지 검증할 필요가 있을 거 같군.”

“흠…”

“그래야 나도 믿고, 내 시간을 투자하지 않겠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입꼬리를 당겨 웃는 테드에 민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 문을 열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간만에 테드 공과 대련을 할 예정이니, 준비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인원은 소수만 배치하는 거로 하지.”

 


아무래도 테드가 내게 은밀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니 말이야.

 










제너럴 병사들 사이에서 우상으로 칭해지는 이든과 테드의 대련. 그것도 대회와 같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병사들의 관심을 한껏 받는 것은 당연했다. 두 용의 싸움이라는 말에 모두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카로운 빛과 같은 검, 이든. 파도치는 물결처럼 유영하는 검, 테드.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을 표현하는 듯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역시 이든 공의 공작가는 소수라 해도, 사람이 많군요.”

“아무래도 자네와 내가 대련한다는 소식에 몰려든 것 같군.”

“뭐, 저는 상관없습니다. 이 넓은 공간이라면요.”

“자신만만하군. 테드.”

“간만에 공과 대련을 하려니, 긴장돼서 말이죠.”

 


민석은 테드의 말에 헛웃음을 뱉었다. 언제 이렇게까지 컸는지. 테드를 처음 보았을 때는 아직 정세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목검을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 어린아이였는데 말이다. 민석은 목을 좌우로 꺾고, 왼손으로 허리춤에 찬 검을 잡았다. 그에 따라 테드 또한 자세를 잡았다. 검을 뽑은 둘은 검을 맞부딪혀 교차했다. 그리고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대련이 시작되었다. 쇠붙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진검은 아니군요.”

“아쉬운가?”

“아뇨. 공께서 저를 미워하시진 않을까 매번 마음 졸이는걸요.”

“미워하지 않는 건 아닌데.”

 


빠르게 부딪히는 검에 반해, 둘의 표정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할 만큼. 그리고 둘의 대화 소리는 쉴 틈 없이 맞부딪히는 검의 소리에 묻혔다.

 


“슬슬 말하지그래?”

 

카앙-

 

“나를 찾아온 진짜 이유를 말이야.”

 

캉-!

 

“이터널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

“항간에서는 제너럴이 이터널로 갔다는 말이 떠돌고.”

“…”

“그 제너럴이 이터널에 협력하고 있다죠.”

“그래서.”

“웃기지 않습니까. 제너럴이 이터널로 넘어가는 일, 그 반대의 일도 알면서 쉬쉬하던 일뿐이었는데,”

“…”

“제 귀에 들어올 만큼 영향력이 있다- 라고 받아들여지는데. 공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내게 말해서 달라질 건 없다.”

 


민석이 검으로 테드의 검 손잡이 부분을 탕-하고 쳐올렸다. 그 충격으로 인한 파동에 테드는 검을 손에서 놓쳤다. 명백한 민석의 승리였다. 테드는 잠시 당황스러웠던 표정을 지우고, 못 말린다는 듯 웃어 보였다. 방금 민석에게 전했던 말이 상당히 자극을 줬음을 알 수 있었다. 민석은 여전히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말이다. 왼손에 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꽂아 넣은 민석은 숨을 한번 뱉었다 내쉬었다. 그리곤 씩 웃으며 테드에게 손을 내민다.

 


“리는?”

“저는 황실을 그리고 제국을 지키기 위해 움직입니다.”

“…”

“전하께 전할 말이었다면, 공에게 찾아오지도 않았겠죠.”

“주소를 잘못 찾은 모양이야.”

“정말 이대로 괜찮으시다고요?”

 


테드는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민석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테드의 눈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민석은 그 눈을 금방 피했다. 아니, 피하지 않은 척했다. 테드는 그 순간의 민석을 빠르게 캐치해냈다.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맞잡은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갔다. 민석의 손안에서 테드는 손이 점점 구겨져 갔다. 그리고 종국엔 민석이 탁-하고 테드의 손을 놓았다. 땅에 꽂힌 검을 뽑아 제 칼집에 다시 넣은 민석은 검 손잡이 끝을 매만졌다. 황제가 한평생을 바쳐 이루어낸 평화. 단단하게 맺어진 매듭 같아 보여도, 매듭을 한 번에 풀 수 있는 끝이 존재한다. 끝의 존재만으로도 제너럴과 이터널 사이의 관계는 언제까지고 위태로울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을 지금 황태자인 리가 쥐고 있으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테드, 미안하지만 부탁을 들어주긴 힘들겠군.”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대신에 병력 육성에 필요한 물자를 지원하도록 하지.”

 


민석은 처음부터 테드의 지원 요청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테드 또한 당연히 민석이 거절하리라는 것을 알았고, 애초에 병사 교육자가 부족하지도 않았다. 그 말은 즉, 지금 오가는 이야기도 사실 본질은 다르다는 뜻이었다.

 

테드 공작가에 병사 교육 지원을 나간다는 것은 당연히 황태자인 리에게는 상당히 거슬리는 일이 분명했다. 공개적으로 테드의 부탁을 거절하되, 물자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통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정보의 통로를 말이다.

 


“이든 공작가의 원조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테드 공작가 병력에 힘을 얹어주는 것과 다름없는 거죠.”

“…”

“공께선 여전하시군요.”

“칭찬인 건가?”

“아무렴요.”

 


둘 사이에 오가는 눈빛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견고하고 단단했다.

 











푸른 초원이 펼쳐진 언덕 끝에 위치한 집은 언제나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여주. 어깨에 힘을 조금 빼는 건 어때.”

“힘 안 줬는데?”

“목에도 힘이 들어가고 있어.”

“아니라니까?”

“맞는데 자꾸 아니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말해줘야 하지?”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니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자꾸 뭐라 하잖아!”

“여주, 니가 제대로 못 하는 거겠지.”

“너 계속 그렇게 싹수없게 말할래?”

“맞는 말을 자꾸 싹수없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하지?”

“아!! 짜증 나!!!”

 


포효하듯 소리 지른 여주가 다리를 동동 굴렸다. 현의 말장난에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맞는 말만 골라서 하는 것도, 자신이 이렇다 할 반박을 할 수 없는 것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면 그런 여주의 반응을 현은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최근 현과 여주는 마을에 내려가지 않고 집에서만 지냈다. 큰일을 거친 후에는 항상 그랬듯이, 휴식기를 가지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 여주가 지루하진 않을까 생각하던 현은 여주에게 먼저 훈련을 제안했다. 그 제안은 그저 여주의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함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일에 대비하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언젠가부터 현은 여주에게 위험한 상황에 놓였을 때를 가장한 훈련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이 그 적기라고 생각을 했고, 곧 있으면 분명 자신이 다시 바빠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깨에 힘을 주면, 목에도 힘이 들어가. 그런 상황에서 큰 충격, 혹은 습격을 당한다면 아마 목을 크게 다칠 거야.”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나도.”

“다시 칼 제대로 잡아봐.”

 


현의 말에 여주는 눈을 한번 흘기고는 정면을 본 채, 칼을 양손에 잡아 들어 올렸다. 현은 자세를 잡은 여주의 양어깨로 손을 얹었다. 그리곤 어깨부터 목까지 한번 쓸어 올린 현은 힘이 들어가는 어깨 부분을 툭툭 쳤다. 그에 몸을 흠칫 떤 여주는 더욱 긴장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왜 만져!”

“여기. 그리고 여기도. 힘이 너무 들어갔어.”

“…”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긴장을 풀어봐.”

 


지금 누구 때문에 더 긴장 상태가 됐는데… 여주는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삼키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고 후-하고 내쉬며, 몸에 힘을 뺐다.

 


“응. 지금.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해.”

“알겠어. 근데 현…”

“응?”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현에 여주는 잠깐 망설이다 입을 뗐다.

 


“손, 손 좀 치워 봐.”

“손?”

“아까부터 목에 닿잖아.”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여주는 점점 제 얼굴이 달아오는 것을 느꼈다. 망할 심장은 도저히 진정될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쿵쿵. 귀까지 울리는 두근거림에 온 신경이 제 목 근처를 배회하는 현의 손에 가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여주는 결국 뒤돌아 현을 마주했다. 목 근처의 홧홧거림이 현의 손과 멀어짐으로써 가라앉는 듯했다.

 


“왜 대답이 없어?”

“…”

“뭘 웃어.”

 


어이없게도 마주한 현은 웃고 있었다.

 


“왜?”

“뭐?”

“내가 이렇게 만지면…”

 


현이 다시 여주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그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는 여주에 현은 멈추긴커녕 손을 더 뻗어 여주의 귀 아래부터 목선을 손으로 덮었다. 맞닿은 곳이 순식간에 다시 달아오르는 느낌에 여주는 제게 뻗어진 현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현은 반대 손을 뻗어 제 손목을 잡은 여주의 손을 잡았다.

 


“떨려?”

“…뭐라는 거야, 진짜. 하지 말라니까?”

“떨리고 있어.”

“…”

“니 눈동자가 말이야.”

“…”

“거짓말인가 보네.”

 


빤히 저를 바라보는 현의 눈빛에 여주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현의 말이 다 사실이니까. 떨리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다. 머리에선 당장 현의 손을 뿌리치고, 뭐 하는 짓이냐고 따박따박 쏘아붙이고 싶지만, 마음은 그러질 못했다. 대체 왜…

 


“그래. 떨려.”

“…”

“다, 당연한 거잖아?”

“왜 당연한 건데? 처음이야?”

 


처음이냐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면서도 왜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자신이 이상한 건지, 현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야? 여주는 억울했다. 항상 이런 이상한 분위기에 놓이면 당황하는 것도, 먼저 피해버리는 것도 제 자신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런 걸 따지는 것도 웃기지만, 알량한 자존심은 이를 허락하지 못했다.

 


“아니?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

“난 목에 뭐가 닿으면 소름이 돋는단 말이야.”

“…누구?”

“어?”

“누구랑 해봤는데?”

 


미칠 노릇이었다. 현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자꾸만 모호하게 물어오는 현에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아니,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고 말아버리는 것이다.

 


“응? 누가 이렇게 해줬어?”

“그게 왜 궁금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되지.”

“…그러게.”

“…”

“그렇게 하면 되는데, 난 왜 그게 안 될까?”

 


되려 반문하는 현에 여주는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여주에도 현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집요하게 물어서라도 알고 싶었으니까. 잡은 여주의 손을 제 얼굴로 가져가, 여주의 손등 위로 제 입술을 묻는다. 현의 숨결이 여주의 손등 위로 여과 없이 내려앉았다.

 


“알려줘.”

“…”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

“여주야.”

 


낮게. 그리고 달콤하게 울리는 현의 목소리에 여주는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함께 훈련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분위기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여주였다.

 


“그냥 장난 좀 친 거가지고… 뭘 그렇게 집요하게 물어봐!”

“장난?”

“그래! 뻥이라고.”

 


좀 전의 말이 장난이라는 여주에 현은 고개를 들었다. 여주의 잔뜩 붉어진 귓불과 저를 마주하지 못하는 시선에 속에 흐르는 피가 뜨거워지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좋아지는 기분을 숨기고 싶지 않아 그대로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에 여주는 얼굴을 확 구기며, 현에게 잡힌 제 손을 뺐다.

 

현은 갈수록 제 마음에 솔직해졌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이 감정을 어떻게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제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여주를 믿고 싶어서 믿기로 한 것처럼, 제 마음이 그러고 싶다면 그러기로 한 것이다. 여주에게 자꾸만 눈길이 가고, 마음이 쏠린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부정해버린다면 처음 여주와 만났던 그 날부터 모든 것은 모순투성이가 될 테니까.

 


“그럼 됐어.”

“어?”

“곧 이터널에서 축제가 열릴 예정이야.”

“축제?”

“응. 사실 말이 축제고… 후계자 임명식이나 다름없는 행사지.”

“그럼 너를 위한 축제라는 거네?”

“그렇지?”

 


여주는 들뜨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축제. 제너럴에 있을 때는 제너럴의 큰 축제가 있어도 마음껏 구경할 수도, 즐길 수도 없었다. 애초에 황실 밖으로 나가는 것부터 어려운 일이었고, 축제와 같이 큰 행사에서는 자칫 도망쳐 나갔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주는 괴한이 나타난다고 해도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겠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자연스럽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것이고, 얼굴까지 팔리게 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황제는 여주의 성인식이 가까워질 때부터 얼굴을 시민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여주의 부탁으로 민석이 황제를 설득해보았지만, 황제는 완강했다. 오히려 여주에게 이번만큼은 제 말을 들어달라 부탁까지 했다. 아무리 말썽꾸러기에, 제멋대로인 여주라 하여도 제 아버지인 황제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순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여주는 축제를 즐기고 싶어도 즐길 수 없었다.

 


“그럼 나도 가는 거야?”

“응. 가기 싫으면,”

“아, 아니! 나 축제 완전 좋아해! 갈래.”

“…푸흡.”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축제에 가겠다 말하는 여주의 모습에 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왜 웃어!”

“그냥 웃기니까?”

“사람 면전에 대고 웃기는…”

“그리고 이번 축제는 이터널 정세와 밀접한 관계로 제너럴 황실에서도 내방하기로 했어.”

“…어?”

“아마 제너럴 황태자와 주요 귀족들이 몇 온다지?”

“…”

“축제에 가는 건 좋지만, 크게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순간 여주는 누군가 뒤에서 머리를 세게 내려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제너럴 황실에서 이터널을 내방을 한다? 그렇다는 건 황태자인 리는 물론이고, 공작인 민석도 온다는 말이었다. 이건 예기치 못한 변수. 자칫하면 축제에서 그들을 마주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축제 날에는 카이랑 같이 있도록 해. 아마 반은 바쁠 거야.”

“어? 어…”

 


혼이 빠진 듯한 여주의 표정에 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마 제너럴의 내방이라는 말에 걱정하는 것이겠지. 아주 당연한 반응이라 생각했다. 제너럴 황실에 현장 적발된다면 여주의 신변이 위험해진다. 이제껏 제너럴과 이터널의 탈주자가 존재한다는 것쯤은 모를 수가 없는 일. 양쪽 모두 쉬쉬하고, 묻어두는 것일 뿐. 그저 이 평화를 깨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 이면에 날카로운 칼을 숨기고서 말이다. 하지만 현행범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뭘 걱정하는 건지 알겠지만,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

“너랑 그자들이 마주칠 일은 없을 테니까.”

“…”

“그리고 평범한 제너럴은 구분 못 해. 기득권들이 방랑자를 알아보는 게 더 신기한 일이지.”

 


현의 말이 맞다. 여주를 그저 제너럴의 방랑자로 알고 있으니 황실에서 여주를 알아볼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여주는 그 말에 도저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면 현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여주의 머릿속은 이미 잔뜩 헤집어져 있으니.

 

축제라면 많은 사람 사이에 섞일 것이고, 이터널의 정부에 따라 움직일 제너럴 황실이 여주를 발견할 일은 사실상 거의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이터널에서 후계자의 약혼자 신분이다. 그 사실을 리나 민석이 듣는 날에는 숨어 있다 해도 언제 어디서 추적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그게 제너럴 황녀라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슬슬 저녁 시간이네. 들어와. 밥 먹자.”

 


현은 그저 여주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불안해하는 여주에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식사를 제안하며, 집 안으로 발을 들이려는 현을 여주가 붙잡았다.

 


“현.”

“…”

“내가 약혼자라는 사실 말이야.”

“…”

“귀에 들어간다면…”

“아마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라.”

“…뭐?”

 


아마 제너럴에서는 이미 이터널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도 눈치챘을 것이다. 이번 임명식에 직접 내방을 하는 것도 아마 이터널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겠지. 축하를 가장한 견제가 분명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터널에 제너럴이 넘어왔다는 것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매번 정보가 흘러나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만큼 제너럴의 정보도 이터널로 흘러들어오니 말이다.

 


“하지만 제너럴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알지라도, 김여주의 존재에 대한 건 모를 가능성이 커.”

“그걸 어떻게 장담해?”

“말했지? 이터널은 지금 제너럴을 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 과정의 변수는 너라고.”

“…”

“아무리 정보가 흘러나간다 해도, 이터널 내부 깊숙한 정보는 알아내기 힘들 거야.”

“…”

“물론 여주, 니가 내 약혼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내부 보안이 더욱 강해진 것도 있고.“

 


여주의 존재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만큼, 이터널 정부에서는 내부 보안을 더욱 강화했다. 제너럴이 이터널에 넘어오는 것쯤이야. 제너럴에서도 이터널에서도 개의치 않게 여기던 일이었다. 하지만 넘어간 그 인물의 영향력이 크다면 말이 달랐다. 제너럴과 이터널 모두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갔을 뿐이지. 영향력이 크다는 것은 곧, 시민들의 귀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이 이러한 사실을 들고 일어난다면, 정부에서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이터널은 예부터 결속력이 뛰어난 나라였다. 그들의 특성상 무리 지어 생활하는 것도 한몫했다. 수장의 존재는 그러한 결속력을 더욱 다지기 위함이었고, 내부의 규율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집단의 해체나 분열을 최소화하는 것이 목표이니, 나라의 정세가 흔들릴 만한 큰 일이 아닌 이상은 수장의 뜻에 따라 처우가 결정된다. 이번 여주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내부에서 묻어버린다면, 당장에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현이 수장자리에 앉기 전에 제너럴과 전쟁하여 승리한다면, 여주의 존재에 대한 영향력도 제로. 오히려 마이너스일 것이다. 그러니 굳이 앞장 서 여주와 현의 관계를 꼬집어 파헤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 솔직히 이해가 안 돼…”

“…”

“아무리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사실이 있어.”

“…”

“내가 일개 시민의 약혼자도 아니고, 무려 이터널 후계자의 약혼자야. 깨진 항아리를 손으로 아무리 막아도 물은 새어 나와.”

“…”

“그걸 끝까지 숨길 수 있을까? 그 잠깐의 내방이라 해도…”

“여주.”

“사실 두려워… 너는 이해 가지 않겠지만 난,”

“김여주.”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두서없이 말을 내뱉는 여주를 현은 진정시키려 했다. 여주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몸을 낮추어 여주의 눈을 마주했다. 떨려오는 여주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현은 뇌의 회로가 멈추는 듯했다. 이토록 여주가 두려워한 적이 있을까. 제 목숨을 저버리는 일에도 두려움을 삼키며, 흔들림 없이 말하던 여주였다. 하지만 지금의 여주는 그런 자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말했잖아. 니가 위험해지는 일은 있더라도, 니가 죽을 일은 없다고.”

“…”

“원한다면 위험해지는 일 따위도 없앨 거야.”

“…”

“그런 거 못 하는 게 아니라고.”

 


여주가 위험해지는 일을 없애는 건 현에게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위험을 야기시키는 모든 존재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그에 따른 결과 또한 스스로 책임지면 되는 일이다. 지금껏 그러지 않은 이유는 온전히 여주와 현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태초에 운명부터 다르게 타고난 여주와 현은 사실상 엮일 수가 없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 운명을 뒤바꾼 건 현 자신이었고, 여주와 협력 관계 또한 따지고 보면 언젠가 막을 내릴 연극에 불과하다.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현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한 나라를, 아니 어쩌면 두 나라의 미래를 뒤흔들 일이니. 물론 지금에 와서야 모두 헛수고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게 아니야.”

“…”

“현, 나는 나를 지켜달라는 말이 아니야…”

“…”

“난, 난 그저…”

“대체,”

“아니야. 내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못들은 걸로 해줘.”

“여주,”

“부탁이야.”

 


여주의 말에 현은 결국 쏟아내려던 말을 삼켜냈다. 마치 여주의 말에 복종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부탁이라 말하며 현의 시선을 피하는 여주는 생각하기를 그만두려 하는 듯했다. 여기서 이렇다 저렇다 말을 이어나가도 여주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 뻔했다. 현의 완벽한 굴복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굴복하고 만 것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숨 막히도록 무거운 정적 속에서 식사를 마친 여주는 방에 들어와 의자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창으로는 노을빛이 방을 물들였다. 식사를 시작하고 끝마칠 때까지 현은 여주를 계속해서 눈에 담았다. 현이 분명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여주는 눈과 귀를 닫은 사람처럼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부쩍 현이 제게 하는 걱정이 늘어난 것을 알고 있다. 여주 자신을 위해준다는 것도 몸소 느꼈으며, 현의 말투와 표정 하나하나에서도 빠짐없이 느끼고 있는 와중이었다. 여주는 은연중에 속에서 덜어지지 않는 제 거짓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현과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자신이 현에게 바라는 것이 많아질수록 여주는 반대로 위축되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야.’

‘나를 지켜달라는 말이 아니야…’

 


제너럴 황실에 적발되어 벌을 받는 일.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황녀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진 않겠지만, 리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고, 민석에겐 아주 못 할 짓이었다. 하지만 여주에겐 더 두려운 일이 있었다. 현에게 제 실체가 까발려지고, 모든 걸 알아버린 현이 제게 실망하지 않을까. 등 돌리지 않을까. 이기적인 바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주는 현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 존재의 가치를 진실 되게 바라봐주고, 지지해주던 현은 끝까지 자신을 김여주로만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현에게 지금이라도 진실을 고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미친 짓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잘만 한다면 끝까지 숨길 수 있다. 일이 모두 잘 풀린다면, 현이 모든 사실을 알기 전에 먼저 도망가면 된다. 그렇게 나라는 협력자가 있었다는 것만, 김여주라는 존재를 알았다는 것만 남기면 된다. 제 머릿속에서 나오는 이 모든 계획이 현에게는 죄다 이기적인 짓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여주는 진실을 고할 수 없었다. 모든 것들이 현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면, 그래도 조금 덜 아픈 결말이 좋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니가 위험해지는 일은 있더라도, 니가 죽을 일은 없다고.’

‘원한다면 위험해지는 일 따위도 없앨 거야.’

‘그런 거 못 하는 게 아니라고.’

 


여주가 걱정하는 일의 단면을 현은 그대로 내뱉었다. 현은 처음부터 여주에게 말했다.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이고, 더 나아가 목숨까지 잃을지도 모른다고. 여주는 그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때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자기 혐오를 일삼던 때니까. 게다가 여주의 눈에 그때의 현은 지금처럼 제 리스크를 감안 해서라도 여주를 지키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주를 죽지 않게 하겠다던 말도 자신의 계획에 금이 가지 않기 위함이 더 컸다고 생각됐다. 하지만 지금의 현은?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여주는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두 나라의 미래를 결정할 키를 쥐고 있는 것은 현이다. 그리고 그에 동참하는 자가 여주 자신이다. 사적이지도, 그렇다고 공적이지도 않은 일이지만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현이 왜 갑작스럽게 변한 것인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여주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잊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자신의 거짓에서 비롯된 산물이란 걸 말이다. 처음 현을 만났을 때, 도망쳐야 했다. 웃기지도 않는 정의감에 무모한 짓 따위 해선 안 됐다. 아니, 현에게 거짓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아, 아… 그냥 황녀라는 걸 밝히고,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끝도 없는 자기 혐오가 이어졌다. 수면 위로 떠 오르는 제 실체를 마주하고야 만다. 하지만 단 하나 부정하고 싶지 않은 건, 김여주의 삶이었다.

 

가슴을 죄어오는 고통에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심해로 가라앉고 싶지 않아. 다시 김여주를 가두고 싶지 않아. 현과의 처음을 부정해버린다면, 김여주의 존재 또한 부정하게 되어버린다. 현을 만남으로써 깊은 수면 중에 깨어난 거니까. 부정하면 모두 사라져버려. 이터널로 오던 날, 모든 걸 버리고 왔다. 제너럴을, 황실을, 오필리아를, 민석을…

 


‘리가 무언갈 더 꾸미고 있는 거 같아…’

‘그러니까 여주야… 너마저 그러지 마… 제발 그러지 마…’

 


잊고 있던 목소리가 여주의 머릿속에 울렸다. 기어코 참던 눈물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민석을 잊고 있었단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몰아치는 현실을 실감하고 만다. 하지만 쏟아지는 눈물과는 별개로 눈 앞의 현실을 실감하고 나니 되려 초연해지는 여주였다.

 


오빠, 나 드디어 김여주를 찾은 것 같아.

오빠가 이제야 생각날 만큼 나는 지금 이곳의 생활이, 김여주로 사는 삶이 익숙해졌어.

마치 내가 처음부터 누렸던 것처럼.

웃기잖아. 난 처음부터 김여주였는데, 지금에서야 진짜 김여주가 된 것 같다니…

세상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탓일까?

황실을 벗어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지만 그럴수록 나는 두려워져.

잃을 게 점점 많아지고 있어. 그리고 그 모든 걸 잃고 싶지 않아.

그걸 내 목숨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이나.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아니. 난 신경 쓰지 마.”

“…”

“정말 괜찮다니까? 그날은 내가 너무 놀라서… 놀라서 그런 거야.”

“그럼 가자.”

 


현은 축제 준비를 위해 성에 갈 일이 생겼다고 했다. 약혼자라는 사실이 공공연해질 때부터 현이 마을로 향하는 날이면 항상 동행하던 여주였다. 하지만 며칠 전, 제너럴 내방에 대한 사실로 공황에 빠졌던 여주를 알기에 현은 이번만큼은 여주를 두고 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여주의 생각은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아마 지금 가면 저녁까지 회의가 계속될 거야. 성에 같이 갈 거라면 따로 방을,”

“아니야. 아직은 이른 것 같아서… 장로님을 뵙고 싶은데…”

“그래. 거기 있으면 오히려 안전할 거야.”

 


오늘 여주가 마을로 가려는 가장 큰 이유는 장로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많았다. 차라리 현이 제 옆에 없을 때,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수장에 관한 것도, 그리고… 현에 관한 것도 말이다.

 


“괜히 귀찮게 하는 건 아니겠지…?”

“할배는 아마 좋다고 할 거야.”

“말버릇 좀 고치라니까…”

“보기엔 안 그래 보여도, 외로움을 꽤 타니까 말이야.”

“잘 해드려.”

“…”

 


여주의 말에 현은 갑작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여주는 그런 현의 반응에 힐끗 바라봤지만, 현은 그저 앞만 보고 걸을 뿐이다. 그 이후로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을 초입이었다. 현은 여주의 손을 잡았다.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자들이 현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이제는 여주를 흘겨보는 일 따위는 없었다. 여주 옆에 서 있는 현의 압도적인 기운에 눌린 것도 있지만, 여주가 제단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한몫했다. 제단의 힘이 그만큼 절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 성 앞까진 같이 가. 카이 내보낼 테니까.”

 


현의 당부와 같은 말에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을을 빙 둘러 도착한 성 입구. 현은 여주에게 카이를 금방 내보내 줄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성 입구를 지키는 병사에게 무어라 말하는 듯했다. 현의 말을 들은 병사는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려 고개를 마구 끄덕일 뿐이었다. 현은 그대로 성안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병사는 슬그머니 여주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가서 일 보세요.”

“…예?”

“저기 가서 일 보시라구요.”

“하, 하지만…”

“저기서 보나, 여기서 보나 다를 거 없잖아요.”

“…”

“그쪽도 저 불편해할 테니까.”

 


병사는 여주의 말에 어쩔 줄을 몰라 발걸음을 뗐다 붙였다 반복했다. 아마 현이 목숨줄을 부여잡고, 지키라 으름장을 놓았겠지. 뻔했다. 어차피 성 입구 앞에 서 있고, 병사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그러니 서로 불편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병사는 눈치를 보더니 제 자리로 돌아갔다.


항상 북적이는 제너럴 황실 입구와는 달리, 이터널 성 입구는 오가는 이가 많이 없었다. 여주는 간만에 외부로 나온 김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그때 하늘에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숲길을 지나온다고 하늘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먹구름이 낀 상태였다. 비가 많이 오려나? 와 같은 걱정을 할 무렵 성 입구로 다가오는 형체가 보였다. 다름 아닌 하루였다. 항상 붙어 다니던 마루는 보이지 않았다. 눈이 정통으로 마주치고, 여주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시비 붙어 봤자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입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다들 그러더라?”

 


여주를 그냥 스쳐 지나가려던 하루의 발걸음이 여주의 목소리에 멈췄다.

 


“내가 제단에 인정받은 제너럴이라고.”

 


하루는 여주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여주를 내려다봤다.

 


“그래서? 뭐라도 된 거 같아?”

“…”

“제단에 인정받아도 니가 제너럴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아.”

“…”

“그러니까 눈에 띄지 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여주는 하루의 사나운 눈빛에도 굴하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고, 도망치고,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여주 자신이 그들보다 우위라는 생각 따위를 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다를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으며,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그 거만함을 꺾어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왜 여기 있는 거지?”

“말해줄 의무는 없어.”

“아- 도망이라도 가려고?”

“뭐?”

“아마 들었겠지. 이번 임명식 때, 제너럴에서 내방을 한다나.”

“…”

“안 그래도 사전에 협의할 안건 때문에 성에 제너럴 황실이 와 있다나 봐?”

“…”

“처음 들은 척하는 니 얼굴 말이야. 역겨운 거 알아?”

 


하루는 여주에게 폭언을 멈추지 않았다. 하루의 말은 그러했다.

 


지금

이터널에

제너럴의 황실이, 리가

왔다

 


“도망갈 생각이라면, 모르는 척해줄 테니까 제발 꺼져버려.”

“…”

“역겨운 제너럴 냄새는 이제 그만 맡고 싶으니까.”

“…”

“주제 파악을 하란 말이야.”

 


하루는 그렇게 여주의 어깨를 치고 지나쳤다. 여주는 그 힘에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순간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여주는 묻고 싶었다. 지금 제너럴에서 누가 와 있는 건지. 정확하게 확인받고 싶었다. 그래서 뒤돌아 하루를 붙잡으려던 그때, 머릿속에서 서서히 잊혀가던 문양을 보았다. 성 입구 너머로 보이는 그것.

 

잊어도 잊을 수 없는 제너럴 제국의 문양을.









요즘 날씨가 너무 덥죠?

이제 정말 장마가 시작되려나 봐요...

추적추적.. 다들 언제 비올 지 모르니 우산 꼭 챙겨 다니세요밍


감사합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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