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바로 본가로 향했다. 여주가 올 거라는 연락을 당연히 못 받았으니 본가에 있던 최 비서는 어리둥절하며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마주한 여주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여주에게 무슨 일이 있으시냐며 물었고 여주는 대답 없이 최 비서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서재에서 신문을 보고 계시겠지. 여주는 거침없이 서재로 향했다. 쾅! 문을 힘껏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란 김 회장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쳐다봤고 이게 뭐 하는 거냐며 여주에게 큰 소리를 쳤다.





"저야말로 묻고 싶네요."


"뭐라고?"


"아버지는 지금 저하고 뭐 하시자는 거예요."


"무슨 소리냐. 알아듣게 얘기해."


"N 기업 이사가 묻더라고요. 제 자리에 김재윤이 올라오는 게 사실이냐고?"


"...."


"저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서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저한테 설명 좀 해주시죠?"





김 회장은 눈을 감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여주에게 들어와 앉으라고 얘기했다. 소파에 앉아 김 회장의 말을 듣던 여주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쳐다봤다. 그러니까 김 회장 말은 여주가 이제껏 노력해서 올라온 제 자리에는 재윤을 앉히고 여주에게는 백화점 대표직을 맡으라는 거였다.





여주가 A 전자 전무이사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건 지환의 도움이 컸다. 지환은 여주가 A 전자를 물려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다르게 여주는 야망이 있고 욕심이 있었다. 해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꼭 해냈고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인재였다. 여주 덕분에 얻은 대중들의 신뢰도와 기대, 또 올라간 매출까지 어느 정도인지 알기 때문에 지환은 여주의 도움 없이는 A 전자를 이끌어나갈 수 없다고 생각해 김 회장에게 얘기했고 이 부분은 김 회장도 군말 없이 인정했던 부분이었다.





재윤이 언제까지 놀고만 있을 수는 없는 거 아니냐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해왔지만 여주는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재 A 백화점 매출은 눈에 띄게 하락세였다. 그 시점에서 여주 보고 백화점 대표직을 맡으라는 건 백화점 매출 상승을 위해 여주보고 책임지는 게 아닌가.





여주는 만약 백화점 대표직을 받아 김 회장의 기대처럼 매출을 올린다고 해도 재윤에게 또 다시 빼앗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아등바등해서 얻은 자리를 이렇게 홀랑 재윤에게 뺏길 판인데 과연 또 다시 그럴 일이 없을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여주는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어이도 없고 화가 났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더니, 지금 딱 그 상황이었다. 여주는 지금껏 노력했던 시간과 고생이 떠올라 더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 회장을 내려다봤다.





"제가 백화점 대표직을 맡더라도 이 자리는 제 자리입니다. 제가 먼저 그만두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뺏을 수 없어요."


"...."


"아버지도 대놓고 김재윤이 얼마나 형편없는 자식인지 인정하시는 거잖아요."


"...."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도 제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얻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그 자식이 그렇게 걱정되시면 저한테 했던 것처럼 하세요. 배우고 노력해야 자신의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저한테 말씀하신 건 아버지잖아요. 전 아무 노력도 없이 욕심만 부리는 그런 놈한테 이 자리 못 맡깁니다. 먼저 가볼게요. 마지막 말을 내뱉은 여주가 그대로 몸을 돌려 나왔다.






*






차에 올라탄 여주는 가슴이 답답했다. 숨이 막혔고 분노와 억울함이 차오를 대로 가득 차올라서 엉엉 소리 내서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가만히 혼자 감정을 가라앉히던 여주의 머릿속에는 아까부터 동혁이 떠올랐다. 이동혁이 보고 싶었다. 여주는 그대로 차 시동을 걸고 동혁의 집으로 향했다. 집 아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서야 여주는 여기를 왜 왔을까 생각했다. 보고 싶다고 해서 이제 내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게 아닌데. 동혁 말고 또 다른 자신만의 쉼터를 찾지 못한 여주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동혁이 무슨 일 있으면 찾아와도 된다고 했잖아. 친구랬잖아. 지금 나 친구로서 위로 받을 수 있는 상황 아닌가? 혼자 중얼거리며 스스로 위안을 하던 여주가 동혁의 집에 올라가기 위해 차 시동을 끄고 내리려는데 차 앞을 지나가는 두 명. 동혁과 예진이었다. 동혁의 팔에 팔짱을 끼고 밝게 웃으며 걸어가는 둘의 모습에 여주가 문을 열려던 손을 그대로 거뒀다.





"오빠 왜 그래요?"


"어, 어?... 아니야. 아무것도."





여주의 차를 발견한 동혁이가 걸음을 멈추자 예진은 왜 그러냐 물었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한 동혁은 오피스텔로 들어가며 고개를 돌려 여주의 차를 한 번 더 쳐다보고 들어갔다. 핸들만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던 여주가 다시 차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아무 길가에 차를 대고서는 그대로 핸들에 팔을 올리고 얼굴을 묻었다.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그냥 지금은 어떠한 생각조차도 하기 싫었다. 동혁을 알기 전에는 이런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했더라. 그때 여주는 눈물 흘릴 시간조차도 아까웠다. 그럴 시간에 더 단단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여주를 보며 남들은 독하다며 수군거리기 바빴다. 누구에게 기댄 적도 위로를 받아본 것도 다 동혁이 처음이었다. 다시 예전처럼 혼자 버티던 때로 돌아가는 것 뿐이었는데 여주는 가슴이 공허했다. 쓸쓸하고 너무 외로웠다. 혼자라는 게 원래 이렇게 외로운 거였나. 동혁아. 나는 이제 어쩌면 좋지. 이제 너한테 기댈 수도, 안길 수도 없는데 네가 생각날 때마다 난 어떡해야 하지.






*






동혁은 잠깐 편의점에 다녀오는데 예진과 마주쳤다. 깜짝 놀래켜주려고 연락도 없이 오고 있었다는 예진은 밖에서 이렇게 마주치는 것도 우리가 인연이라 그런가 봐- 하며 웃었다. 인연. 인연이라, 그렇게 따지자면 인연은 자신과 여주 아닐까. 동혁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예진의 되물음에 웃으며 그런가- 하며 대답했다. 동혁의 집으로 향하는 중에 예진이 동혁의 팔에 팔짱을 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동혁이 살짝 당황했지만 티는 안 냈다. 예진과 만나는 사이가 맞는데 동혁은 예진과의 스킨십이 불편했다.





예진은 모든 일에 긍정적이며 밝은 사람이었다. 예진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예진의 그 밝은 기운 덕분에 웃을 정도로 좋은 사람. 가끔 볼 때마다 항상 웃고 있길래 그냥 웃음이 많은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였던 둘이 어떻게 이런 사이가 된 거였을까. 그날은 같이 회식을 했던 날이었다. 동혁은 평소에 담배를 안 피우지만 술을 마시면 가끔 담배를 피웠고 회식 중에 잠깐 빠져나와 담배를 피우고 들어가니 동혁이 앉아있던 테이블에 재무팀 팀원들이 섞여있었다. 회식이 파하고 멀쩡한 동혁이 술에 취한 직원들을 차례로 택시를 태워보냈고 그 직원들 중 예진도 있었다.





그날 감사했다는 말로 커피를 사겠다며 예진이 먼저 다가왔고, 어쩌다 보니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예진은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고 가족과의 사이도 화목해 보였다. 나쁜 일은 한 번도 안 겪어본 사람 같았다. 동혁의 눈에는 그런 예진이 신기했다. 게다가 누가 봐도 자신을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는 예진을 보며 동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먼저 만나자고 한 거였고 그래서 여주에게 정리하자고 했다. 여주와 멀어지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여주와 만나면 하는 일들은 일반적으로 여자친구인 예진과 해야 할 일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예진과 데이트를 할 때면 동혁의 머릿속에 항상 여주를 떠올렸다.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예진아. 미안한데 나 오늘 약속이 있는데."


"아, 정말요? 언제 나가야 되는데요?"


"지금 바로 준비하고 나가야 돼."





말하는 걸 까먹었다. 갑자기 잡힌 약속이라. 미안. 택시 불러줄게. 예진과 함께 집에 들어온 동혁은 갑자기 급한 약속이 생겼다는 핑계로 예진을 돌려보냈다. 차에 있을 여주 때문에 마음이 급해졌다. 다시 주차장에 내려와 아까 여주의 차가 있던 자리로 가봤지만 텅 비어있었고 동혁은 바로 휴대폰을 꺼내 여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연결이 되지 않아 삐소리 후 소리샘으로...





하지만 신호음만 길게 들려오다 여주의 목소리가 아닌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봤지만 이번에도 여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 여주야..."





대체 어디를 간 거야. 동혁은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헤집었다.






*






꽉 막힌 답답함에 여주는 결국 혼자 술을 마셨다. 술 아니고서는 이 답답한 마음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큰 VVIP 룸에 여주 혼자 앉아 술을 마시는데 울리는 벨소리. 보나마나 또 동혁이겠지. 아까부터 동혁에게 계속 전화가 오는 중이었다. 안 받으면 그만할 법도 한데 계속해서 오는 전화에 여주가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은 아무 하고도 만나기 싫었다. 여주는 전원을 아예 꺼버릴 할 생각으로 휴대폰을 들었지만 지금 오는 전화의 발신자는 재민이었다. 입술을 말아물며 망설이던 여주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재민의 목소리.





"...응."


- 여주야. 언제 갔어?


"...급한 일이 생겨서. 미안."


- 간 줄도 모르고 한참을 찾아다녔잖아-





위스키 생각난다고 해서 같이 마시려고 했는데. 그 말에 여주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응? 왜 웃어 여주야? 그 웃음소리를 들은 재민이 왜 웃냐고 물어왔다.





"...아무래도 다음에 마셔야 할 것 같은데?"


- 여주야. 너 지금 술 마셨어?





살짝 풀린 여주의 목소리에 재민이는 여주가 술을 마셨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주가 다른 한 손으로 술잔을 들어 흔들었다. 달그락-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초콜릿에 위스키 마시는 건 아니지만 재민이 너도 올래? 여주의 말에 재민은 한 쪽 어깨를 올려 휴대폰을 지탱하고 겉 옷을 챙겼다. 





- 여주야. 왜 혼자 마시고 있어.


"같이 마실 사람이 없으니까."






- 거기 어딘데. 나 지금 바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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