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제 평가 항목에 대한 교수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학생들은 교수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리고 오늘 개강 파티에서 무엇을 하며 놀지 생각했다.


“여러분, 조별 과제 조는 홈페이지에 올려놓았습니다. 각자 본인 조를 확인하시고, 팀원들과 주제 결정해서 이번 주 내로 제출하길 바랍니다. 한 조당 다섯 명씩 배정되어 있으니 자료조사, PPT 작업, 보고서 작성, 발표 등으로 역할 분담해 주세요. 그리고 보고서 작성 시 역할 분담 내용도 함께 기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명심하세요! 편승하는 학생은 점수 없습니다.”


윤은 서희에게 몸을 붙이고 속삭였다.


“김규택 교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게 편승이래. 지훈 오빠가 그러는데 작년에 팀 과제에 참여 안 하고 요령 피웠던 사람들 다 D 나왔대. F보다 더 잔인하다는 D. 그때 D 받은 학생들이 교수님한테 찾아가서 울고불고 매달렸는데, 교수님이 완전 냉정하게 안 된다고 하셨대.”


서희가 동그랗게 모은 입술을 내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윤은 다시금 서희 곁에 몸을 붙였다.


“그리고 김규택 교수님, 한국인 최초로 IMF에서 근무하신 분이래. 월스트리트에서 부와 명예를 쌓으실 수도 있었는데, 인재 양성 차원으로 한국에 들어오셨대.”


서희는 윤을 보며 너는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느냐 물었고, 윤은 서희를 보며 너는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르느냐 되물었다.


“이런, 중요한 이야기가 빠졌군요.”


교수는 한쪽 옆구리에 책을 끼우고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수업 인원이 육십칠 명인데 다섯 명씩 조를 짜다 보니 피치 못하게 두 명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교수는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한 차례 헛기침을 했다.


“마지막 14조는 두 명 입니다. 물론 해결해야 할 과제 양은 다른 조와 동일합니다.”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어떤 학생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또 어떤 학생들은 옆 친구와 눈을 마주치며 설마를 반복했다. 교수는 혼돈에 빠진 학생들에게 손 흔들어 인사하고는 유유히 강의실을 나갔다. 곧이어 곳곳이 마구잡이로 웅성거렸다. 짐 챙기는 윤의 손도 덩달아 빨라졌다.


“야야, 서희야, 설마... 우리가 그 두 명 안에 들어가진 않겠지?”

“설마, 랜덤으로 다섯 명씩 뽑아서 만들어진 조만 열세 개야. 당연히 1조부터 13조 안에 들어갈 확률이 높지.”

“그렇긴 한데, 그러다 14조가 되면.”

“그리되면...”


서희는 강의실을 나가는 진혁의 뒷모습에 눈을 고정한 채 아무 말이나 뱉었다.


“그땐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죄인의 마음으로 깊이 반성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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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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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 화면을 보는 서희와 윤은 얼음땡을 기다리는 애들처럼 숨도 쉬지 않은 채 눈꺼풀만 한 번씩 차례로 깜빡였다.


“... 서희야.”

“응...”

“왜... 그랬니. 왜 나라를 팔았니.”


서희는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모니터를 향해 헛웃음을 뱉었다.


【 14조 : 이진혁(00학번), 김서희(02학번) 】


순간, 조금 전 출석 부르던 상황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 자네가 김서희? 」


지금 돌이켜보니, 저 문장은 ‘김서희’를 부르는 게 아니라 ‘김서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개강 전부터 조가 정해졌던 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서희의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서희는 발신 번호도 확인 않고 얼 나간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김서희 학생인가요?

“네.”

-저는 경제학과 김규택 교수님 조교입니다.

“네... 네?”


초점 없던 서희의 눈이 순식간에 번뜩였다.


-교수님께서 지금 김서희 학생과 면담 원하시는데, 혹시 지금 교수님 연구실로 올 수 있나요?

“네? 지금이요? 아, 네, 네.”


서희가 ‘네’를 반복할 때마다 윤은 앞에서 계속 ‘왜, 왜’ 거렸다.


-그럼 이십 분 후에 교수회관 앞에서 뵙겠습니다.

“네, 네네.”


서희는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귀에 대고 ‘음’소리를 길게 냈다. 대학 생활하면서 지도 교수님이 아닌 분의 면담 호출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김규택 교수님은 한국인 최초로 IMF에서 근무하신 저명인사 아니신가. 그런데 그런 분이 나를? 왜? 서희는 미간에 바짝 힘을 주었다. 아직 조 구성도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당최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일단 대답을 하긴 했는데 현실 감각은 휘발되고 없었다.


“왜, 왜, 왜, 왜, 무슨 일이야.”


윤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서희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윤아.”

“응!”

“내가 진짜 나라를 팔았... 아니다.”


서희는 아무렇게나 나오는 말을 멈추고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아아, 김서희! 왜, 왜, 말을 하다 말아. 무슨 일인데? 아, 빨리! 나 궁금해 죽어.”


윤이 호들갑을 떨면서 닦달하는데도 서희는 전생을 반성하는 건지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건지, 말없이 먼 곳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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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회관에 도착해 조교 뒤를 따라가던 서희가 힐끔 뒤를 돌아보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윤이 서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입으로는 연신 '잘해'를 반복했다. 서희는 무심결에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엇을 잘하라는 건지.


조교가 연구실 문을 열자, 서희는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김서희입니다.”

“오오! 서희 양, 어서 와요.”


서희가 고개 들자 소파에 앉은 교수와 직사각형 모양의 낮은 탁자, 그리고 교수 맞은편에 앉은 진혁이 차례로 보였다. 서희는 입을 다문 채 속으로 말했다. 레전드... 다. 서희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작동 오류 난 기계처럼 문 앞에서 주춤댔다.


“서희 양, 어서 들어와요. 오느라 고생했지요?”

“아닙니다.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영광이라! 그렇게 말해주니 내가 더 고맙네요. 자자, 다리 아플 텐데 어서 이쪽에 앉도록 해요.”


교수는 진혁의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서희는 교수의 손끝을 따라 자신이 앉을 자리와 이미 앉은 진혁을 빠르게 훑었다. 찰나에 윤에게 들은 모든 이야기가 떠올랐다. 민진 건설, 수석, 장학금, 취미는 SAS. 서희에게 진혁은 아는 데 모르는 사람, 모르는 데 아는 사람이었다.


서희는 진혁과 두 뼘 정도 떨어진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곧이어 커피를 가져다준 조교에게 묵례하고 잔을 들었다. 은은한 향이 마음에 들었다. 커피 향이 아니라 옆에서 흘러오는 향이. 집중해야만 느껴질 정도로 연한 향기였는데, 주제와 상관없는 것들을 연이어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 남자는 무슨... 향수를 쓰는 걸까.


“조 구성원 보고 많이 당황했지요?”

“솔직히 조금 당황하긴 했습니다. 두 개 조는 구성원이 여섯 명이 될 거라 예상했는데, 두 명만 별도로 조가 되어서요.”


진혁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교수의 질문에 차분하게 답했다. 묵직하면서 나긋한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저런, 저런, 이거 미안하게 됐어요! 당황했다면 사과할게요.”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진혁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가슴 높이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서희도 엉겁결에 진혁을 따라 손을 들었다가 얼른 내려놓았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실은 내가 박 교수에게 두 사람 이야길 전해 들었어요. 두 사람 다 수석 입학생에, 지난 학기 성적도 우수한 그런 훌륭한 경제학도 들이라고.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단순한 호기심이 생기지 뭔가요. 이 둘이 함께 과제를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하는...!”


교수는 개구진 표정을 하고서 메트로놈처럼 빠르게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혹시 조 구성원 보고 수강신청 취소할까 봐 걱정한 까닭도 있고, 또 내가 두 사람의 과제 결과를 기대하나 그대들은 절대 부담 갖지 말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랍니다. 진혁 군, 서희 양, 못해도 좋으니 부디 최선을 다해주세요. 하하하!”


서희와 진혁은 교수의 천진난만한 웃음 앞에서 눈동자만 또르르 움직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조원이 두 명이라 자료 찾으려면 손이 부족할 듯해서 내가 준비해 보았어요.”


교수는 만면에 미소를 띄고서 교수실 문 측면 공간에 마련된 회의용 원형 테이블과 그 위에 놓인 책 더미를 가리켰다.


"아아, 내가 하고 싶어 한 일이니 너무 고마워하진 말아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무제한으로 여기 연구실을 써도 좋아요."


서희는 조용히 코를 훌쩍였다. 벌써 코피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두 사람은 안면이 있나요.”


교수의 물음에 서희와 진혁은 고개 저으며 아니라고 했다. 교수는 마치 자신이 결혼식 주례사가 된 것 같다면서 즐거워하더니, 마주 본 양손을 구부리며 어서 인사하라고 재촉했다.


“안녕하세요. 이진혁입니다.”

“말씀 많... 처음 뵙겠습니다. 김서희입니다.”


진혁과 서희의 어색한 첫인사였다.






*


교수회관 앞에 앉아 서희를 기다리던 윤은 수신자 부담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K대 여신에게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하는 겁 없는 인간은 지구상에 딱 한 명뿐이었다.


‘임지훈’

중학교 1학년이었던 윤을 아침 등굣길마다 불러 세워놓고 명찰, 치마 길이, 타이 등등의 항목으로 아낌없이 벌점 카드를 날렸던 구현 중학교 선도부 선배.


윤은 전활 받자마자 틱틱 거렸다.


“아, 오빠 너는 왜, 또!”

-와... 이윤, 너 진짜 섭섭하게 이럴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오빠한테 이러면 안 되지. 작년 내 노고를 벌써 잊은 거야?


작년 이맘때 도영과 이별한 윤은, 아침에는 '사랑 때문에 죽는 이 없다, 세상에 반은 남자다'를, 점심엔 '도영이를 죽이네 마네, 미국을 가네 마네'를, 저녁엔 나긋한 목소리로 '그와 함께한 추억이 많다, 그가 행복하길 바란다'를, 새벽엔 울면서 '도영이 없이 못 산다'를 반복했다. 한 마디로 그냥 ‘미친年’이었다. 그때 지훈은 이 미친年을 데리고 다니면서 밥 먹이고 술 먹이고 머리카락 잡아주고 업어주고 집에 데려다 놓기를 반복했다.


-알지? 내가 그때 입영통지서를 보고 웃었어.


지훈의 발언에 윤은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별소리 안 하는 걸 보니 저도 양심은 있는 모양이었다. 윤은 급하게 비음을 끄집어냈다.


“아,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중요한 순간인데 전화가 오니까 그러지.”

-무슨! 지금 내 전화보다 중요한 게 뭔데?


윤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친구가 지금 김규택 교수님 연구실에 레전드 선배와 함께 있다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진혁 형이랑 서희가 지금 같이 있다고?

“어! 내가 연구실 문 열렸을 때 봤다니까!”

-진혁 형이랑 서희가 정말 같은 조란 말이야? 게다가 조원이 단 두 명? 우와...! 우... 와...! 대에박! 진짜 대박!


지훈은 수화기를 붙잡은 채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아니! 이런 조선 역사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을! 내가 군대에서 전화로 들어야 하다니! 으아! 윤아, 나 벌써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나 이제 너한테 하루에 세 번씩 전화할 거야. 넌 전할 이야기 없으면, 예측이라도 해서 말해 줘야 해.

“오빠, 나 이윤이야. I’m profit! 그런 걱정은 접어둬.”

-아무튼, 우와... 만약에 서희랑 진혁 형이랑 맺어지면 진짜 대박 사건이다. 아, 그럼, 그럼...


한참 신나 하던 지훈이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왜.”

-아냐.

“뭐가 아냐.”

-그냥 뭐든 아냐.

“오빠 너, 뭐 있네.”

-아냐, 없어, 절대 없어.

“어차피 말할 건데 그냥 빨리 말해.”


지훈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빠르게 태세 전환했다.


-그게... 태호가 면회 왔었어.

“태호 선배가? 왜? CPA 시험 끝났대?”

-응.

“어떻게 됐대?”

-1차 합격하고 경험 삼아 2차 응시했는데, 결과가 좋은가봐. 시험 한 번에 통과할 거 같대.

“아......”


윤과 지훈은 지금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만약 태호가 돌아오면 서희와 다시 잘될 수 있나, 시험 때문에 끊어진 인연이니 시험 끝나면 다시 이어지는 인연인가, 하는 생각.


-태호가 서희 안부를 묻더라.

“그래서 오빠 너는 뭐라고 했어.”

-뭐... 그냥 잘 지낸다고 했지. 남자친구 없이, 혼자, 잘.


윤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인상을 썼다.


“아이참! 오빠 너는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니. 태호 선배가 괜히 기대하면 어쩌려고.”

-아니, 난,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 말했지.

“그러다 만약에라도 서희가 다른 사람이랑... 혹여 진혁 선배랑 잘 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대화가 잠시 끊겼다. 두 사람 다 이건 자신들이 선택할 문제도, 나설 문제도 아님을 잘 알았다. 그저 친구로서 누구도 불행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태호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윤과 지훈은 서희와 태호를 응원했었다. 태호의 꿈은 홀어머니가 도배 일을 그만두고 아픈 허리를 치료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윤과 지훈은 태호의 시험 또한 응원했어야 했다.


“오빠”

-응.

“난... 만약에 서희에게 새로운 인연이 생긴다면, 그 사람이 태호 선배는 아니었으면 좋겠어. 어찌 됐건 태호 선배랑은 한번 엇갈렸잖아. 엇갈린 인연은 그대로 두는 게 맞을지도 몰라.”


자신과 도영이 그랬듯이.

마음만 먹으면 도영의 소식 정도는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윤은 끝내 그러지 않았다.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같은 이유로 잘 지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윤의 이야기를 듣던 지훈은 대답 않고 발끝으로 삼각형만 그렸다. 지훈이 어느 한 사람만 응원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건 누구보다 윤이 더 잘 알았다. 그들 모두 지훈이 아끼는 친구들이었다. 서희도, 태호도, 그리고 한때의 도영도.


윤은 눈치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이번엔 또 뭐가 필요해서 전화했어?”

-아, 맞다.


지훈의 목소리가 금세 밝아졌다.


-윤아, 나 바디로션 필요해. 보습용으로.

“다른 건?”

-정성 담긴 손 편지.

“진짜 가지가지 한다.”


윤은 조금 전 전화 받았을 때보다 더 툴툴거렸다.


-어허! 너 자꾸 이러면 오빠 서운하다고 했다. 중학교 때 미술실 뒤에서 장미파 애들한테 머리끄덩이 잡혀서 빙빙 돌고 있던 너랑 서희를 구해 준 사람이 누구지?


윤은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 이야긴 사골이야? 도대체 언제까지 할 거야?”

-너 아들 둘 낳을 때까지.

“오빠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바디로션 대신 벽돌이 가는 수가 있다.”


이래놓고 바디로션 사고 손 편지를 쓰는 윤이었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돼....... 」




평범한 습작생. 더디고 어설픕니다. 빠른 전개를 원하는 분께는 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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