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아이는 뻐근해져 오는 어께와 팔 근육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결코 멈추지는 않았다. 아픔보다 먼저 흐르는 시간의 감각이 훅훅 느껴져 멈출 생각 따위는 하지도 못하였다. 이미 종이는 많이 쌓였지만, 더 많이 쌓여야 할 더미를 보며 그는 속도를 늘였다. 지금은 생각할 시간도 부족하였다.

종이는 거칠기 짝이 없었다. 사한당에서 쓰는 종이를 생각하자면 이것은 차마 이름을 붙이기도 창피할 수준이었다. 붓이 계속 망가져 또 다시 낡은 붓을 갖고 오기를 몇 번 반복하였다. 까칠한 표면에 가뜩이나 낡은 붓으로 휘갈기듯 써내리니 버텨줄 리가 없었다. 다행히도 이 서고 안에는 종이도 붓도 많았다. 다 상태가 좋지 않긴 하지만, 이런 대량으로 찍어내기에는 적합한 재료들이었다. 아이는 이미 몸이 외워버린 글씨를 또 한 번 써내었다.

“슬슬 노을이 집니다. 조금만 더 열심히 버텨주세요.”

나루는 그를 채근하였다. 사실 충분히 많았지만 왕자는 많이,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하였다. 어쩌면 이미 그가 만족할 분량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루의 입장에서도 이 일은 실패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장이라도 더 필요하였다.

그렇게 해는 져가고, 마침내 밤이 내려앉았다. 나루는 불을 지피고서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만. 되었다.’라고 말하여 그를 멈추게 하였다. 그는 마지막 글자를 써내고는 붓을 멈추었다. 마치 단 한 번도 숨을 쉬지 못하였다는 듯 크게 호흡을 반복하며 그는 나루에게 물었다.

“항아님, 그런데 이를 어찌 뿌리실 생각이옵니까?”

상당히 많은 양의 종이가 쌓였다. 종이 한 두 장이야 매우 가벼웠지만, 몇 백장은 넘어 보이는 이것을 그녀는 들 수 없었다. 거기다 종이를 뿌리려면 지붕에 올라가야 할 텐데, 치마차림으로는 고작해야 담이나 넘겠지.

“어떻게든 해야지요.”

“제가 하겠습니다.”

아이의 제안에 나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째서 그런 위험한 일을 스스로 떠안겠다는 것일까. 이미 충분히 위험한 구역에 들어선 그에게 더 많은 짐을 떠안기기는 미안함이 서렸다. 아이도 그런 나루의 의중을 알았는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항아님께서는 ‘그 분’을 모시지요. 저는 정말로 많은 은혜를 졌습니다. 물론 그분께서 의중이 따로 있으셨다 하더라도 저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으실 은인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저 역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마땅히 할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날쌥니다. 물론 항아님께서 많은 일을 하셨겠지만, 바깥에서 살아온 세월은 제가 더 길지 않습니까.”

나루는 이 일에 누군가가 또 끌어들여 지는 것이 썩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보다는 둘이 나았다. 자신이 가진 이 무게감을 누군가가 덜어준다면 그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알았습니다. 꼭 몸조심하시구요.”

그는 종이 뭉치를 보자기로 싸매었다. 단단히도 묶어 어찌 풀지 의문이었지만 곧 그는 자신의 춤에 든 날붙이를 보였다. 나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 쪽의 잠금을 풀었다. 그러자 그는 배웅을 할 새도 없이 문 밖으로 달음박질하며 사라졌다. 벌써 어둠은 길거리에 쫙 깔려 그의 모습은 금새 사라지고 말았다. 나루는 그 모습을 보고는 돌아서 다시 서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엉망이었다. 이를 도하가 보면 분명 심기가 불편하겠지. 나루는 빠르게 치워놓고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저기 먼지투성이인 것은 원래 그런 터라 어쩔 수 없어 간단히 흩어진 종이와 책이라도 제 자리에 넣고자 하였다. 그녀는 늘 해오던 실력대로 정리를 시작하였다. 정신없긴 하였지만 그래도 해오던 일인지라 의외로 금방 끝나버렸다. 이대로라면 늦더라도 궁에 오늘 들어갈 수는 있겠다 싶었다.

하루 종일 숨도 쉴 새 없이 달리고 일하였던 나루는 잠시 앉아서 쉴까 하였다. 일각만 딱 앉아서 기력을 채우고 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였다. 그녀는 잠시 몸을 벽에 맡기었다. 피곤은 한 번에 몰려왔다. 그제야 그녀는 이 서고 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서고는, 도하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정확히는 이 장소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이곳에서 시우를 만나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어찌 그리 좋기에 그런 것일까.

그녀는 이 서고의 풍경을 처음 보았다. 볼 일을 없었으니까. 이곳은 정말 그 둘만의 전유물과도 같았다. 두 사람의 세계에 자신은 끼고 싶지도 않았고 실제로 그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이런 다급한 일만 아니었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도하는 왜 황자의 시해를 이토록 막고 싶어 할까. 그는 권력에도 관심이 없었고 약간의 의리는 있었지만 그 전에 현명한 사람이었다.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스스로 벌일 생각보다는 어서 궁을 나가 다른 방법으로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뭔가, 그 답지 않았다. 그저 한 사람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한다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막고자 한다면 어떤 의미가 있는 사람일까. 나루는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리 떠올리고 또 떠올려 보아도 시우 외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시우, 나루는 그 이름을 생각하고서 눈을 번뜩였다. 단 한 번도 연결 시켜볼 생각을 못했지만 가장 맞아 떨어지는 지점이었다. 시우가 황자라면, 이 모든 이야기가 설명되었다.

도하가 처음부터 알면서도 황자인 것조차 나루에게 숨긴 것인지, 아니면 도하조차도 모르고 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다면 도하가 그토록 황자를 살리기 위하여 애쓰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는 생각보다도 시우를 더 많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때서야 나루는 자신이 문을 잠그는 것을 까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하야?”

나루는 입을 틀어막았다. 시우였다. 몇 번 스쳐 지나가듯 본 것이 다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워낙 여려 단 번에 각인되었다. 무엇보다도 상전이 아끼는 자를 아랫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제 정신은 아닌 일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다가왔다. 이를 피할 길은 없었다.

“너는...”

시우의 기대하였던 얼굴이 싹 굳어버렸다. 왜 네가 여기 있지. 딱 그 표정이었다. 아마도 시우역시 나루를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매일 같이 도하를 불러대는 여자아이. 아마도 같은 집의 종이라고 생각할 그의 머릿속을 그녀는 예상하였다.

“왜 네가 여기 있니?”

평온한 목소리지만 어딘가 위화감이 서려있다. 나루는 그런 감각을 잘 알았다. 가끔 연회에 불려 갈 때면 다른 궁의 아이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와 같았다. 웃고는 있지만 어딘가 엷게 서린 차가움. 그녀는 그 것을 느낄 때마다 오한이 서렸다. 지금 드는 오한은 나인들에게서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왜 몰랐을까. 그는 정말로 황자였나보다. 도하의 앞에 있을 때는 그런 기운을 전혀 내뿜지 않았다. 정말 천진난만한 소년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귀족 집 자제 정도이겠구나 하고 의복으로 예상하였다. 그는 궁에서의 도하처럼, 아니 그 보다도 더 고고하였다. 처음으로 느끼는 위압감이었다. 도하에게서 그런 무게를 느낀 것이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올 해는 정말 운수가 제대로 말렸구나. 나루는 평생 믿어 본 적 없는 사주를 생각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 봐두기라도 해 볼 것을.

“왜 네가 여기 있냐고 물었는데.”

약간 더 싸늘해졌다. 나루는 어쩔까 고민하였다. 대답을 할 방법이 없었다. 도하가 무언가를 시켜서 왔다고 하기에는 그는 자신과 도하가 친구사이라고 알 고 있었다. 그가 열쇠를 내준 상황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도하는 시우와의 둘이서 나눠 가진 열쇠가 서로에 대한 신의의 증표와도 같다고 늘 나루에게 자랑하였다. 시우에게도 이 공간은 그만큼이나 의미있는 곳이라고 들었다.

분명 그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텐데. 나루는 이 상황이 도하의 잘못도, 자신의 잘못도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괜히 그를 원망해보았다. 일단은 무어라도 답을 해야 했으나 도저히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아 무심코 손이 올라갔다.

“그것이!”

부욱. 콩. 또르르. 처음의 소리는 나루의 소매 자락이 찢어지는 소리였다. 두 번째 소리는 그 틈으로 구슬 하나가 떨어져 바닥 위를 구르는 소리였다. 그 구슬은 사우의 발에 톡 부딪혔다. 아 큰일이다. 저렇게 소중히 여긴 당잔대라면 분명 그를 준 사람도 정해져 있는데.

시우는 이번에 말이 없었다. 대신 그 구슬을 들어 올리고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구슬은 금이 가있었다. 꽤나 큼직한 것이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금이 있더라도 그 안에 갇힌 꽃의 정체를 못 알아보지는 않았다.

“도하게 네게 준 것이야? 이 당잔대를?”

그는 정말로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 차가움은 나루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실망이 서려있는 그의 말이 도하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것은 그, 마... 아니 도하가 제게 맡긴 것입니다.”

“열쇠도 맡겼고?”

시우의 시선이 향한 것은 상위의 열쇠였다. 나루는 이번에는 답할 수 없었다. 후자는 사실이었으니까. 왜 맡겼는지 설명할 수도 없는 이 노릇을 어찌 해야할까.

“도하가, 그 두고 온 것이 있다 하여. 걔가 오늘 바쁘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물건이 뭔데.”

없다. 있을 리가. 나루는 거짓말을 했고 시우에게 들켰다. 이미 그녀의 말에 신뢰가 없었다. 시우는 보이는 것을 믿을 것이고 나루는 항변을 해도 그에게 신뢰를 줄 수 없다.

“그래. 도하에게는 열쇠도 당잔대도 그렇게 가벼운 것이었구나.”

그는 더는 화내지 않았다. 대신 체념하였다.

“혼자 있고 싶은데. 나가 줄래?”

“아, 네. 그 그럼 평안한 밤 되십시오!”

나루는 급히 열쇠를 쥐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미 시간도 늦었고 더는 시우에게 할 말도 없어 그 자리에 있기란 견디기 어려웠다. 그렇게 한참을 뛰고 또 뛰었다. 어쩌면 낮보다도 더 빨리 뛴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나루의 앞에 한 종이가 내려앉았다.

‘皇子弑害期犯 是國內之有’

거리가 웅성거렸다. 사람들이 그 소란에 튀어나오고. 그들은 종이를 보며 큰 소리를 내었다.

“이 글자가 뭔 뜻이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 있소?”

“여여, 그 황자를 시해하려는 사람이 이 나라 안에 있다고 하는데?”

“뭐? 아이고 흉해라. 이것이 뭔 말이야.”

사람들의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많은 인파를 몰았다. 나루는 더 빠르게 뛰었다. 최대한 멀어져야 하였다. 괜히 이 중에 끼어있어 조사를 받거나 했다가는 큰 일을 치러야 할 것이었다. 도망치듯 뛰어 마침내 궁담의 근처에 도착한 나루는 이번에야 말로 풀릴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쥐고서 걷기 시작하였다. 곧 커다란 궁의 출입구가 보였다.

그 곳에는 이상궁이 오지도 가지도 못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서 나루를 발견하자말자 뛰어왔다.

“어딜 갔다 이제 오는 게야. 네가 늦어서 궁의 아이들 모두 걱정하고 있었다.”

“그... 찾는 것이 늦어져.”

“그래, 구슬은 찾았고?”

아. 나루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 금이 가버린 구슬은 이미 시우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시우는 텅 빈 서고 안에서 우뚝 서있었다. 그녀가 나가고 나서도 아무런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제가 준 소중한 마음들은 도하의 손을 떠나버리고 없었다. 그에게 자신은 한없이 가벼운 존재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어, 잠시나마 무언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잔인하게도 제 손에 쥐어진 깨진 구슬만이 있었다. 제가 도하에게 준 푸른 당잔대가 깨진 구슬로 돌아왔다. 도하가 그녀에게 이 꽃을 준 것일까. 그래서 그 아이는 이 꽃이 예쁘다고 또 그것을 구슬로 만든 것일까. 그가 아무렇지 않게 타인에게 꽃을 쥐어주었을 생각을 하자니 가슴 한 구석이 쓰라렸다.

시우는 한참 서있다 서고의 책장을 더듬었다. 어느 책 하나에 손이 닿았고 그는 그것을 꺼내어 열어보았다. 책은 단 번에 어느 쪽이 열려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곳에는 곱게 마른 보랏빛 당잔대가 끼워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떼어내 제 손바닥위에 올려보았다. 한없이 가벼웠다. 분명 받을 때만해도 묵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아무런 무게도 없다고 생각할 만큼이나 가벼웠다. 그 안에 의미를 담은 것은 자신뿐이었다.

차라리 계속 모르고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아프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저 이곳에 있는 동안 도하가 저를 소중히 여기고, 제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만을 가진 채 그렇게 살아갔다면 아마도 평생 그는 그 마음만으로도 살아갈 가치를 느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이 정체모를 통증도 없었겠지.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원래라면 도하가 오지 않는 날은 찾지 않을 곳이었다. 도하에게는 서책을 다 읽어 가지 않는다 하였지만, 사실은 그 뿐만은 아니었다. 도하가 없는 이 서고는 시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와 이곳에서 만난다는 사실이 의미를 부여해줄 뿐이었다. 그는 그래서 더더욱 서고를 찾지 않았다. 오로지 그와 만나는 장소만으로 남겨두고 싶었기에. 책은 어디서든 읽을 수 있지만, 그와 자신만의 특별한 만남이 이뤄지는 곳은 이 서고 단 하나였다.

그렇게 평소대로 도하를 만나는 날에 왔으면 됐을 것을. 시우는 책갈피를 만들려고 꽂아둔 당잔대가 갑자기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상궁은 밤에 늦었다고 외출을 막아섰지만, 그녀의 시선을 따돌리고서 저녁 길을 달려왔다. 차라리 오늘 가져가 책갈피를 만들어 곁에 두는 것이 훨씬 나았다. 어차피 그 정도 놔두었으면 충분히 말랐으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남은 것은 상처뿐이었다.

그는 당잔대를 바닥에 버렸다. 이미 그 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도하의 애정이 담겨있지 않다면 그것은 한낱 들꽃이 될 뿐이다. 그라는 존재가 꽃이 되어 의미가 있었지, 꽃 자체로는 어디에나 널리고 심지어 그렇게 향을 품지도 않아 쓸모없다. 아니 사실은 그 어느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도 도하가 아니면 시우에게는 그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는 쪽이 더 맞는 말이었다.

바짝 마른 당잔대는 하늘하늘 바닥을 향해 추락하였다. 시우의 마음이 곤두박질치는 속도에 비하자면 너무도 느렸다. 한참을 있어서야 바닥에 떨어진 꽃은 그렇게 먼지와 함께 쓰레기가 되어 의미가 사라져 버린 서고의 일부가 되었다. 시우는 그것을 일부로 짓밟는다던가 하는 짓은 굳이 하지 않았다. 의미가 없는 것에는 화를 낼 필요도 없으니까.

그에게 남은 것은 제게 되돌아 온 깨진 당잔대 구슬뿐이었다.

의미를 상실한 공간은 몸서리치게 싫었다. 먼지투성이에 낡은 책들뿐인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서고. 시우가 더는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불편하여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의미는 없어도 추억은 있다. 그 추억은 하나씩 의미가 지워져 그저 평범한 기억이 되었다. 그 감각이 싫었다.

시우는 서고를 나왔다. 문을 잠그지도 않았다. 어차피 저런 낡은 서고 누가 드나든다고. 그의 생각에 약간은 나쁜 마음이 섞여들었다. 누군가가 도둑이 든다 해도 더는 상관이 없었다. 이미 다른 사람이 드나들었는데, 또 누군가가 그 곳에 들어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을까. 시우는 서고를 뒤로하고 길을 걸었다. 잠시 어디로 가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눈앞이 흐릿하다. 무언가가 축축한게 느껴지고서야 그것이 눈물임을 깨닫고 잠시 멈춰서 손으로 닦아냈다.

그의 손에는 깨진 구슬이 꼭 쥐여져 있었다. 그것도 버려야 했건만 버릴 수가 없어 결국 손에 쥐고 말았다. 제일 미운 것임에도 그것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꼭 품는 것은 제 안에서 만들어낸 추억들을 결코 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까지도 아마 놓지 못한 채 질질 끌겠지. 그런 자신이 약간 추하다고도 생각 들었다.

그는 다시 발을 내딛었다. 어쨌든 돌아가야 하는 것은 현실이었으니. 제 아픔에 마냥 저려서 길바닥에 자리를 펴고 앉을 수는 없었다. 전상궁이 자신을 찾고 있을 터였고 그 역시 이런 곳에서 눌러 앉아 울 사람은 아니었다. 몇 걸음을 그렇게 걸었다.

펄럭거리며 밤하늘에 무언가가 뿌려졌다. 아마도 종이였을 것이다. 무언가 타다닥하는 소리는 사람의 뛰는 소리가 분명하였다. 정체모를 종이가 날라 온 방향은 지붕 위였다.

흔한 일이었다. 민중에게 무언가를 알리고자 하여 이런 금언을 종이에 적어 뿌리는 일. 그러나 최근 화홍은 그럴 만한 일이 없었는데. 마침 시우의 앞에도 종이는 떨어졌다.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저처럼 종이를 주워 그 내용을 확인하였다. 대게는 글을 몰라 무슨 뜻이냐고 서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허나 시우는 그 글자를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고 멍하니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읽을 수밖에 없었다.

“황자시해기범 시국내지유”

황자를 시해하려는 범인이 이 나라 안에 있다.

그는 그 글을 잠시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다시 읽어도 모르겠다. 이 나라에 황자는 자신뿐이다. 아니 제국과 주변국을 통틀어 황자는 단 둘이었고 그 중 하나는 황태자가 되기 위하여 연수국에서 배움을 갈고 닦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단 하나. 은시우 자신뿐이었다.

그가 속으로 내뱉은 질문은 ‘왜?’였다. 이 나라에 자신의 적은 없다. 그를 적대시 하는 이는 황궁의 사람들뿐이었다. 특히 황제. 그가 아니고서야 은시우를 감히 살해하고자 하는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나 할까.

그리고서야 시우는 이 문장의 의미를 깨달았다. 분명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그 범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고, 그 명령을 내린 사람도 누구인 지는 더더욱 선명하였다.

시우는 이번에야말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길 한가운데서 종이를 붙들고 웃고 있는 자신을 사람들은 슬슬 피하였다. 엮이고 싶지 않은 게지. 상관없었다. 누군가가 수상히 여겨 관아에 신고한다 하여도 어차피 자신은 이 이야기의 당사자였으니.

황제가 황자를 죽이려 한다. 간단한 문장이 시우의 머릿속에 써내려졌다. 참으로 짧은 글이었지만 그 의미는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제 아버지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임을 시우는 상기시켰다.

그는 시우를 단 한 번이라도 아들로 보았을까. 아니 확실히 잠깐은 불쌍히 여겨준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이 아니었다. 그저 책임감에서 나온 동정 따위였다. 그것을 부정이라 착각하였고 시우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다섯 살의 일이었다.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딱 5년 만에 다시 제 착각을 깨닫고 고통을 감수하려던 찰나, 마치 ‘너는 사랑받을 수 없단다.’하는 저주가 내려진 것과 같이 황제가 이렇게 각인을 시켜주었다. 시우는 이 상황이 마치 누군가가 꾸며 놓은 것만 같아 모든 것이 우스워졌다.

죽이라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왜 지금껏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일까. 아마 그럴 필요조차 없다고 느꼈겠지. 어쩌면 연수국 안에서 이황자의 편을 드는 무리가 생겼을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황제의 알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제 목숨은 위협에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겠다는 삶을 살아서 무엇을 할까.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주위는 시끄러워져만 갔다. 사람들의 입에서 황자라는 단어가 오르내리고 소리는 거세어져 갔다. 그들은 모를 것이다. 황자를 가장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황제라는 것을. 이 일을 밝히려는 이는 참으로 정의로운 이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시우만큼은 그를 미워하였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또 아프지는 않았다. 자꾸만 몰라도 되었을 일을 굳이 알게 되어 마음이 흉터투성이가 되는 제 꼴이 흉하였다.

“도하야.”

마치 습관처럼 내뱉은 말에 시우는 쓰게 웃으며 다시 집어삼켰다. 도하는 사실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묻지도 않았다. 그는 말해주지도 않았다. 세상을 보여주어도 자신은 보여주지 않는 그가 저를 정말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아마 도하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순간이라도 그는 제게 무슨 일이냐고 묻기 보다는 화제를 돌렸을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세상을 파고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오늘은 모든 것이 엉망인 밤이었다. 시우는 제 전부를 잃어버렸다. 정말로 자신을 누가 시해할 생각이라면 그 계획을 실행할 날은 오늘 밤이면 좋겠다. 내일도 일어나서 이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일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어이, 거기 괜찮소? 아까부터 멍하니 서있던데. 아픈가?”

말끔하게 차려 입은 사람이 시우에게 말을 걸었다. 행색이나 말버릇으로 보아 아마도 어느 집 도련님인가 보았다. 밤이슬 맞으며 놀러다니는 인간이야 흔하였다. 시우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어주었다. 그의 얕은 관심은 시우를 귀찮게만 만들었다.

“그, 그 손에 쥔 거. 황자시해범 이야기 맞지? 세상 말세야. 황자를 시해한다니.”

시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말만 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연수국에 다녀 온 내 친구 말로는 황자가 미움을 받는다는 소문이 있단 말이오. 혹시 황실에서 그런 일을 벌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시우가 관심을 보이기는커녕 아무런 대답도 없자 그는 흥이 떨어졌는지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렸다.

“세상 참. 정말이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 든다는 것인데 참 흉한 일이오.”

그는 그렇게 종지부를 찍고는 자기 갈 길을 다시 가버렸다. 시우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절망은 오랜만에 다시 시우를 집어삼키고서 뱉어내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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