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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 Ho! (2)



 죽겠네.


 칠흑같이 검은 머리가 물기에 가라앉아 있었다. 떨어지는 물기를 닦아내고는 소파에 몸을 던지자 푸욱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토니 스타크, 그의 두 개의 곧은 눈썹은 어째서인지 상당히 기울어져 있었다.


 지금이 한 일주일 째인가. 같은 수업을 들어도 종이 치기가 무섭게 교실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바로 뒤쫓아도 교실 문 밖에 발을 딛는 순간, 그 애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짓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까 신기루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난 귀신을 쫓고 있는건가? 한 번 옆에 앉은 이후로는 일부러 구석 아니면 누군가의 사이, 그것도 자기랑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앉는 바람에 말을 걸 수도 없었다. 사실 전에는 어떻게 앉았는지 본 적 없어서 옆에 앉은 이후로 그런 건지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과학 동아리도 찾아가 봤으나 당분간 미팅이 없어서 만날 일이 없다고 한다. 부장, 미셸이었던가? 피터만이라도 지금 불러줄 수 있냐고 하자 싹 거절당했다. 그럼 언제 만나는지라도 알려달라 하자 우리 부원도 아닌데 내가 왜 알려주냐고 하기에 당장 가입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러자 신청서를 가로채가더니 하는 말이,


 '평소라면 환영인데, 피터한테 물어보고 할게. 너 최근에 되게 스토커 같거든.'


 뭐라 반박을 하려 입을 열었다가 할 말이 없어서 그대로 입 다물고 나왔다. 제기랄. 맞는 말이어서 분하다. 하자고 한 적도 없는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네. 이러다가 달리기 실력이 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달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복도에서 피터 파커의 이름에서 'ㅍ' 만 들려도 그 쪽으로 달려가서는 어딨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어, 피터 여기 있는-없네!?"


 -따위였다. 두어번 네드라는 애한테 방금 전까지 너랑 있던 파커는 어디 갔냐고 물어봤지만, 저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와서 결국에는 물어보기를 관뒀다. 대답을 줄 생각이 없으면 빠르게 포기하는게 낫다고 판단했다. 매번 식은땀을 흘리면서 눈도 못 마주치고 모른다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하지만 오늘은, 오늘은 정말 닿을 수 있었는데! 마침내 교문을 박차고 나가는 피터를 발견하고 손을 뻗는 중이었는데, 뒤에서 저를 잡는 손에 덜컥 걸려버린 것이다. 덜그덕 덜그덕 닫혀버린 문을 지금 당장 열어도 피터는 없을 것이다. 깊은 빡침을 누르고 입꼬리를 부들부들 올리며 뒤를 돌아보자,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누가 만면에 미소를 띄운채로 저를 보고 있는게 아닌가. 


 "오늘 축구 시합 잊은 거 아니지?"


 토니는 욕이 나오려 근질거리는 입을 미소로 짓누르며 빨리 가자고 등을 밀었다. 내가 알겠다 한 약속일텐데 안 갈 수도 없고, 아... 정말 한 뼘 거리였는데. 그렇게 가라앉은 기분은 공을 터질듯이 뻥뻥 차도 풀리지 않았고, 그렇게 집에 와서 덜 마른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헤집고 있는 중이었던 거다. 시계를 보자 8시. 부모님 둘 다 오늘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었고, 오늘은 그냥 멍하게 보낼 생각이었다. 혼자의 시간- 얼마나 좋아. 근데 자꾸 머릿속에 피터 파커가 둥둥 떠다녀서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 생각의 시간으로 하지 뭐. 파커, 피터 파커. 사실 일주일동안 말도 못 붙이고 관찰만 하다보니까 겉핥기를 섬세하게 한 정도로만 그 애를 알게 되었는데, 그 겉핥기 수준에서는 피터 파커는 첫 인상이랑 똑같다고 느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나쁜 쪽이 아니라는 건 느꼈지만 보면 볼 수록 괜찮은 사람의 예를 들라고 하면 피터 파커를 들 수 있다. 사실 이제는 비밀이고 뭐고 우선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더 든다! 그런데 말을 걸 기회가 도대체 나지를 않는다고.


 그래서 오늘 등교하려던 차에 자비스한테 물어봤다. 요즘에 궁금한 애가 있는데, 도저히 친해질 수가 없는데 방법있냐고. 그러자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시면 더 잘 찾아볼 수 있을거라는 대답이 돌아와서 인공지능의 한계인가 부정하며 나왔다. 나와서는 학교에서 심리학에 관심있다는 애한테 물어봤더니. 역시 방법 대신에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나는 질문이 돌아와서 그대로 책상을 엎고 돌아왔다. 물론 엎은 책상은 치워줬다. 관심이 있는 거지 좋아한다는 게 아닌데 다들 왜 이래.


 사실 상당히 티가 나는 제 행동에 그 아이에게 내 인상이 어떻게 박혀가고 있는지 약간 불안하기는 한데, 그래도 지루하지는 않으니까. 그렇게나 느리고 지루하던 시간이 그 애에게 신경쓰기 시작한 후부터는 너무 빠르게 가서 문제일 정도였다. 그리고 사실...이건 약간의 억지일 수도 있지만, 날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도망치는게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니까. 애들 말로는 원래 그렇게 사라진댄다. (이것도 4달 전부터)


 본점으로 다시 되돌아가자. 몸에 관한 건 아무리 봐도, 피터 파커는 별다른 운동은 안 하는 듯 싶었다. 운동에 관련된 거는 모든게 어색했다. 하지만 날라다니듯이 달리는 속도도 그렇고, 최근 체육시간에 풋볼 연습을 한 번 한적이 있는데, 공을 던지는 폼은 엉망진창이지만 그 엉망의 상태로도 운동장의 절반을 가로지르게 날리고는 양 볼을 감싸쥐고 뜨악하는 표정을 짓더니, 누가 봤나 확인이라도 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꼴은 수상해도 너무 수상했다. 그러더니 그 다음부터는 멀리 던져봤자 10m 정도로 던지는게 아닌가.


 체육시간에는 말 붙일 수 없냐고? 조별 활동을 시작하는 바람에, 그것도 난 1조고 피터는 8조인 바람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는게 지금 상황이다. 점심시간도 마찬가지. 크지도 않은 식당인데 당최 저가 갈 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도저히 가까워질 기회가 보이지 않아서 도대체 운명이 아닌 사람이 있다면 이 케이스겠다 싶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기회는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다.



-



 아야.



 토니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에 스위치라도 켜진듯 저를 따라다니던 무리에서 괜찮냐는 말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목을 삔 탓이다. 욱씬거리는 발목을 매만지는데, 그 중에 한 마디가 귀에 박혀들어왔다.


 "보건실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평소라면 무시할 정도의 부상이었지만, 다음 교시 체육. 피터랑 대화도 못 해볼 지루한 조별활동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제안은 제법 달콤하게 들려왔다. 그래야겠다. 몸을 일으키자 같이 갈래? 하는 말들이 다시 한번 쏟아져 나왔지만, 발목 다쳐서 수업 안한다고 전해달라고 남기고 타닥타닥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엘레베이터가 있기는 하지만, 조금 더 아프게 만들어서 수업을 못 할 정도로 하기 위함이었다.


 드르륵-

 보건실 문을 열자 쨍쨍한 햇빛에 데워진 노곤한 공기가 저를 반겼다. 약간의 약품 냄새는 덤. 보건실은 온통 노란 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한가가 가득하던 복도와 이질적일 정도였다. 히터라도 틀어뒀나. 조용한 분위기에 토니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들어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보건실에 처음 와보는데, 침대마다 커튼이 쳐져있는게 신기했다.


 그런데...왜...아무도 없지?


 보건 선생의 자리로 보이는 책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저것 늘어져 있는 걸 보니 잠시 자리를 비운 듯 싶은데. 약간의 당황스러움에 주변을 둘러보자, 바로 옆에 있던 침대의 발치에 누군가 가지런히 벗어둔 듯한 신발이 있었다. 커튼이 쳐져 있어서 사람이 있는 줄 몰랐는데. 토니는 조심스럽게 몸을 틀었다. 혹시 여기서 쉬고 계신가? 조심스럽게 커튼 자락을 잡았다.


 "선생님?"


 차라락 소리를 내며 열린 커튼 사이로 드러난 사람은 흰 베개에 흰 담요를 덮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익숙한 뒷통수였다. 갈색 곱슬머리. 그럴리가 없지.


 하지만 토니는 커튼을 닫기 전에, 한 번 확인이나 해보자 싶었다. 


 "피터?"


 이름을 부르자 그 뒷통수가 대답이라도 하듯 고개를 비트는데, 그 덕에 얼굴이 보였다. 커튼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커튼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맞네, 피터. 예상치 못한 만남에 손이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놀라움, 그리고 이어진 반가움. 침대에 걸터앉기 위해 발을 딛던 순간, 발목에서 찌르르한 고통이 올라왔다.


 아윽!


 작지 않은 비명에 토니 자신도 놀라 바로 입을 막았으나 이미 피터는 눈을 뜬 상태였다. 피터는 몇 초 정도 상황파악이라도 하듯 저를 보더니 눈이 튀어나올듯 커져서는 등에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이 자리에서 튕겨올랐다. 그러고는 잠에서 덜 깨 잠긴 목소리로 제 앞에 있는 사람을 재차 확인했다.


 "스타- 스타크?"


 토니는 중심을 못 잡고는 침대에 걸터 앉아서 저를 부르는 피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튼을 걷은 탓에 햇빛이 쨍하게 들어오는데, 햇빛에 비친 피터는 정말, 몇 번을 봐도 예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냥 정 가는 얼굴이네 했는데 계속 보다보니 이젠 사랑스럽다, 예쁘다는 수준으로 변했다. 토니는 피터를 바라보느랴 정신이 없었지만, 시선을 받는 피터는 그 순간이 굉장히 어색했기 때문에 얼이 빠진 토니를 다시 한 번 불러야만 했다.


 "스타크?"

 "응? 아, 깨워서 미안."

 "괜찮아. 근데 뭐...문제 있어서 온거야?"

 "문제야 많지..."

 "음?"

 "발목 삐어서 왔는데, 선생님은 어디 계셔?"

 "보건 선생님은 점심 드시러 나가시는 것 같던데, 적어도 내가 잠들기 전에는 그렇게 들었어."

 "아, 그래? 어떡하지."

 "괜찮으면 내가 해줄까? 보건실 자주 와서 왠만한 건 다 알거든. 삔 거 정도면 잘 할 수 있어."


 토니는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건 기회야! 지금 피터를 단둘이 만난 것도 기적같은데, 대화까지 하고 있고 심지어 치료까지 해주겠단다. 근데 자주 온다고? 일단 대답부터!


 "나야 좋지."


 그래. 피터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덮었던 이불을 젖혔는데, 한번도 본 적 없는 반팔 차림이었다. 체육복도 긴팔, 평소에도 항상 후드나 체크셔츠를 입고 다녔던 것 같은데. 뭐 벗어뒀나, 하지만 그건 지금 문제가 아니다. 반팔 때문에 보인 팔이 문제지!


 "이게 실례가 아니라면 좋겠는데,"

 "너 맞고 다녀?"


 피터의 팔은, 양 팔은 피로 묻어 갈색으로 변한 반창고와 피멍들로 뒤덮혀 있었다. 제 말을 듣자마자 흠칫 자기 팔을 보더니 빠르게 이불을 끌어당겨 가리는게 아닌가. 지금 이게 뭐야?


 "어...아니?"

 "아니는 무슨. 누가 한-"

 "스타크!"


 옷을 들어 올리려던 손길을 잡아챈 피터가 놀란 듯이, 화난 듯이 소리를 쳤다. 잠깐이었지만, 배에도 큰 상처가 있었다. 들어올려서 보인게 아니라, 셔츠가 희어서 붉고 푸른 부분이 비쳐 보였다. 자신의 손목을 뿌리친 피터가 화난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실례인 것 같은데. 무례했어."

 "미안. 내가 잘못했어."

 "응. 남의 옷 들추지 마. 그리고 이미 다 나았으니까 괜찮아. 반창고들만 아직 안 뗀거야."

 "미안, 미안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그래."

 "미안."

 "여기 앉아서 기다려. 붕대 가져오게."

 "미안해-"

 

토니는 멀어져가는 피터의 뒤에 대고 손을 모아 한번 더 사과했다.


 "...미안하다는 말 세번이면 충분한 것 같아."

 "응!"

 "찾았다. 어느쪽 발목 삔거라고?"

 "오른쪽. 계단 내려가다가."


 붕대와 파스 등 이것저것을 품에 들고온 피터는 약품들을 바닥에 늘어놓고는 무릎을 꿇더니, 오른쪽 신발을 벗기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능숙...하네?


 "이런거 자주 해봤나봐?"

 "어...그렇지 뭐. 많이 부었네. 아프겠다."

 "피터."

 "응? 내 이름 알아?"


 피터는 감던 손을 멈추고 저를 올려다 봤다. 정확히는 알고 있냐는 말보다는 기억하고 있냐는 의미의 질문이었다. 그 질문을 받은 토니는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는 제 입을 딱히 막지는 않았다.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널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뭐? 왜?"

 "너가 어딜가도 없었는데. 오늘은 운 좋은 날이네. 여기 오면 만날 수 있는거야?"

 "음...아니. 와도 오래 안 머물러. 오늘은-됐어. 신경 쓰지마."

 "왜 다치는 건지는 안 알려줄거야? 아파보이던데."

 "다 됐습니다."

 "안 알려줄거군. 고마-"


 몸을 일으키려던 토니는 다시 침대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피터가 살포시, 아주 살포시 저의 발목을 잡은 탓이었다. 그러고는 신발을 신겨주었다. 토니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모르겠는 상황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 토니가 일어나려했던 것을, 토니의 반응을 알아챈 피터는 역으로 함께 당황해버렸다. 그 탓에 귀가 발그스레 달아올랐지만, 쨍쨍한 햇살에 비쳐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피터가 말하기를, 


 "발목 다쳤잖아."


 그 말에 토니는 뒷목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 괜스레 뒷목을 만지작 거렸다. 자꾸 몸이 달아올라 따스하던 보건실이 이제는 후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원래 이러는 앤가? 왜 이렇게 달콤한 짓들만 하는거지? 짧은 초 단위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속눈썹을 내리깔고 있는 피터가 예뻤다. 멍청한 토니 스타크, 속으로 계속 예쁘다 달콤하다 사랑스럽다 하면 뭐해.


 "너 예쁘게 생겼어."

 "너도."


 세상에. 이 무슨 방어와 동시에 플러팅이람. 쟤는 아무런 생각 없이 말하는 걸텐데, 아니 사실은 생각없이 말 하는 건지는 나도 모른다. 피터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면 원래 이런 면이 있는 애였나?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쑥맥-여하튼 토니는 이 기회에 더 가까워지자는 생각을 했다. 이미 다 알긴 하지만, 자기 소개를 해야겠지.


 "이름, 피터 파커 맞지?"

 "응. 피터 벤자민 파커."

 "오, 풀네임까지? 나는 앤소니 에드워드 토니 스타크야."

 "너 같은 이름이네."

 "칭찬이지? 토니라고 불러줘. 스타크는 싫거든."

 "알-알았어. 스타크."

 "토니. 불러봐. 토-니."

 "토-아니, 적응할 시간 좀 줄래..."


 토니는 대답 직후 이제 가보겠다며 몸을 일으키던 피터의 옷자락을 잡고 다시 앉혔다.


 "지금 가도 시간 애매할텐데 그냥 나랑 있자. 쌤한텐 빠진다고 말 한 거 아니야?"


 말했지...그다지 같이 있고싶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저를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쉽사리 거절할 수 없었다. 피터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토니는 침대에 몸을 늬였다. 침대에 누워서 삐딱하게 저를 보는데, 참 잘생기기 어려운 각도에서도 여전히 잘생긴 걸 보니 확실히 엄청난 얼굴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피터였다. 토니는 조심스레 자신이 열었던 커튼을 다시 닫고 있었지만, 피터는 제 얼굴을 보던 탓에 눈치채지 못 했다. 별 상관은 없지만.


 피터가 수업시간이 남았음에도 떠나려던 이유는 어색할 것 같아서였는데, 확실히 처음 몇 초간은 어색했지만 정말 끊이지 않고 질문하는 토니의 덕인지 탓인지 어색함은 빠르게 지나갔다. 시시콜콜한 질문들을 던지고 받고 했는데, 그 중 넌 평소에 뭐하고 지내느냐는 질문에는 양 쪽 다 대답을 못하는 바람에 어물쩡 넘어갔다. 한 쪽은 비밀이라서, 한 쪽은 너무 많아서.


 "아."

 "응?"

 "그 때, 체육 지각한 날 도와줘서 고마워. 생각해보니까 말을 안했네."

 "별 말씀을. 근데 너 몸 좋더라. 운동해?"


 순간 사레라도 들린 듯 쿨럭거리던 피터는 다시 몸에 열이 올랐다. 달궈진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눈치챈듯 싶었다. 토니가 저의 손을 내 뒷목에 올리면서 뜨겁다고 말하는 걸 보니. 토니의 차가운 손이 목에 닿자 움찔 고개를 다시 돌린 피터는 토니의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차가운 손. 장난스런 눈빛. 그 때 그 상황이 머리 속에 생생하게 재생되는 바람에 더 민망해졌다. 아직 안 잊었구나. 좀 잊지. 저 놈이 나의 약점을 찝었으니, 나도 카드를 꺼내서 주제를 바꿔야지 싶다.


 "...근데 너가 나 쫓아다닌다는 거 진짜야?"


 어읔-켁.

 100% 미셸이다. 망할 자식.


 "알, 알고 있었구나."

 "내가 감이 예민하거든. 근데 요즘 자꾸 불안한 느낌이 나서 달아나면 나중에 애들이 어김없이 너가 날 찾았다고 하더라? 지난 일주일 동안. 일부러 그런거야?"


 도망- 도망 친건 아닌데 도망친건 맞구나...본능적으로. 거의 동물적인 감이네.

 실제로는 1초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토니는 수십번을 갈등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아니면 대충 넘겨야 하나? 그래, 넘겨봤자 좋을 것이 없다. 토니는 솔직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인생에 그다지 흔치 않은 순간이었다.


 "쫓아다녔다기 보다는, 찾은게 맞지."

 "어,으...왜? 왜 나를?"

 "너에 대해 알고 싶은 점들이 있었거든."

 "뭐?"


 "정확히는 겨울방학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토니는 자신의 말에 피터의 얼굴이 굳었다는 걸 눈치챘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제야 말해서 미안한데, 너 몰래 물어보고 다녔어. 근데 너가 4달 전부터 갑자기 달라졌다는 말들이 엄청 많아. 2학기 시작 후에"

 "네 몸은-"

 띠리리리리-


 종? 진짜로? 최고의 타이밍이네.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가려 다시 입을 연 토니는 자리에서 일어난 피터의 뒷모습에 떨떠름히 말을 삼켰다. 피터 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실례였구나. 토니는 여지껏 자신에게 무례함과 무례하지 않음의 선을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다. 만날 일도 드문 아버지는 만나게 되면 화만 내고, 어머니는...항상 아버지를 이해하라는 말만 하시니까.


 지금도 피터가 스승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단시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토니 스타크의 인생 처음으로 이건 무례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 것일 뿐이다. 내가, 스스로 내가 잘못한 거라고 생각해본 적 있나? 토니는 순간 머리라도 한 대 맞은 듯이 눈 앞이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빠르게 정신을 챙겼다. 피터가 먼저 가지 않고 문가에서 저를 기다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둥지둥 일어난 토니는 다리를 약간 절며 피터에게 다가가서는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갈까?"


 보건실에서 같이 나오는 길, 복도는 바글바글하고 시끄러웠지만 토니와 피터는 붙어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잃을 일은 없었다. 토니는 왜인지 제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빨리 뛴다고 생각했다. 기분 탓이라고 느꼈지만, 실제로 빨리 뛰고 있었다. 그 순간, 얼마 전 들었던 자비스와 심리학에 관심있다던 아이의 목소리가 머리 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토니의 와글거리는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제 존제를 강하게 외쳤다. 정말 뜬금없는 것 같은 생각이었는데, 틀렸다는 의심도 들지 않아서 이상했다. 그래서 음성으로 변환되어 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다분히 고의성이 보이는 실수. 지금이 아니면 얘를 또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섣불렀다면 섣부르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고민의 시간따위는 없었다.


 "난 널 좋아하나봐."


 그 순간부터 시간은 프레임 수가 낮은 영상처럼 흘러갔다.


 찰칵. 점심을 먹기 위해 교실에서 뛰쳐나오는 아이들.

 찰칵. 피터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던 토니.

 찰칵. 그리고 그런 토니의 눈을 마주하는 피터.

 찰칵. 올라가는 토니의 입꼬리

 찰칵. 피터의....?


 토니의 얼굴은 무거운 짐덩어리를 내려놓기라도 한 듯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설명이 되지 않던 자신의 피터에 대한 집념과 관심, 그리고 알 수 없이 간질거리던 속은 쌓이고 쌓여 1000피스짜리 퍼즐을 이루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1000피스 이어야하지만, 999피스 밖에 없는 퍼즐이었다. 그 중 999피스는 앞에 말한 설명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토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왜" 라는 1 피스. 내가 왜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걸까. 이 모든 것들을 하면서도 저도 이유를 모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값을 넣어보다가 설마하고는 넣어본 "좋아한다" 는 정말 완벽하게 그 자리에 들어맞았다! 그 한 단어의 피스는 마침내 거대한 퍼즐을 완성시켰다. 내가 피터 파커를 좋아한다. 그것을 인식하자 민망해지는 기분이 들어 헛기침을 서너번 뱉어냈다. 언제부터? 그냥, 보다보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피터는 온몸의, 특히 얼굴의 근육을 제어할 수 없었다. 고백이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질문형이었지만 고백이 아닐리도 없는 멘트. 이미 그 멘트가 입 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지도 2초가 지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 지나면 어색해지고, 이제 반응이 나와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피터의 몸은 뇌의 과부하를 불러올 그 말을 듣자마자 자가방어 수단으로 이성을 놓아버렸고, 2초간 뇌는 지나치게 식어있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필터링 없는 순도 100%의 본심이 튀어나오게 된 것이다. 물론 고백에 답할 때에는 본심을 답해야 하는게 맞지만, 어휘 능력이 떨어진 인간의 입에서는 어떻게 해도 좋은 말이 나오기는 어렵다는거, 당연 하지 않은가?


 "뭐"

 "뭔, 개소리야?"


 그래, 망했군. 복도는 시끄러웠지만, 둘 사이에는 죽음같은 정적만이 흘렀다. 잠시 후, 다시 이성을 잡은 피터는 저가 한 말에 저가 놀라 바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그게 내뱉었던 말을 주워담을 수 있게 해주지는 않았다. 피터가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못해 뻥긋뻥긋 거리던 차에, 토니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실례인 것 같은데. 무례했어."


 자신이 했던 말을 따라하며 비아냥 거리는 토니를 보자 피터는 겉잡을 수 없이 등줄기가 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잠깐, 지금 쟤가 날 좋아한다고 했고, 난 지금 거기다가 뭔 개소리냐고 한 거지? 미쳤니 피터 파커? 그럼 지금...쟤는… . 피터는 꿀꺽 소리가 나도록 마른 침을 삼켰다. 당연히 화났지.


 "미안, 미안해! 멍해져서..."


 급하게 시동이 걸린 몸은 손 발 이것저것 다 휘저으며 어버버 방금 자신의 망언을 취소하려고 애를 썼다. 몸과 말의 끔찍한 부조화는 오히려 악영향을 주는 듯 싶었지만 멈출 수가 없어서 피터는 입술을 꾹 물고는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토니는 그런 피터를 보면서 약간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난생처음 생쥐에게 머리끄댕이를 잡히며 조종당하는 요리사의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겁에 질린 토끼같기도 했다. 갈색 곱슬머리와 속눈썹이 정신없이 깜빡깜빡 흔들리는 것을 보는 것에는 질리지 않을 자신 있지만, 저 의미없는 말들을 언제까지 듣고 싶지는 않았다. 토니는 피터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고는, 물었다.


 "좋아서 아니면 싫어서?"

 "잠깐-"


 "피터!"


 인파를 뚫고 달려온 호명에 둘 다 고개를 돌렸다. 미셸이었다. 또. 토니 왈, 오늘따라 방해꾼이 많은 느낌인걸? 미쉘은 길쭉길쭉한 다리로 성큼 다가오더니 토니와는 마주보고, 피터는 약간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무시의 의미가 아니라 키 차이 때문이다.)


 "오늘, 3분 후부터 과학 동아리 미팅 있는 걸 잊은게 아닐거라 믿을게."

 "어, 맞다. 지금갈게."

 "과학 동아리? 나도 가도 되는거지?"

 "너는 왜?"

 "신청서 작성했잖아."

 "아, 미안. 접수 안 했다. 다음에 오시죠."


 응? 으응? 둘이 아는 사이던가? 무슨 이야기 중인거지? 토니가 동아리에? 피터는 마치 두 재규어 사이에 껴있는 사슴이 된 기분이었다. 잡아먹히는게 아니라,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미다. 하지만 토니가 제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으아아. 어쩌면 미셸이 저를 도우러 온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던 방금 보다는 낫지만, 저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도 궁금하지만, 어쨌든 난 여기서 나가야겠다고요.


 마침 둘은 이제 저는 뒷전으로 미뤄두고 서로 으르렁 거리며 싸우기에 바빴다. 정확히는 미셸은 거의 0도의 포커페이스를 유지 중이었지만, 열받은 토니가 덤비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씩 커지는 소란에 복도를 지나가던 몇몇의 시선이 멈춰서기 시작하자, 정말로 안절부절해진 피터는 잠시 이 싸움을 중재해야하나 싶었지만, 이내 토니가 미셸을 상대하다 제 옷자락을 놓은 것을 눈치챘다. 잘들 이야기 하세요. 피터는 문워크라도 하듯 뒷걸음질로 학생들 속에 섞여들어갔다. 두 사람이 피터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챈건 약 5분 뒤의 이야기이다.


 "피터 파커!"


 토니는 미셸을 따라서 미팅에 갔지만, 피터는 결국 동아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피터가 동아리에 가입한 이후 최초의 결석이었다.



-



 "메이."


 왜 그러니? 거실에서 메이가 답했다.


 메이는 출장에서 돌아왔다. 피터는 최근 일주일 간 몸이 계속 위험요소를 예민하게 감지하며 도망다닌데다 (스타크라는 걸 안 후에도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제 들킬 염려 없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시간도 끝났기 때문에, 푹 가라앉아있는 상태였다. 이미 눈가에 그림자가 자리잡은 상태에서 오늘은 보건실에서 좀 쉬려고 했더니, 스타크가 나타나서는 이제 영문도 모르겠는 고백까지 받았다.


 "느그-즈흔트 그븍흤으으"


 피터의 목소리는 베개에 묻혀서 뭉게져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거실에서 물을 마시던 메이는 답답한 나머지 피터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분 안 좋은 일 있었니?"

 "누가, 저한테 고백했어요."


 쿨럭 쿨럭거리며 사레에 들린 숙모의 반응에 피터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몇 번 고백받아본 적이 있을 때마다, 반응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메이는 침대에 다가오더니 걸터 앉았다. 그제야 피터는 베개에서 얼굴을 떼고 메이를 마주했다.


 "거의 모르는 애인데...처음 대화해본 것도 저번 주에요."

 "제일 근본부터 보자. 넌 걔를 좋아해?" 

 "잘 모르겠는데...좋아하는 것보다도 걔가 왜 절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걔는 인기도 많고, 그냥 평생 마주칠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나쁜 애가 아닌 것 같으면 일단 같이 지내봐. 아마 그 애는 오래 전부터 널 봐왔을텐데."

 "그래요?"

 "인기 많은 애인데 널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네."

 "근데 피터, 그거 알아? 넌 분명 사랑 받을만한 가치가 있어. 너는 안에 반짝이는 보석이 심어져 있는 것 같은 아이거든."


 메이는 쭈그리고 앉아있던 피터의 가슴 언저리를 쿡쿡 찌르면서 말했다.


 "한 눈에 보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만약 그 보석을, 네 본질을 본다면 이미 누구라도 너한테 넘어가버리게 되거든. 그리고 그건 널 오랫동안 봐온 사람들만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해. 뭐, 그 오랫동안이 일주일이 되지 못하란 법은 없잖아?"

 "오 메이...고마워요."

 "사실을 말한 것 뿐인걸. 사랑의 표출 방법은 몰라도,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섣부름이라는 건 없어."

 "근데 걔가 자꾸 성가시게 해서... 자꾸 제 개인적인 정보를 취조하려 든다고요."

 "음, 표출 방법이 잘못된 친구인 것 같은데. 차라리 그냥 팍 터뜨려보는 건 어때?"

 "터뜨린다고요? 뭐...걔가 알고 싶어하는 걸 말해주라는 거에요?"

 "그 말 그대로야. 정보만 원하던 쓰레기라면 금새 떠날테고, 너를 정말로 좋아하는 거라면 계속 네 곁에 있을거야."

 "으음...고마워요."

 "잘 되면 이야기 해 줘야 해! 그리고 베이징에서 사온 과자들 가져가서 먹어라. 그 애한테도 줘 봐."


 메이는 그렇게 방을 나갔다. 짐을 마저 풀어야 하는 모양인 듯 했다.

 정보를 줘 버리라고? 스파이더맨이라는 걸, 그래서 이렇게 다치고 또 금새 나아버린다고... 그래서 몸도...를 어떻게 말해! 그건 말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 한다 쳐도, 만약 정말 정보만 얻어서 악용하거나 소문을 퍼뜨리면!? 내가 걔의 무얼 믿고?


 아니 잠깐...그런데 내가 개소리라고만 하고, 답은 했던가?



-



 이 시각, 토니의 집. 오전 12시.


 토니는 소파에 녹아있듯이 누워서는 와인을 물처럼 마셔대면서 한 잔을 비울 때마다 그 잔을 깨뜨리고 새로 꺼내는 매우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중이었다. 아마 아버지나 어머니가 봤다면 미쳤냐며 제 뺨을 갈겼겠지만, 지금은 집에 없잖아. 어차피 비싼 잔도 아니고. 왜 이러는지 감히 이유를 짐작하려 들지는 말아라. 짐작할 필요도 없이 뻔하게 실연에 부리는 투정이니까. 정확히는 대놓고 거절의 답을 듣지도 못했다. 하지만 고백하고 아무 말 없이 2시간 이상을 넘어간다면, 그건 그냥, 끝이지. 토니는 애초에 뭔 개소리냐는 말을 들었던 것은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사실 차인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에 누군가 자신을 거부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기분이 나빴는데, 이번에는...뭐라 하더라. 아주 익숙한, 거의 평생을 함께 해온 무언가이었는데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단어를 떠올린 순간, 토니는 비우지도 않은 잔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붉은 와인이 이리저리 튀면서 스며들었다. 슬픔.


 "슬픔을 함께 해 왔다고? 웃기는 망상이네, 나 새끼야! 난 내 인생에 슬퍼한 적 없어."


 토니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채로 이중인격이라도 되는 듯 소리쳤다. 유리조각을 밟든 발든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자비스가 알림을 보냈다.


 [Sir,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자비스, 눈치 좀 키워. 꺼지라고 해."

 [눈치가 있으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피터 파커군입니다.]

 "뭐!? 왜? 걔가 내 집은 어떻게 안 건데!?"

 [도련님이 계속 파티를 열어서 미드타운 고등학교 내에서 이 곳을 모르는 사람이 더 적을걸요. 들여보낼까요?]

 "한 마디를 안지네...당연하지. 아니, 잠깐 바로 들여보내지는 말고, 복도에 있게 해."

 [팬티라도 입으시는게 좋겠네요. 옷을 준비했습니다.]

 "굳이 그 점을 짚어줘서 아-주 고맙다."

 [별 말씀을요.]


 토니는 완전한 자유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어쨌든, 앞으로 서빙된 옷을 급하게 챙겨입은 토니는 거울을 몇 번 보고는 복도로 걸어나갔다.


 "피터!"

 "스타...토니."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그것도 너가. 놀랐잖아."

 "별 거는 아니고...우선 들여보내줘서 고마-으아아아악!!!"

 "왜 그래!?"


 피터의 우렁찬 비명에 함께 놀라 펄쩍 뛰어오른 토니는 바닥에 내려앉는 과정에서 발바닥에서 통증을 느꼈다. 아. 아까 유리 조각 밟은 걸 신경썼어야 했나. 발바닥 무늬의 핏자국은 제가 걸어온 경로를 참 섬뜩하게도 알려줬다.


 "너, 너 발바닥 왜 그래? 페인트야!?"

 "아니...피. 나도 몰랐네."

 "미친...이걸 어떻게 모른건데...구급키트 없어?"

 "있지. 저기 두번째 서랍에."


 토니는 손을 들어 가리키면서 말했다. 상처를 눈치채자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게. 이걸 어떻게 몰랐지. 피터는 급한 마음에 토니를 풀석 앉혔다.


 "그 발로 서 있지마. 집에 아무도 없어?"

 "없어."

 "무슨...일단 응급처치만 하고, 병원가자."

 "난 괜찮은데. 그냥 베인거잖아. 피가 이렇게 보일 뿐이지. 그리고 난 너랑 같이 있고 싶은데."

 "멍청한 소리 하지마. 원하면 같이 가줄게. 어차피 혼자선 못 가잖아."


 피터는 어느새 꺼내온 구급키트를 덜그럭 거리며 유리조각들을 빼내고, 소독하고는 아주 단단히 발을 묶어버렸다. 낮과 마찬가지로 능숙한 솜씨였다.


 "아파... 살살 좀 해줘."

 "새벽이라 응급실가야겠네. 나 자전거 타고 왔는데 뒤에 타도 괜찮지? 아, 난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하루에 발을 두 번이나 다치고 뭐하는 거야. 가자."


 우다다 말을 쏟아내는 피터를 보며 생각했다. '아, 혹시 당황하면 말 많아지는 타입?'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무슨 꼴을 보려고. 자신을 부축하는 피터에게 녹아내리며 기대는 토니를 서게 하려고 반복하던 피터는 결국 성질이 났는지, 가만히 있으라며 자신을 업어버렸다. 힘이 무지 세네. 저를 업고 10m 가량을 달리고서는 지친 기색도 없이 자전거에 자신을 앉히는데, 셔츠 사이로 피터의 팔뚝이 보였다. 반창고들이 없었다. 팔의 멍도 없었다. 그런 상처에 밴드도 새거였는데, 정말 벌써 다 나았다고...?


 "너...팔에..- 반--...ㅊ...."


 말을 하려는데 목소리가 어눌하게 나왔다. 왜, 왜 이러지? 피터는 그런 저를 보더니 놀란 기색이었다. 거의 질겁한 정도로. 눈 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토니?ㅌ-니--세앙-에, 몸-왜이-렇게 뜨거-오 하느-니임-."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없다.



-



 "토니."


 헉. 토니는 호명에 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이 부신 와중에 앞에 피터가 보였다. 안도한 표정이었는데, 약간 화가 난 듯 하기도 했다. 피터. 몸을 일으키려는 자신을 피터가 저지했다.


 "사람 없으니까 조금 더 누워있어."

 "여긴 어디야?"


 멍청한 질문이었다. 뻔하지. 응급실. 벽시계는 어느덧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에 놀라 피터를 돌아보자, 한 숨도 안 잔 듯한 피터는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있었다. 목소리도 쉬어서 갈라져 있었다.


 "너 기절했었어. 도수 높은 술 처먹고."

 "뭐?"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짓으로 기절하고 응급실 왔다고."

 

 피터가 화났던 듯한 것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르렁거리듯이 화를 내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말을 하려던 순간, 피터가 제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너한테 찾아왔던건, 오늘 안에 뭐라도 대답을 줘야할 것 같아서 온 거였는데- 일이 커졌네..."

 "대답?"


 피터의 말에 눈에 생기를 띈 토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답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내 대답은, 지금은 대답 못 해줘. 내가 숨기는 것도 안 알려줄거야. 나는 아직 남한테 내 비밀을 알려줄 생각이 없으니까."


 "거절이라고 생각하고 싶다면 거절로 생각해도 괜찮아. 근데 나는 너에 대해 더 생각해보고 싶은 거야. 이게 내 대답."


 고개를 푹 숙인 토니를 보던 피터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말했다.


 "학교에서 보자. 진료비는 내가 냈어. 내 전재산이니까 갚아야 해."

 "응."


 그대로 등을 돌리고 나오려던 피터를, 토니가 멈춰 세웠다.


 "피터."

 "한 번만 안고 가면 안돼?"

 "이젠 놀랍지도 않네..."


 "딱 한 번만. 우리 서로 안아보면 좋아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안아달라고. 날 두고 갈거면 그 정도는 해 줘."


 피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노골적인 애정표현에 민망할 정도였다. 진료비까지 계산해줬는데 그냥 두고 가도 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저 베시시 웃는 미소를, 절대로 자신이 거절하지 못하게 하려고 짓는 표정을 보면서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피터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토니는 양팔을 쫘악 벌리고서는 기다렸다. 와, 이런 이미지인줄 몰랐는데. 정말...애같네. 나는 애한테 장단을 맞춰주는 거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심장은 빨리 뛰기 시작했다. 팔로 토니를 감싸안자, 토니도 팔을 착 감고서는 놔줄 생각이 없기라도 한 듯이 꽈악 쥐었다. 피터는 얼굴이 달아오르는게 느껴졌다. 실로 오랜만에 숙모가 아닌 사람과 하는 포옹이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별로 어색하지도 않았다. 저를 끌어안고 있던 토니는, 제 귓가로 고개를 틀더니 작게 소곤거렸다.


 "고마워. 피터."


 그렇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아주 낮아서 아주, 많이 간지러웠다. 피터가 간지럽다며 품에서 벗어나려하자, 토니는 그런 피터를 더욱 끌어안으면서 속삭였다. 난 좋은데. 진짜로 그만하라면서 품에서 빠져나온 피터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있었다. 잘 가라면서 뒤에서 손을 흔드는 토니를 무시하면서 병원에서 뛰쳐나오자, 얼굴에 닿은 새벽공기에 숨이 트였다. 자신을 끌어안던 손길이 너무 생생해서 아직도 끌어안겨 있는 느낌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생각했다. 페달을 아주 신경질적으로 밟고 있었다.


 웃기게도, 난 이 애를 고작 몇 번 보고는 좋아하는 듯 싶다.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을.





오랜만이에요.

소식: 사람들과 스파이더맨 트릴로지가 엄청 많이 수정되었습니다. 시간 있으면 다시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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