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이 시대를 재난 문자도 오지 않는 재난이라 일컬었고

그 부름엔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도시는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몰락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편도로 두 시간밖에 안 걸린다는 새로운 지하철도의 개회식을 앞두고 있던 사람들은 고작 두 달 만에 손바닥만 한 라이터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살해하게 됐다. 미미한 전류가 흐르는 작은 구멍 두 개와 그런대로 목은 축일 수 있는 한 모금의 액체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인간을 해치지 않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서로를 죽이게 만든다.

바이러스가 퍼지고 1년이 지났다. 가족과 친구를 포함해 그 누구의 행방도 단언할 수 없다. 단지 우리가 아는 건 이것뿐이다.

첫째, 우리는 <그들>을 <개>라고 부른다.

둘째, <개>에게 물리면 인간은 <개>가 된다.

셋째, <개>가 된 인간은 번식, 즉 전염의 욕구를 제외한 모든 의식이 휘발된다.

별첨1. <개>가 된 인간은 진화를 역행한다. 그것은 비단 지능, 행동, 속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넷째, <개>는 열에 취약하다. 그들의 주 활동 시간은 밤이다.






호흡양도




골목길 어귀에 있는 빈 가게를 털고 나왔을 때 태양은 이미 정수리 너머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식량을 챙기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이제 곧 <개들>의 시간이 올 거야. 누구의 입에서 뱉어진 것인지 모를 소리를 듣고서 우리는 무작정 뛰었다.

"민······ 저기 봐."

창우가 발을 뚝 멈추었다. 그의 시선 끝엔 우리의 거처가 있다.

"우리가 너무 늦었어······. 다른 곳을 찾아야 해."

엄밀히는 날뛰는 <개들>의 천국이 된 우리의 거처가.

이곳저곳 구멍이 나서 도저히 옷이라고는 할 수 없는 천가죽을 걸친 <개들>이 기어서 건물을 타고 오른다. 썩어문드러진 살갗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이거나 침일 진액이 건물 벽면을 적신다. 배수관을 타고 오르는 <개들>은 나무가 줄기를 뻗듯 여러 갈래로 갈라져 창문을 두들겼다. 쿵! 쿵! 쿵!

쿵! 쿵! 쿵! 심장이 뛴다. <개들>의 시간이 왔다. 사방 이곳저곳에서 퍼지는 기괴한 신음 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손끝만 살짝 맞닿은 창우에게서 전해진 온기에 손이 시리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온기를 품은 순간 서로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을 버리고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등에 맨 가방에서 통조림 캔이 부딪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챙! 쿵! 챙! 쿵! 챙! 쿵!

숨이 벅차고 골이 울린다. 눈앞에 구름이 낀 것처럼 앞이 뿌옇다. 다다를 곳이 없는데도 행선지가 있는 사람처럼 뛰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뛴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가늠이 안 갔다. 다만 절망스러운 것은 제법 뛴 것 같은데도 여전히 <개들>의 신음이 귓속을 파고든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달리자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미군 기지가 보인다. 미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철거되지 않은 건물이었다.

"하아, 하, 여기, 올라갈 수 있어?"

창우가 묻는다. 계속해서 숨을 고르는 걸 보니 창우를 데리고 더 달리는 건 무리란 생각이 들었다. 담의 마감이 엉성하기 때문에 담 자체를 오르는 건 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높은 담 위에 설치된 철조망이었다. 가시 철선을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가시철조망이 있는 이상 담까진 올라가더라도 그 이상으로는 진입이 불가할 것이다. 더군다나 나보다 체력이 약한 창우까지 있다

하지만 <개들>은 네발로 기어 활동한다. 그것은 곧 배수관처럼 타고 오를 것이 없으면 기어올라가지 못함을 의미하고, 그것은 다시 <개들>이 특수한 입구 없이는 이 기지 안으로 침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철조망만 없다면······

뛰기 버거워하는 창우의 손을 잡고 담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그때, 창우가 어딘가를 가리킨다.

"저기,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는 될 것 같지 않아?"

창우가 가리킨 것은 철조망의 이음새 부분이었다. 이음새가 녹슬어서 철조망이 약간의 틈을 두고 벌어져 있었다. 오래 전 버려진 이후 재개발을 앞두고 있던 녹슨 미군 기지의 허술함이 동아줄이 되어 내려왔다.

창우가 먼저 담을 올라갈 수 있도록 등을 대 주었다. 마감이 엉성해 약간씩 튀어나온 벽돌을 밟고 한참을 후들거리는 다리로 애를 쓰던 창우가 마침내 꼭대기에 다다르자, 나도 창우가 밟았던 곳을 따라 담을 기어올라갔다. 이음새는 다행히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로는 충분했지만, 둘이 있기엔 너무나 비좁았다. 철선이 찌르는 오른손과 오른팔뚝, 오른다리에서 퍼지는 따끔함을 애써 무시하고 서둘러 창우를 먼저 내려보내려는 순간,

휙.

눈앞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바람? 하지만 바람일 리 없다. 바람만큼 빠른 것이 간신히 얼굴을 빗나가 그대로 어깨에 박힌다

아악!

는 걸 자각하기도 전에 몸이 붕 뜬다.

그게 밑에서 누군가가 던진 칼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나는 이미 담에서 떨어져 땅바닥으로 처박히고 있었다. 떨어지는데 얼어붙은 창우의 얼굴이 시야에 쿡 박힌다.

그대로 고꾸라진 나는 쇠 파이프와 벽돌과 넘어진 과녁판이 있는 모래밭으로 추락했다. 모래에 메다꽂힌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숨을 쉴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버틸 만은 했다. 모래에 처박힌 몸도, 칼이 박힌 어깨도, 한참을 쉬지 않고 달려 팽창한 심장도 모조리 쓰리다. 토할 것 같다. 침을 삼키는데 모래맛인지 피맛인지 모를 비릿하고 짭짤한 맛이 났다. 다행히 엉망이 된 몸을 이끌고 담으로 기어갈 때까지 두 번째 칼은 날아오지 않았다.

담에 등을 기대고 앉자 미친 것처럼 뛰던 가슴이 잦아든다. 요동치던 시야도 서서히 초점이 맞춰진다.

"인간?"

그러자 달을 등진 사람이 보인다.

"어디서 왔어?"

손에는 내 어깨를 뚫은 단도와 같은 류의 칼 두 자루를 더 쥐고 있는 채였다.






호흡양도

1. 다정한 죽음을 바라는 이들(1)




두 손목을 옥죄던 밧줄이 풀린다. 우리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내 어깨에 칼을 명중시킨 남자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사람의 흔적 같은 건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기지 내부는 한산하고 음습했다. 간혹 벽면에 인간의 것인지 <개>의 것인지 모를 피가 눌어붙어 있었다.

한참을 걷던 그가 발을 멈춘 곳은 <의무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문 앞이었다.

의무실에는 세 명이 더 있었다.

이십대로 보이는 여자 하나와 그보다는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다른 여자 하나, 그리고 중년의 외국인 하나. 그들의 눈동자 세 쌍이 일제히 우리에게로 박힌다. 피가 흥건한 어깨에 부닥친 시선은 그대로 튕겨져나와 내 얼굴에 꽂힌다. 나를 보는 시선에서 적대감이 읽힌다. 그들은 우리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누구지?"

외국인이 제법 유창한 솜씨로 말했다.

"이방인."

"그걸 몰라서 묻는 거겠어요?"

앳된 여자가 재차 묻는다. 목소리 끝이 날카롭게 올라간다.

"담 넘다가 걸린 거 데려왔어. 식량도 가지고 있고, 쓸 만한 곳을 안대서."

"운이 좋군. 이리 와서 앉아."

자신을 제임스라고 소개한 이 남자는 사태가 시작되기 전에도 미군으로 복무했다고 했다. 그의 소속 부대가 이곳이었던 건 아니지만 그는 미군 기지 속 미군 생존자라는 타이틀을 굉장히 즐기고 있는 듯했다. 한참, 그의 지루한 무용담을 듣는데 창우가 등 뒤로 허리를 툭 건드린다. 흘깃 바라본 창우의 시선은 제임스의 불룩한 허리에 머물러 있었다. ······권총이다. 아마도 이곳에서 총을 소유한 건 비단 제임스뿐만이 아닐 테지만······.

그다음으로 여자들은 자신들을 주윤정, 주연정이라고 소개했다. 이름을 듣고 자매냐고 질문한 창우에게 그들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들은 살던 도시가 폐쇄되자 목숨을 걸고 탈출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얼마 전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폐쇄되었다는 도시와 동생의 억양으로 보건대 자매는 화주에서 왔을 것이다. 화주는 <개들>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상륙한 곳이자 가장 처음으로 폐쇄된 도시다.

마지막으로 내 어깨에 칼을 던지고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남자는 이안이라고 했다. 제임스나 주 자매처럼 불필요한 이야기는 덧붙이지 않았다. 이안의 말이 끝나자 제임스가 나를 가리켰다. 입을 뗐지만 막상 할 말이 없어서 나도, 창우도 이안처럼 이름만 뱉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깨 아프죠?"

소개가 끝나자 아까부터 이쪽만 주시하고 있던 연정이 물었다. 칼은 진작에 빼냈지만 입고 있던 옷의 어깨 부분이 온통 벌겋게 물든 탓이다. 윤정이 아프겠다며 대신 얼굴을 누비는데, 정작 어깨를 피투성이로 만든 장본인은 마음대로 대답하라는 듯 말없이 내 얼굴만 응시한다.

"괜찮아요."

"너무 기분 나빠하진 말구요. 원래 이안이 그래요. 아니, 이 기지 사람들은 모두 그렇죠."

맞는 말이었다. 이안의 방식은 과격하긴 하지만 동시에 당연한 처사다.

"저기요."

소개가 끝난 이후로 창우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그래."

"출입구는 어디에 있어요?"

그 순간 사방이 고요해진다. 애써 이안을 변호하던 연정도, 내 어깨에 커튼자락을 찢어 감싸주던 제임스도, 붕대가 이미 동나서 이게 최후의 수단이자 최선이라고 덧붙이던 윤정도 모두 숨소리를 죽인다. 창우는 더 말할 게 있다는 듯 입을 벙긋였지만 모두가 입을 다물자 따라서 입을 다물었다.

"따라와."

이안이 일어선다.



기지는 여전히 한산하고 음습했다. 우리는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 다시 밖으로 나갔다. 담 주위에 아까는 보지 못했던 <개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개중엔 입에 거품을 문 것도 있었고, 가슴에 꽂힌 칼이 몸을 관통해 등으로 나온 것도, 얼굴이 형체 없이 녹아내려 마치 얼굴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것들을 유심히 보던 창우가 천천히 입을 뗀다.

"<개들>도 여기에 들어올 수 있어요?"

"아니."

"그럼 저건······"

"기지 내에 있는 시체는 모두 인간인 채로 들어온 <개들>이야."

"······인간인 채로요?"

"두 가지밖에 더 있겠어? 자기도 모르게 번식됐거나, 알면서도 기어들어왔거나."

담을 따라 즐비한 <개들>의 사체가 아까 본 것인지 새로운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을 때 이안이 걸음을 멈추었다. 가까이서 봐도 다른 곳과 구분하지 못할, 그저 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곳이었으나 이안이 손전등을 비추자 아주 작은 구멍이 눈에 띄었다. ······열쇠 구멍이다. 이안이 들고 있던 손전등을 내게 넘기고 쥐고 있던 열쇠를 넣었다. 하지만 이안이 열쇠를 구멍에 넣고 아무리 돌려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하다못해 열쇠가 부딪는 소리조차 나지 않아서 이안이 열쇠를 돌리는 시늉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안이 담을 밀자 담은 그의 손에 손쉽게 밀렸다. 약간 열린 틈 사이로 들리는 <개들>의 신음소리가 이 담 너머가 바깥이라는 것을 낱낱이 증빙했다. 청각이 민감한 <개들>을 대비해 특별히 개조한 것인지 열쇠를 넣고 돌릴 때는 물론 담을 열 때도 소리가 나지 않아서 위치를 모르는 이들은 절대 출입구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가고 싶으면······."

"······."

"지금은 나가도 돼."

그는 지금이 아니면 나갈 기회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 말고도 너희가 넘었던 담의 이음새로 드나들 수 있어."

"······."

"하지만 거긴 의무실 바로 앞이고, 의무실엔 매일 누군가가 불침번을 서."

그는 이곳이 아니면 나갈 통로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생각 없으면 돌아갈까. <개들>이 오기 전에."

그는 지금 이곳을 떠나는 즉시 <개>가 될 것임을 일깨우고 있다.

우리에게 출입구를 보이는 척하지만, 사실 이건 세뇌하기 위한 시늉에 지나지 않는다. 이안 없이는 나갈 수 없고, 들어올 수 없다. 이곳 말고는 통로도 없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혼란을 <개들>의 존재로 잠재운다. 나갈 기회도, 나갈 통로도 지금 이곳밖에 없지만 지금 나간다면 밖에 늘비한 <개들>의 습격을 받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이안이 이방인들에게 기지에 잔재할지, 탈출할지 선택지를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이곳에 남는 것.

이안이 문을 닫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안을 따라 돌아섰다. 창우가 손끝을 잡아 온다. 창우도 이 이유 모를 기이함에 전율하고 있을 것이다.

 




얼마 간 이곳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이들은 너무나도 태평했다. 언제 <개들>의 침략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길지 모르는 생존자보다는 도리어 수학여행을 온 학생의 모습에 가까웠다.

눈앞에 있는 저 할리갈리가 바로 그 증거다. 이곳을 거쳐 간 누군가의 것이라는 너덜너덜한 할리갈리는 종을 치는 대신 바닥에 손을 엎어 가장 밑에 있는 손이 카드를 먹는 방식이었다. 큰 소리가 나지 않으니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역시 어딘가 위화감이 든단 생각은 버릴 수가 없다. 자매와 제임스는 한참 게임을 즐기다가 오늘의 불침번이었던 윤정이 잠을 자겠다고 하자 제임스의 이마에 딱밤을 두는 것으로 게임을 마무리했다. 오늘의 게임은 저걸로 끝이······

"같이 하실래요? 마침 두 자리 남는데."

나는 줄 알았건만 아닌가 보다.

할리갈리 대신 부루마블을 집어든 연정이 우리를 향해 묻는다.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기꺼이 고개를 주억인 창우는 몇 분 뒤엔 내가 경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주사위를 던지고 있었다.

창우가 서울을 먹자 제임스와 연정에게서 동시에 탄식이 터진다. 살짝 웃음이 났다.

그와 동시에 멀리에서 그들의 게임을 관람하던 이안이 일어섰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문을 턱짓한다.

"······."

따라오라는 신호다.



지금은 이곳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1층을 벗어나는 영광적인 순간이다.

의무실 왼쪽에 위치한 좌측 계단에는 중앙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핏자국이 있었다. 쇠창살같이 촘촘한 난간에도 기둥마다 피가 튀어 있었는데, 무심코 난간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구석에 고인 핏덩이를 보고 토할 뻔했다. 의무실 앞 복도에 있는 핏자국은 좋게 생각해서 군사 기지의 잔해 정도로 취급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이건 너무나도······ 너무나도 명백한 <개들>의 흔적이었다.

얼굴을 우그러뜨리며 고개를 드는데 마침 나를 보고 있었는지 이안과 눈이 마주친다.

"어때?"

"뭐가?"

"저 사람들."

이건 이 시대에서 할리갈리를 하는 자매와 제임스보다도 더 위화감이 드는 발언이다. 이안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좋아."

"너무 정 붙이진 마."

"······."

"당장 내일 <개>가 된 저들이 너를 <개>로 만들 수도,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어."

더 이상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이나 달싹거리는 입술 같은 것들에 시선이 가지 않는다. 그가 내게 왜 이런 말을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서서히 잦아든다. 초점 잃은 시야에 이안은 사라지고 그 공백을 사랑하는 <개들>이 메운다. 나를 번식시키기 위해 달려들던 번득이는 눈동자와 집에 들어선 순간 코끝을 찌르던 악취, 나를 보고 게걸스럽게 입맛을 다시던 입술과 네 발로 기어다니던 그림자, 침 범벅이 된 얼굴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나와 같은 위치에 찍힌 점과 언젠가 나를 형이라 부르던 <개>의 목소리······

"죽일 수 있을 정도로만 정 들란 소리야. 그게 누구든."

이안의 말이 맞다. 의식이 휘발된 <개들>은 더 이상 인간의 기억 속에 남은 누군가가 아니다. 껍데기를 보고 무너지는 건 언제나 살아남은 사람뿐이다.

그런데 그의 말은 지난 밤, 그가 우리에게 구태여 전달해 준 암시가 모두 내 착각이었나 싶을 만큼 이상했다. 그의 말에는 틀린 데가 없었지만 도리어 옳아서 이상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첫날, 그가 굳이 우리에게 탈출의 절망을 불어넣은 것은 우리를 쉽게 다루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는 이방인들이 어디론가 식량을 들고 나르지 못하도록, 끝내는 이방인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기지에 복종하도록······ 하지만 이안은 그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나를 감추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심지어는 언제나 그들을 죽일 태세를 갖추고 있으라고 한다.

"복잡한 얼굴이네."

나는 창 너머로 익숙한 철조망이 내려다보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민!"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도 전에 몸이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난다. 눈을 떴는데 온통 까매서 눈을 뜬 건지 뜨지 않은 건지 잠시 고민했다. 방금 나를 부른 이는 반쯤 뜨인 내 눈 위로 손을 휘휘 젓더니 이젠 덥석 손목을 잡아온다. 아닌 밤중에 정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끌려가는데 비몽사몽한 정신엔 오늘 불침번이 누구더라······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나 불침번 순서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이 손의 감촉이었다. 비정상적으로 온도가 높은 손.

나는 이 손의 주인을 안다. 창우다.

"왜?"

한껏 소리를 죽이고 말했지만, 창우는 의무실을 빠져나와 맞은편의 휴게실로 들어갈 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창우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휴게실엔 바닥을 뒹구는 탁자와 용도가 적적한 공간을 차지하는 것으로 변질된 고장난 자판기, 산처럼 쌓인 쓰레기통, 진작에 방전된 것으로 보이는 컴퓨터 한 대뿐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그 말에서 어떠냐고 묻던 이안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여기에 남을지 네 의사를 묻는 거야. 너도 느꼈지? 우리가 처음 온 날 이안은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알려 줬어.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거라고."

느꼈다. 창우의 말처럼 이안은 그날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암시를 보냈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눈치챘음에도 곧장 밖으로 도망치지 않은 것은, 기지에서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는 최악의 가정을 내리면서도 그저 창우의 손가락을 붙잡기만 한 것은 <개>가 들끓는 외부에 나가 <개>가 될 바엔 사람의 손에 죽는 게 나아서였다. 창우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날 내 손을 잡고 이안이 열어 준 문 너머로 도망치지 않은 것일 테다.

이 문이 열리는 것은 오직 지금뿐이고, 출입을 제한하는 통로도 이곳뿐이며, 다른 방식으로 탈출을 시도하더라도 우리의 불침번이 어디선가 너희를 감시하고 있을 거라는 이안의 말을 듣고도······

······불침번?

"이안이 그랬지. 우리가 들어왔던 담으로도 드나들 수 있지만, 거긴 의무실 바로 앞이고 의무실엔 매일 밤 누군가가 불침번을 선다고."

이것은 그날 창우만이 이해한 이안의 암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불침번인 날에는 도망칠 수 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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