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정보 : Photo by Patrick Tomasso / Unsplash




네 : 끝의 경계부터 일그러져 가는 동화가 있어요. 모서리가 말려 들어 중심부로 모이는 페이지 한가운데, 잘게 부서진 이야기를 볼까요? 그래요. 흩어져 꽃가루처럼 날리는 사연들을 한 데 모아 연주하는 일. 그것이 당신의 역할이죠. 도돌이표를 그릴지 마침표를 찍을지 또한 당신의 몫입니다.


게 : 눈의 세계에 갇힌 나그네는 그저 걸었다. 깨끗한 결정들이 시리도록 쌓여 발목을 먹어댔다. 하얗게 물든 발걸음이 종착역에 닿았을 무렵, 안광을 잃은 사내가 그대를 맞이했다. 맨발로 배회하던 나그네가 다가가며 웃었다. 처음의 미소로 처음을 만든 한마디. "Herobrine, 맞죠?"


전 : “노을이 차오르는 방에 틀어박혀 구석을 안았어.”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끝자락을 굴리며 노는 아이가 있었다. 캡슐형 알약을 만든 사람은 아마 늦은 저녁을 좋아했겠지. 알약에 그어진 선은 석양이 떠나가며 남긴 애매한 경계와 아프도록 닮았구나. 어스름이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방. 아이한테 유일하게 허락된 작은 공간이었다.


하 : 봄빛을 바른 잔디밭이 손바닥만한 마당을 가득 채웠다. 찻잔에 향기로운 차를 따르던 나는 말갛게 웃고 있었다. 메이플 시럽을 올려서 구운 과자 위로 시나몬 가루를 솔솔 뿌렸다. 바람에 실려 가는 시나몬을 따라 내달리는 사이 티타임도 지났다. 점점 어른이 되면서 나는 푸른 단맛을 지우고 말았다.


는 : 가시를 먹고 자란 그림자가 담장에서 말을 걸어 왔다. 잿빛 흉터를 주륵 흘리며 다가서던 검은 인간의 말소리. 귓바퀴도 기억할 만큼 담장의 언어가 또렷이 흘러든 순간이었다. 또다른 나의 칼날을 부수지 못하고 뒷걸음질쳤다. 내가 무섭니? 과거에서 태어난 덩어리가 나를 잠식해 왔다.


이 : 호박빛 하늘에서 쏟아진 파편이 눈을 찔렀어. 쨍하게 퍼져 가던 노을이 구름을 자르며 히죽 웃더라. 흘러드는 밤에 밀려 쫓겨나면서도 너는 제 빛을 토했지. 픽하고 비웃던 비행운이 슬금 옅어지는 겨울의 언저리를 봤어. 목격자는 넘기다 만 책장의 모서리를 문지르다가 저녁에 기댈 뿐이야.


야 : 아무도 모르는 새벽이 있었다. 온힘으로 시곗바늘을 묶어두고 버티는 게 전부였다. 손틈을 비집고 빠끔히 튀어나온 시간에게 물었다. 잠깐이라도 괜찮은데 머물다 갈래? 대답은 침묵에 녹아든 채 태엽 뒤로 숨어버렸다. 이내 시간은 묵묵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침이 되었다.


기 : 잠들지 못한 메시지가 오가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쌓아올린 책더미 위에서 세 번째 도서를 꺼내 들고 뒤적였다. 쪽지들과 깨진 손톱이 떨어진 초승달 마냥 반짝거렸다. 은은한 펄을 뒤집어쓴 색종이를 펼치자 익숙한 글씨체가 보였다. 널브러진 글자들이 보여준 추억에 다시 웃고 말았다.


들 : 나뭇가지에 매달린 늦여름의 파편이 미처 가시지 않았다. 여름과 가을 사이 어딘가에 걸친 제 5의 계절을 걸었다. 너의 계절이었다. 은행잎들은 낙하를 준비하고 낙엽의 꿈을 꾸며 나날이 안색도 노래져 갔다. 어렴풋이 구릿한 냄새가 대기에 묻어나 코를 스치는 듯했다. 은행을 밟아 터뜨리고 짓이기고 싶어졌다. 너와 나눴던 애매한 계절은 빛바랜 채 남아, 돌아오는 해마다 거리를 수놓기를 반복했다.


은 : 마당에 끌고 나온 그림자가 마루까지 길게 누웠다. 습기로 코팅된 전신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저 달빛이 받고 싶었다. 고아한 문양들은 마구잡이로 섞인 시간을 보여주며 히죽거렸다. 비웃음이 가시로 박혀 굳어버린 지금, 그의 귀환을 그리는 기도마저 차츰 스러지기 시작했다. 오래 전에 흩어졌을 누군가의 숨결 만큼이나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싸늘한 월광이 내렸다. 내일도 하얗게 밤이 스며올 것이다. 그가 몰고 오는 그리움과 함께.


그 : 간편하게 점심을 때우고 돌아온 우리는 테라스로 나왔어.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던 너는 테이블의 나이테가 신기하다고 말했지. 있지도 않은 나무의 역사를 프린팅해서 덮었을 뿐인데. 적당히 대꾸하고 넘겼던 그 날 오후의 현장에 지금은 홀로 여행을 왔어. 그저 패턴을 입혀 반질거릴 뿐인 테이블 위로, 고개 숙이고만 있던 네 얼굴이 보이는 기분이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메말라 있었을 나이테가 좀 더 커진 듯해서. 너와 나의 각기 다른 시간은 테이블에서 흐르고 있었나 보다.


곳 : 언젠가부터 아끼는 것들에게 찻잎을 달아주고 있었다. 마음으로 달아주든, 차를 우려서 대접하든, 찻물이 나오는 옛이야기를 들려주든 방법은 다양했다. 오다가다 지친 이들부터 낡고 빛바랜 물건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뻐하고 감사를 표했다. 간만에 산뜻한 바람이 부는 오늘이니까 선물 받은 티백을 꺼내자. 풍미 이상의 고마운 마음을 마시고 싶다. 스쳐가는 모든 나그네에게 기분 좋은 휴게실로 남는다면. 그제야 나름대로의 삶을 우린 내 이름의 '차'가 탄생하겠지.


에 : 비바람에 창문이 떨리는 골방을 안다. 깜빡이는 전등은 아예 꺼두는 시간이 많아졌다. 익숙한 습기를 온몸에 코팅하고 구석에 앉았다. 장마답게 어제부터 빗방울이 지치치도 않고 쏟아졌다. 선풍기 앞으로 엉금 기어가 약풍 버튼을 눌렀다. 땀이 식어갈 무렵에는 문득 익숙한 갈증이 왔다. 미지근해진 물을 마시면서 다시금 늘어졌다. 이내 물병 뚜껑을 닫던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출렁이던 물이 살짝 흘렀다. 휴지로 닦을 힘도 없었다. 비는 계속해서 세차게 내렸다. 그런 비처럼 네가 쏟아져 내렸다면, 그 때의 나는 그대로 맞아줄 수 있었을까.


있 : 선생님. 땅거미한테 쫓기는 골목에서 제 발끝으로 뻗어 있던 그림자도 저라고 할 수 있을까요. 넘어지거나 모서리에 긁혀서 떨어진 살점은 왜 줍지 못하는 걸까요. 그토록 자신의 일부는 떼어놓고 잃어버리기 쉬운 건가요. 있죠, 오늘도 선생님의 선생님은 그 안에서 안녕히 계신가요.


어 : 거리 한복판에서 꿈과 청춘을 부르짖는 이들이 있다. 세상을 겪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노래가 있다. 무더위를 가로질러 관중 사이로 가사가 숨가쁘게 내달린다. 약동하는 일렉기타가 신발코를 툭툭 건드리다가 어느 순간 뛰어올라 구름을 찢는다. 걸핏하면 소음이라며 손가락질 받아도 열정은 관중의 무의식까지 후려갈긴다. 뇌리에 박히고 가슴에 꽂히는 노랫말로 행인은 감았던 눈을 뜬다. 마음에 박음질된 가사가 희망을 간질인다. 혈관 구석구석까지 전율이 흐른다. 여름의 절정을 알리는 매미소리도, 아스팔트를 달구는 더위도, 그들의 끓어대는 외침에 불꽃처럼 삼켜져 흩어진다.

-2019년 2월



고 : 한결같이 가슴에 머무는 보랏빛을 압니다. 감히 닿지 못할 하늘입니다. 문득 떠올리면 아련해지는 이름을 구름마다 간직한 채 저물어 갑니다. 퀴퀴한 우울을 끄적이던 시간, 날이 선 펜촉도 어루만지며 동경이 흐릅니다. 오늘을 조금이나마 다정하게 전하려 펜을 드는 저녁입니다. 


마 : 수많은 초침과 분침이 겹쳤던 시절은 덮어두고 싶다. 오랜 기다림 끝에 모두가 모이는 날이 온다면. 입 안이 깔깔해져 찬물을 넘겼다. 각각으로 떨어져 나온 시계가 저마다의 시간을 걷기 시작한 지 오래다. 아직도 아이들은 태엽 소리를 내며 운다. 소중할수록 외면해야 하는 환청이 울린다. 


웠 : 눈물에 적신 붓으로 가만가만 선을 그어나간다. 도화지는 아마 울고 있었다. 완성한 그림을 둘둘 말아두고, 온갖 색깔이 뒤섞인 팔레트를 씻는다. 이건 마음을 정리하는 법이다. 시시각각 스치는 여러 감정은 파스텔빛을 하고 있다. 변해가는 애정조차 서글피 빛나며 꺼져버리던 순간이다. 


어 :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됐습니다. 나의 배려는 누군가에게 권리가 되었죠. 반복된 이별, 헌신짝처럼 공터에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온몸으로 불신의 암세포가 퍼졌고, 추억이 남긴 우울은 구석구석을 좀먹었습니다. 울적한 투병이 길어지고 옅어가는 신음에 쓰레기통도 눅눅해진 지 오래입니다. 

-2020년 2월



미: 빛바랜 동공은 이미 얼어버린 채, 아스라이 꺼져갈 목숨을 붙들고 버텼다. "나는 당신을 믿어요. 얼음에 갇힌 시간은 흐르지 않으니까요." 눈밭의 협곡 위로 발갛게 발자취를 남겨온 우리였다. 곳곳마다 냉기를 묻힐 수밖에 없는 저주 속에서, 두 사람은 온기를 알고 녹이는 방법을 터득했다. 언젠가 당신이 말했다. "얼음으로 태어난 이상, 물처럼 늙어가는 운명을 거스를 순 없어." 나도 그럴 터였다. 허나 당신은 나를 얼려두고 잠시 떠났다. 그대가 돌아와 멈춰버린 나를 녹여주는 그 날, 둘이서 봤던 이름모를 겨울꽃을 또 보러 가자며. 언제까지고 그리운 박동을 헤아리며 기다릴 것이다. 


련: 눈물은 여기까지. 모두가 기댈 새벽의 면죄부 앞에서도 나는 끈덕진 가면을 고수하기로 한다. 다가오는 자정을 긁어내면 금세 설익은 아침이 드러날 터. 태양 아래 부끄러운 눈물자국 따윈 찾아볼 수 없도록. 상황이 나를 정의하게끔 내버려두지 않겠다. 창문 앞 가로등이 탁하게 깜빡인다. 


빛: 오후만 되면 머리가 아팠다. 화창한 날씨처럼 유독 빛나던 네 앞에서 축하 인사도 기어들어갔다. 목 안에서 솔직한 벌레가 꿈틀대며 속을 헤집었다. 뭐라도 떠들어야 했다. 샹들리에 밑으로 쏟아지는 조명을 칭찬하고 앉았다. 덕분에 엉뚱하고 유쾌한 친구로 남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허상 뿐인 밀도는 오롯이 내 몫으로 남았다. 언제는 아니었다는 것처럼. ... 회상이 끝나갈 즈음, 익숙한 맛이 밀려온다. 어릴적 먹던 가루약의 여운이 아직도 머무나 보다. 엄마가 주던 초콜릿을 찾아 먹는다. 거실에서 이질감을 비추며 샹들리에가 흔들린다. 

-2020년 3월


마: 찬바람이 목가를 훑는 계절에 선다. 가을과 겨울 사이의 틈을 비집고 걸어본다. 머리 위로 펼쳐진 심야는 가만가만 아침을 향해 번져간다. "새벽이 머문다는 정류장에 잠깐만 가 보자." 밤처럼 느긋하나 부지런한 발걸음이 문득 멈춘다. 가로등도 없는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른다.

떨어진 낙엽이 발밑에서 사부작대며 밤을 굴린다. 핫커피 대신 11월이 몰아온 바람으로 속을 달랜다. 가볍고 깨끗한 공허가 들이차면 하아, 뱉어 본다. 따수운 숨결이 공허를 끌어안고 다시금 한밤에 녹아든다. 멀겋게 피어나는 입김이 북동쪽으로 흐릿 흩어진다. 새벽을 끌어온 닻별이 여리게 반짝. 

사랑하는 새벽녘마다 잠든 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듯이, 조금 더 특별한 별자리가 머무는 겨울하늘로 손을 뻗는다. 별과 별이 이룬 나열이 하나의 자리가 된다면, 우리가 나란히 이룰 자리는 어떤 이름일까. 오늘처럼 닿지 않는 손길 너머에서 그대는 어떤 얼굴로 잠들까. 

아침이 눈앞까지 덮쳐온다.

-2020년 5월



다: 버스에 올라 다섯 정거장을 지나오니 자리가 생겼다. 축축한 기류를 휘감은 몸이 의자에 툭하고 떨어졌다. 한 겹의 유리 너머로 빗방울이 흘렀다. 입김을 불어 뽀얀 창가에 고슴도치 한 덩이를 그렸다. 물방울 무늬가 귀여운 친구였다. 수줍음이 많은 아이인지, 점점 옅어져서 창문에는 손끝이 훑어댄 흔적만 남았다. 자국만이 머무는 창가에 가만히 머리를 기댄 채 깜빡 졸았다. 버스가 온몸으로 덜덜대며 울고 있었다. 요란스런 진동에 몸을 맡기자 내리기 싫어졌다. 함께 울고 싶었다. 그래, 오늘은 집이랑 멀리 떨어진 사무소로 가자. 종점은 아직도 멀었다. 


저: 그 눈, 낯익은 눈이다. 익숙한 방향에서 은근한 시선이 온몸으로 꽂힌다. 커튼을 치고 형광등을 끄고 음지를 비집고 들어가도 쫓아온다. 깜깜한 밤마다 사방에서 휘어진 눈꼬리가 쏟아진다. 헛구역질이 올라와 고개를 바닥에 처박는다. 이제야 보인다. 모두는 그림자에 박아둔 눈이다. 

-2020년 8월


+ 앞으로도 추가될 예정

어둠을 헤매는 자에게 글로써 작은 빛줄기라도 비추어 그들이 새로운 길을 찾도록 돕고 싶다. 세간의 병든 운석이 나를 상처 입히려 해도 나만은 이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은하수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