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의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 작품의 인물은 전부 성인입니다.



# 01


레이는 첫 번째 좌표에선 실패했다.

푸짐한 광고와 달리 받아든 햄버거가 볼품없을때도 있지 않은가? 다만 레이의 일은 햄버거보단 쪼오끔 더 중요했다. 레이는 주머니에서 찌그락 째그락 깨져서 굴러다니는 파편을 집어냈다. 그건 입체퍼즐 조각이나 다를바 없는 꼴이다. 어차피 소모품이지만 역할을 못하고 망가진 건 슬픈 일이다.

소개글과 달리 기후는 쓰레기장처럼 습했으며 사람들은 서툰 사람을 봐주지 않았다. 레이는 귀여운 척 하지 말라거나 토쏠린단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별의 생물은 비위가 유달리 약하겠거니 싶을 뿐이다. 실내화-하반신 쪽 말단부위를 보호하는 흰색의 인조가죽 보호구-에 진흙이 가득 차 있던것도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토양 샘플이 생긴건 이득이었다.

하지만 애들이 빠져나간 옥상에서 코피를 뚝뚝 흘릴 땐 수신기를 켜버린 것이다.

좌표 J-052098. 긴급 전근 요망. 모듈 수리 요청.

레이는 한 번의 기회를 써버렸다. 아무리 레이가 스피카-001의 막내공주라도 한 번 더 전근 요망을 하면 부적합자로 분류될거다. 

스피카의 사람들은 상냥했다. 그렇기 때문에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은 시키지 않았다.

뺨의 둔통은 지구의 중력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꺼림칙하고 뻐근했다. 입에서 피맛이 차올랐다. 레이는 그 애들의 손찌검이 신기했다. 사법체계와 교칙과 기타등등이 있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감은 눈 뒤편으로도 애들의 모습이 보였다. 힘을 재고. 눈치를 보고. 싫어하는 걸 시키고. 따돌리고.

워프 도약 기술에 못 오른 문명이 으레 그렇듯.

야만스러웠다.

레이는 이 별에 대한 기대를 관두기로 한다. 어차피 스피카-001로 돌아가기까진 일 년 남았다. 고향에선 우주콘서트와 무중력 올림픽이 열리는 해였다.

수신기에서 닉네임 변경 요청 알림이 떴다. 바꾸겠냐고 물었을 때 레이는 눈을 위로 굴린다. 여권. 신분증. 기타등등 증빙 자료. 하나하나 새로 맞추는 것도 귀찮아서 아니오 버튼을 눌렀다.

나오이 레이.

두 번째로 할당받은 좌표는 바로 옆의 반도다. 레이는 캡슐을 호출한 후 투명화를 눌렀다. 지긋지긋한 습기와 무더위는 이제 안녕이다. 남한에 대한 자료를 출력할 때 캡슐이 이륙했다. 잠깐 귓가가 찡 울렸다. 어쩌면 잠들기 직전에 움찔 수면발작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레이는 이백년이나 살면서도 제가 비행기 멀미가 있단걸 모른다.




# 02


- 잘 부탁합니다.

망했군.

레이가 말을 뱉은 뒤 황급하게 귓불을 건드려 언어 설정을 바꿨다. 사이가 더럽게 안좋은 국가라고 들었다. 다시 한국어를 뱉을 기회는 없었다. 선생님이 빈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레이는 걷는 동안의 침묵이 적대감이 아니길 빌었다.

옆자리에 있던 여자애는 졸린 눈을 비비다가 인사했다.

- 안녕.

- 응.

수업을 들은 뒤에 그 애의 이름이 김지원인 걸 알 수 있었다. 

긴 생머리에 깊게 파인 볼우물. 환대어린 웃음.

위험도 극히 낮음. 자동 저장 완료. 그 동안 레이는 지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지원이 코를 흐흥 울리며 웃었다. 왜. 나 뭐 묻었어? 그러길래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종이 울리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을 하러 가야하니까.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 문이 잠겨있었다. 문 손잡이를 잡고 한참 철컹거렸는데 요지부동이라 포기했다. 태양빛이 좀 있는게 좋지만 어쩔 수 없어서 미니 시추기를 꺼낸다. 땅에 푹 꽂고 눈금이 오를 때 까지 기다렸다. 레이는 깊은 지식까진 몰랐지만 이걸 엔트로피라 부르는 것 정도는 안다.

레이같은 사람은 다른 별에도 많았다. 이걸 수거해서 스피카로 보내면 가공 후 에너지원으로 쓴댄다. 눈금이 꼴꼴꼴 오르는 동안 발소리가 들렸다. 아래쪽 계단에서 정수리가 빼꼼 솟았고.

- 뭐해?

지원이었다. 레이가 지원을 보며 생각한다. 쟤 웃상이구나. 그 말 처럼 지원은 기본 표정이 미소였다. 정체불명의 전학생이 땅에 이상한 걸 꽂고 옥상 문 앞에 앉아 있는데도.

- 잠겼어?

- 응. 가자.

지원이 세 칸 아래에서 한쪽 손을 내밀었다. 레이는 땅에 꽂힌 시추기를 회수한 뒤 지원의 손을 잡았다. 한 걸음씩 내려갈 때 의문스러웠다. 조금 둔한 개체인가? 사람들은 레이를 궁금해했다. 레이가 하는 짓도 궁금해하긴 물론이다. 궁금증이 지나쳐 쫓아다니다가 오해하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저번 좌표에서 겪은 일이다. 그런데 왜 시추기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는지 오히려 레이가 궁금했다. 교실로 돌아가는 동안 지원이 말했다.

- 일본 학교는 옥상 문 원래 열어놔?

- 몰라.

레이는 겸손했다. 한 학교만 겪고 모든 곳이 그렇다곤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원이 이마를 긁적이더니 생각했다. 고등학생 때 학군도 버리고 전학오는 애들은 여러 이유가 있다고. 얘는 좋은 이유는 아니겠구나. 새 친구 잘 챙겨야겠다. 이러고 말았을 뿐이다. 땅에 이상한 걸 꽂고 알 수 없는 짓을 하는것도 아직 지원이 물어볼만한 문제는 아녔다.

이후로 레이가 반 애들 사이에 잘 섞이게 된 건 순전히 지원의 노력이었다. 천성적인 둔감함. 사람을 좋게 보려는 마음. 배려. 이런 것들을 메모하며 레이는 캡슐 안에서 생각했다. 어떤 덕목들은 너무 당연한데 오히려 드물다고.

마음이 편해져서 소등을 하고 잤다. 투명화가 된 캡슐은 학교 뒤편 공원에 꽂혀 있었다.




# 03


점심시간 이후에 아이들은 트랙을 맴맴 돌았다. 지원이 그걸 회전초밥이라 말한 적 있다. 자세히 보니 닮았다. 옥상이 잠긴 대신 태양광을 조금이라도 쬐려는 발악으로 보였다. 비타민 D가 필요한 생물들은 번거로운 면이 있다.

나머지 밥친구들은 선도부 회의때문에 일찍 갔다. 벤치엔 지원과 레이가 앉아 있었다.

- 제주도?

- 응. 여기.

지원이 네이버 지도를 부러 켜서 섬 하나를 콕 짚었다. 레이가 파편적으로 알고 있는 정보였다. 관광지. 통행량이 가장 많은 기간은 삼월에서 오월. 유채꽃. 해변. 강풍 주의. 급식실에서 받은 귤도 제주의 특산물이었다. 시트러스 계열 과일. 산성도가 높은 과일. 우적우적 씹어서 목 뒤로 넘겼다. 향기로웠다. 지원이 웃으며 손끝을 보여준다.

- 귤 지겨워 죽겠다.

- 왜?

- 집에도 많아. 엄마가 빨리 치우자고 하루에 다섯개는 먹으래. 손 노래진 거 봐.

눈 앞에 쫙 펼쳐진 손바닥. 그 말대로 손끝이 샛노란듯 살구색인거 같기도 하다. 레이가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 그럼 김치 먹으면 빨개져?

- 뭐? 야아.

웃음과 함께 등을 팡 친다. 지원은 얼굴이 벌게진채로 너 그거 인종차별이라며 뭐라 해댄다. 비난과 폭소가 함께 할 수 있는거였나. 레이는 여전히 지구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별다른 일이 없는걸 보면 적응을 잘 하는 것 같다. 그래. 내가 낸데. 스피카 막내 공주이자 계승 3순위인데. 달력이 넘어갈수록 자긍심이 팡팡 솟았다.

도저히 안 익숙한 건 있었지만.

지구는 유의미하게 탄산가스 소비량이 많았다. 레이가 손에 쥔 사이다 캔을 바라보다가 넘겼다. 혀부터 목구멍까지 자글자글 쏜다. 결국 또 딸꾹질이 시작되었다. 히끕히끕거리자 지원이 웃어댄다. 얘 또 딸꾹질해. 그러다가 십분 동안 이어지자 걱정어린 눈길로 말했다. 

- 딸꾹질 백 번 하면 죽는대.

레이의 눈이 커진다. 모듈이 행동 불가 상태에 빠지는 건 골치 아픈 일이었다. 시추기와 달리 모듈은 주문제작과 배송까지 지구력으로 한 달 정도는 걸렸다. 그거 뻥인데. 하고 말하려다가 천진한 눈이 재밌었는지 지원은 굳이 해명하지 않는다. 대신 코를 막고 물을 마셔보라고 했다. 손에 든 게 사이다밖에 없어 마셨다.

또 히끕히끕.

- 어떡해?

- 너 지금 오십 번은 했을듯.

회전초밥을 돌던 애들이 조금씩 교실로 돌아간다. 드문 인파는 그나마 등을 보이고 있었다. 지원이 레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 잠깐만.

그러다 눈치를 보더니 입술을 쪽 맞댔다.

따끈따끈 부드러웠다.

입맞춤을 먼저 한 건 지원인데 얼굴이 먼저 벌개진 것도 지원이다. 반대로 레이의 표정은 무덤덤해보인다. 예쁘고 큰 눈에 오동통한 입술이 인형같다고 늘 생각했다. 친구끼리 장난으로 입을 맞춘 적도 몇 번 있다. 그리고 놀래켜야 딸꾹질이 멎는다고 냅다 등을 두드려 기회를 날리긴 아쉬웠다.

- 멈췄어?

다시 딸꾹.

- 아니.

- 으음.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이학기 동안의 충동질이라고 하기엔 너무 밝은 대낮이었다. 지원은 누가 벤치 쪽을 쳐다보고 있을까 싶어 노심초사했다. 레이가 지원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뺨에 손을 대었다.

말랑말랑한 살성. 볼을 엄지로 꾹꾹 누르면 보조개의 흔적이 만져진다. 눈과 입과 코는 크고 높고 반짝거렸다. 레이는 지원의 얼굴이 꽤나 미형이라고 생각했다. 스피카와 지구의 기준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손아귀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지원이 옆눈을 굴리더니 작게 말했다.

- 애들 지나가는데.

- 알아.

지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예비 종이 울릴 때 남은 애들마저 교정 안으로 들어간다. 그건 둘을 위한 알맞은 때였다. 레이는 지구로 오기 전 다큐멘터리를 지겹도록 봤다. 그러니까 이게 인간의 구애 행동인걸 알고 있다. 지원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번엔 레이가 지원에게 입술을 가볍게 포갰다.

딸꾹질은 옮는 거구나. 레이는 히끕거리며 어깨를 떠는 지원을 보고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뻘건게 꼭 토마토 꼴이었고 교실로 들어가도 혈색은 가라앉지 않았다.




# 04


레이가 자신의 캡슐을 보여준 건 방학식 때였다.

노래방에다 시내 탐험까지 끝나고 다시 학교 쪽 정류장으로 가는게 마음에 걸렸다. 지원이 레이를 졸졸 따라오다가 물었다. 너는 집이 어디야? 레이가 공원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그 때 까지만 해도 공원쪽 빌라촌에 자취를 하는 줄 알았다. 레이의 의사소통은 특이한 면이 있었다. 누가 레이에게 혹시 우체국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으면 알아요. 라고 대답한 뒤 갈 길을 갈 것 같았다. 한참을 놀았고 이미 해가 졌다. 깜깜한 공원 하늘 아래서 레이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 들어올래?

지원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렸다. 레이가 교복 주머니에서 수신기를 꺼냈다. 지원은 그 날 까지만 해도 레이의 핸드폰이 블랙베리나 플립 비슷한 일본 폰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테나가 잘깍 나오자 캡슐 투명화가 해제되었다. 눈 앞에 두둥 나타난 흰 캡슐을 볼 때 지원이 눈을 깜빡였다.

이건 뭐지.

얘 뭐지.

- 이거 이인용. 근데 쪼끔 좁아.

문이 지잉 열리고 레이가 먼저 걸어들어간다. 지원이 그 뒤를 따랐다.

외계인이 인간에게 정체를 감추지 않는 이유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FBI나 정부기관이 납치하기 전에 비상 탈출 모드에 돌입하는 게 훨씬 빨랐다. 또한 애완견 앞에서도 샤워가운이나 잠옷차림으로 활보하는 심리와 비슷했다. 레이가 투명화 버튼을 누르고 대기 청정모드를 눌렀다. 캡슐에 달린 창 너머로 은하수가 반짝반짝거렸다. 지원은 레이의 옆에 서서 하늘을 들여다본다.

너무 황당한 일을 겪으면 사람은 오히려 침착해진다.

그래서 물었다.

- 레이야.

- 응.

- 너 어디서 왔어?

- 스피카.

들어도 모르는 별 이름이었다. 그래서 지원은 가만히 끄덕였다. 도란도란 이어지는 대화는 수학여행 때 진실게임 같다. 왜 온거야? 엔트로피 뽑으려구. 뭐? 에너지 추출. 뭔지 모르는 얘기는 의외로 그렇구나 하고 잘 듣게 된다. 지구 침공은 할 이유가 없대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로라가 얇은 커튼처럼 너울거린다. 지원은 고향에서 비슷한 걸 본적 있다. 알고보니 오징어배 불빛이 하늘에 비친거랬다. 그거보다 백 배는 예뻤다.

지원이 알게 된 정보는 다음과 같다. 나오이 레이가 가짜 이름인거. 레이는 스피카의 막내 공주인 것. 스피카는 여기보다 공기도 맑고 다들 착하고 중력도 낮고 아무튼 좋은 곳이라고. 그렇게 대답하는 레이의 옆얼굴을 지원이 바라봤다. 외계인은 표정이 없었다. 그래서 고향을 그리워하는지 아닌지 구분이 잘 안됐다.

음.

일주일 전에 뽀뽀.

그냥 한거구나.

지원은 레이와 자기 사이에 문화차이가 있다고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굳이 해명시키는 대신 말을 돌리기로 했다.

- 너 고향 가면 여왕 되는거야?

- 아니. 내 차례까지 많이 걸려.

- 많이 걸리는구나.

- 언제 가?

- 내년에.

이건 괜히 물어본 것 같다.

지원은 벌써 레이가 없는 교실을 쏘다니거나, 몇백 광년 거리의 하늘을 바라보는 자신을 떠올렸다. 섭섭해서 마음속이 꾹 치밀었다. 그럼에도 미리 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또 말을 돌린다.

- 근데 너 한국말 진짜 잘 배우더라.

- 아닌데.

- 그, 통역? 아무튼 그거 썼다고 해도 진짜 완전. 한국인 다 됐어 김레이.

- 김레이?

- 응. 내가 김지원. 너 김레이.

- 김레이…….

레이가 입속말로 중얼거리다가 키득거린다. 부끄러워 하는 표정은 뭔가 싶었는데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 여기는 성 안 바꾼다며. 결혼해도.

- 응.

- 스피카는 바꾸는데.

- 헐.

- 프로포즈.

-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 아냐?

- …….

예쁜 외계인이랑 썸타는 것도 인생에 해볼만한 경험이긴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나 할만한 경험은 아니지만. 지원이 괜히 귀밑머리를 넘길 때 시뻘건 볼이 드러난다. 너는 말을 왜 그렇게 해. 하고 꿍얼거릴 때 레이가 대답했다. 내 맘인데. 막내 공주로 이백년을 살았는데 어련할까 싶었다.




# 05


그 날 이후로 레이의 캡슐은 둘의 아지트였다. 누군가에 대해 정말 알려면 밀실에 단 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맞다. 레이의 정체를 알게 된것도 좁아터진 캡슐 안이었다. 지원은 방학 동안 레이가 맨땅에 시추기를 꽂거나 일지를 쓰거나 보고서를 전송하는 모습을 봤다. 가끔은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는 핑계로 레이의 캡슐에서 자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 날도 지원이 옆자리에 잠들어 있었다. 레이는 방금 전송된 설문조사지를 들여다봤다.


왕립 항공개발사 다이브 파견 직원용 설문 조사지

다음 설문에 정직하게 대답해주세요.

1. 행성의 대기 질은 어떤 상태인가요?

매우 나쁨 / 나쁨 / 보통 / 쾌적 / 매우 쾌적


2. 행성 내 인원의 갈등은 심한 편입니까?

매우 그렇지 않다 / 그렇지 않다 / 보통 / 그렇다 / 매우 그렇다


3. 엔트로피 수거는 원활합니까?

매우 그렇지 않다 / 그렇지 않다 / 보통 / 그렇다 / 매우 그렇다


4. 행성의 환경 파괴 지수에 대해 적어주세요.


5. 행성에서 친밀도가 100%인 사람이 몇 명입니까?

1명 / 2명 / 3명 / 4명 / 그 이상 / 기타 (      )


6. 기타 의견을 자유롭게 서술해주세요.



설문에 응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는 설문지의 지시대로 적어냈다. 매우 나쁨. 매우 그렇다. 보통. 파괴지수 80%. 1명.

기타 의견은 굳이 적지 않는다.

전송 완료 알림이 깜빡이다가 사라졌다. 지구에 파견 된 사람이 몇이랬더라. 세어보다가 단체 채팅방에 들어갔다. 공지사항 이외엔 대부분 불만 어린 목소리였다. 모두들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었으며 파견 종료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레이는 여기서조차 익명이다. 자신이 스피카 제3공주인건 굳이 밝히지 않았다. 

아마 그 때 해명했다면 뭔가 달라졌을수도 있다.




# 06


다이브에서 알림이 도착한 건 다음날이다.


왕립 항공개발사 다이브 파견 종료 알림 / 지구 지점 철수
다이브 파견 직원 여러분들께 알립니다.
설문 조사 추합 결과에 따라 다이브는 지구 파견 및 엔트로피 추출을 종료하며.
민원과 설문 결과를 고려해 환경 파괴 지수가 극히 위험 수치에 있는걸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우주방위국 지침에 따라 지구 내의 모든 생명활동을 종료하기로 하며, 우주법 1항 12조에 따라 지구를 철거할 예정입니다.
지구 시간 기준 72시간 내에 모든 물품을 수거하고 캡슐에 탑승하시길 바랍니다.
모두들 스피카에서 만나요!


레이는 그 통지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지원에게서 그 때 메세지가 왔다. 오늘도 집에 놀러가도 되냐는 내용이었다. 젤리 곰 모양의 이모티콘으로 메세지가 끝났다.




# 07


레이야. 나 원래 연습생 되려고 했었다? 아이돌. 근데 엄마아빠가 많이 반대했구. 결국 생각해 보니 부모님 말이 맞더라. 중간에 관두면 경력도 안 남는거. 그래서 그냥 공부 하던거 하고 대학가고 나중에 하려고. 요즘 노래 잘하고 예쁜 사람 진짜 많더라. 나중에 못참으면 유튜브라도 해보려고. 근데 가끔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래도 끝까지 해보면 어땠을까? 너 옆반에 걔 알지. 장원영. 응. 키 크고 예쁜 애. 걔는 데뷔조 들어갔대. 내년에 할거 같다고 그러던데.

아이돌 되면 뭐 할거냐고? 그냥 노래하고 춤 추고 방송 나오겠지. 근데 이건 진짜 비밀인데 난 사람들이 내 노래 듣는게 좋더라. 진짜 잘 하면, 계속 연습해놓으면 언젠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아이돌 하기엔 늦은 나이겠지만……. 에이, 아냐. 그룹 리더들 보면 생각보다 나이 많은 경우도 있더라.

무슨 음식 좋아하냐고? 김레이 진짜 뜬금없어. 나 매운 거 좋아하구 잘 먹고. 응. 엽떡 그거. 즉떡도 좋아. 볶음밥 싹 조지고 아몬드 봉봉 먹으면 얼마나 맛있게. 단짠단짠 알잖아. 강아지랑 고양이 중에 고르라고? 뭐야. 설문조사야? 인간 생태 조사 뭐 그런건가. 내가 표본으로 좋을지 모르겠네. 난 고양이. 강아지도 좋은데 우리집에 고양이들 있으니까. 얘가 꾸미. 얘는 밀크. 귀엽지.

우리 꾸미랑 밀크 대학도 가야하는데.

아. 진짜 고양이가 대학을 간다는 뜻은 아니구.

이십년 삼십년 넘게 쭉 살면 좋겠다고.

음. 나는.

좋아하는게 좀 많아. 그래서 솔직히 행복해.

가족이랑 친구들이랑 우리 고양이랑 전부 다.

세상엔 그럴 수 없는 사람도 많잖아. 친구들 얘기 들어보니까 집이 꼭 좋지만은 않고…….

레이 너는?

지구는 어때. 좀 좋아졌어?

있잖아. 우리 친척들 다 제주도에 있어서 설날에 갔다오거든. 너도 갈래? 엄마아빠한테 말해놓을게. 너 제주도는 한 번도 안 가봤잖아. 겨울이라 좀 춥긴 한데 예쁘고 좋아. 야. 내가 풀코스로 모신다. 고기국수도 먹고 올레길도 먹고 그냥 다 가자. 약속. 도장 꾹. 무르기 없기.



 

#08


지원아.

너희 집 놀러가도 돼?

지원은 오늘 집에 아무도 없다며 얼굴을 붉혔다. 둘은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불 꺼진 집에서 둘은 아무것도 안하진 않았다. 모든 게 끝나고 지원이 괜히 등을 돌리며 꿍얼거렸다. 김레이 진짜 변태다. 레이는 지원의 맨등을 꾹 껴안으며 말했다. 나 화장실 좀. 그렇게 말한 후 화장실은 가지도 않고 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머리카락들을 주웠다. 모근이 있는 채로.

고양이 털은 줍기가 쉬웠다. 밀크와 꾸미가 태평하게 꼬리를 흔들며 레이를 내려다봤다.




# 09


레이는 지원을 보낸 뒤 수신기를 들었다. 통화 목록에서 아빠를 찾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가기도 전에 아빠가 받았다. 우리 딸 너무 고생했다며. 집에 돌아오면 맛있는 걸 해주겠다고 말했다. 레이가 입술을 꾹 짓씹다가 말했다.

- 아빠. 나 식민지 있잖아. 스피카 공공삼번 거기 쪽.

그렇게 말한 후 눈을 위로 올렸다. 지구에서 보는 마지막 하늘이 커다란 눈에 담겼다.

- 거기 동물원 하나만 만들어주라.

아빠는 흔쾌히 허락했다. 예쁜 우리 막내 부탁이면 뭘 안들어주겠냐고 웃었다. 지구 기념품이 얼마나 많으면 식민지까지 개간해야 하냐고 농을 던진다. 레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치. 진짜 많지.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눈은 고요한 그대로다.

지원의 집에서 얻은 것들이 샘플통 안에 분류되어 있었다. 복제품을 만들기엔 적당한 양이었다.




# 10


레이가 지원을 불러냈다. 지원은 캡슐 안에 오자마자 눈을 꿈뻑꿈뻑 느리게 떴다. 오늘 친구 강아지 산책 따라다니긴 했는데 너무 졸리댔다. 미안하다며 조금만 자도 되냐고 청했다. 레이는 계기판에 뜬 수면 가스 농도를 보다가 대답했다. 응. 잘자.

지원이 완전히 잠든 후 이륙 버튼을 누른다.

캡슐이 둥실 떠오르더니 중심을 찾는다. 그러더니 엔진음을 붕 내며 더욱 높게 오른다. 공원과 학교 부지와 도시가 자꾸자꾸 작아졌다. 작아질수록 산과 바다와 강도 한 눈에 들어온다. 구름의 등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레이는 성층권을 뚫을 때 쯤 아래를 내려다본다. 반도 아래의 작은 섬이 보였다. 저기가 지원이 말하던 제주도구나 싶었다.

왕립 마크가 새겨진 우주선들이 지구 쪽으로 다가왔다.

철거 작업 들어갑니다. 나오세요.

무전이 도착했다. 레이가 알았다고 응답을 보냈다.

외기권마저 벗어난 뒤 속도를 조금 늦췄다. 캡슐 안에서 보는 지구는 감자만한 크기다. 레이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우주선들이 합을 맞춰 레이저를 가동시킨다. 광선이 드르륵 지나가자 지구의 속이 쪼개졌다. 깨진 파편들은 오팔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물과 광석과 여러가지가 암흑 속으로 흩어지는 걸 보고있다. 레이는 그 광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려고 한다.

약속을 괜히 했나.

레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건 볼로 줄줄 흘렀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너무 좋다고 말해야 한다. 기타 칸을 할애해서라도 꽉꽉 채워 써냈어야 했다. 레이는 처음으로 스피카 사람들이 자랑스럽지 않았다. 싫은 일과 수준 낮은 것, 해로운 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레이도 그렇게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걸 전부 좋아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언젠가 지원이 레이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너 진짜 대단하다고. 공주랑 친구 먹은 건 인생 처음이라고.

레이는 울다가 도가 지나치면 숨이 막히고 딸꾹질까지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헛구역질을 하며 생각했다.

이 망할 비행기 멀미 좀 어떻게 해야겠다고.




# 11


김지원.

잘 잤어?

미안해.




# 12


스피카의 3공주는 지원이 수명을 다한 뒤에도 지구 시절의 모듈을 풀지 않았다. 때문에 스피카의 역사서에 3공주의 모습은 달리 남게 된다. 스피카-003은 3공주의 사유지로 지정되었으며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003번에서 생명 활동은 확인되었지만 아무 것도 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정복군주인 1공주와 책략가 2공주와 달리 3공주의 기록은 얼마 남지 않았다.

사학자들은 역사서를 뒤져보다가 김레이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그게 누군지, 어떤 행성의 형식인지 조사하는 것도 한참 걸렸다. 3공주의 별칭인걸 알게 되는 것도 한참 뒤의 얘기다. 왜 그 이름인지 머리를 싸매다가 결론을 내렸다. 아마 귀족 이름 중간에 흔히 붙이던 애칭 아니겠냐고.■  

https://asked.kr/jsypppq

복정백차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