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다섯 살, 현실에게서 도망쳤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에서 자라, 인문계 고등학교를 거쳐 문과 대학에 들어간 평범한 대학생이다. 사실 이젠 대학생이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다. 나는 지난 학기 부로 4학년 2학기를 마쳤으며, 그저 졸업 유예를 통해 재학생 신분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음, 반쪽 대학생이라고 부르자.


내 인생은 언제나 학교 속에 있었다. 처음 유치원에 들어간 4살 이래 20년간 난 단 한 번도 학생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나는 학교 밖의 공간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또래 친구들은 많이들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나는 모르는 사람을 접하는 것에 서툰 편이라 일대일 과외 혹은 재택근무가 가능한 아르바이트만 해왔다(이를테면 교정교열 아르바이트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학교 밖의 공간을 몰랐고, 사회를 몰랐다. 그런 내가 드디어 대학생 신분을 반쯤 벗어던졌다.


2022년이 밝자 나는 여러 가지 불안감에 휩싸였다. 대학생활 내내 학점 관리도 잘 했고, 남들 하는 것만큼은 스펙 쌓기도 했지만, 이제부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취직……. 그래. 취직을 해야지. 그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진로를 고민해서는 아니다. 나는 일찌감치 출판사에 들어가 편집자가 되리라고 진로를 정해두었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앞으로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강의를 듣는 것도 아니고, 과제를 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시험을 치는 것도 아닌, 일을 해야 했다. 그래. 세상 모두가 그러하듯이.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토익 공부를 시작했다. 사실 3학년 때 잠시 토익을 공부한 적이 있었지만, 목표한 점수는 나오지 않은 차였다. 어차피 취직하려면 토익 점수가 필요하다. 일단 고민은 토익을 치고나서 하자. 그렇게 생각을 미루었다. 이게 2022년 1월 초의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난관에 부딪혔다. 토익은 현실도피 수단으로 삼기엔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웃음). 3달을 공부했는데도 점수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답답했다. 공부에 성취가 안보이는 것도 답답했고, 이런 점수로는 취직할 수 없다는 생각도 스트레스였다. 스트레스를 받으니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손에 잡히지 않으니 더욱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내가 노력을 덜 해서,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그래서…….


토익이 1주일 남았는데 차마 신청할 수가 없었다. 점수가 오를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원래 긍정적인 사고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나 같은 성격이면 인생 살기 편할 것이라고. 걱정을 사서 하는 편도 아니고, 안 좋은 일은 금세 잊는 타입이었다. 그런 내가 난생 처음으로 한 달을 우려만 가지고 살았다. 늘상 기분이 침체되어 있고, 때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숨이 조여왔다. 매일 저녁이 되면 시계를 보고 눈물을 쏟았다. 벌써 이런 시간이 되었는데, 나는 오늘 하루 한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코로나 때문에 집과 독서실만 오가던 환경도 문제였던 것 같다. 나는 외향적인 사람인데, 거진 2년 반을 집에만 박혀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내 정신 상태가 유례없이 나쁜 것은 확실했다. 이런 나를 두고 보지 못한 엄마가 말했다. 너 토익 공부 그만두고 여행이나 다녀오라고.


사실 난 몇 달 전부터 여행 계획을 짜고 있었다. 토익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취직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유시간을 만끽하고 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토익 공부가 생각보다 지지부진하여 내 여행 계획은 계속 밀렸다. 스트레스 탓에 모든 의욕이 꺾이면서 여행을 가고 싶다는 욕구도 사라졌다. 두려움에 시험을 신청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관둘 수도 없어서, 관성적으로 독서실에 가는 나날들. 이러던 때에 엄마가 내 등을 떠민 것이다.


많이 고민했다. 아무튼 나는 토익을 치기 위해 3달을 공부했고, 여기서 성과도 내지 못한 채 관두는 것은 옳지 않은 일 같았다. 누구나 겪고 있는 취직 스트레스다.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니다. 내 또래면 누구나 가진 고민일 터. 고작 이런 압박감도 이겨내지 못한다면 한심하고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엄마는 내게 말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매일 밤마다 우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이런 상태로 공부해봤자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이건 자신을 파악하고 잠시 돌아가는 과정이니, 부끄러워할 것 없다고. 그 말에 설득됐다. 우울은 호르몬과 뇌의 문제라고 하던가? 그렇다면 내 뇌가 멀쩡하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우선 나는 나의 마음을 치료해야 했다.


그래서 도망치기로 했다. 4월 초의 어느 날. 인생 첫 번째 현실도피였다.

 

 


0일차

 

현실도피는 쉽지 않았다. 얼이 빠진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닐 셈이었으나, 일단 첫 번째 목적지는 제주도였다. 시작을 제주도를 고른 이유는 별 거 없었다. 얼마 전에 SNS에서 본 제주도의 유채꽃이 예뻤기 때문이다. 나는 무작정 다음날의 비행기와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일단 1주일 치 옷가지를 준비했다. 여행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으나 갈아입을 옷이 부족해지면 코인빨래방이라도 들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챙긴 캐리어 하나와 배낭 하나, 보조가방 하나. 다 합쳐보니 제법 묵직했다.


우선 김포공항으로 가야했다. 그런데 이때 나는 답지 않은 실수를 했다. 글쎄, 전철의 선반 위에 배낭을 올려놓았다가 두고 내리는 바보짓을 한 것이다. 나는 환승역에서 내리자마자 배낭을 놓고 내린 것에 눈치챘다. 사색이 되어 역무실로 달려갔다. 배낭 안에는 필기구와 상비약, 여벌 겉옷, 여벌 신발, 그리고 노트북이 들어 있었다.


역무원은 물건을 되찾을 수 있도록 친절히 도와주었다. 내가 탔던 차에 연락해서 승무원에게 배낭을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어째선지 배낭은 내가 탔던 자리에 없었다. 혹여 내가 탄 차를 헷갈렸을까 다른 전철까지도 찾아봐주었다. 그런데도 내 배낭은 온데간데 없었다. 내리자마자 눈치채고 배낭을 찾기 시작했으니,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역무원은 전철에서 누군가가 배낭을 훔쳐가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 곧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위로해주고는 경찰의 유실물 사이트와 연계하여 물건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비행기 출발 시각까지 2시간도 남지 않았지만, 노트북을 두고 떠날 순 없었다. 결국 나는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배낭 찾기에 몰두했다.


금세 역무원이나 경찰에게서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 환승역 근처에서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가방은 찾을 수 없었고, 몇 시간 째 유실물 사이트만 새로고침할 뿐이었다. 해가 다 지고 나서야 포기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집으로 돌아가자. 나는 캐리어와 보조가방만 가지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질질 끌리는 캐리어가 몹시 무거웠다. 엄마 외의 누구에게도 여행 계획을 알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마음을 다스리러 가겠다고 비장하게 나서서는 이리도 초라하게 돌아오는 꼴이라니.


겨우 끌어낸 의욕이 끊길락 말락 했다. 그냥 여행 때려칠까? 위에서 나는 ‘답지 않은 일’을 했다고 표현했다. 사실 나는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사람이다. 거의 없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없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산 티머니 카드를 아직도 쓰고 있다고 말하면 믿겠는가? 난 아주 꼼꼼하게 소지품을 챙기는 편이다. 그런 내가 난생 처음으로 배낭을 잃어버렸다. 고가의 노트북이 사라진 것도 충격이었지만, 내가 무언가를 분실했다는 상황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스스로도 추스르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딜 가겠다고.


그렇게 공기 빠진 풍선처럼 푸시식 작아지고 있던 나를 다시 한번 일으킨 것은 엄마였다. 네가 자주 안 하던 실수일 뿐, 누구나 배낭 한 번쯤은 잃어버려본다며 말이다. 정말이지, 나는 스물 다섯이나 먹고도 엄마 없이는 살 수 없는 못난 딸이었다. 안 그래도 이전부터 계속 나를 염려하던 엄마에게 계속 걱정을 끼칠 수는 없었다.


잃어버린 것은 포기하고 새로 배낭을 꾸렸다. 다행히도 몇 년 전에 쓰던 노트북이 남아있었다. 몇 년 만에 켜는 것인데도 노트북은 멀쩡하게 구동했다. 이 글도 그 노트북으로 쓰는 것이다. 여벌 겉옷과 여벌 신발도 새로 챙겼다. 그리고 다음 날 비행기를 다시 예약했다. 그렇게 나의 여행은 하루 늦게 시작됐다.


아무거나 끄적이는 잡덕 글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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