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하늘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과 문틈 사이로 보이는 건물 옥상마저 화사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은색의 송풍기는 끊임없이 반짝였고. 부서지는 햇살 사이로 차오르는 바람이 뺨을 스치면 어김없이 뒤를 돌아봤다.


 피터.


 새하얀 빛에 익숙해진 눈이 검게 어스러진 그림자를 만들어 냈지만, 상관없었다. 다만 그 순간도 아쉬워서 눈을 떼지 못했을 뿐이었다. 피터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클린트.


 뭘 그렇게 보고 있어.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마 모든 것을 걱정하고 있는 탓이다. 그냥요, 아무것도. 피터의 목소리는 가벼웠고, 밝은 햇살에 떠밀려 올라갈 만큼이나 높았다. 일종의 긴장된 흥분이 그의 손끝을 타고 올라가면, 피터는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날씨가 좋아서요.

 피터의 대답에 그제야 고개를 들어 문틈 사이의 창문을 바라본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는 훌륭했다. 하늘은 드높고 너무 밝아 새하얗기만 한 태양이 머리 위에 떠있었다. 그 바로 밑에서 지글지글 타오르는 아스팔트는 틀림없이 더울 테지만, 그와 피터는 괜찮았다. 그늘진 집 안에 깨진 창문 사이로 충분한 바람이 통하고 있었다. 바튼은 왼쪽 허벅지에 찬 홀더에 손질한 권총을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피터, 34번지에.

 피터는 손을 들었다. 손을 드는 것은 전장에서의 수신호였다. 내가 말하겠으니 잠시만, 이라는 의미에 바튼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고, 건조한 공기 사이를 파고드는 그의 목소리가 멈춘 것은 아쉬웠지만, 피터는 말할 필요가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은 꼭 필요했다.

 피터. 바튼은 아이를 어르듯이 힘없는 목소리로 피터를 불렀다. 그는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말도 안 되게도 웃긴 일이었다. 그는 한 번도 떼 쓰는 아이를 만난 일이 없었다. 적어도 피터가 알기로는 그랬다. 다시 피터는 문틈 사이로 창문 밖을 내다봤다. 반짝이는 은색의 송풍기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것은 왕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리 와, 날 가져! 은색의 왕관이 반쯤 부서진 지붕 위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저곳은 이미 무너진 왕국이다. 피터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알고 싶지 않아요.


 피터, 이젠 정말 우리 둘뿐이야. 클린트는 여전히 미간에 주름을 지은 채로 말했다. 그의 말이 귓속을 파고 들었다가 꺼져가는 불꽃처럼 사그라졌다. 피터는 깊게 팬 그의 주름을 올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그거, 계속 찡그리고 있을 거예요? 클린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터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에서 시선을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우리 둘뿐인데, 조금 더 편하게 있는 게 어때요? 피터는 클린트의 손을 끌어, 없어진 나무다리 대신에 탁자를 대 놓은 의자에 그를 앉혔다.


 저기 봐요, 저거 왕관 같지 않아요? 반짝거리기까지 하고.


 피터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고요한 침묵이 아이보리색 먼지바람에 섞여 들어가는 것은 이제 지겨웠다. 뭔가 말하고 싶었고, 그만큼 뭔가 듣고 싶었다. 전장의 열기는 새하얀 햇살에 녹아들어, 이제는 고요가 남아 있었다. 아니, 정말로 이제 우리 둘이잖아요. 그런데 계속해야 해요?

 클린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곤 조용히 허벅지에 차 두었던 총을 꺼내, 불에 그슬린 자국이 남아 있는 테이블 위로 올려 두었다. 모든 것이 멈춰있었다. 피터는 숨을 고르게 내뱉으며 숨소리를 죽였다. 왠지 긴장되는 데요, 숨소리가 들릴 것 같아. 피터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네 숨소리 다 들려.

 거짓말. 피터는 얼굴을 찡그린 채로 웃었다. 눈만 좋은 게 아니라 청각도 좋단 말이에요? 클린트는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말했다. 당연히 아니지.


 장난도 치네요.


 피터는 웃었다. 클린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끄덕이다 끝에는 슬쩍 웃었다. 문틈 사이를 타고 들어온 햇빛에 노랗게 그슬린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피터는 기지개를 켜며 자신의 오른쪽 팔을 그의 어깨에 둘렀다. 


 이거 상당히 고전적인데. 클린트가 말했다.


 삼촌에게 배웠거든요. 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첫 번째 순서죠. 그럼 그다음은 뭔데? 클린트는 여전히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반쯤 열린 문틈과 깨진 창문 사이로 보이는 부서진 지붕, 그 위의 은색 왕관을.

 피터는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클린트.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피터는 그의 숨결 가까이에 닿을 수 있었다.


 다음은 키스죠.


 피터의 입술을 가르고 나온 숨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그건, 내 예상보다 빠른데. 클린트의 말에 피터가 작게 웃었다. 오, 언제나 키스가 중요하다고 하셨거든요. 손은 그 다음이고.

 클린트가 눈이 감길 정도로 웃었다. 그것참, 특이한데. 나는 그렇게 안 배웠거든. 피터의 손 위로 그의 손이 닿아 왔다. 손이 먼저지, 먼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멀고, 민감한 부분부터. 손가락이 피터의 손등 위를 덧그렸다. 이거, 통하네. 어디서 배운 거예요? 피터의 물음에 클린트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비밀이지.


 비밀에 비밀, 그리고 또 비밀. 도대체 비밀이 아닌 게 있긴 한 건가요?


 피터가 불만스럽게 목소리를 높여 물었음에도 그는 그저 웃었다. 글쎄, 요원이란 다 그렇지. 피터는 이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요원이란.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는 피터를 바라보며 그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요원이란.

 하지만 이제는 더는 아니지. 담담하게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은 잔인해서, 둘 사이의 고요를 찢어발겼다. 피터는 한숨을 쉬었다. 이젠 우리 둘뿐이니까요. 클린트가 말을 받았다. 히어로, 어벤져스, 쉴드 아무것도 없어, 그저 우리 둘뿐이지. 피터가 자기 자신과 클린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피터 파커, 그리고 클린트 바튼. 단둘 뿐이죠.


 이제 뭘 해야 하지? 클린트가 길 잃은 아이처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명령도, 임무도, 이제 아무것도 없어. 피터는 손을 들어, 클린트의 손을 잡아 내렸다. 즐기는 거죠, 마지막 순간을.

 지구의 마지막 순간을? 클린트가 작은 목소리로 되물으며 맞잡은 피터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인류의 마지막 순간을. 피터는 고개를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함께 있는 거예요.

 낭만적이네.


 클린트가 작게 웃었다. 아주 낭만적이죠. 피터 역시 웃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이제 마지막에 할 만한 일을 해도 될까요? 피터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뜨거운 공기 아래에서 녹아버린 숨소리가 작게 끈적거리는 소리를 냈다. 클린트는 그저 웃으며 입술을 가져갔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두 사람의 숨이 섞여 들어가자, 덥고 달콤한 소음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채워 갔다. 머릿속을 채우던 것들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며 낮은 신음과 함께 세상에 녹아 들어갔다. 순간, 모든 것이 뒤섞이는 착각이 일었다. 입술이 닿고 혀끝이 얽히며 클린트 바튼과 피터 파커가 뒤섞이며 곧 그들이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단둘이서, 온 세상의 곳곳에 키스를 퍼붇는 순간은 마치 영원 같았다. 믿을 수 없었지만, 꼭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질 것 같은 미련한 착각 속에서 두 사람은 눈을 뜨지 않았다. 

 새하얗게 타오르는 지구의 중심에서 나눈 키스는 그 순간, 세계의 전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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