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Ready for the floor_w. 제철망개




그렇게 쉬었어도 연습을 시작하니 몸은 금방 풀렸다. 싱글 발매는 이미 정해진 일이었고 곡도 남준형이 써 준 덕분에 내가 쓴 가사의 검수와 녹음, 화보 촬영, 안무 연습은 여유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여러 명이 맞춰야 했던 집단 군무보다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솔로무대는 아무리 연습을 해도 마음에 쏙 들지가 않아서 오랜만에 안무 연습만으로 꼬박 하루를 보냈다. 팔다리가 풀려 한참동안 바닥에 누워 있다가 이럴 거면 집에 가서 눕자 싶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매니저에게 차를 대기시키고 나가는 길에 회사에서 새로 데뷔시키는 걸그룹의 인사를 받았다. 이제 막 열일곱, 열여덟이 되었다는 그녀들은 내가 그렇게 어려운 모양이었다. 지쳐서 눈을 뜨고 있는 것도 벅찬 지경이었지만 나를 우상처럼 바라보는 다섯 명과 악수를 했다. 우리 후배님들 열심히 하셔서 성공적으로 데뷔하시길 바란다는 말도 잊지 않았고.



“형님, 전화 왔는데요.”

“…어? 아, 어….”



「어, 지민아. 바빠?」

“아뇨, 연습하고 이제 집에 가요.”

「아, 피곤하겠네.」

“왜요?”

「그냥, 너 녹음 날짜도 잡아야 되고. 술이나 한 잔 할까 해서.」

“갈게요. 어디로 갈까요?”


비척거리는 나를 걱정하는 매니저를 퇴근시켰다. 남준형 집까지만 데려다 주면 알아서 하겠다고 해도 매니저는 영 찜찜한 표정이었다. 옛날만큼 사생이 들러붙는 것도 아닌데.

어딘가 투박해 보이는 목재가구와 비슷한 톤으로 꾸며진 내부는 집주인을 꼭 닮아 있었다. 숙소에서 함께 지낼 때도 형의 방과 작업실은 딱 이런 느낌이었다. 어색하게 비어있는 한쪽 벽은 그새 늘어난 피규어를 전시해 놓기 위해 유리장을 주문제작 중이라고 했다. 여전하구나.


“형, 저 샤워 좀 할게요. 연습하고 바로 와서.”

“갈아입을 거 줄까?”

“네, 아무거나요.”



남준형이 와인 셀러와 와인 글래스를 구비해놓고 살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 술을 그렇게 즐기는 편도 아니었는데, 사람이 바뀌는데 시간만한 게 없다. 내 옷보다 두 사이즈는 족히 큰 후드티와 반바지를 얻어 입고 거실 바닥에 앉아 형이 따라주는 와인을 받았다.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형이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한강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남준형이 만드는 음악적 영감의 원천. 형은 지금도 고민이 생기거나 작업이 막히면 자전거를 타고 한강 둔치를 돈다고 했다. 면허는 땄어도, 운전은 아직도 겁난다면서.

가이드 녹음에 맞춰서 안무 연습하는 게 불편하진 않은지, 솔로곡의 고음 부분이 내가 낼 수 있는 음역대의 최고 수준 이라든지, 컴백 무대의 컨셉, 아직 멀었지만 연말 시상식 까지. 대화는 끊길 듯 말 듯 이어졌다. 와인 한 병을 다 비웠을 무렵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떴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 연락할 만한 사람은 딱히 없는데,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일 것 같아서.


“지민아, 폰.”

“안 봐도 돼요.”

“급한 거면 어떡해.”

“급한 거면 매니저한테 전화가 오겠죠.”



“…혹시 정국이?”

“그럴걸요.”

“아직 안 만났어?”

“녹화 때 인사만 했어요. 모른 척.”

“모른 척 한다고… 그게 될 일이냐.”



집으로 가려는 나를 형이 잡았다. 이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형 집 근처에는 사생으로 보이는 팬이 몇 명 보였다. 남준형은 농담처럼, '박지민, 아직 안 죽었네' 했지만 결코 나를 웃기려고 하는 말이 아닌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때만큼은 아닐지라도 아직까진 내가 몸을 사려야 했다. 형은 남은 작업이 있어서 마저 하겠다고 했고 나는 술을 얻어 마시고 옷도 빌려 입은 주제에 형의 침대까지 점령했다. 메시지를 무시한 업보인지 밤새 어릴 적 정국이가 보여 잠을 설쳤다.





*



인생 첫 키스라는 과업을 달성하고도 사실 나는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막연히 나는 누구와 키스를 하게 될까, 했던 그 물음의 답이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아끼는, 좋아하는 정국이란 게 그저 괜찮았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내 마음은 깜빡거리는 불씨 정도였다. 불이 붙을락 말락 하는 그런 불씨.

지방행사와 음방으로 꽉 찬 한 달을 보낸 후 다시 만난 정국이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참 유치하게도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게 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로 피곤함에 쩔어 있는 정국이를 굳이 바깥으로 불러냈다. 일부러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의 카페에 앉아 정국이를 기다렸다. 한 달이 지났다고 바뀐 건 없었다. 무심히도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 심지어 맞은편의 커다란 코스메틱 샵에서는 우리 노래가 나오고 있었는데. 아니 여보세요, 저기 저 노래를 부른 게 나라니까요. 하고 크게 소리치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는지.


- 형.

- 정국아. 뭐 마실래?

- 나 배고파요. 밥 먹으러 가요.

- 그래.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은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내가 일부러 사람이 많은 가게에 골라 들어가는 것도 정국이는 이유를 알고도 남았을 테지만 별 말은 없었다. 저렴한 무한리필 고기집에 가서 배가 터지도록 저가의 삼겹살을 구워 먹고 밥까지 볶아 먹었다. 엄마가 용돈을 넣어둔 체크카드로 계산을 하는데 정국이가 쭈뼛거리면서 뒤에 섰다.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바닥만 내려 보고 있는데 그게 어찌나 귀엽던지.

아직은 나와 키가 비슷했던 정국이의 정수리를 쓱쓱 쓰다듬고 밖에 나가 조금 걸었다. 인파들 사이로 곳곳에 크고 작은 버스킹이 들렸다. 정국이는 홀린 듯이 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았고 가만히 서서 음악을 들었다. 우리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지만 이미 고정팬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아 보였다. 아마 우리는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다. 나는 TV에도 나오는데 이중에 1명도 나를 몰라보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고 정국이는 솔직히 아무 표정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강아지 같은 눈이 처연해 보이는 정국이를 끌고 지하방으로 돌아왔다.


- 정국아, 뭔 일 있어?

- …팀이 잘 안 돼요.

- 왜.

- 그냥… 다들 하고 싶은 게 다른가 봐요….


풀죽은 정국이 목소리를 들으니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그저 안아줘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다른 뜻은 없었다. 그래서 기타를 만지작거리는 정국이를 뒤에서 안았다. 조금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정국이는 곧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그리고 허리를 감은 내 손을 가볍게 잡았다.


- 형.

- 어.

- 키스해도 돼요?

- …어.


확실히 내 손보다 큰 정국이의 손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볼이 눌려 튀어나온 내 입술에 정국이의 입이 곧장 닿았다. 또 바보 같은, 숨 못 쉬는 키스. 날씨는 겨울이 다 되어 찬바람이 불어대고 볕도 들어오지 않는 찬 기운 가득한 지하방은 다 큰 남자 두 명이 얼굴만 벌겋게 익었다.

마주보고 서서 헐떡이다가 먼저랄 것 없이 매트 위로 푹 주저앉았다. 정국이는 그대로 나를 눕혀 내 위로 포개졌고 숨소리는 그 간격이 짧아졌다. 상체는 매트, 하체는 방바닥에 어정쩡하게 걸쳐진 채 추위를 피해 온기를 나누려는 동물처럼 꼭 껴안고 입술과 뺨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어설프기도 그렇게 어설플 수가 없지. 정국이의 다리 사이가 불룩해 진 것을 알았지만 그땐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우리에게는 키스만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 후로는 정국이를 만나면 밥을 먹고 지하방에서 뒹구는 게 일상이 됐다. 이게 뭘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이게 나쁜 짓이라거나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뒹군다고 해봐야 언제 만들어 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스프링 소리가 들리는 매트 위에 나란히 누워 서로 끌어안고 한숨 자거나 눈을 뜨면 입술을 맞대는 게 다였다. 타액이 오가는, 혀를 쓰는 키스는 나중의 일이었다. 그러면서 단 한 번도 서로에게 우리가 이런 짓을 해도 되는 걸까, 그런 대화는 나눈 적 없었다. 우리는 그냥 허락된 시간만큼은 본능에 충실했고 기분이 좋았다.



데뷔한 그 해 연말에는 신인상도 받았고 첫 정규앨범도 반응이 괜찮았다. 다른 팀에 비하면 미미한 규모였지만 팬덤 이라고 할 만큼의 화력이 생겼고 덕분에 첫 팬미팅도 하게 됐다. 다이어트와 연습은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았지만 내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는 팬이 있다는 게 기뻐서 평소에는 결코 하지 않던 애교 같은 걸 부리기도 했다. 팬미팅이 끝나고 sns를 훑어보니 내가 했던 오버스러운 액션이며 애교는 두고두고 놀림감이 됐지만 그래도 뿌듯했다. 그렇게 한 층 더 바빠진 아이돌로서의 생활이 다시 반복됐다.



- 형, 많이 바빠요?

- 어… 요새 스케줄 늘었거든.

- 잘됐네요.

- 근데 진짜 피곤해. 그저께 음방 녹화하는데 딜레이만 6시간이었어….

- 그렇게 길어요?

- 앞 순서 밀려서, 우리가 제일 짬 없으니까 기다려야지 뭐.



형들이 피곤하다고 칭얼거려 겨우 얻어낸 귀한 시간을 정국이 방에서 보내고 있었다. 나는 첫 정산을 받았고 정국이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기타를 쳤다. 장비 욕심이 생겼는지 방에는 못 보던 자잘한 이펙터와 저렴한 시스템 장비 같은 것들이 늘어나 있었다. 내가 손으로 이펙터를 만져보며 이건 뭐하는데 쓰는 거냐고 물어보면 정국이는 신이 나서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전문용어를 써가며 열심히 설명해줬다. 신기했다. 정국이는 아주 간단했지만 짧게 곡도 썼고 떠오르는 멜로디가 있으면 그때그때 녹음해뒀다가 생각 날 때 다시 되짚어보곤 했다.


- 이걸 다 외워?

- 외워야 치죠.

- 헐… 대박.

-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래요. 그냥 기본?

- 난 진짜 악기는 못 다룰 거 같애….

- 형 손가락 짧아서 코드 못 짚어요. 킥킥.

- 이 자식이.


한 대 때려주려고 했는데, 정국이는 내 손가락을 주물거리다가 제 입에 갖다 댔다. 그리고 츗, 하는 소리를 냈다. 순간 아까 손 씻었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손가락에서 손등으로 손목으로 조금씩 위로 올라와서 정국이의 입술이 처음으로 내 목덜미에 닿았을 때 옆구리부터 소름이 돋았다.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런 곳에 입술이 닿았다는 게 그저 생소하고 부끄러워서 잘게 몸을 떨었다.


- 아….

- 싫어요?

- 아니, 안 싫어.

- …안에 만져도 돼요?


솔직히 이건 좀 놀랐다. 그래도 정국이가 민망할까봐 콧김 섞인 소리로 작게 ‘응’ 했다. 정국이도 조심스럽긴 마찬가지여서 후드티 안으로 더듬더듬, 천천히, 땀이 밴 손가락이 들어왔다. 허리의 잘록한 부분을 쓰다듬으며 나머지 한 손은 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나는 내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쪼그려 앉아 차렷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가 점점 몸이 기울어져 무게를 더해오는 정국이를 버티지 못하고 풀썩 누워버렸다. 목 언저리에 오래도록 숨을 뱉어내던 정국이의 입술이 조금씩 내 얼굴로 가까워 졌다. 정국이를 꽉, 부둥켜안았다.


- …형, 여기 봐도 돼요?


마침내 정국이도 쑥쓰러운지 내 허리에 감긴 벨트를 잡고 봐도 되냐고 물었다. 뭘 보고 싶다는 건지 뻔했지만 선뜻 대답은 못했다. 보여도 되는 건지, 보이고 나면 정국이랑 나랑 뭐가 되는 건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목소리도 못내고 입만 뻐끔거리니 정국이는 ok로 알아 들은 건지 절그럭 소리를 내면서 벨트를 풀어 냈다. 분명히 반은 호기심일 테지. 


- 형, 안 돼요?


살 위를 덮고 있는 게 겨우 한 겹만 남았을 때 정국이는 또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 안 돼요?

- 아니, 안, 안 돼… 아니….

- 형 싫으면 안 할게요.

- 아….


아니야, 안 되는 게 아냐. 그냥 빨리. 나 좀 어떻게 해 줘, 정국아.







***





뭐라도 해라 후하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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