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유비와 제갈량 / 조조와 사마의 / 손책과 주유가 각각 궁의 주인과 신선으로 나옵니다.

제갈유비 연성으로 시작했지만, 둘이 만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동양 AU 및 동인 설정 날조가 항상 함께합니다.

본편에서 못했던 이야기와 완결 이후 유장과 유비와 제갈량의 이야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해당 글은 본편을 읽으셨다는 전제하에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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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새는 언제나 모든 이에게 공평하다.


그것은 변함없는 진리였고. 이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며, 더 나아가서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명령과도 같았다. 옥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묵직하게 운명을 누르곤 한다. 군주조차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일개 신선이 도망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다못해 그 신선이 새로 선출된 옥새의 관리자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애초에 이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렇게 흐르지 않으면 곧 무너지기 십상이었다. 신선은 태어날 때부터 이것을 머릿속에 간직한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약간 틀어진 곳이 생겼는지. 옥새는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말이 없었고,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전대의 관리자가 그러했듯. 그 전 전대의 관리자가 사마휘에게 모든 권한을 양도했듯. 시간이 흐르고 강줄기가 바뀌는 것처럼 아주 느리게.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변화 가운데 제갈량이 있었다.



“…….”



사실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이미 한번 소멸된 몸이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서 주군을 막아섰을 때, 이미 자신의 운명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유비에게도 늘 하던 말이었다. 군주를 보좌하기 위해 태어난 신선에겐 윤회가 없다. 그저 육체가 사라지면 끝날 생이라 많은 순환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갈량은 어느 정도 짐작을 한다. 부디 이 이후에 주군이 많이 슬퍼하지 않기를. 그저 작은 소원을 빌었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다면 한마디 정도는 하고 싶었다.



‘아.’



이제 끝났구나. 마지막 기억이 저 멀리 넘어가는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희미한 빛을 봤다. 흩어지는 신선을 그러모은 채 꼭 멀리 가지 말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을 어디서 느꼈더라.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간신히 움직여봤지만 제대로 된 답변을 얻을 수 없었다.


세상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제야 허무하지 않은 이유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세상이 변할 수 있을까.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꾸 한 점 아쉬움이 남아서 뒤를 돌아보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머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량.”

“…….”

“…량! 어디 있어.”

“…….”



그 순간. 귀가 트인다. 의식은 저 멀리 가라앉아있지만, 흐릿하게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기분이 들었다. 소리를 따라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태어난 뒤에 의식이 깨어나기에 그 전 기억은 없다. 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제갈량!”

“…….”



누군가 자신의 몸을 콱 끌어안는다. 그 순간 온몸을 감싸고 있던 물이 느껴진다.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고 숨을 내쉴 수 있게 된다. 물론 의식은 몸에 갇혀있지만, 적어도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기엔 충분했다. 제갈량을 껴안은 유비는 내내 울고 있었다.



“제갈량. 이제 돌아가자.”

“…….”

“응?”

“…….”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나한테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

“그렇게 사라지면 난 어쩌라고. 응?”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지만, 유비는 계속 말을 건다. 제갈량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굴던 유비는 겨우겨우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서 연못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림자가 없는 연못이라 불리는 이곳은 모든 신선이 태어나는 곳이었다. 유비는 물가에서 끝없이 넓은 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꼭 예전에 봤던 수경 같았다. 제갈량이 사용하는 것도 꼭 이런 기분을 들게 한다.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어 자꾸 제갈량을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는다면 품 안의 신선이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았다.



“유비.”

“…….”

“유비!”

“…….”



손책이 유비를 부른다. 하지만 들리진 않는 모양이었다. 혼란한 군주를 달래주는 것은 백호궁의 주인이었다. 자신의 건강부터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이쪽도 유비가 마음에서 떨어지지 않는지 계속 주변을 떠나지 못한다. 깊게 생각하면 오히려 먹혀버린다. 손책은 유비의 어깨를 덥석 잡고 흔들었다. 유비가 아무리 강건한 마음을 지녔다고 했지만, 지금은 틈이 너무 많았다.



“유비!”

“…….”

“…괜찮은가?”

“…응.”

“정말 앞뒤 없이 그렇게 뛰어들면 어떡하느냐.”

“하지만…….”

“됐다. 둘 다 무사하면 그만이지. 도와줄까?”

“…….”

“궁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건…….”



유비는 약간 망설인다. 사실 허겁지겁 제갈량을 끌어내긴 했지만, 이 결정이 잘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물가에서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신선만 끌어안고 있었다. 혹시나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이 품 안에 있는 이가 진짜 내 신선이 맞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하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비도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실정이니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사마휘가 이곳에 제갈량이 있으리란 말을 해서 허겁지겁 달려왔을 뿐이었다. 유비는 신선이 태어나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군주가 자리에 오르기 전 이미 신선들은 모든 준비를 마친 채 기다린다. 서서는 조금 늦게 태어났지만, 그 시기엔 유비는 이곳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처음이라서.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은 마음이 울컥 올라온다. 만약 여기에 누워있는 사람이 자신이고, 제정신인 사람이 제갈량이라면 이런 일이 있을 때 당황하지 않을까. 아마 누구보다 먼저 움직이면서 사방을 채근할 텐데. 유비는 그럴 수 없었다.



“유비.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아라.”

“…….”

“주군. 주군이나 신경 쓰세요.”

“응? 아니…왜. 나한테 그러느냐.”

“걱정되니까 그러죠!”

“…….”



주유가 슬쩍 끼어든다. 하긴 손책이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었다. 그래서 주유가 자신의 생명을 깎아 주군을 지탱하고 있는 것도 맞았다. 그러다 보니 손책이 과하게 힘을 쓰는 것을 두려워한다. 둑이 터지는 것처럼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랐다.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응?”

“제갈량은 강한 신선입니다. 물론 저보단 못하지만.”

“…….”

“유비 님께서 지금 마음 가시는 대로 하시면 응당 그 길을 따라 돌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신선은 주군의 도구.”

“…….”

“어찌 주인을 놔두고 떠나겠습니까.”

“…….”



주유의 말이 조용히 파고든다. 유비는 차라리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해주길 원했다. 물론 군주라는 자리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 손안에서 부서지는 제갈량을 보았다. 그 고통을 또 느낄 수는 없기에 계속 망설일 뿐이었다.



“…괜찮을까.”

“유비. 걱정 말아라.”

“…….”

“내 신선도 괜찮다고 하지 않느냐.”

“…….”

“믿어보아라.”

“…….”



유비가 제갈량을 좀 더 끌어당긴다. 제갈량이 내내 말했던 모든 것이 이제야 현실로 다가온다. 왜 그랬을까. 끝을 알면서 달려가는 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걸 알면서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 후회가 물밀듯 밀려온다. 해주지 못한 안타까움은 한 번에 뭉쳐서 유비에게 쏟아진다.



“제갈량.”

“…….”

“돌아가자.”

“…….”

“네가 다시 내게 온 이유가 있다고 믿어.”

“…….”



어느 정도 결심이 선다. 제갈량의 육체는 이미 그 힘을 다했으니 사라지는 것이 맞다. 하지만 옥새는 그가 다시 필요함을 안다. 새로운 옥새 관리자가 되어야 했고, 유비를 도와야 한다. 그래서 또 한 번 생명을 허락한다. 그 허락이 비단 유비를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길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깃을 따라 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무거울 법도 한데 유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갈량이 자신을 찾아 돌아왔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혼자서 황폐해진 길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비는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간신히 복구된 궁이었다. 푸른 대나무가 흔들리는 곳. 제갈량과 유비가 만난 곳. 그리고 다시 한번 인연을 시작할 장소로 돌아온 둘은 지쳐있었다.

 

 


**

 

 


제갈량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숨은 쉬고 있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유비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홀로 밤을 지새우는 것은 유비의 몫이었다. 지난날 제갈량이 그랬던 것처럼 유비는 홀로 궁 안에 깨어있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갈량 너도 이런 밤을 보냈을까.”



신선에게 닿지 않은 질문은 하릴없이 밤하늘로 흩어진다. 길게 한숨을 내쉬면 입김을 따라 근심이 흘러나온다. 어떻게 해야 이 답답한 마음이 풀릴지 알 수 없었다. 크게 소리를 지를 수도 땅을 내리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숨만 자꾸 흘러나온다. 이렇게 무능할 일일까. 유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스르르 주저앉았다. 군주는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하던 세간과 달리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어쩌지.”



어떡해야 할까. 스스로 답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신선은 군주에 대해 아는 것이 많다. 태어날 때부터 군주를 보좌하기 위한 몸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 많아진다. 그래야 모든 것에 대비할 수 있었다. 군주는 그런 신선의 도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연이기에 그 누구도 이상하단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만큼 군주는 신선에 대해 알지 못한다. 신선은 그저 도구일 뿐이라는 소리를 늘 듣곤 한다. 그러다 보니 신선 또한 군주에게 자신에 대해 많은 정보를 흘리지 않는다. 어차피 한번 생이 끝나면 사라질 몸. 그저 군주를 모시면 족합니다. 모든 신선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런 말을 한다. 이제야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은 자신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왜. 너에게 해줄 것이 아무도 없을까.”

“…….”

“응? 제갈량.”

“…….”

“난 왜 아는 것이 없고,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까.”



여전히 대답이 없다. 이렇게 한탄을 해봤자 없는 지식이 생겨나지 않는다. 유비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기에 적어도 그것만은 지키려고 했다. 제갈량은 여전히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분명 눈앞에 보이는 데, 이불마저 무거워 보이는 그 기분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또 한 번 부서질까 쉽게 손도 쥐어보지 못한다.



“…….”



딱히 하는 일이 없기에 유비는 내내 제갈량 곁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살살 머리카락을 쓸어본다. 손끝이 안타깝게 얼굴선을 타고 내려오다 입술 근처에 머물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슨 일을 해야 네가 눈을 뜰 수 있을까. 내가 인간계를 헤매고 있을 때 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같은 생각이 계속 살아 올라오면 모든 것이 먹힐 수 있다.


그런 충고마저 제갈량이 해준 것이니. 도저히 제갈량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처음에 어떻게 만났더라. 그리고 그 이후엔 무엇을 했더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의 얼굴을 뜯어보면 옛 생각이 난다. 그러다 문득 손가락을 코 밑에 대본다.



“…….”



숨은 쉬고 있는데, 도통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손책이 지나가는 말로 주유의 의견을 전해주었다. 아마 몸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 쪽으로 부족한 점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유비도 그 점은 인지하고 있었다. 제갈량의 육체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깨끗하고 단단했다.


하지만 눈을 뜨지 않는 것은 역시 옥새가 다시 살려내면서 무엇인가 길게 상처를 남긴 것이 아닐까. 옥새는 이것도 모두 염두에 둔 채 제갈량을 살렸나. 아무리 궁금증이 많다고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선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갈량.”

“…….”

“눈 좀 떠봐.”

“…….”

“아니면 이것 좀 먹어보던가.”

“…….”

“정말 괜찮은 거지? 그저 조금 피곤해서 이러는 거라고 믿어도 괜찮을까?”

“…….”

“자꾸 나쁜 생각이 들어.”



그럴 때마다 제갈량을 품에 안아본다. 그리고 얼굴을 쓰다듬던 손가락으로 입술을 조금 벌리고 수저로 물을 떠 넣었다. 물이 넘어가는지. 아닌지. 그것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움직임이 없었다. 그래도 이러면 조금 반응이 있어서 한시름 놓는다.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은 신선이 무사할 때 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반대로 추측하게 된다. 이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억지로라도 제갈량을 깨워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상태가 정신과 육체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의식의 바닷속에 빠져있는 것이라면 어떡할까. 오히려 제갈량은 구해달라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괜찮을까.”

“…….”

“난…정말.”

“…….”

“하나도 결정을 못 하겠어.”

“…….”

“어떡하면 좋지. 제갈량.”



언제부터 이렇게 약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갈량이 보았으면 크게 한마디를 했을 것이 뻔했지만, 당장 눈앞에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신선을 둔 군주는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신선은 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그건 유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가만히 제갈량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단정하게 생긴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혈색이 돌고 숨이 터져 나오면 금방 일어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더디기만 하는지. 신선의 숨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유비의 애를 태워 죽이려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입술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제갈량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눈을 감았다. 제갈량은 군주의 상처를 흡수했지만, 유비는 오히려 힘을 나눠준다. 천천히 응룡의 힘이 흐르기 시작한다. 일렁이는 힘은 금방이라도 금가루가 되어서 사방에 흩날릴 것처럼 굴었다.



“…….”

“…….”



입술을 가만히 물었다가 놓는다. 떨어질 것처럼 움직이다 이내 더 깊어진다. 제대로 받아들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거부 반응은 없는 듯했다. 유비는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볼부터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더니 이네 눈 밑까지 번진다. 얼마나 더 힘을 나눠주어야 제갈량이 깨어날까. 이것조차 알 수 없으니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

“…군.”

“응?”

“…….”

“잘못 들었나…….”



제갈량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허겁지겁 멀어진다. 그리고 가만히 바라보았지만, 꼭 꿈만 같았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손끝으로 입술을 쓸어본다. 몇 번이나 제갈량도 했던 일인데, 오늘따라 이렇게 부끄러운지. 헤헤. 혼자 실없이 웃다가 다시 신선을 바라보았다.



“어떡해. 제갈량.”

“…….”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어.”

“…주군다우십니다.”

“역시. 그렇지?”

“…….”

“어?”



볼을 손끝으로 긁으면서 웃던 유비가 순간 굳었다. 그러더니 눈만 깜박인다. 방금 들었던 소리가 뭐였지. 갑자기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혼란해진다. 하지만 좀처럼 고개를 들어 제갈량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혹시 기대했다가 더 크게 실망할까 봐. 자꾸 실망하다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칠까 걱정이 된다. 유비를 괜히 옷자락을 쥐었다가 놓는다. 그런 유비의 손 위로 익숙한 감촉이 닿았다.



“그렇게 계시는 것은 주군답지 않습니다.”

“…….”

“응당 일어나서 인사를 드려야 마땅하지만.”

“…….”

“당장 움직일 수가 없어 이렇게 누워서 인사를 드리는 것을 용서하세요.”

“제…갈량.”

“예. 주군.”

“제갈량?”

“예. 신선 제갈량 여기 있습니다.”

“…….”

“주군은 항상 이러십니다.”

“…….”



눈물이 터진 것처럼 흘러나온다. 큰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자 옷자락이 금세 젖어 든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턱에 맺힌다. 제갈량의 손이 유비의 손을 잡았다가 다시 놓는다. 꼭 주군을 달래려는 것처럼 손등을 톡톡 두드린다. 그 손끝이 익숙하다. 손이 천천히 유비의 볼을 감싼다. 꼭 강아지가 손에 엉기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볼을 기댄 유비는 이미 눈물에 푹 젖어있었다.



“제가 늘 이야기 하지만. 자꾸 이렇게 우시면 좋은 군주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몰라. 그런 거.”

“여전하시네요.”

“…….”

“너무 넓어서 천천히 변하시는 분을 다시 모시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

“그런데.”

“응? 왜?”

“…….”

“어디 불편해?”

“아뇨. 제가 어떻게…….”



황망한 말끝이 아득하다. 천하의 제갈량조차 무슨 일이 있었는지 흐릿했다. 마지막 기억에서 모든 것이 끊겨있었다. 흐릿하고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실제인지. 아니면 옥새가 만들어낸 가짜에 불과한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지만. 처음 눈을 뜨고 유비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주군은 늘 정이 많다. 금방 눈물을 흘리면서도 제갈량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아. 정말 주군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가슴에 울컥 감정이 스민다. 옥새는 어이하여 다시 제갈량은 이곳에 보냈을까. 누구에 의해서 태어난 운명인가. 흐르는 바람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정신이 들어서 다행이야.”

“주군…더 우시면 얼굴이 못나지십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예. 그렇네요.”

“제갈량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는 줄 알고…그러니까.”

“천천히 말씀하세요. 이 제갈량 어디 가지 않습니다.”

“그게…….”

“전 이런 한결같음을 좋아합니다. 조금이라도 덜 허무할 수 있으니까요.”

“…….”



일단 정신을 차리니 몸은 빠른 속도로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꼭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유비는 침대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하루를 꼬박 누워서 보냈고, 다음 날이 되자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물론 어디 갈 생각을 하지 말라며 내내 제갈량을 막아선 유비도 그런 좌식 생활에 톡톡한 도움을 주었다. 괜찮다는 말은 애초에 주군이 들을 생각이 없으니 입이 아프게 반복할 이유가 없었다. 이럴 땐 그냥 유비가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것이 낫다.



“제갈량.”

“네?”

“이제 정말 괜찮아?”

“주군은 느끼시지 못하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원래는…군주의 힘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

“이상하게도 지금은 아주 미약하게나마 몸속에 힘이 머물고 있군요.”

“좋은 거지?”

“옥새가 절 이렇게 살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물론 주군이 제 삶의 지표가 되어주신 것도 맞습니다.”

“…….”

“제가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태가 제대로 주변 상황을 알지 못합니다. 옥새에서 알려주는 정보가 있긴 하지만, 확실히 부족합니다.”

“그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겁니까. 주군.”

“…….”

“예?”



유비는 말이 없어진다. 제갈량은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무리 저런 식으로 말한다고 해도 똑똑한 신선이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옥새가 살려낸 인물이 아니던가. 굳이 모든 일을 유비의 입에서 듣고 싶어 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모든 것이 유비가 바라는 세상이 될 것이란 확신과도 같았다.


군주를 위해 태어나 수많은 싸움을 했다. 그리고 꿈을 위해 사는 신선은 가만히 자신의 주군을 바라본다. 신선이 가진 꿈은 주군 그 자체였으니. 유비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돕고 싶었다. 옥새의 관리자가 되고 영생을 지내면서 다음 후대를 만나고, 새로 태어나는 군주를 보살핀다. 그러다 먼 길을 떠났던 신선이 다시 돌아오면 천천히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었다.



“천천히 이야기해줘도 괜찮아?”

“주군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쩐지 불안하네요.”

“에이. 왜 그래.”

“주군은 늘 제가 생각하지 못한 일을 찾아오시니까요.”

“…….”

“농담입니다.”

“일어설 수 있겠어? 계속 누워있으니까 불편해 보여서.”

“못할 건 없죠.”



언제는 침대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더니 이젠 밖으로 나가보자고 한다. 주군의 생각을 당최 종잡을 수 없었다. 제갈량이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유비가 걱정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멀쩡하다. 애초에 정신만 차리면 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제갈량을 부축하려 했던 손이 머쓱하게 공중에 멈춰있었다. 제갈량은 늘 자신을 돌봐주는 것 같았는데. 이런 곳에서 마저 군주와 신선의 차이가 보인다.



“…….”

“주군?”

“아니 건강한 것 같아서…다행이야.”

“…….”



어색하게 뻗은 손을 주춤주춤 내리려는 그 순간 제갈량이 두 손을 꾹 잡아 온다. 손깍지를 낀 채 손가락으로 손등을 꼭 누른다. 어. 유비의 눈이 동그랗게 뜬 채 맞잡은 손을 바라본다. 제갈량은 그런 유비를 끌어당긴다. 예전 같았으면 한번 버텨보기라도 할 텐데, 혹여 제갈량의 몸에 무리가 갈까 봐 군주는 내내 고분고분했다. 제갈량은 유비를 품에 안은 채 낮게 한숨을 쉰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

“아직도 솔직히 믿기지 않는군요. 제 몸은 이미 힘이 다했을 텐데.”

“…….”

“그런 일이 있음에도 제가 주군을 놓지 못하는 것은…….”

“…….”

“그저 제 질투이며 고집일 텐데. 주군은 이런 저도 가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갈량은 당연히 가족이지!”

“…….”

“왜 자꾸 멀리 갈 것처럼 이야기해.”

“…….”

“난 제갈량이 그럴 때마다 무서워.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주군.”

“눈앞에 있어도 자꾸 멀어져 보인단 말이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물론 하나하나 알아야 할 것은 많지만, 지금 당장은 유비를 품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텅 비어버린 신선의 몸속에 단 하나 남아있는 감정이었다. 주군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새끼 오리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좀 더 가까이. 눈앞에서. 복잡한 생각이 들 때마다 제갈량은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그런데 오늘은 제대로 갈무리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

“…….”



제갈량의 입술이 차지게 붙어온다. 유비는 늘 그럴 때마다 절로 눈을 감곤 했다. 제갈량은 그런 주군의 얼굴을 보면서 만족할만한 미소를 짓곤 한다. 눈 밑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조금 눈을 뜨면 그 앞에 늘 보고 싶은 얼굴이 한가득 보인다. 입술을 살짝 깨무는 제갈량을 보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주군.”

“…제갈량.”

“신선 제갈량. 인사를 올립니다.”

“어서 와. 제갈량.”



둘이 있어도 마냥 좋았다. 당장 내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이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한참 입술을 맞댄 채 웃는다. 꼭 밤에 달이 뜨는 것 같은 기분이라 했다. 그러다 살짝 멀어진 유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춤을 추는 것처럼. 혹은 무술을 하는 것처럼 유려하게 움직이는 유비를 따라 제갈량도 발걸음을 옮긴다. 대나무 향기가 바람에 날린다. 늘 보던 그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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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가 아까워 조금 더 적어봅니다.

책을 읽으신 분들께여 여기까지 보실지 모르겠지만, 부디 읽어주시길 빌고 있습니다



쩜오 연성 창고 트위터 : @hwanwol_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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