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티 워가 일어나지 않은 세계입니다.




*


토니 스타크가 피터를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건 결단코 아니었다. 그건 아니었는데, 그간의 노력이 무색하게 이렇게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은 사람을 힘 빠지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페퍼의 부름으로 간만에 회사에 가는 길이었다. 집에서 나오는 건 오랜만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스타크라 써진 번호판을 단 아우디가 신호에 걸려 멈춰 서 있었다. 초록불로 바뀌기 직전이었다. 고개를 돌리던 토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럴 리가 없어.  부정의 말부터 나왔다.

시선의 끝에 그가 그토록 찾아해매던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눈을 돌리면 사라질까 감히 깜박이지도 못하였다. 어느새 신호가 바뀌었는지 주변에서 빵빵 소리가 들려오다 이내 차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챘는지 그를 피해 지나갔다. 

그는 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참았던 숨이 터져나온다. 이건 꿈인가? 눈을 깜박거려도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자 그도 이 쪽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돌려왔다. 토니는 분명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공중에서 시선이 얽혔다.

뻐끔대던 입이 간신히 열렸다.

"... 피터."

피터의 환상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그건 모두 꿈 속이었는데. 

그렇다면 지금은 꿈 속인가? ... 아냐. 그럴 리 없다.

깨닫고 나니 마음이 급해졌다. 문을 열고 내려 차들이 지나는 도로를 건너기까지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피터도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눈을 돌리지 않았다. 피터가 도망갈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이 차올랐다.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그를 피해갔다.

피터는, 그를 보고 도망가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표정이 좋지도 않았다. 얼핏 불안해보이기까지 하는그 눈이 얼마 안 가 토니의 얼굴 아래로 시선을 비껴내렸다. 그 잠깐이 애탔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한산하던 길가는 금세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이 사람들은 왜 사람을 가만히 냅두지 않지? 하고 조급해진 마음에 발걸음을 빨리 하다가.

"토니 스타크야!"

"세상에, 토니!"

"토니!"

"토니!"

사람들이 저마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평소라면 그들을 향해 서비스용 미소를 날려주며 브이라도 그렸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인도에 올라선 토니가 마침내 인파에 반쯤 파묻혀 있던 피터의 손을 잡았다. 실제로 잡히는, 실체가 있는 사람이었다.

맥이 탁 풀렸다.

"너..."

"......"

"피터 파커네."

"... 스타크 씨..."

"하하. 진짜 피터 파커야."

재킷 주머니에 걸어두었던 선글라스를 썼다. 그 편이 쉬웠다. 그는 입술을 앙다물고, 몇 마디 더 할 말을 달싹이다가, 그냥 다물어버렸다.

"스타크 씨, 제가.."

"아냐."

할 말이 있는 얼굴로 입을 여는 피터를 막았다. 

"가서 얘기해."

사람들이 토니 스타크와 아는 사이로 보이는 아이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답해줄 마음은 없었기에,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서비스 미소를 지어주다 그대로 아이를 잡고 차로 끌고 갔다. 차는 아직도 도로 한가운데서 진로 방해를 하고 있었다. 

그대로 조수석을 열어 아이를 앉히고 제 자신도 운전석에 앉았다.

"안전벨트 매."

그는 그대로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이후로는 침묵이었다. 토니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고, 피터는.. 토니는 옆자리에서 제 눈치를 보며 손을 꼼지락거리는 피터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 사실에 괜시리 속이 뒤틀렸다. 아이가 제 눈치를 보는 것도, 저를 스타크 씨라고 부르는 것도. 사귄 뒤로 피터는 꼬박꼬박 그를 토니라고 불렀다. 그도 꼬맹이라는 호칭은 관두고 그를 피터라고 이름을 불러주었었다. 그건 피터를 단순히 이끌어주어야 할 멘티가 아니라 연인으로 보는 일종의 인정이었는데.

다시 만나면 할 말이 많을 거라 생각하였지만 막상 닥쳐보니 생각했던 모든 말이 입 속에서 맴돌다 사라질 뿐이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둘 사이를 채웠다.

페퍼에게서 두어 번 전화가 오는 것을 족족 거절해버렸다. 세 번째에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렸다가, 그 다음에 해피에게서 전화가 오자 아예 꺼버렸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피터가 입을 열었다.

"... 받으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급한 전화 같아 보이는데."

넌 이 상황에서 그런 걸 챙길 여유가 있냐고 따지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삼켜버렸다. 꾹 눌린 입술 사이로 말이 속삭이듯 나왔다.

"... 괜찮아. 네가 신경써야 할 것이 아니야."


이내 차가 저택의 입구로 미끌어지듯 들어서고, 그는 주차에 신중을 기했다. 상황이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고 싶었다. 바짝바짝 마르는 입 안에 억지로 침을 삼켰다가, 잠시 멈칫했다가, 불현듯 차문을 열고 나왔다. 제 손으로 문을 열고 나오려는 애를 저지하고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가 천천히 제 옆을 스쳐지나가며 차에서 내리는 짧은 순간에도 그는 피터를 스캔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키가 자라지 않았네. 잘 못 먹고 지냈나?  얼굴은.. 뺨에 살이 올랐어. 더 귀여워진 것 같기도 하고.


그는 피터를 부엌 식탁에 앉혔다.

"아이스티?"

"네, 네. 감사해요."

제가 마실 물을 준비하는 손이 덜덜 떨려왔다. 그는 정말이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싸우고 싶지  않다. 이성적으로 대화를 하고 싶었다.

얼음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도 갈증이 가시지 않아서 한 잔을 더 마셨다. 피터는 제 몫의 아이스티를 받고는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다. 먼저 말을 해주길 기다렸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말이 나오지 않아 결국 토니가 운을 떼었다.


"뭐라도 말해봐."

그제야 피터가 고개를 들고 이 쪽을 바라보았다. 눈 안에 간절함이 비친다. 그리고 나온 말은 예상치 못한 대사였다.

"저, 스타크 씨.. 많이 화나셨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그건 그가 참을 수 없는 종류의 말 중 하나여서, 머리속의 퓨즈가 뚝 하고 끊겼다. 분노가 야금야금 뇌를 좀먹었다.

"화났냐고?"

그가 신경질적으로 유리컵을 내려놓았다. 그 동작에 피터가 겁을 먹었는지 움츠러들었다.

"젠장, 피터 파커. 내가 화났냐고?"

"스타크 씨, 저는, 그게... "

"말없이 사라지고 일 년만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지금 그래, 화났냐고?  그럼 뭘 기대했어? 내가 기뻐서 춤이라도 출 줄 알았어? 아니면 그냥 없던 일로 치고 잘 살고 있을 줄 알았어? 너는 지금, 그게,......"

숨이 턱 하고 막힌다. 목이 커다란 공이라도 걸린 것처럼 아파왔다. 손을 들어 형편없이 망가져 있을 얼굴을 매만지다가, 떨리는 왼팔을 잡았다. 이번엔 시선을 피하는 건 토니 쪽이었다. 

"... 변명이라도 해봐. 설명해. 내가 납득할 수 있게."

"화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스타크 씨. 제가 생각해도 제가 경솔했어요. 그치만 그게, 일 년이라니요? 아직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잖아요."

"... 뭐?"

"저도 갑자기 장소도 이동되고 날도 바뀌어있어서 놀라긴 했는데.. 죄송해요. 아무리 그래도 마스크 없이 도둑을 잡으려고 한 건 경솔했어요. 그런데 전 어떻게 찾으신 거에요? 혹시 캐런이 연락한 거에요? 아니면 메이? 메이가 스타크 씨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나요?"

토니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고 느꼈다. 머리속에서 경보가 울려왔다. 

이 상황에서도 잘난 머리는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해서, 금세 몇 가지 가설을 나열했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것 뿐이었다. 똑똑한 머리는 이럴 때 싫다. 토니가 손을 내저었다.

"다시, 천천히 말해봐. 처음부터. 집을 나설 때부터 말해."


그래서 심호흡을 하고 시작한 피터 파커의 이야기는 이랬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물리 과제를 하다가 달걀이 떨어졌다는 메이의 말에 혼자 달걀을 사러 나갔다. 마트 근처 골목길에서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길래 강도라도 있을까 싶어 대충 후드집업을 눌러쓰고 들어가봤는데 갑자기 환한 빛이 번쩍 터지더니 눈을 뜨니 이 곳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피터의 모습은 마치 그 옛날에 크루즈에서 변명을 하던 모습과 겹쳐보여서, 토니는 최악의 상황을 예감하면서도, 정말 묻기 싫은 질문을 입에 올렸다.

"피터, 지금이 몇 년도지?"

"네? 당연히.. 2017년이죠."

맙소사.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지끈지끈 두통이 일었다.

흥분하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2017년이면 그들이 아직 사귀기도 전이다. 어째서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묘하게 어려보이는 건 이것 때문이었나? 얼굴을 덮은 손틈 사이로 살짝 보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애였다. 정말 그런가?  4년 전의 피터 파커는 그랬지만 1년 전의 피터 파커는, 떠나기 전날조차도 그토록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대하지 않았나.

토니는 이 말을 해야하는 이 상황이 미치도록 싫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상황이었다.

"잘 들어 피터. 현재는 2021년이야. 네가 말하는 2017년은 4년 전이라고."

"네에?"

놀라는 피터를 뒤로하고 프라이데이를 불렀다. "프라이데이. 오늘 날짜 말해봐."

"오늘은 2021년 10월 5일입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부엌에 울려퍼졌다.

"그럴수가.. 말도 안돼요. 지금이 2021년이라고요? 그럼 저는요? 저는 어떻게 된 거에요? 분명 2017년 7월 21일 저녁에 달걀 사러 나가는 길이었는데. 골목길에서 불빛이 반짝이더니 눈 뜨니까 그 거리였어요. 진짜에요."

억울해하는 피터의 얼굴 위로 토니가 선고하듯 말했다.

"아무래도 너가 4년 간의 기억을 잃은 것 같아, 핏."


'일단 네 소지품들을 보여줄게. 뭐라도 생각날지 모르잖아.' 토니가 제안한 것이었다. 금세 서랍장 깊숙한 곳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피터가 쓰던 물건들을 늘여놓는 토니를 보고 피터가 중얼거렸다.

'엄.. 근데 왜 제 물건들을 스타크 씨가 가지고 있죠?'

'... 우리가 많이 친했거든.'

그게 그가 말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피터가 자신과 사귀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 쪽에서 먼저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애한테 더한 문제만 떠넘기는 꼴이었다. 그리고 2017년이라면,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 나이의 애한테 이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른이랑 사귄다고 말해서 돌아올 반응도 두려웠다. 것도 평생 존경해온 토니 스타크와.

피터가 쓰던 핸드폰과 지갑, 손목시계, 몇 가지 옷들, 그리고 대학에서 필기하던 노트들을 보여주며 피터의 필체임을 확인시켜주는데 그 애가 반응을 보인 것은 시계였다.

'손목시계네요.'

'그래. 네가 아끼던 거잖아. 벤 삼촌한테 물려받은 거라면서.'

'아, 맞아요. 네. 그랬죠 참.'

시계는 밧데리가 다 했는지 움직임이 멈춰있어서 토니는 금방 맞는 것을 찾아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갖 크기와 모양의 밧데리가 모아져 있는 랩실에 들어서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피터를 생각했다. 그가 기억을 잃었다고 하는 말에 어째서인지 위화감이 들었다. 다짜고짜 나타나서 4년치의 기억이 날아갔다니. 그런 애가 그런 길거리에는 왜 서 있던 거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기억을 잃은 이유가 뭐지? 혹시 어딜 다쳤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머리라도 다친 거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기억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검진부터 했어야 했다. 시계의 밧데리만 갈아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확인해봐야했다. 그는 피터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검진 기록을 불러왔다.



*

피터 파커는 홀로 부엌에 남아 있었다. 다 마신 아이스티 컵엔 얼음만이 남아있어 녹으면서 저들끼리 들러붙고 있었다. 그는 진정되지 않는 속내를 가라앉히려 얼음을 한꺼번에 입에 털어넣었다. 옅은 아이스티의 맛이 났다.

스타크 씨가 제 물건이라며 남기고 간 것들을 둘러보았다. 분명 노트는 자신의 필체였다. 자신이 필기한 것이 맞았다. 한 번 훑어보니 내용의 수준이 높아, 자신이 대학에 가긴 했구나 싶었다. 핸드폰과 지갑은 뭐, 그렇다치고.

그가 가장 이질적으로 여기는 건 시계였다. 벤 삼촌이 물려줬다고 하는, 검정색 손목시계.

그건 정말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자신이 지난 밤부터 지금까지 한 경험도 충분히 이상하긴 했지만. 심부름을 가다 눈 앞이 번쩍여서 감았다 떴더니 모르는 길거리에 와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날이 바뀌어 있었는데 느닷없이 스타크 씨가 나타나더니 자신보고 4년 간의 기억을 잃은 것 같단다. 그럼 그 골목길에서의 불빛이 내 마지막 기억인가? 그렇다면 처음에 스타크 씨가 말한 일 년은 뭐지?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지금 자신의 손에 있는 시계도 충분히 이상했다. 벤 삼촌이 물려줬다고? 물론 벤 삼촌이 시계를 물려주긴 했다. 그러나 그건 이 시계가 아니다. 그건 아직 어린 자신이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는 메이의 말에 따라 퀸즈의 있는 제 방 서랍 깊숙한 곳에 보관해두었었다. 그리고 그건 분명 이 시계가 아니다.

지난 4년 간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자신은 처음 보는 시계를 벤 삼촌의 시계라며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거지?

그는 의문을 곧장 행동에 옮겼다. 스타크 씨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부엌의 서랍과 찬장을 모조리 뒤지자 그가 원하는 것을 금방 찾아냈다. 드라이버를 가지고 시계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분해된 시계에는,

"이게 뭐야..?"

처음부터 밧데리 따윈 들어있지 않았고, 시계로서의 기능을 하는 최소한의 부속품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텅 빈 공간 안에서는, 처음 보는 작은 쪽지 하나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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