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설정을 일부 차용했습니다.

- 스파이더맨 파프롬 홈 이후의 이야기. 파프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오타, 비문 주의

- 파프롬에서 시간이 더 지나 피터는 갓 성인이 된 설정입니다.






피터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자 피터는 스파이더맨의 가면을 벗고 후드를 깊게 뒤집어 쓴 채 고개를 숙이며 길거리를 나섰다. 아침이 되자 세상은 죽었다 다시 나타난 스파이더맨의 소식으로 넘쳐났다. 피터가 거미줄을 타고 날아가는 모습이 찍힌 화면이 전광판에서 나오는 걸 본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도 ‘저길 봐, 스파이더맨이야!’ 하고 서로 알려주고 기뻐했다. 이어지는 뉴스에서는 새로운 스파이더맨의 등장, 혹은 실은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를 스파이더맨의 모습을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흥분 섞인 인터뷰와 그러면 그렇지, 스파이더맨이 죽었을리 없다고 살아있을 거라 믿었다며 스파이더맨의 장난감을 들고 울먹이는 소년의 모습이 반복해서 나왔다. 사회학 전문가라는 사람은 담화 코너에서 ‘죽지 않았던 것이 아닌, 새로운 스파이더맨의 등장으로 봐야하지 않겠느냐’고 했고 그렇다면 그가 ‘우리 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을 조심스레 건냈다. 물론 그의 그 의견은 또 다른 전문가에 의해 반박을 받았다.

- 그가 무너진 건물 안에서 토니 스타크씨를 구출한 걸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가 설령 새로운 스파이더맨이라 해도 우리가 알던 스파이더맨과 결을 같이 하는 사람일 겁니다.

결론은 그 말이 맞았다. 적어도 피터는 사람을 헤치는 쪽에 속하진 않았다. ‘우리’라는 어절에서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어도 어디에서든 친절한 이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토록 스파이더맨에게 우호적인 세상이라니. 피터는 코끝이 살짝 아렸다. 그는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였다. 피터는 가까운 서점으로 들어가 책을 뒤졌다. 사회, 경제, 정치…….

아주 짧은 시간동안 얻은 정보만으로도 피터는 지금 이 세상이 제가 알던 세상은 아니지만 상당히 닮은 꼴임은 알았다. 스파이더맨을 제외한 초인 영웅이 없고, 범우주적인 위협만 없을 뿐이지 문화나 과학을 비롯해 역사마저도 제가 살던 세상과 큰 범주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덕분에 이곳 세상에 적응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불분명하니 필연적으로 어떻게 돌아가야할지도 당장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피터는 우선 안심했다. 일단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만이라도, 그리고 최악의 경우 돌아갈 수 없을 경우를 생각해도 제 세계의 지식은 이곳 생활에서 적잖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은 피터의 세상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피터는 여느 때처럼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애썼다. ‘친절한 당신의 이웃’은 피터의 아이덴티티였고, 이곳이 제가 살던 곳이 아니라 한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 할 수는 없었다. 애당초 피터 피커라는 인물은 그렇게 생겨먹지를 못했다. 피터는 캐런이 수집해준 정보와 스파이더맨을 반기는 사람들을 보며 지금은 죽고 없는 이 세상의 피터도 그랬을 것이라는 걸 자연스레 느꼈다.

피터는 스파이더맨이 되어 움직이면서 캐런에게 토니의 소식을 검색하도록 부탁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피터는 그가 입원한 병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도 토니는 거대 기업을 이끄는 유명 셀레브리티로 수많은 소문과 위협을 안고 사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어제의 폭발사고는 테러가능성도 크다는 의견이 많았다. 보안체계는 상당히 엄숙했고 프라이데이와 연결이 끊어진 캐런은 스타크 테크놀로지의 보안을 뚫을 정도의 연산을 처리할 수가 없었다. 결국 피터가 할 수 있는 건 스타크 인더스트리에서 공개를 결정한 일부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내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 대부분은 기사화 된 것이 다였다.

그렇게 3일이 지났다. 다행스럽게도 그때부터는 피터가 원하는 정보가 돌기 시작했다. 캐런은 인터넷에 올라온 각종 기사를 찾아 토니의 부상 정도와 토니가 입원해 있다는 병원을 찾아줬다. 토니는 오른쪽 다리의 정강이 뼈의 복합골절과 (완치에는 두 달여가 걸릴 거라고 했다) 이마에 길게 찢어진 자상 외 다른 큰 상처는 없다고 했다. 없던 의식도 수술이 끝난 다음 날에는 바로 찾았다. 소식을 들은 피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살아있고 무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눈물이 고였다.

장소를 알게 되자 피터는 망설임없이 토니가 있을 병원으로 향했다. 그가 입원한 병실이 어디인지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찾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저는 스파이더맨이었고 토니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하면 그 범위는 한없이 줄어든다. 게다가 피터에겐 캐런도 있다. 그의 스캔 기능을 사용하면 막힌 벽 뒤에 누가 있는지 파악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쓰라고 달아 준 기능이 아닌데.’

토니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애쓰지 않아도 들린다. 피터가 피식 웃었다. 얼마만에 격없는 웃음을 짓는지 모르겠다. 최근 몇년은 토니를 떠올리는 것조차 죄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 같아 괴로웠고 너무 그리워서 괴로웠다.

이곳의 토니가 제가 알던 토니와 다르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는 항상 그리던 그 토니와 꼭 닮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처음으로 집으로 찾아왔던 그 당시의 모습과 비슷한 것도 같았다. 딱 나잇대가 그때쯤이기도 하다.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날지언정 저와 죽었다는 이곳의 스파이더맨의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제가 알던 토니와 이곳의 토니 역시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평행세계. 한 때 미스테리오의 출신을 듣고 흥분했던 고양감이 새롭게 떠오른다. 꿈도 환각도 아니라면 이곳은 무수히 존재했을 시간선 중에서도 피터의 지구와 가장 근접한 맥락 중 하나였다.

피터의 예상대로 토니의 병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피터는 우선 토니가 있는 병실의 위치만 확인하고 해가 지길 기다렸다. 대낮에는 너무 눈에 띄어서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더 큰 욕심은 부리지 않을 테니 그가 무사한 것만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조금만 그 얼굴을 다시 눈에 새기고 싶었다. 토니가 죽은 지도 벌써 4년 여가 지났다. 피터가 아무리 되새겨도 기억 속의 얼굴은 매일 매시간 흐려져만 갔다.

“토니…….”

병실에 불이 꺼진 걸 확인한 피터는 조심스레 창가에 붙어 안쪽을 들여다 보려 움직였다. 커텐이 쳐진 병실은 어둡고 아주 작은 틈도 찾기 어려웠다. 몇 번 창가 주위를 오가며 어떻게든 안을 보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피터는 들여다보는 걸 포기하고 캐런에게 부탁해 열화상 카메라 모드로 시야를 변경했다. 사람 형태의 붉은 체온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토니였다. 토니가 저기 있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 한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니. 하지만 이 거리가 제가 그에게 가질 수 있는 거리였다. 항상 이 정도의 거리였다.

아이언맨은 피터의 영웅이었다. 붉은 갑주가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흥분했다. 하늘을 날며 손바닥에서 빔을 쏴 악당을 퇴치하는 정의의 기사는 어린 피터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피터는 금새 아이언맨의 팬이 되었다. 벤 삼촌을 졸라 가게 된 스타크 엑스포에서 사람들을 위협하는 로봇을 해치울 심산으로 손바닥을 내민 피터의 앞에 진짜 아이언맨이 나타나 적을 해치워 준 건 피터의 가장 소중한 기억 중 하나였다. 나도 사람을 구하겠다는, 구할 수 있다는 의지와 어렸기에 많이 무모했지만 그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시도, 그리고 의지는 곧 현실이 된다는 것을 때맞춰 나타난 아이언맨이 알려줬다.

그때부터 피터의 꿈은 아이언맨 같은 영웅이 되는 거였다. 그런 피터에게 벤 삼촌은 항상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라며, 꿈을 이루기 위해 힘을 쫓기 보다는 그렇게 얻게 되는 힘으로 무엇을 할지 항상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했다.

거미에게 물려 초인의 능력을 갖게 된 건 정말 예기치 못한 사고였다. 몇날며칠을 앓고 일어난 피터는 그 힘에 두려워했고, 그 힘에 흥분했다.

남다른 그 능력은 벤 삼촌이 해주던 말과 어릴 적부터 동경해 온 아이언맨의 모습과 더불어 피터의 등을 떠밀어줬다. 이 힘은 어쩌면 축복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미숙하더라도 힘을 얻었기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데 눈을 돌릴 수는 없었다.  피터는 힘을 과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저 하고자 하는 일에 조금 더 보탬이 되고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피터는 스파이더맨이 되었다.

그리고 스파이더맨이 된 피터의 앞에 토니 스타크가 나타났다.

사실 피터는 아이언맨이 토니 스타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였지만, 토니 스타크가 아이언맨이라는 것에는 조금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저를 찾아오고 그와 관계를 이어가게 된 이후로 특히 더 그랬다. 토니 스타크는 분명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아이언맨일 때의 토니 스타크와 그냥 토니 스타크일 때 피터가 받는 느낌은 달랐다. 토니 스타크는, 영웅이 아닌 토니 스타크는 피터가 생각하는 것만큼 마냥 옳바른 것도 아니었고 마냥 강한 것만도 아니었다. 고집이 세고 독단적이고 불편한 어른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여리고 상냥하고 상처가 많은 외로운 어른이기도 했다. 피터는 그런 그에게 믿음을 주고 싶었다. 나의 영웅. 하지만 그 역시 고뇌하는 사람이기에. 적어도 여기, 당신이 기댈 구석이 하나는 있다고 생각하게 해 주고 싶었다. 아직 갈 길은 멀었지만, 그래도 그가 조금씩이나마 저를 듬직해 한다는 걸 느낄 때도 종종 있었다. 피터는 우선은 그걸로 만족했다. 그렇게 차츰 거리를 좁혀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타노스 일당이 지구를 침공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피터는 미증유의 위기에도 막연하지만 당연하게 미래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 미래에는 토니도 당연하게 있을 것이라고.

피터는 허무하게 존재가 소멸되어 가는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토니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죽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았고 무엇보다 토니를 두고 죽고 싶지 않았다. 그를 혼자 두기 싫었다. 하지만 그건 그 무엇보다 토니의 심장을 난도질 했다. 피터는 뒤늦게 사과했지만, 시간이 모자랐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을 때조차 시간은 피터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피터는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다시 한 번 강제로 해야 했다.

[피터. 스타크 씨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어]

생각에 잠겨 멍하니 창가에 붙어있던 사이 생명을 뜻하는 붉은 물체가 시야를 꽉 채웠다. 캐런의 말을 듣고도 상황이 바로 파악되지 않아 망설이던 피터의 코앞까지 다가온 물체는 커텐을 잡고 확 열어제꼈다. 커텐이 걷힘과 동시에 캐런은 별다른 명령 없이도 피터의 시야를 디폴트 모드로 변경했다.

커텐이 걷히자 피터는 얇은 유리 판막 하나를 사이에 둔 토니와 눈이 마주쳤다. 아래 위로 긴 속눈썹에 감싸인 커다란 헤이즐넛의 눈동자에 스파이더맨의 가면이 비춰진 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그의 눈이 깜빡 거릴 때마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아아, 정말, 토니다. 살아 있는 토니. 피터는 감격에 떨며 입을 벙긋거렸다. 목이 메였다.

토니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더니 엄지로 방 안을 가리켰다. 순간 의미를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린 피터에게 토니가 한숨을 쉬었다. 피터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토니는 턱짓을 같이 했고, 그제야 피터는 지금 그가 들어오라는 소리를 한 거라는 걸 깨달았다.

토니가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피터는 천천히 닫혀 있던 창문을 열었고 (걸쇠는 걸려있지 않았다) 시야가 넓어지자 토니의 머리에 묶인 붕대와 그가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목발, 두꺼운 기브스로 둘러싸인 다리가 차례로 보였다.

“……움직이면 안 되는 거 아니예요?”

“알면 빨리 들어 와. 나도 침대에 좀 앉게.”

방금까지 망설이던 것이 무색하게 피터는 후다닥 병실로 들어와 창문을 닫았다. 토니는 익숙치 않은 목발로 절뚝거리며 침대에 걸터 앉았다. 피터는 침대를 빙 돌아 토니와 대각선 구석으로 이동했다. 너무 그리운 얼굴과 목소리. 잊어버릴 세라 끊임없이 되새기고 또 되새기면서도 추억이 되어가는 원망스러운 기억. 토니는 피터가 멀리 떨어져 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피터는 이 모든 게 거품처럼 사라져버릴까 두려워 함부로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좀 가까이 오지 그래?”

“……미안해요.”

“그래, 뭐. 그게 편하다면 그러고 있어.”

“미안해요.”

“미안할 것도 많다. 뭐가 미안해? 오히려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응? 스파이더맨. 날 구해줬다면서?”

“몸은 좀 괜찮아요?”

“덕분에 크게 안 다치고 끝났어.”

구름에 걷힌 달빛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와 토니의 옆선을 비췄다. 언젠가 몰래 어벤져스 컴파운드의 창가에서 훔쳐봤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날따라 하는 일마다 잘 풀려 기분이 좋았던 피터는 그걸 토니에게 말하고 싶어서 찾아갔었다. 하지만 피터는 불이 꺼진 컴파운드에서 혼자 앉아 생각에 잠긴 듯한 토니를 보고 자신이 왔다는 걸 바로 알리지 못했다. 프라이데이가 먼저 피터를 발견하고 토니에게 그의 방문을 알렸다. 토니가 고개를 들고 어이없어하며 피터에게 얼른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피터가 엿보았던 우울함은 이미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그게 기쁘기도, 못내 아쉽기도 했다. 그에게 제 존재가 도움이 되었을까. 어쩌면 애써 속내를 감춰야 해서 더 괴로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어봤자 어차피 대답해주진 않겠지. 피터는 그냥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와 나란히 서서 그의 고민을 같이 해결해주고 싶었다.

달빛이 서린 어둠 속에서 토니와 피터의 시선이 마주쳤다. 피터는 무슨 말을 이어 해야할 지 몰랐다. 평소에 토니와는 어떤 말을 했었지? 거의 제가 막 떠들었던 것 같다. 두서없이 이것저것 말이 끊어질세라 쉬지 않고. 오히려 토니가 숨 넘어가겠다면서 적당히 말 하라고 핀잔을 줬을 정도로 많은 말을 했다. 뭐든 다 보고하고 싶었고 뭐든 다 공유하고 싶었고 뭐든 다 들어줬으면 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반응을 해 줬으면 했다. 칭찬을 해 줬으면 했고 웃어줬으면 했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려도 좋으니 저를 똑바로 봐 줬으면 했다.

하지만 지금 피터에게 그때의 기세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명수배자가 되고 고립된 존재가 되면서 피터는 말수가 점차 줄어만 갔다. 오히려 지금의 피터는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게 되었다. 심할 때는 하루 종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어서 떠올려 봐. 언제까지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무슨 이야기든지 해 봐, 피터 파커. 토니가 앞에 있잖아. 토니를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추태야.

“어, 음……. 저기…….”

“피터.”

“네, 스타크 ㅆ, ……나, 날 알아요?!”

무슨 말을 하면 좋을 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그때, 토니가 피터의 이름을 불렀다. 제 이름을 토니가 부르는 거야 워낙 당연한 일이라 무심결에 대답하던 피터는 문득 이곳이 제 세상이 아님을 상기하고 되물었다.

이곳은 어벤져스도 아이언맨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다. 초인 영웅이란 스파이더맨 하나가 전부였고, 스파이더맨은 당연히 철저하게 정체를 숨기며 살았을 거다. 그런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 건 그가 죽고 나서였다. 그러나 토니는 저를, 스파이더맨을 ‘피터’라고 불렀다. 꼭 아는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토니 스타크와 스파이더맨이 아는 사이라도 되는 건가? 캐런은 유능하게도 피터가 지금 가장 원할 법한 정보를 검색해 알려줬다.

[공식적으로 스파이더맨과 토니 스타크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피터 파커는 22세 때 스타크 인턴쉽에 참여한 이력이 있어]

“인턴쉽……?”

“아, 그래. 그런 적도 있었지.”

그렇게 말하는 토니의 미소는 어딘가 힘이 없고 슬퍼 보였다.

“너는, 너도 피터인가? 목소리가 똑같은데.”

“저도, 저도 피터 파커는 맞아요. 하지만 어떻게……?”

“네가 날 모르는 것처럼 반응을 하니까.”

“아…….”

“운 좋게 살아남아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겠지만, 피터의 장례를 치른 게 나고. 안타깝게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기적에 눈이 머는 것보다 평행세계 가설을 받아들이는 게 나한테는 더 쉽고 납득도 되거든.”

피터 파커의 장례식은 비공식으로 조용히 치뤄졌다. 참석자는 그의 숙모인 메이 파커를 비롯해 극히 일부의 친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는 내용의 뉴스를 캐런이 찾아줬다. 그 말은 뉴스 속에는 기록되지 않은, 극히 일부 중에 토니도 있었다는 소리다. 조금 전엔 캐런이 공식적으로 둘 사이에는 인턴쉽을 제외하면 아무런 접점이 없다고도 말했었다. 그 정도밖에 공개할 수 없는 접점. 어쩌면 그도 스파이더맨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걸까. 아이언맨은 아니지만 그렇게 그는 제 세계의 토니처럼 스파이더맨의 조력자이기도 했던걸까.

“어……, 무슨, 사이셨는지……, 물어봐도 되요?”

무슨 사이라. 피터의 물음을 되읊는 토니의 얼굴에 애환이 스쳐 지나갔다.

“사랑하는 사이였지.”

“……네?!”

피터가 놀라 되물었다. 순간 저를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토니의 표정은 진지했다. 무엇보다 표정은 속여도 눈빛은 속일 수 없다. 어둠 속에 감추고 있지만, 초인인 피터의 시력에는 감정이 침잠해있는 게 보였다.  

“장례는 메이 씨에게 부탁해서 조용하게 치뤘어. 아니면 내 손으로 배웅해주는 것도 힘들 것 같았거든. 그 정도는 해 주고 싶었어. 난 정말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스파이더맨의 정체에 관한 것이라는 걸 묻지 않아도 알았다. 피터는 죽은 피터 파커의 심정이 이해가 가면서도, 토니의 말대로 그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다면 그가 무엇보다 잔인한 짓을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피터는 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그에게 상처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바라보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토니가 목발을 짚고 천천히 피터를 향해 다가갔다. 피터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토니의 손이 스파이더맨의 가면을 쓴 피터의 볼을 쓸며 내려오다 목덜미에 닿았다. 가면이 벗겨진다. 피터는 반사적으로 토니의 손을 잡아 제지했다.

어둠 속에 녹아 든 토니의 눈망울이 슬프게 휘었다.

“가면, 벗어주지 않을래?”

애원이 섞인 목소리가, 표정이, 기시감이 든다. 피터는 저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것을 예기치 못한 한순간에 잃어버린 애달픈 사람이 눈앞에 서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피터가 손을 내리고, 토니가 천천히 그의 가면을 벗겼다. 타인의 앞에서 가면을 벗은 얼굴을 보여주는 게 오랜만이라 좀 떨렸다. 그 타인이 다른 세계지만 토니임에도 그랬다.

토니가 가면 아래로 드러난 피터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살며시 부여잡고 이마를 맞댔다. 꼭 감은 눈꺼풀 아래로 고인 눈물방울이 그의 속눈썹을 촉촉하게 물들인다. 그걸 보며 피터는 토니의 정수리가 제 것 보다 조금 아래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성인이 된 피터는 토니보다 키가 조금 더 컸다.

그 순간, 피터는 상실했던 미래를 실감했다.

‘토니! 이제 제가 토니보다 키가 더 커요!’

‘그래봤자 몇 센티 차이 안 나. 그런 걸 자랑스럽게 말 하지말라고, 꼬맹아.’

이제 꼬맹이 아니거든요?! 전 엄연한 성인이고 토니보다 키도 크다구요!’

‘네가 그러니까 꼬맹이라는 거야.’

흥. 내 키 갖고 질투하는 토니는 그럼 뭔데요?’

이런 배은망덕한 꼬맹이를 봤나? 그게 어른한테 할 소리야? 응?’

아.

토니가 살아 있었다면 있었을지도 모를 작은 해프닝이 피터의 뇌리에 떠올랐다. 숨이 막힌다. 가슴이 메이고 또 메이고, 그리고 아프다. 이 뭉친 가슴의 갑갑함을 수십 수백개의 칼로 찔러 도려내도 이보단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피터는 터져나오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토니의 목에 팔을 둘러 그를 끌어 안았다. 품 속의 그는 당황하는 듯 했지만, 곧 달래듯이 피터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누구 눈치볼 것도 없이 가슴 깊이 끓어오르는 대로 소리내 울었다. 때론 눈시울을 붉히고 조용히 홀로 눈물을 흘린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짙은 감정을 드러내놓고 소리 쳐 우는 건 처음이었다. 

피터는 그제야 겨우, 제가 잃어버린 것의 진짜 무게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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