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달콤한 꿈을 꾸었다. 내게 발길질을 하는 아버지도 아니었고, 기약 없는 이별을 하며 떠나간 엄마도 아니었다. 늘 그렇듯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저만 바라보는 아저씨의 얼굴을 한참이나 마주 보고 섰다. 언제나처럼 조금 길게 자란 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는 아저씨의 다정한 손길을, 천천히 눈을 감고 마음껏 느꼈다. 아.. 꿈이 아닌가? 감고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니, 여전히 제 머리칼을 소중하게 만지작거리던 아저씨가 올곧게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좋다..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깼어?"

"...."

"아직 새벽이야, 더 자."



잠이 들었던가. 모로 누운 내가 아저씨의 품에 폭삭 안겨 팔을 베고 있었다. 무거울 텐데... 아직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몽롱한 와중에 꼼지락거리며 팔을 빼려 하자, 괜찮다는 듯 등을 당겨 안은 아저씨가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아저씨가 정리해준 건가. 땀에 흠뻑 젖어 찐득해야 할 몸은 물론, 엉망이어야 할 이불이 보송보송해 기분이 좋았다. 슬그머니 입술을 앙다물며 단단한 품을 파고들자 제 귓가에 입술을 붙인 아저씨가 낮게 웃는 기분 좋은 진동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몸이 아프진 않은지, 기분은 괜찮은지. 오른쪽 귓불에 입술을 척 붙이고 조곤조곤 묻는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으며 살랑살랑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에 듣는 아저씨의 목소리는 훨씬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래서일까. 제 귓불을 만지작대는 손길을 한참 느끼다가 고개를 들어 올려 아저씨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나 싶어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는 아저씨에,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바로 미간을 팍 구긴 아저씨가 때를 놓치지 않고 짧게 입을 맞췄다. 



"하지 마. 왜 멀쩡한 입술을 못 괴롭혀서 안달이야, 맨날."



분명 잔소린데. 툭툭 내뱉는 언사와 다르게 다정한 목소리가 듣기 좋아 저도 모르게 쿡쿡 웃자, 얼씨구? 하고 작게 말한 아저씨가 숨이 막히도록 나를 꽉 껴안았다. 숨이 막힐 것처럼 답답한데 또 숨통이 트이는 게 이상해서 아저씨의 체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아, 아저씨 냄새. 말할까 말까 고민하느라 넘실거렸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벗은 몸을 따라 살살 어루만지는 아저씨의 손길을 느끼며 제법 덤덤한 말투로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말에 아저씨는 역시 놀라지 않았다. 어쩌다가 청력을 잃게 됐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아저씨는 대부분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경청했지만,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게 된 이유라던가, 아버지에게 맞아 청력이 사라지던 순간 따위를 말할 때 마다 작게 대꾸하며 조금 가라앉은 내 마음이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들지 않게 잡아줬다. 그런 아저씨 덕분에 무거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작게 웃을 수 있었다.



'싹수없는 것들. 나중에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많이 아팠겠네. 버티느라 고생했네, 윤시현.'



아버지가 장애수당을 신청했다는 이야기까지 대략적인 인생일기를 모두 읊고 나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꼭꼭 숨기고 있던 깜깜하고 습기 가득한 내면을 드러내면 세상이 무너질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 누군가가 아저씨라서 그런거겠지만. 



대화의 말미, 보청기는 그냥 신청하지 않았다고 대충 넘어가는 나에게 아저씨는 아주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 조금 망설이며 시선을 내리깔자,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괜찮다는 듯 채근하지 않고 안아주는 아저씨에 감추고 있던 속내를 밝혔다. 어렵지 않게 술술 내뱉는 스스로가 놀라웠다.



'싫어서요... 세상이 나한테 하는 말들이 듣기 싫어서...그래서 안 했어요...'



중얼거리듯 속마음을 툭 내뱉자 눈썹을 가로뉜 아저씨가 파르르 떨리는 눈가에 입을 맞췄다. 아마 아직도 내가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믿는 것 같은 아저씨를 보니 용기를 내고 싶었다. 괜히 혼자 부끄러워져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로 느릿하게 말을 건네자, 머리 위로 아저씨의 입술이 몇번이고 내려앉았다. 아저씨가 행복해하고 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나도.. 행복했다.



'근데 요즘은 가끔 후회돼요...'

'보청기 꼈으면... 아저씨 목소리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여기저기 입 맞추는 입술이 간지러워, 방금 전 까지 인생의 어두운 배경을 논하고 있었다고는 믿을 수도 없을 만큼 크게 웃었다. 숨까지 헐떡이며 크게 웃던 내가 진정되자마자, 아저씨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깊게 입술을 맞물렸다. 구석구석 숨결을 앗아가는 입술이, 마치 잘 버텨줘서 고맙다는 듯 위로해주는 것만 같아 나 역시 아저씨의 가슴팍에 얌전히 손을 올리고 숨결을 나누었다.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는 태양을 뒤로하고 애정을 확인하는 연인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




"말씀하신 윤시현 어머니 정보입니다."



시현과 서로 마음을 확인했던 새벽. 덤덤한 척 하면서도 숨기지 못한 그리움을 조금씩 내보이던 얼굴이 계속 신경 쓰였었다. 몇 살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는 그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그리웠을까. 찾을 수도, 찾아갈 수도 없던 환경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에 급급했을 시현의 내면을 직접 보고 나니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고 싶었다. 



관계를 나눈 이후로 시현은 확실히 달라졌다. 단순히 몸을 섞은 것으로 하여금 깊어 진 게 아닌, 늘 혼자 해결하고 감추려하던 습관을 조금씩 버리며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던 마음의 문을 최선을 다해 열어가고 있었다. 그런 시현이 언젠가 어머니를 찾고 싶다고 말을 꺼내게 됐을 때, 시현은 물론 시현의 어머니도 최대한 상처받지 않는 방향으로 도와주고 싶었다. 늘 그렇듯 일 처리가 빠른 민준이 건네는 서류를 받아드는 데 기분 탓인지 민준의 표정이 제법 난감해 보였다. 왜 그러나싶어 말을 건네니 들려오는 대답이 영 시원치 않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윤시현 어머니께서 재혼을 했습니다. 근데..."

"근데?"



여기까진 저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간 게 벌써 10년 전이라고 하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근데...?



"재혼 상대가 박민철 이사님입니다."

"박 이사?"



박 이사? 저도 모르게 허- 하고 헛숨을 내쉬었다. 서류를 확인해보라는 민준의 시선을 따라 얼른 내용을 확인했다. 하필이면 상대가 박 이사라고... 재혼 일자를 보아하니 시현의 어머니가 집을 나간 시점과 거의 일치하는 듯했다.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나, 저의 반대편에 서서 하는 짓거리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갔다. 박 이사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사내에서 공공연한 이슈였기 때문에 제 비서인 민준이 난감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중에 시현이 어머니를 찾고 싶다고 말하면 뭐라고 해줘야 할까. 아마도 괜찮은 척 하는 것에 도가 튼 그 아이라면, 잘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줄줄 내뱉을 것이 뻔했다. 



하-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서류를 휘적거리자, 민준 역시 마음이 편치 않은지 미간을 팍 구기고 있었다. 하여간 인정 넘치는 놈. 회사 일로도 충분히 바쁠 텐데 사적인 부탁으로 조사해준 것이 고마워 생전 하지도 않던 인사말을 건넸다. 



"고마워요."

"...."



민준의 눈썹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일그러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뭐라 반응이 와야 하는데. 한참을 버퍼링이 걸린 듯 벙 진 표정을 지어 보이던 민준이, 이내 표정을 굳히며 웃음을 꾹 참기 위해 애쓰는 게 보였다. 힘이 잔뜩 들어간 보조개가 움푹 들어가는 게 그 증거였다. 회사에선 공적인 모드로 대하는 게 원칙이거늘... 저건 필시 저를 놀리고 싶어 안달이 난 듯 보이는 안면근육이라 참을 수 없었다. 탁 소리가 나게 서류철을 내려두고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민준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여전히 미세하게 씰룩이는 입꼬리가 상당히 거슬렸다.



"김 비서."

"예, 전무님."

"...."

"...."

"....재밌냐?"

"푸흡-"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끅끅대며 웃는 민준에게 서류철을 던지고 싶었다. 안 되지. 소중한 정보인데 내가 참아야지, 아무렴... 빠직거리는 이마주름을 애써 갈무리하고 웃느라 정신이 없는 민준에게 말을 건넸다.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느라 들썩이는 어깨가 신명 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을 끅끅대다 겨우 웃음을 멈춘 민준이 힘겹게 말을 건넸다.



"살다살다 이제하한테 고맙다는 말을 다 듣겠다. 역시 사랑의 힘이 대단해?"

"....내가 또 고맙다고 말하나 봐라."

"박한 새끼. 시현이한테도 박하게 구는 건 아니지?"

"알아서 하니까 신경 꺼."

"이것저것 부탁할 땐 언제고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일 안 합니까, 김 비서님?"

"예예-"



일부러 각이 잔뜩 잡힌 자세로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는 민준에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마 서류 내용을 확인하는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지었을 제 걱정에 분위기를 올리려 노력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 이건 나중 일이지... 이리저리 종이를 휘적이다 서랍 깊은 곳에 잘 정리해 두었다. 다시 업무에 돌입하려 컴퓨터로 시선을 옮길 찰나 띠링- 소리를 내며 진동하는 핸드폰에 기분 좋은 미소를 띄었다. 시현일 것이다. 혼자 꼼지락대며 느릿하게 문자를 끄적일 시현을 생각하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14:46 [오늘 늦어요?]

[아니, 일찍 들어갈거야.] 14:46

[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14:47

14:49 [아니요. 그냥 물어봤어요.]

[싱겁긴. 생각나면 말해. 사서 들어갈테니까.] 14:51

14:55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그냥 오세요.]

[알았어. 이따 봐.] 14:56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하면 되지.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시현과 나누었던 문자를 다시 한번 곱씹었다. 시현은 아주 가끔이지만 이제 곧잘 먼저 문자를 보냈다. 대부분의 내용은 오늘 늦냐, 바쁘냐 따위의 싱거운 멘트였지만, 간단한 멘트에서도 느껴지는 나름의 애정표현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흐음..."



하는 일 없이 매일 집에만 있는 게 지겨울 때도 됐나. 지금이야 괜찮아졌지만, 다친 상태로 편의점 일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제 고집으로 일을 그만두게 했었다. 며칠 전에 지나가는 말로 다시 편의점 알바를 시작하고 싶다고 말하긴 했었는데. 일하는 시간대도 너무 늦고 술에 취한 손님들도 많은 걸 몇 번 본적이 있어 반대했었다.



"...."



턱을 살살 문지르며 머리를 굴리다 떠오르는 한 사람에 곧바로 전화를 발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목소리가 한결같이 나잇값을 못한다는 생각이 들게 해맑았다. 



"서준이 형. 전데요. 아니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



사람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적극적으로 통화에 응하는 서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내려놓곤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넓은 유리창을 응시하다 자세를 바로 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떠오르는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지만, 신속정확하게 업무를 제시간에 마치고 1분이라도 빨리 귀가하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두 눈을 반짝이며 흐트러진 서류를 훑어보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이때쯤인가. 전무실에서 빠르게 두드리는 타자소리에 맞춰 흥얼거리는 콧노래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린다는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




음? 집에 들어오면 거실 한가운데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어야 할 시현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냄새에 이끌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니, 뭐가 그리 바쁜지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시현이 앞치마를 둘러매고 요리에 열을 가하고 있었다. 처음에야 제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시현이 조금 안타까웠지만, 매일 다른 방법으로 제가 왔음을 알리는 게 즐거워 '오늘은 어떻게 인사하지.' 하고 고민하는 게 퇴근길의 일과였다. 시현 역시 매일 다른 제 인사법에 환하게 웃어 보이며 저를 맞이했었다. 근데 요리하고 있는 시현이라니. 이래서 오늘 낮에 문자했었나 싶어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예상에 없던 시나리오라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한참을 지켜보다 칼을 내려놓는 시점에 맞춰 슬그머니 다가가 뒤에서 폭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놀라지 않도록 귓가에 입 맞추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간지럽다는 듯 작게 몸을 움츠린 시현이 몸을 돌려 마주 보고 섰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예쁘네, 윤시현. 해사하게 웃는 시현에게 홀린 듯 다가가 짧게 입 맞추며 인사했다.



"앞치마 예쁘네. 요리하고 있었어?"

"네. 근데 아직 좀 더 있어야 되는데..."

"천천히 해, 씻고 나올 테니까."

"네."



어지간히 급했는지 짧은 대화가 끝나자마자 인덕션으로 달려가는 시현에 웃음이 나왔다. 아마도 제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모를 시현의 뒷모습을,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화장실로 향했다. 




-




"어때요?"

"...."

"...."

"맛있네."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하는 시현에게 반찬을 올려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빈말이 아니고 정말 맛있었다. 최고의 솜씨로 매일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아주머니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마도 곳곳에 담겨 있을 나름의 애정이 묻어있어 그런지 정말로 더 맛있게 느껴졌다. 저 몰래 아주머니의 연락처를 받아 틈틈이 배우고 레시피를 외웠다는 시현의 말에 광대가 내려갈 세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 묻는 말에 해주고 싶었다고 간단히 대답하는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시현과 함께하는 식사시간은 언제나 즐거웠지만, 오늘따라 수줍어 보이는 작은 웃음소리라던지, 먹는 중간중간 제 얼굴을 살피는 커다란 눈이 예뻐 밥을 먹는 내내 어디 나사 하나 빠진 것 마냥 실실 웃었다. 사랑의 힘이 대단하다던 민준의 말은 진짜였다.



밥을 다 먹고 할 말이 있다는 시현에 설거지를 마치고 소파에 앉았다. 제 눈치를 슬슬 보는 게 뭔가 싶었지만 채근하지 않았다. 말 한 마디 꺼낼 때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시현이라는 걸 모르지 않아 기다리는 시간 마저 지루하지 않았다. 드디어 결심을 한 건지 혼자 작게 주먹을 꽉 쥐며 목을 가다듬는 게 귀여웠다. 여느 때 처럼 부드러운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어루만져 주었다. 이제 시현은 더 이상 제 손길에 놀라지 않았다.



"아저씨."

"응."

"나... 다시 알바 시작하고 싶어요."



이미 안된다고 한 번 반대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 건지, 상당히 긴장한 눈치로 말을 고르길래 잠잠히 들어주었다. 머리칼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려 귀 뒤로 넘겨주었다.



"이제 다친 것도 완전 다 나았고... 이제 아저씨 덕에 밥도 잘 챙겨 먹어서 쓰러질 걱정도 없고... 어.. 또,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는 것도 아저씨한테 항상 신세만 지는 것 같고..."

"...."

"...안 돼요?"



가만히 멀뚱히 쳐다보니 불안해진 듯 버릇처럼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손을 꼼지락거리는 시현이었다. 말없이 다가가 늘 그렇듯 입을 맞추며 불쌍한 입술을 먼저 구해주고, 꼼지락거리는 손에 깍지를 끼워주며 체온을 나누었다. 혼자 몇 번을 연습하고 고민하다 건넨 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고, 말 그대로 이제 시현의 건강은 완전히 회복된 상태였다. 육체적인 면에서는.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얌전히 제 답을 기다리는 시현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게 해."

"진짜요?"

"근데 편의점은 안돼. 시간도 너무 늦고 위험하잖아."

"아...."

"그리고 병원도 지금처럼 열심히 다녀야 돼."

"...알아요."



말 한 마디 잘못 꺼냈다가 잔소리 폭격을 맞은 어린아이처럼 시선을 내리깔고 축 처진 모습이 마냥 귀엽게 느껴졌다. 습관처럼 만지작대서 인지 날을 바짝 세우고 올라있는 손톱 거스러미를 가만두지 못하는 손을 잡아주었다. 그제야 제 시선을 마주하는 시현을 한참 바라보다 말을 건넸다.



"카페에서 일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카페요?"

"아는 형이 카페를 하는데 얼마 전에 알바 한명이 그만둬서 손이 부족하대. 시간도 적당하고, 일주일에 4번 정도만 나오면 된다던데."



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그런가. 아니면 제가 소개해줘서 그런가. 동공을 이리저리 굴러가며 고민하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다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곧 졸업인데 하고 싶은 거 없어?"

"갑자기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너 그동안 생각할 여유도 없었잖아. 일하면서 천천히 생각도 하고. 그러다가 하고 싶은 공부 생겼을 때 뭔갈 시작하기엔, 편의점보단 카페가 시간관리하기 낫지 않을까?"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제가 하는 말에 경청하던 시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갑작스럽나. 왜 그러나 싶어 두 볼을 잡아 천천히 들어 올리니 시현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 보였다. 미세하게 시시각각 바뀌는 표정을 기민하게 느끼는 것 역시, 어느새 당연해져 있었다.



"왜 그래."

"저야 카페에서 일하면 좋죠, 좋은데..."

"응. 좋은데."



제 눈치를 보는 게 쉽사리 말하기 어려운 이유인 것 같아 눈가를 살살 어루만지며 가만히 기다렸다. 그에 작게 나마 용기를 얻은 듯 느릿하게 내뱉는 말에 마음이 아팠다. 



"잘 안 들리잖아요, 나는..."

"...."

"...아저씨 친구분한테 민폐일 것 같아요."



아직 이유를 못찾아서 참고 있었는데. 웅얼거리는 시현의 머리를 괜히 장난스레 헝크려주곤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왜 일어나냐는 듯 올려다보는 시현에게 잠깐 기다리라 이르고 서재로 향했다. 책상 서랍 구석에 넣어두었던 작은 책자들을 챙겨 나오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시현의 시선이 나를 따라 움직였다. 익숙하게 시현의 오른편에 앉아 책자들을 건네자 이게 뭐냐는 듯 눈짓하는 시현에게 확인해 보라는 말만 건넸다. 책자에 크게 적힌 글씨를 확인한 시현의 눈이 점점 크기를 키웠다.



"아저씨...."

"네가 원할 때 주려고 갖고 있었는데. 지금 필요한 것 같아서."



보청기 제작 관련 책들이었다.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던 새벽. 제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없어서 조금 후회된다는 시현의 말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있었다. 그 날 이후 딱히 보청기가 필요하다 먼저 언급하지 않아 선뜻 주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이 적기인 듯했다. 사랑을 받기만 해도 모자란 부모로 인해 청력을 잃은 만큼,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 때문에 하고 싶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미리 제작해놓고 언제든 원할 때 줄려고 하니, 직접 착용할 사람의 귀 모양을 뜬 본이 필요하다는 말에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싶어 보청기에 대해 열심히 조사했었다(물론 민준의 몫이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시현의 마음이 상처 입지 않도록 신경 쓰고 청력이 불편한 걸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막상 책자를 받아 들고 말이 없는 시현을 보고 있자니 역시 실수한 건가 싶어 조금 긴장이 되었다. 



한참을 뚫어지게 책들을 살펴보던 시현이, 소파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 책들을 정리해 올려두었다. 역시 기분 상한 건가...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 말을 고르던 중에 훅 끼치는 시현의 체향이 눈이 번쩍 뜨였다. 



"...."

"...."



처음이었다. 시현이 먼저 제게 입 맞춰주는 것은. 바보같이 이렇다 할 반응도 못하고 멍하게 있자 시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주 적나라하게. 그러곤 한다는 말이...



"고마워요..."

"...."

"아저씨 언제 시간 돼요?"

"어?"

"같이 가주세요. 만들러 갈 때..."



예상치 못한 입맞춤에 집 나갔던 정신줄을 겨우 챙겨와 정신을 차렸다. 제 마음을 알아준 듯한 시현이 고마웠다. 저를 마주 보며 웃으며 제법 살이 오른 두 볼을 봉긋하게 올리고 있는 모습이 예뻐 보여 작은 몸을 번쩍 안아 들어 허벅지 위에 앉혔다. 갑자기 붕 떠오르는 몸에 정신 사납게 파닥이던 시현이, 넘어가지 않으려 제 어깨에 팔을 둘렀다. 새빨개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놀리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29년 동안 모르고 살았던 스스로의 짓궂음을 요즘따라 자주 확인하는 것 같았지만, 알 바가 아니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걸 놀리지 않고는 참을 수 없다. 그게 결론이었다. 



"윤시현."

"왜요..."

"나한테 고마워?"

"....당연한 걸 묻고 그래요."

"근데 그게 끝이야?"

"응?"



뭔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현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 선홍빛 입술을 가득 머금었다. 마른 등을 힘껏 끌어안고 나누는 입맞춤도 달콤했지만, 어느새 익숙하게 제게 안겨 오는 몸이 예뻐 고개를 엇갈리느라 입술이 떨어지는 찰나마다 피식피식 웃었다. 저와 같은 마음인 듯 시현도 연신 작게 웃으며 입맞춤에 응했다. 



사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날이었다.




-




"긴장 돼?"

"나보다 아저씨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

"...."



보청기 제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카페 알바 면접에 앞서 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아저씨의 말에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저씨를 따라나섰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완성된 보청기가 지금 제 손안에 있었다. 저보다 긴장되는 듯 부산스럽게 다리를 달달 떠는 아저씨에, 조금 긴장되던 마음마저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후- 하고 작게 숨을 내쉬고 천천히 보청기를 끼워 넣었다. 낯선 이물감을 견디느라 찌푸려진 눈가를 습관처럼 어루만져주던 아저씨가 제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때.



"어때?"

"...."



아... 울면 안 되는데.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툭 내뱉은 아저씨의 목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귀를 파고들어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어느새 제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는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물고 있던 아저씨가 왜 그러냐며 난리를 피웠다. 불편해? 잘 안 들려? 왜 울어, 응? 쉬지 않고 바쁘게 내뱉는 아저씨의 말을 잠자코 듣다가 결국 왈칵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당황한 아저씨가 저를 꽉 껴안았다. 늘 그렇듯 습관처럼 오른쪽 귓가에 입술을 붙인 아저씨가 왜 우냐고 다정하게 얼렀다. 히끅대는 소리를 내며 몸을 들썩이다 아저씨의 어깨를 밀어냈다. 제 말만 기다리는 아저씨의 눈이 티 없이 맑아 겨우 멈춘 눈물이 또 터질 것만 같았다.



"아저씨...."

"어. 왜. 왜 그래, 응?"

"아무 말이나... 흐윽, 나한테 해주고 싶은 말.. 해 봐요..."

"어?"



그제야 제가 잘 들린다는 걸 알아챈 아저씨가 안심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제 눈물을 닦아주는 손끝이 부드러웠다. 쉴 새 없이 흐르는 제 눈물을 닦아주던 아저씨가, 늘 제게만 보여주는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사랑해, 시현아."



흐으아아아앙- 어린 아이처럼 울음이 터진 나를 껴안은 아저씨도 울컥한 듯 눈가가 빨겠지만, 언제나 든든한 남자친구이고 싶은 우리 아저씨는 울지 않았다.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갈무리한 아저씨가 좀처럼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나를 연신 어루만지고, 입 맞추고, 어르고 달래며 한참을 웃었다. 



사람이 행복해서 울 수도 있다는 걸, 아저씨 덕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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