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에 대하여>


 남준X지민

지민X정국

 

 

김남준(34)

S사 직계 손자. 미국에서 경영학 박사과정까지 수료. 20대 후반부터 이미 회사 물려 받을 준비를 다 마치고본사에서 직접 업무를 보면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음. 만사 젠틀하고 쉽게 흥분하는 법이 없지만 화가나면 무섭도록 차가워짐. 지민이한테만은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결국 지민이가 그 모습을 볼 날이 오고야 말지. 다른 건 다 참아도 내것을 뺏기거나 누군가와 나눠갖는 다는 건 참을 수 없는 남준이었으니까.

“다 줬잖아, 다 줬는데 뭐가 부족했었어? 너 이러는 진짜 의도가 뭐야.”


박지민(29)

22살 때 남준이네 회사 단기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다 남준일 만남. 직원도 아니고 그냥 사무보인 아르바이트생한테도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을 잋지않는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어. 지민이도 은근히 설레였었지.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는 점심시간엔 구내식당에 늘 나타나 지민이 뒷 테이블 앉아서 의자를 등받이를 맞대고 밥을 먹었음. 그러면서도 꼬박 한 달을 말 한마디 붙여오는 일이 없었는데 개강할 때가 다되어서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마지막 퇴근하던 날 회사 앞에서 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나랑 만나주면 좋겠는데로 시작한 첫 연애, 첫 경험 모든게 그 날 하루에 끝났었음. 자신의 지난 7년이란 시간이 철저하게 남준이에 의해 관리되어 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또는 그렇다해도 그걸 뒤집거나 벗어날 의지나 용기도 없는 상태였어.

 

전정국(25)

그런 두 사람의 일상에 나타나 돌을 던지게 되는 장본인.

 

지민인 아무것도 모르는 22살 때 남준이 만나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영원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어. 현재는 그냥 집안일 돌보면서 지냄. 크게 소리내서 웃어본지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무료하고 무의미한 일상이 반복되던 때에 운명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거야. 미친 듯이 돌진해오기만 하는 정국이를 밀어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온 몸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

"살면서 단 한번도 이렇게 가지고 싶었던게 없었어요. 아니면 가라고 해요. 그럼 나 정말로 갈테니까."

 

 

 



-1-

 

그 날 아침도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어. 평범하고 조용한 아침 식사, 그리고 배웅. 현관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돌아서다 문득 생각이 나버린 귀찮은 일이 하나 있었지.

 

 

“대신 가줄 수 있겠어? 자세한 건 문자로 보낼게.”

“네.”

 


늘 그렇듯이 지민인 무조건 알겠다고 해. 남준이가 떠나고 10분 후쯤 도착한 문자에는

 

이름 : 전정국

입국 비행편 : KOREAN AIR KE777 (3시 30분 도착 예정)

 

그리고 텀을 두고는 사진 한 장이 더 도착했어. 지민인 그 사진을 5초 정도 응시했다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소파에 깊게 몸을 뉘고는 마른세수를 했어. 길고도 피곤한 하루가 될 것만 같다는 예감. 

저녁에 남준이가 손님이 올 테니 간단하게 식사준비를 부탁한다고 했으니까 아침부터 부지런히 마트에 들려 식재료를 사고 집에 돌아와서는 재료 손질에 집 안 청소까지 마치고 보니 한시였어. 점심은 생각이 없어서 인스턴트커피로 때웠고 이제 곧 공항에 가봐야 했어.

차 키를 손에 쥐고 언제나 쓸쓸하고 적막한 집안에 배경음악처럼 켜져 있던 텔레비전을 끄겠다고 잠시 소파에 앉았어. 요새 은근히 남준이가 날카로운 것 같아서 덩달아 긴장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 잠깐 엉덩이만 붙였다가 일어난다는 게 그만 한 시간을 꼬박 잠에 빠져들어 버렸던 거야. 시간은 이미 두 시. 이대론 약속 시각이었던 세 시 반까지 공항에 도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조금이라도 덜 늦겠다고 그때서부터 지민이는 뛴 거야.

 

“헉…. 헉….”


공항에 도착하고도 주차장에서부터 뛰고 또 뛰어. 길고 긴 터미널 입구에서 한번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이 욱신거리는데도 이미 늦어버린 한 시간을 만회하겠다고 애쓰고 있었지. 도착하고 보니 이미 네 시. 입국장 앞에 서서는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고 그 일을 한참을 반복했지.

 

 

-그래, 한 시간을 늦었다면 이미 가버렸을지도….

 

 

지민인 남준이에게 전화하려고 전화기를 들고 근처 벤치에 앉았어. 그리고 벤치 옆 기둥에 기대어서 숨을 고르면서 주변을 보다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과 똑같은 얼굴의 옆모습을 발견했어. 얼마나 이로 물어댔든지 너덜너덜해진 커피 컵 안에 든 다 식은 커피를 연신 들이켜며 그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앳된얼굴. 지민인 한참을 그렇게 넋 놓고 사진이랑 그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어. 조금만, 조금만 이쪽을 봐주면…. 하고 생각하던 찰나 두 사람의 시선이 드디어 같은 곳에서 만나. 둘은 한참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순간을 멈춘 건 지민이 전화벨 소리였겠지.

  

“네. 만났어요. 조금 늦을 것 같은데…. 네, 다시 연락할게요.”

  

지민인 벤치에서 일어나 그 남자 앞에 가깝게 섰어.

 

“전..정국씨? 제가 너무 늦어서….”

“커피 괜찮으세요?”

“네? 네,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혼자 홀짝거리던 거의 다 비어버린 커피 컵을 내려놓고는 아직도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커피잔을 내밀었는데 자세히는 몰라도 아마 한 번 이상 양해를 구하고 다 식은 커피를 따뜻한 걸로 바꿔온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어. 지민인 그걸 받아들고는 그저 고맙다고 고개를 꾸벅하고는 앞장서서 차로 향해. 정국인 묵묵히 뒤에서 자기 캐리어를 들고 급하지 않은 큰 걸음으로 종종거리면서 앞서가는 지민이 뒤를 너무 가깝지 않게 따랐어. 

정국인 그 사람 참 아담하다고 생각했어.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얼핏얼핏 스치는 붉은 무릎도 눈에 담았지. 차에 올라타고 나서는 줄곧 퇴근길 교통정체에 걸려서는 도로 위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며 의미 없이 틀어진 교통방송을 듣고 있었어.

  

“어디로 가세요?”

“본가라고 하는데 어딘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 할아버님댁으로 가시는군요. 그쪽으로 모셔다드리면 되는 건가요?”

“...가는 길에 약국에 좀 내려주시겠습니까.”

“약국이요?”

“전 잠깐 눈 좀 붙이겠습니다.”

  

지민인 정국이 쪽을 슬쩍 쳐다봤다가 그저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정면만 응시했어. 정국인 창밖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어느샌가 잠에 빠져들었지.  대단히 고단하고 길었던 48시간이었어. 대학 졸업장을 받아들고 그길로 바로 떠난 2주간의 유럽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선 비행기에 내린 지 채 24시간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가 손에 쥐여준 비행기 표를 받아서 또 다른 여행길에 올랐지. 언제나 그렇듯이 어디로 가야 하냐고 왜 가야 하냐고 묻지 못하고 그냥 그곳에 도착하면 마중 나올 사람이 있고, 가서 지내야 할 곳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이곳에 도착했어. 딱 10년 만이야.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입학식에 가는 줄 알고 올라탔던 차가 공항에 도착했고 그길로 10년을 한국 땅을 밟아보질 못했어. 갔다 오겠다고 씩씩하게 손을 흔들고 집을 나왔었는데 그약속은 지키질 못했고 그게 마지막으로 봤던 엄마 얼굴이었어.

 

 -엄마….

 

지민인 악몽을 꾸는 듯 몸을 들썩이다가 입 모양으로 엄마, 엄마 불러대는 정국이를 차마 깨우지 못하고 그저 흔들리는 어깨에 손을 얹었어. 정국인 진정되기는커녕 점점 더 감정이 격해져서 흐느끼다가 결국 감긴 눈가를 따라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서는 지민이 손등에 떨어졌지. 

시간은 벌써 9시가 다 되어가. 겨우 잠시라도 주차할 수 있는 곳이 가까운 약국을 찾았는데 정국이를 깨우지 못하고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사이 그마저도 큰불이 꺼지고 셔터가 내려가기 시작했지. 어쩐지 지민인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고 남준이가 부탁했던 손님맞이준비를 전혀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는 걸 알면서도 운전석에 기대어 눈을 감았어. 그리고 쎄한 기분에 눈을 떴을때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차 밖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억수같이 비가 퍼붓는 광경을 마주했고 자꾸만 축축하게 젖어드는 청바지는 정국이의 새까만 머리칼을 타고 내리는 빗물 탓이라는 것도 곧 인지하게 됐어.

 

“괜찮아요!”

  

지민인 자기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며 정국이 손을 쳐내버렸지. 그러는 바람에 어두운 차 바닥에 떨어진 밴드를 더듬거리면서 찾던 정국이 위로 지민이가 핸드폰 플래시로 불을 비췄어. 그리고 그제야 눈치채게 되는 흠뻑 젖어 든 하얀 셔츠. 단단한 등의 근육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는 걸 보고 지민인 급하게 시선을 돌렸어.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어. 지민인 분명 당황해서 그런거라 생각하고 자기 가슴에 손을 얹어서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어. 그리고 능숙하게 해냈지. 다시 차분해진 목소리와 눈빛으로 정국이와 눈을 맞추고 얘기할 수 있었으니까.

 

“정말 괜찮은데…. 괜한 일을 하셨네요.”

“아까부터 신경 쓰였어요.”

“..............”

“상처라는 게 제때 잘 덮기만 해도 알아서 아물어요. 덧나지만 않으면.”

  

그 날 정국이를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지민인 그 말을 곱씹었지. 덧나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말. 열두 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한 지민인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거실 소파에 늘어져 잠이 든 남준이를 발견했어. 술 냄새가 많이 났고, 넥타이와 와이셔츠는 이미 본래의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져있었어. 지민인 건조대에 널어놓았던 담요를 가져와 남준이 몸을 덮어주고는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빈 생수통들을 집어 들지. 그러다 미쳐보지 못한 생수통 하나를 밟아버렸는데 그게 정말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적막이 흐르던 집안에 찢어지는 소음을 하나 만들어버렸지. 지민인 눈을 질끈 감았어.

 

“지민아. 물 좀.”

“네.”

  

남준이에게 줄 생수병을 찾으려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거기 케이크 상자가 하나 들어있었어. 그걸 못 본 체하고 생수병만 하나 잡아서 냉장고를 다시 닫았지. 그리고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남준이에게 걸어가 생수병을 내미는데 두통이 있는지 줄곧 머리 위에 팔을 올리고 있던 남준인 더, 더, 가까이와 그렇게 명령조로 얘기했어. 그리고 충분히 가까운 거리도 다가왔을 때 남준인 지민이 팔을 낚아채 자기 품 안에 넣었지.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랐어?”

“...네.”

  

5월…. 5월..10, 20…. 아, 지민인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남준인 한숨을 푹 쉬고는 지민이 허리를 꽉 껴안았어. 지민인 미동도 하지 않고 그냥 그다음을 기다렸지. 이제 벌 받을 차례인가 하면서.

 

“싫다고 안 하면 바로 할 건데 상관없나.”

“네.”

“가끔은 거부해도 괜찮은데.”

“괜찮아요.”

“너무 딱딱해. 좀 더 진심을 담아서 얘기해봐.”

“어차피 마음대로 하실 거잖아요. 그냥 마음대로 하세요.”

“......너, 나 미치게 하지. 일부러 미치라고 그러지.”

 

남준인 짐승처럼 그르렁대는 숨소리를 내면서 지민이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 이리저리 이 자국과 붉은 흔적을 남겨 놓기 시작해. 지민인 어느 순간부터는 정신을 잃었었고 눈을 떠보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에 얇은 이불 한 장만 덮여있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면은 하루를 시작해. 테이블 위엔 오렌지색 원형의 상자 뚜껑에 리본이 잘 매어져 있었어. 그 안엔 손에 쥐려고 하면 미끄러져 나가 버릴 것만 같이 매끄러운 실크 스카프가 들어있었지. 이해하기 난해하고 어지럽지만 고급스러운 문양에 네이비, 블루, 브라운 같은 차분하고 무거운 컬러들이 섞인 대강 봐도 최고급인 까레 스카프. 1시 J 호텔 로비로 오라는 카드 메시지도 함께 들어있었는데 지민인 과연 이걸 선물로 주기 위해 어젯밤 남준이가 그렇게 무섭게 흔적을 남기고 몰아붙인 건지 그게 미안해 그걸 가리려는 선물인지 어떤 게 먼저고 어떤 게 나중인지 알 수가 없었어.




-2-


정확하게 12시 50분 약속 시각 10분 전이었어. 남준인 약속 시각에 철저한 편이어서 일이 생길 경우라 엔 아무리 늦어도 10분 전에는 변동사항이 있으면 알려왔어. 특별한 연락이 없었던 오늘은 어쩐지 10분 전에도 나타나지 않아 지민인 초조한 마음이 들어서 손톱 끝은 물어뜯고 무의식적으로 스카프를 만지작거렸어. 



“박지민 씨?”

“.......?”

“먼저 와계셨네요.”



지민인 자신 맞은편에 의자를 조심스럽게 빼서 앉고 웨이터를 불러 커피를 주문하는 낯익은 얼굴을 말없이 계속 쫓았지. 시계를 다시 내려다보면 정각이야. 남준인 나타나지 않는 것이 분명했어. 애초에 약속장소와 시간만 적혀있었지 점심을 같이하자는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그렇구나 납득하고 말았지.


“사실 오늘 선 자리인 줄 알았어요.”

“네?”

“호텔 로비에서 누가 기다릴 거라고 하길래.”

“아, 모르셨군요. 제가 나오는 줄….”

“무릎은 좀 괜찮으신가요?”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어요.”


‘상처라는 게 제때 잘 덮기만 해도 알아서 아물어요. 덧나지만 않으면.’

지민인 정국이 말이 생각이 나서 아직도 손이 스치면 시큰거리는 무릎을 감쌌지. 애써 비까지 맞아가며 구해다 붙여준 밴드는 어젯밤 침대 위에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면서 힘없이 떨어져 나가버렸어. 상처는 덮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더 쓸리고 덧나서 아침에 샤워하면서 따뜻한 물이 닿았을 땐 아- 하는 탄성이 나올 만큼 아팠어. 어젯밤 일이 생각나니 자기도 모르게 남준이가 거칠게 입으로 남겨 놓은 상처에 손이 올라갔어. 그리고 부드러운 스카프가 손가락 끝에 닿으니 안심하고 손을 내렸지.


“집에 잘 들어가셨는지 궁금했어요.”

“왜 걱정하셨죠?”

“길을 잃은 것처럼 보여서요.”

“나 서울 토박이예요.”

“그러시구나.”


어쩐지 발끈한 듯 쏘아붙이는 지민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곤 커피잔을 들어 올려서 호로록 소리를 내며 들이마시는 정국이 입가가 조금 올라가 있었어. 첫 만남에도 오늘도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했지. 그걸 힐끗 곁눈질로 본 지민이도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담긴 커피잔 겉면에 쓱쓱 닦아 내렸지. 한참을 그렇게 오가는 말이 없이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다가 커피잔을 다 비운 정국이가 먼저 입을 열었어.



“제가 믿어도 되는 분인가요.”

“네?”

“필요한 건 다 지민 씨한테 부탁하라고 하시던데.”

“할아버님이요?”

“네, 할아버지가.”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하세요.”


‘방금 또…. 변했지.’


정국인 조금 전 털을 세우듯 날카롭게 반응하던 지민이의 태도가 단숨에 순종적으로 변하는 걸 느꼈어. 어제도 약속 시각보다 늦게 공항에 나타나서 자기를 찾아 헤매던 창백한 얼굴, 상처를 치료해줄 때 당황하던 표정. 뭔가 방심할 때마다 나타나는 방어기제들. 그리고 어떻게든 스스로를 진정시켜서 다시 끌어내는 차분하고 순종적인 태도는 학습된 것으로 보였어. 



“집부터 봐야 할 것 같아요.”

“회사 근처로 구하실 건가요? 평수는요? 동네는 생각해 놓은 곳 있으세요?”

“생각해 놓은 곳이라….”

“회사가 여기서 30분 거리니까…. 아무래도….”

“지민씨는 어디가 좋아요?”

“네??”

“지금 사는 곳 좋아요? 살고 싶은 곳이에요?”

“..저는….”



그렇게 질문을 받고 나니 대학을 다닐 때 돈이 조금 모이면 꼭 살아 보고 싶었던 복층 원룸이 생각이 났어. 남준이와 연애를 시작하고 3개월도 안 되어서 반동거를 하는 상태가 되었고, 그 후로 일 년, 남준이가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사를 해야겠다고 했고 함께 살자는 프러포즈를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당연스럽게 손을 붙잡으니 같이 이곳에 오게 된 거지. 어떤 집에서 살고 싶냐는 질문은 남준이에게도 받은 적이 있지만,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급빌라를 보여주는데 거기에다 대고 복층 원룸이라는 말을 하기가 우스웠어.



“저는…. 복층에 꼭 살아 보고 싶었어요. 복층 원룸이요.”

“좋은데요? 그렇게 하죠.”

“아, 그럼 동네는….”

“서울에 오래 살았다고 하시니까 믿어볼까요.”



정국인 살짝 상기된 듯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서 이것저것 메모를 남기는 지민이의 모습을 훔쳐봤어. 앳되어 보이는 게 비슷한 또래이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눈이 마주치자 처음으로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하니까 덩달아 입가에 미소가 번졌지. 언제 집을 보러 갈 거냐고 스케줄을 맞춰보자는 얘기까지 빠르게 진행돼서 분위기가 활기차졌어.  



“주말엔 어떠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지민씨는 어때요?”

“저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럼 토요일에 보기로 할까요?”

“아, 저녁때 다시 연락드릴게요.”



스케줄을 들여다보던 지민인 갑자기 망설였어. 그러더니 자기 핸드폰을 정국이 쪽으로 내밀어서는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지. 집에 들어가서 연락하겠다고 말이야. 정국인 난감해하면서 아직 미쳐 한국 전화번호를 못 만들었다고 했어. 그도 그럴 것이 생각해보니 어제저녁 늦게 들어가고 오늘도 이제 겨우 1시였으니까. 사실 정국인 시차 때문에 어젯밤에 전혀 잠을 자지 못했어. 차에서 잠깐 눈을 붙였던 것이 전부였지. 해가 뜨고 나서야 눈꺼풀이 무거워졌지만 잠들었다가는 약속 시각에 맞춰 나가지 못할 것 같아서 참았어. 



“그럼 내 번호를 줄게요.”

“네.”

“아…. 이거 한글이….”

“설정 들어가면 되는데 세팅이라고 되어있는 거.”

“아….”

“예뻐요. 잘 어울리네요.”

“네?”



정국이는 자기 목을 가리키면서 다시 예쁘다고 했어. 스카프 얘기였지.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지 지민인 고개를 푹 숙이고 계속해서 영어와 씨름을 하면서 한글 자판을 찾아. 자신이 쓰는 핸드폰이랑 기종이 달라서 조금 헤맸어. 자판도 한국어가 없어서 헤매다가 겨우 저장을 하고 다시 핸드폰을 돌려주려고 보니 정국인 팔짱을 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지. 찰랑거리는 생머리가 늘어져서 한쪽 눈을 가렸고,  머리카락부터 높다랗게 날이 선 콧대를 타고 입술 밑에 점까지 자연스럽게 눈이 따라갔어. 귀에 귀걸이는 없었지만, 귀를 뚫었던 흔적이 제법 여러 개가 남아있었어. 새삼 정국이 나이가 궁금해지고 햇빛에 비쳐 보이는 피부에 솜털을 보면서 그 개수를 다 세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 얼굴을 계속해서 눈에 담고 있었어. 꿈속에서까지 엄마를 찾았던 일에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궁금해졌지. 청바지를 적시던 젖은 머리칼, 완전히 젖어버린 셔츠가 들러붙어 드러나던 갈라진 등까지 떠올랐을 때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어. 한가하던 주변 테이블도 가득 차 있었고 로비에 잔잔하게 울려 퍼지던 클래식 음악이 사람들의 대화 소리, 웃음소리에 묻히기 시작해. 그렇게 30분을 지민인 자리를 지켰어. 뒤 테이블을 정리하던 직원이 실수로 정국이가 앉은 의자를 엉덩이로 밀어버리면서 정국이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기 전까지.


“잘 쉬었어요?”

“아…. 잠이…. 죄송합니다.”


온몸이 물에 젖은 스펀지처럼 무겁고 귀도 먹먹해진 느낌으로 잠에서 깨어난 정국인 괜찮다며 환하게 웃는 지민이 얼굴만 눈을 껌벅거리면서 쳐다봤지. 좀 꿈같은 느낌이었어. 잠이 든 것도 지민이가 환하게 웃어준 것도. 


“여기 있었네. 내가 일이 생각보다 늦게 끝나버려서. 나 대신 손님맞이를 해줘서 고마워.”

“아, 오셨어요.”


그리고 지민이 얼굴에 피었던 웃음꽃이 곧 져버렸지. 어깨에 올려진 손은 일어나려고 하는 지민이를 다시 눌러 앉혔어. 그리고 스카프로 올라가서는 위치를 조금 고쳐주고는 어깨를 두드리고 나서 떨어져 나갔지.


“오랜만이다. 한 십 년만인가?”

“안녕하세요.”


내밀어진 남준이 손을 올려다보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잡는 대신에 꾸벅 인사를 했어. 남준인 정면만 응시하고 있는 지민이를 내려다보더니 그렇게 소개를 했지.


“내가 제일 믿는 사람이야. 너도 믿어도 될 거야.”

“할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 내 말은 못 믿어도 영감 말은 믿을 테니 뭐.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할아버지는 지민이 얘기를 하면서 정국이에게 정확히는 자주 드나들어야 하는 집을 지키는 개라고 했지. 잘 길들이고 얼굴을 익혀놓으면 나중에도 물지는 않지 않겠냐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셨었어. 남준이가 자리를 뜨니 꾸벅 인사를 하고 뒤를 따르는 지민이 뒷모습을 보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 조금은 이해가 갈 것 같아 씁쓸해졌지.


“오실 줄 몰랐어요.”

“내가 그렇게 경우가 없는 사람이었나 너한테?”

“그런 생각 안 하는 거 알잖아요.”

“처음 같이 밤을 보낸 곳에서 그것도 기념일에 성가신 일이나 대신 해결해달라고 보내고 그게 경우가 없는 놈 아닌가?”

“아….”


오는 길 풍경이 익숙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어. 주변을 둘러보니 인테리어도 시즌마다 바뀌는 데다가 그날은 설렘과 긴장감에 휩싸여서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었고 술에 제법 취하기도 했었으니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도 엘리베이터가 열리니 베르사유 궁전에서나 볼듯한 호화로운 금빛 장식을 보고야 알았어, 

아, 여기였지. 펜트하우스로 이어지는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키스를 했었어. 아주 깊고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키스였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날은 저 사람도 여유가 없었던 게 분명했어. 밖에서 섣부르게 접촉을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인데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던 걸 보면 말이야. 그래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이 있었지. 처음 자신에게 연애감정을 표현한 날인데 그날 자기가 OK 할 거라는 걸 남준인 알았던 걸까? 아니면 내가 아닌 아무라도 상관이 없었다는 걸까? 만약 거절했었더라면 차가운 얼굴로 “그래요?” 하고 돌아섰을까? 그랬으면 지금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하는 질문.


“몰랐다는 표정이네? 가만 보면 의외로 순정파는 난가.”

“..죄송해요.”


엘리베이터가 열리면 남준이가 성큼성큼 걸어서 먼저 엘리베이터 안에 자리를 잡았어. 지민이도 천천히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올라타서는 남준이 옆이 아니라 뒤에 섰지. 밖에서 노골적으로 애정표현을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밀폐된 공간에 둘만 남게 되면 손을 잡는 다던지 가까이 서도록 옷을 끌어당기고는 하는데 오늘은 지민이에게 눈길을 한번 주는 일이 없이 앞만 보고 서 있었어. 그래서 33층까지 올라가는 시간이 끔찍하게 길게 느껴졌어. 뭔가 말을 꺼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이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는 거야.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33층에 도착해서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도록 남준인 내리지 않았어. 지민인 그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먼저 남준이 재킷 끝을 붙들고 이마를 널따란 등에 기댔어.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만 느낌에 매달려오니 결국 남준이가 뒤를 돌아 한 손으로는 자기 재킷을 구겨 잡고 있던 지민이 팔을 붙잡고 한 손으론 가는 허리를 감싸서 자기 몸에 밀착하게 지민이 몸을 끌어당겼지.


“이사회가 있었어. 뒷방 늙은이들이 저 어린놈 얘기만 계속하더라고 직통, 직계 타령하면서. 지금이 뭐 조선 시대고 회사가 왕국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시대착오적이야 다들."


열이 받은 듯 넥타이를 늘어뜨리는 남준이의 차가운 얼굴에 지민인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느낌이었어.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르고 허공을 헤매던 손을 살짝 남준이의 가슴에 올려놓자 남준인 스트레칭을 하듯 고개를 한 바퀴 돌리고는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려 서늘한 미소를 띄워 보였어.


"근데 거기서 네 생각만 하고 있었어. 목을 가리려고 스카프를 이리저리 돌려댔을 너, 나 대신 따른 놈이 마주 앉았을 때 당황했을 네 얼굴. 내 얼굴을 보고 그보다 더 당황할 네 얼굴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남준인 점점 얼굴을 가까이 붙여오면서 귓가에 그렇게 속삭였지.


“설 것 같더라고.”


지민인 벗어날 곳도 없는 남준이 품 안에서 고개를 돌리고 남준이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피했어.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추어져 보이는 목덜미 붉은 자국, 아까 남준이의 손에 의해 고쳐진 스카프의 위치 때문에 그게 훤하게 드러나 있었지. 그걸 못 본 척하지 않고 곧은 눈으로 쳐다보던 맑은 눈이 생각나서 몹시 부끄러워져 버렸어. 보인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지 살짝 벌어졌던 입술도 생각나. 입술이 얇고 그려 놓은 것처럼 예뻤던 것 같은데. 그런 섬세한 입술은 닿으면 어떤 느낌이려나?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 갑자기 목덜미가 뜨거워져서 그걸 가리려고 스카프를 올렸지만, 그마저도 곧 남준이에게 제지를 당해버렸어. 결국, 스카프는 스르륵 힘없이 풀려서 남준이 손에 들어가 버려. 자기 행커칩처럼 가슴 주머니에 찔러넣고 다시 보니 무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새 걸로 다시 사주겠다고 했지. 그리고 드디어 품 안에서 지민인 놓아주고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지. 지민인 어쩐지 마음이 다급해져서는 자기도 모르게 남준이 등 뒤로 조금 가까이 붙어서 뒤를 따랐어. 


‘예뻐요. 잘 어울리네요.’


“주세요. 제거예요.”

“돌려 달라고?”


호실 번호도 없는 펜트하우스 문이 열리고 비트가 묵직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어. 테이블에 세팅된 샴페인부터 따서 한잔 따르곤 그 잔을 들고 소파에 앉은 남준이 앞에 벌을 받듯이 선 지민이를 보면서 남준이 오른쪽 눈썹이 높이 올라갔어. 지민인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면서 애먼 자기 목덜미만 계속 만지작거렸지. 


“저…. 주셨잖아요.”

“줬지. 너한테. 너한테 준 건 네 거고, 너는 내 거고 그럼 다시 내 거 아닌가?”

“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마음에 든 거라서….”

“그래 가져가.”


남준인 그 스카프를 자기 팬츠 안에 깊숙이 밀어 넣었어. 그럼 지민인 아무 말 없이 까지고 쓸려서 쓰라린 무릎이 아픈 줄도 모르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스카프 끝을 입에 물었지. 그러면 남준인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지민이 뒷머리를 조금 세게 잡아서 헝클어트렸지.



 

편안한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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