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 요소 혹은 트라우마를 자극하거나 불편하실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읽으실 때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25.


계속 이렇게 처박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자신세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노력을 한 것이었다. 결국 노력도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그렇다고 또 굳이 여기서 납작 엎드려 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를 위로 가장 높은 곳에 앉혀준다는 알파들이 생겼는데 구질구질하게 그럴 필요가 뭐가 있을까 싶은 괜한 객기이기도 했다.

아직도 저 아래는 무서우면서. 이 곳도 딱히 나의 안전을 보장 하지 않으면서도 오메가라는 이유로 받는 친절과 관심에 젖어버린 모양이었다. 정말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연약한 마음이지. 또 믿으면 안되는걸 알면서도 눈앞에 내밀어지는 의도가 심어진 친절을 매몰차게 거절하지도 못하고, 그게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르면서 덥석 받아먹는 내 자신에게 환멸이 나면서도 이럴 땐 정말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라고 느껴졌다.


그래도 최대한 내가 할 수 있을 만큼은 의심을 하고 경계는 해 볼 것이다. 그래, 이렇게 까지 해주는데 뭔가 속셈이 있겠어? 하면서 간단하게 넘어갈 리 없게 노력을... 내가 진짜 할 수 있을까? 마주한 안락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이럴 땐 마음이 없는 로봇이고 싶었다.


머리를 정돈하고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안경을 다시 한번 콧대로 바짝 올린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난... 할 수 있다.



심장이 커다란 북소리를 내어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잠시 머뭇거렸지만 발을 옮겼다. 지하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괜찮아. 운이 좋아서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잖아? 괜찮아.

최신식 아파트의 엘레베이트는 좋기도 했다. 이 높은 층수를 단 몇초 만에 내려왔다. 괜히 겁먹었다 싶을 정도로 아무런 방해가 없었다. 넓은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자 조금 막막해졌다. 이 많은 차 중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차는 어떻게 찾지? 이리저리 둘러보며 자동차 스마트키의 버튼을 눌러본다. 저 멀리서 주황빛의 불빛이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빠르게 다가가서 확인하자 새까만 재규어였다.

둥그런 곡선으로 미끄럽게 빠진 차체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싸 보였다. 정말 이걸 내가 타도 된다고...?


자동차 면허는 가지고 있지만 장롱면허였다. 면허를 취득한 이후 운전을 해본 적이 없단 소리였다. 내가 이걸 몰아서 호텔까지 잘 도착 할 수 있을까. 벽에다 들이박지만 않아도 성공이지 않을까?




쉬웠다. 운전이.

몰랐는데, 비싼 외제 차로 도로에 고개를 들이미니까 알아서 피해주는 게 제법 웃겼다. 그러면서도 씁쓸했다. 원래는 내가 피해주는 쪽에 있던 사람인데 타고 있단 자동차가 고급 차란 이유로 내 앞길을 터주는 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돈이 있는 기득권층은 항상 누렸을 일상을 잠깐 훔쳐본 것만으로 이런 느낌이 드는데 나와는 시선이 맞지 않았다. 높이가 너무나도 달랐다. 나에게 맞지 않은 불편한 옷을 입은 것 처럼 말이다.


한달만에 출근하니 솔직히 조금 민망했다. 연차를 몰아 쓴다더니 하루 만에 돌아와 놓고선 며칠 뒤 다시 한 달을 쉬어버리게 되었으니... 팀원들의 얼굴을 보기 조금 미안했다.

쭈뼛거리면서 작업실로 들어갔는데 다들 아무렇지 않게 반갑게 맞아주니 조금 얼떨떨하기도 했다.


"여주씨 이제 괜찮아?! 많이 아팠다며!"

"아! 네. 네네! 이제 다 나았어요. 괜찮습니다."


내가 많이 아파서 입원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사님이 잘... 이야기 해준 모양이었다. 평소와 다름 없는 원래 나의 일상으로 다시 복귀한 것 인데도 뭔가 새로웠다. 어색한 느낌조차 들었다. 시시콜콜한 사담을 나누며 화분들을 정리하고 장식을 하기로 결정한 꽃들을 디스플레이하고, 객실로 올려달라 전달받은 꽃다발들을 만들고. 만약 조금 욕심을 내어서 바란다면 지금 처럼 다를 것 없는, 평소와 틀린 게 없는 지금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 알파 소굴의 동네에서 지내야 한다 해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도 행복이라고 정의한다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잠시 스치듯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플라워 파트에 김여주씨?"

"네?"


한창 로비의 화병들을 정리하고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호텔 정문 앞에서 대기를 하며 투숙객의 짐을 관리하고 시설물을 안내하는 벨보이가 말을 걸어왔다. 같은 호텔 안에서도 구역이 다르고 역할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보다 마주치는 직원들이 한정적이었다. 더더욱이 호텔 내부 깊숙한 곳에서 일하는 나와 호텔 대내외를 오가는 벨보이가 마주칠 확률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소리였다. 친분이 있어 의도적으로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유난히 낯이 익은지 모르겠다. 흔하게 생겨서 그런가?


"뭐야. 왜 모르는 척해?"


미친놈이라서 내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던 걸까? 이 새끼는 뭔데 갑자기 말을 까고 지랄일까? 내가 순해 보이는 인상이라 만만하게 보이는 걸까? 괜히 직원 간의 트러블이 생기면 나만 손해다 싶어 자리를 피하려고 했는데 이 새끼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는 계속 졸졸 따라왔다. 우리 부서 쪽 복도까지 말이다.


"뭡니까? 일 안 하세요?"

"아, 나 휴게시간이라."


그럼 할 말 없지. 쉬는 시간이라는데 그럼 동선이 같을 리가 있나. 이 미친놈이 나를 뭐로 보고.

직원통로는 한곳이 아니다. 저 자식과 나는 같은 부서나 연관 부서가 아니다. 성별도 다르다. 그렇다는 것은 휴게공간도 다르고, 직원실도 다르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내 부서와 같이 보관할게 많은 부서는 따로 공간을 빼내어 보관 창고가 필요하기 때문에 더더욱이 나랑 같은 곳으로 올 이유가 없었다. 이쪽은 우리 파트만 사용하는 공간이니까.


"뭐야. 나한테 볼일 있어? 왜 따라오고 그래?"

"아니, 너 진짜 왜 모르는 척 하는 건데? 연기면 대단한 거고 참는 거면 더 자극하고 싶잖아."


아. 시발!

느낌이 존나 좋지 않았다. 이 새끼 알파인 듯했다. 그래서 내가 낯이 익다고! 알파라서 기억하려고 얼굴을 외워둔 것이었다. 한 달 넘게 마음은 불편해도 몸은 편하게 쉬고 와서 그런지 긴장이 이렇게 풀려버릴 수가 있나?! 항상 고슴도치 같이 가시를 세우며 다녔었는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정말 최악이었다.

근데 나 베타 아닌가 아직? 벌써 약효가 끝났나? 어?!


"무슨 개소리야. 미친 소리 하지 마. 그거 성희롱이야."

"하, 이렇게 온갖 알파 냄새 묻혀놓곤 모르는 척 하는 건 무슨 짓인지 모르겠네. 아무것도 몰라요. 강제로 해주세요. 이런 거 즐기는 타입이었나?"


아 개 같은 새끼 진짜 알파 새끼들은 하나같이 역겹고 추잡하며 온갖 머릿속에 그딴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아니 그리고 이야기가 다르잖아. 미친놈들아. 너희가 이렇게 페로몬을 쌓아두면 아무도 안 건들인 다며! 근데 이 새낀 왜 오메가 페로몬도 아니고 알파 페로몬에 반응하냐고 진짜 개 또라이 새끼 아냐?!

그래도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 좆같은 알파와 단 둘이 있어선 안되었다. 어디로든 도망을 가거나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덩치나 키 차이는 별로 나지 않더라도 나는 오메가이고 저 개자식이 알파라면 완력과 힘의 차이는 이길 수 없었다. 어떻게 빠져나갈지 궁리를 하며 개자식의 뒤를 슬쩍 보는데 복도 끝으로 누군가 지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까지만, 저기까지만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


"얼마나 쫀득하고 맛있으면 이런 상위 알파들이 달려들었을까. 하. 궁금하네."

"미친 새끼. 내가 먹는 거로 보이냐."

"아유. 입도 거칠어. 누가 그렇대? 일단 나도 맛을 봐야 알 거 아냐."


건성으로 개자식의 말에 대답을 해주며 빈틈이 생기길 노렸다. 조금 더 가까이 와라. 그래. 겁먹었을 오메가를 힘으로 압박하면서 가지고 노는 물건 취급은 너네의 전유물이잖아? 안 그래? 방심해. 그래 더 가까이 와. 이 십새끼. 내가 당하더라도 너는 꼭 죽여버릴 거다.

슬슬 다가오던 이 개자식은 내가 더 이상 물러나지 않자 포기했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손을 들어 나를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 뻗어오는 손을 개자식의 안쪽으로 강하게 쳐내며 복도를 내달렸다. 제발! 이 복도 끝까지라도 달려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제발 누구라도 복도에 있어 주세요. 제발...!

신고 있던 단화가 벗겨지며 균형이 무너졌다.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지만 곧장 중심을 잡고 다시 내달렸다. 복도의 끝에 가까워져 커브를 돌려는 순간이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속도가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복도의 끝 벽으로 처박히게 되니까. 그 작은 순간을 이 개자식이 놓칠 리가 없었다. 무섭게 따라오던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내 머리카락도 붙잡혔다.


"이 개 같은 년이. 되게 비싸게 구네. 어디 함부로 굴러먹다 온 게."

"놔! 놓으라고! 이 미친새끼야!"


붙잡힌 머리채 때문에 머리통이 아팠지만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쓸게 아니었다. 저 역겨운 손아귀에 휘감기듯 붙잡힌 내 머리카락 때문에 질질 끌려가는 게 더 고통스러웠다. 너무 싫었다. 내 몸의 한 부분이 저 손에 잡혔다는 게 치욕스러웠다. 두피가 다 떨어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벗어나고 싶어 힘을 주었다. 끌려가지 않기 위해 버둥거렸다.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은 거지 이런 식으로 취급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것도 그렇게 과분하고 분수에 넘치는 욕심이었을까?

머리카락이 다 뽑혀도 상관없는데 이미 많이 뽑힌 것 같은데도 여전히 붙잡혀 창고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아... 발버둥을 쳐봤자 오메가는 오메가였다. 소수가 다르게 한다고 해도 대다수의 알파들이 이따위인데 내가 뭘 상상을 했던 걸까. 나는... 아직도... 뭘 믿고 싶었던 걸까...


이 소란에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다. 아니, 나를 도와주러 올 사람이 없다.

인생은 역시 혼자였고, 내 자신은 내가 지켜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럴 힘이 없는 존재다. 너무 서럽고 화가 나고 그래서 눈물이 났다. 울지 않기로 마음 먹었는데 자꾸 그 결심을 무너뜨린다.


왕자는 없다.

내가 공주가 아니기 때문인가 보다.





26.



"이런 식이면 곤란해. 린타로군. 나 정말 화낼 지도 몰라."

"쯧. 관리 소홀은 인정하지."

"맨날 그 위에 처박혀 있으니까 밑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거 아니야. 이 미친놈아."

"직원 교육 똑바로 안 시키나! 그 새끼 우쨌노?! 살려놨나?! 그러면 니가 내한테 뒤지는 거다!"


네 사람의 언성이 자꾸 커지며 곱지 못한 단어들이 서로에게 뱉어지고 있었다. 특히 의도치 않게 사건의 장소를 제공하게 된 스나는 역적 취급을 받으며 가장 욕을 먹고 있었지만 딱히 그걸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비난을 받아도 싸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큰 한숨을 내쉬기만 바빴다.

텐도는 책상 위에 엎드려 날뛰는 나머지 둘을 보며 손장난만 치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평온해 보이다가도 갑자기 눈썹을 찌푸리며 작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자꾸 지나간 일들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털어내고 싶었는데 잘 안되었다. 그 잔상이 너무 짜증 나는데 자꾸 엉겨 붙었다. 너무 기분이 나빴다.

후타쿠치는 알파들에게 정조대를 채워버리자며 자신이 그것을 만들어오겠다며 날뛰고 있었다. 아예 공간을 분리해서 떨어트리고 정조대를 채워 관리·감독을 하는 것이 사회에 이롭다며 아무도 듣지 않을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동의만 한다면 너네도 다 차고 다니라며 짐승같이 사는 알파들에 대해서 강하게 비난을 했다.

미야는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지 씩씩거리며 책상을 쳐 내리기 바빴다. 그러다 텐도한테 한 소리를 듣자 자신의 허벅지를 쳐 내렸다. 아프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말이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머리를 헝클이며 소리를 질렀다. 주체하지 못할 분노의 감정에 먹힌 몬스터 같았다.


"그래서, 린타로군. 누구였어? 그 자식."

"신입. 몇 달 전에 들어온 모양이더군. 알파로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막 사회에 나온 햇병아리였다."

"아하. 이 미친놈이 감히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런 짓거리를 했다? 그래서 이해해줘야 되는 건 아니지?"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다! 고마 데리고 온나. 내가 그냥 뒤지게 패줄게."


음. 그래? 그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도 아무도 몰랐겠다. 갓 나온 녀석이면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을 텐데 말이야. 그치? 혼잣말을 중얼 거리던 텐도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의자 등받이에 푹 눕듯이 몸을 기울였다. 그리곤 다리를 꼬아 발끝을 까딱거렸다. 평정심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눈썹은 여전히 찌푸린 채였다.

스나는 테이블에서 아예 뒤 돌아 앉으며 팔걸이를 손끝으로 탁탁 두들겼다. 어떻게든 후처리를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세상에서 말소시켜버리면 가장 깔끔하겠지만 그럼 너무 관대한 처사라고 생각을 했다. 아예 죽여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피를 말려버릴 생각이 다분했다.

후타쿠치는 연설이 끝났는지 자리에 털썩 앉으며 팔짱을 꼈다. 그리곤 스나의 뒤통수를 뚫어질 듯 노려봤다. 너무나 마음에 안 들었다. 여주씨가 저 능구렁이 같은 놈의 호텔에서 다니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이런 사고를 예상하지 못해 여주씨에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것도 열을 받았다. 그 개새끼보다 이 새끼를 먼저 조지고 싶었다.

미야는 이제 의자를 쥐어짜고 있었다. 얼마나 강하게 잡았는지 의자가 버티질 못하고 양쪽의 팔걸이가 동시에 부서져서 바닥으로 낙하했다. 떨어진 팔걸이를 보니 저렇게 만들어버려야겠단 결심이 들어선 모양이었다. 그 개자식이 갇힌 곳을 알아내어서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갈 기세였다. 여주가 일어났다는 것 만 확인한다면 행동에 옮길 생각이었다.


으르렁 거리는 알파들이 모여있는 곳의 문이 열렸다. 굳은 표정의 시라부가 들어왔다. 네쌍의 시선이 문에 서 있는 시라부에게 꽂혔다. 빨리 뭐라도 뱉어내라는 신호였다.


"괜찮아. 과호흡이 오긴 했는데 지금은 진정했어."


과호흡이란 단어가 들리자 마자 뭔가가 와지끈하며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한두 개가 부서진 게 아닌 듯했다.


"텐도씨. 무슨 일 있었는지 자세히 들려줄 수 있어요?"


집중의 시선이 텐도에게로 옮겨졌다. 텐도는 다시 생각하기 싫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머리를 털었다. 굳게 말아쥔 주먹을 자신의 입가로 다가가 입술을 꾹 짓눌렀다. 내뱉기도 싫은 모양인지 애꿎은 침만 삼켰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짓씹듯이 한 글자씩 내뱉었다. 평온을 가장하던 눈빛이 매서워졌다. 죽여버릴 상대를 찾아낸 짐승 같은 눈빛이었다.


오늘은 여주씨가 좋아하는 카넬레를 구울 생각이었다. 다른 달콤한 간식들은 몇 입 먹고 마는데 이건 한입 크기라 그런지 덜 달게 만들면 맛있게 먹는 편이었다. 벌써 잘 먹을 여주를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잘 챙겨 먹여야 해. 이럴 때 일 수록 잘 먹어야 힘이 나지. 그런데 자꾸 조리실 바깥으로 향하는 문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기분은 나쁘지 않았고, 곧 여주를 만날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그런데 자꾸 문이 눈에 들어왔다. 문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저 기분 나쁜 열성 알파의 페로몬 때문일까?

확인이 필요했다.


페로몬의 양이 너무 작아 어디 쪽인지 잘 구분이 가질 않았다. 곧 점심시간 때라서 그런지 이쪽 조리실 복도에는 유동 인구가 너무 많았다. 향이 흩어지기 충분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서슴없이 발걸음이 옮겨졌다. 눈앞에 안심할 수 있는 상대를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점점 더 걸음 소리가 다급해졌다. 쓰고 있던 마스크가 답답해 벗어 거칠게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여주씨가 있을 작업대의 복도로 가려다 방향을 틀었다. 느낌이... 이상해. 뭔가 찌릿한 공기가 저 옆의 복도에서 느껴졌다. 저쪽은 창고 쪽이라 사람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제발 아니길 빌었다.

복도로 들어서자 조용했다. 방마다 불이 꺼져있어서 오히려 어둡다고 느낄 만큼 고요했다. 나는 감이 좋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나의 감을 맹신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느낌일 때, 그러니까 좋지 않은 느낌이 들 땐 잘 맞아 들어서 좀 짜증이 났다. 제발 내 과대한 망상이길 바라면서 제일 느낌이 안 좋은 문 앞으로 다가섰다.

솔직히 말하면 그 문을 열기가 무서웠다.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확인이 될까 봐. 하지만 그래도 열어봐야만 했다.


뭔가 둔탁한 것이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착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손은 이미 문고리를 돌려 열어재겼다. 문을 열자 복도의 빛이 그 어두운 창고 안으로 드리워지면서 내 그림자도 천천히 길어졌다. 그림자의 끝에 뭔가가 있었다. 벌겋게 돌아버린 안광이 어두운 곳에서 복도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알파. 내가 맡은 페로몬의 주인이었다. 이런 미미한 향이라면 열성 알파인듯했다. 그래도 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얼굴 주변으로 부채질을 하며 그 역겨운 향을 치우려 했는데 뭔가 이상한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그 자식 밑에 누가 깔려있었다. 천천히 다가가자 그 열성 알파도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는지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가면 갈수록 내 표정은 화가 난 표정이 아닌 무표정에 가깝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열을 받을수록 그렇더라고 내가.

어정쩡하게 서서 내 눈치를 보는 열성 알파에 기가 차면서도 더 빨리 확인하러 오지 않은 나에게 짜증이 좀 났다. 눈물범벅으로 얼굴이 엉망인 여주가 있었다. 머리카락은 뜯겼는지 풀어헤쳐져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뺨도 좀 붉게 부은 듯했다. 반항의 흔적인지 아님... 저 자식이 때린 건진 알 수 없지만... 얼마나 세게 붙잡혔는지 양쪽 손목은 이미 멍이 들어있었고 상의의 블라우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분노로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 열성 알파의 이름표를 확인하고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제가 아는 분이라 모셔갈게요. 무슨 의민지 아시죠?"


자신에게 뭔가 해코지가 없다고 판단을 한 건가 한결 안심한 표정의 병신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리고 있었다. 걸치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여주씨를 감싸듯 둘러 그대로 안아 올렸다.

저 병신새끼를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었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여주씨가 먼저였고 그다음은 스나 린타로 이 자식부터 손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으득이며 뼈가 갈리는 소리가 턱에서 나왔다.








27.



욱씬거린다. 머리도 너무 아프다. 목이 너무 메말라서 물을 마시고 싶은데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온 몸이 쑤시고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귀밑에 심장이 옮겨간 듯 두근거리며 둥둥 울렸다. 사타구니 쪽에도 열감이 느껴졌다. 뭔가 화끈거리는 뱀이 기어 다니는 감각에 소름이 끼쳤다. 당한 걸까? 나는... 그렇게 당해버린 걸까... 잘 모르겠다. 온몸이 아파서 그런지 그런 것 같지 않으면서도 그런 것 같기도 했고... 기억도 드문드문 해서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떠 주변을 살피니 펜트하우스의 내 방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니 많이 어지러워 휘청거리게 되었다. 이마를 짚었는데 열이 좀 있는 모양이었다. 물이 너무 마시고 싶은데... 1층 까지 갈 수 있을까?

그냥 방에 작은 냉장고를 들일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내 정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이 새었다. 아님 정말 제대로 미쳐버린 것 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난 어떻게 여기에 온 거지? 누가 나를 발견해 준 것일까?

침대에서 나오는 것도 고역이었다. 이불에 스칠 때마다 몸이 아렸다. 꼭 몸살이 걸렸을 때 느끼는 감각처럼 말이다.


조심스레 한걸음 발을 내디뎠는데 몸에 닿는 공기마저 쿡쿡 찌르듯 쑤셨다. 다시 복직한 첫날 부터 무슨 봉변인지 모르겠다. 더 휴가를 주실까. 주시겠지? 정말 이럴 땐 뼛속까지 직장인 같아서 어이가 없긴 하네.


2층 난간에 서서 거실을 내려다보자 무슨 일인지 5명이 다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서 나도 모르게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나 때문이겠지...?

괜히 집중 받기 싫은데... 다시 방으로 돌아갈까 싶어 몸을 돌렸는데 누가 빠르게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에 바라보니 후타쿠치가 올라오고 있었다.


"몸은 괜찮아요? 어때요?"


계단 아래에도 네명이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 괜찮..."


정말 괜찮아? 나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아니잖아. 안 괜찮잖아. 근데 왜 괜찮다고 말을 하려고 해? 안 괜찮은데, 나 진짜 너무 무섭고 죽고 싶을 정도였는데 정말 그래?


"안 괜찮네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후타쿠치의 표정이 잔뜩 어그러졌다.


"뭐 필요한 거 있어요? 뭐 먹을래요?"

"아, 물."


쿵쿵쿵 소리를 내며 누가 다시 올라왔다. 미야였다. 언제 받아왔는지 물 한 컵과 생수통을 내밀었다.


"어는 거 마실래. 골라라."

"...고마워."


잔을 받아 들었다. 따뜻했다. 천천히 조금씩 물을 마시며 한 컵을 다 비워내었다. 그 동안에도 이 알파들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꼭 훈련이 잘 된 강아지 같았다. 수틀리면 바로 그 날카로운 송곳니를 들이댈 것이겠지만.

빈 컵은 미야 받아 가더니 자기가 죄를 지은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내려가고 싶은데, 비켜주실래요?"


그러자 홍해를 가르는 것 처럼 몸을 비켜주더니 길을 만들어주었다. 계단의 난간을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가자 그게 영 불안한지 뒤에서 둘이 허둥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 걸을 수 있는데...

아래를 보니 넘어지면 금방이라도 달려올 기세였다. 절대로 넘어지지 않고 완주할 거다.


이 알파들은 할 일도 없는가 내가 움직이는 대로 자꾸 따라왔다. 내가 부엌에 가서 물을 한잔 더 뜨려고 해도 왜 시키질 않냐며 미야가 컵을 뺏어서 해주려 하고 소파에 앉으려고 하자 텐도씨가 그 앞을 가로막는 테이블을 밀어 넓게 길을 터주고 후타쿠치가 쿠션을 던지며 앉기 좋게 만들어주려 했다. 부담스럽게; 얼마 전에 사서 드디어 생긴 TV를 켜려고 하자 시라부가 리모컨을 상납하는 하인처럼 두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왜 그래;

뉴스를 보다 몸을 일으켜 세우니 따라서 일어서는 다섯명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또 따라올 셈인 모양이었다. 자꾸 쭐레쭐레 따라오길래 화장실 갈 거니까 앉아 있으라고 하니 데려다주겠다고 서로 아웅다웅했다. 진짜 미쳤는 모양이었다.


"저기요. 화장실은 좀 지켜주시겠어요? 제가 뭘 쌀지 어떻게 알고 그 앞까지 따라오겠단 건데."

"아...!"


그제서야 다시 소파에 앉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부담스럽게 왜 저래;

화장실에 들어오니 찝찝함이 더 강력하게 느껴졌다. 열도 좀 있는 것 같으니까 미온수로 씻으면 열이 내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 근데 좀 잘못 생각한 것 같았다. 그 알파가 닿는 곳을 박박 씻고 싶은데 살갗에 닿을 때 마다 너무 아파서 제대로 씻을 수가 없었다. 팔뚝도 온통 멍이고 팔목에는 아예 팔찌를 만들어놨다. 아 진짜 역겹다. 조금 몸이 나으면 다시 시도를 해야겠다. 대충 물기를 털어내고 나가자 똥 마려운 강아지들 처럼 다섯은 거실을 배회하고 있었다.

진짜 왜 저래...? 역병이 들린 건가?


가까이 다가가자 왜 이렇게 늦게 나왔냐며 미야가 징징거린다. 좀 많이 귀찮은데...?


"부담스러워. 평소처럼 해요. 다들."


물론 내가 안 좋은 일을 겪은 것은 맞다. 그것을 배려해준답시고 이렇게 과하게 행동하면 많이 불편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뿐이었을까? 물론 이런 치욕적인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익숙하게 받아들인 다는 말은 아니지만... 하여튼 오메가로 살면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고 흔한 일이었기에 그리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니란 것이었다. 나는 운이 좋게 잘 도망쳐 끝까지 당한 적은 없었지만 그러지 못한 오메가들도 많았다.


"근데, 저 어떻게 된 거예요? 누가 발견해서 여기 데려온 거죠?"


아까까진 말을 건네고 싶어 낑낑거리더니 지금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아 진짜 뭐 어쩌란 거야. 이 새끼들아. 일관적으로 행동해.


"저, 혹시 당했어요?"


쾅 소리를 내며 테이블이 기우뚱하더니 내려앉았다. 미야가 한 짓이었다. 유리 테이블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그랬더라면 파편으로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다! 니 그런 적 읍다! 그딴소리 다시는 하지 마라!"

"그건 다행이네."


못들을 걸 들었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그런 시선들이 생소했다. 오메가들 끼린 이러면 다행이라며 촉촉해진 눈으로 서로를 위로했는데...


"흔한 일이에요. 정말 몰랐어요. 다들?"


그러니까 상처 주고 싶었다. 괜한 심술 맞다. 이들은 나에게 그러진 않았지만 같은 알파라는 이유로 나에게 비난받을 것이다. 그것도 감내해준다면 다행인 거고 그게 아니라면 나를 여기서 내보내 줘야 한다. 잠시 맛본 아주 작은 권력의 한 점의 맛은 끊을 수 없을 만큼 달아빠졌지만 그것이 내 것이 아니란 것을 안다. 나는 여전히 이 높은 곳에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었고, 어설프게 가진 이 모든 것들이 어색했다.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진통제를 맞아서 아프지 않다고 착각하는 것 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다. 약 기운에 가려져 잠깐은 고통이 없다고 해서 없어진 게 아닌 것 처럼. 여전히 그 고통은 존재하고 있음을 잊어선 안되었다.



아... 그런데 왜 진짜 내가 그런 기분인 거지...?

아까보다 더 아프게 느껴졌다. 옷이 닿는 살결이 따끔거린다고 느껴질 만큼... 내가 약을 먹긴 먹었나 보다. 약효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아 열이 더 나는 것 같다.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누워서 쉬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여전히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여기서 더 말을 보태보았자 나아 질 것도 없을 것이고 무엇을 말한다고 해도 나에겐 기만이자 해선 안 될 말일지도 모른다. 딱히 뭘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다시 2층 계단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는데 여전히 그들은 앉아 있었다.

중간쯤 올라갔을 때 아차 싶었다. 물 한 병 가져가는 건데... 귀찮네. 그냥 빨리 눕고 싶어졌다. 귀밑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들었다. 겨드랑이도, 아랫배도, 사타구니도... 아...? 잠시... 이건


인식을 하자마자 순식간에 열이 치솟았다. 주체 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워졌다. 그대로 계단 위에 주저앉아 귀밑으로 손을 올렸지만 억지로 욱여 잠가놓아 버티질 못하고 결국 터져버리는 댐처럼 그렇게 쏟아졌다.


순식간에 거실을 메웠다. 인간의 의지로는 절대로 막을 수 없는 천재지변을 마주한 것 같은 절망감이 나를 눌러왔다.


빠르게 뒤를 돌아 그들을 확인했다.



가지각색의 형형한 눈동자들이 소름 끼치도록 빛을 내고 있었다.

그들과 나의 거리는 '기껏해야' 정도였다.






* * *


여주는 무사합니다. 미수에 그쳤어요.


먹고싶은 맛이 있는데 아직 메뉴에 없다면 직접 조리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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