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를 사랑하는 여성들에게 김혜수 배우는 참 애틋한 존재이지요. 극적인 목소리와 곧게 선 자세, 후배 여성 배우들을 보는 눈빛 같은 걸 떠올리면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되거든요. 아이고... 언니...
그런 김혜수 배우가 주인공 현수 역을 맡은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지금까지 해온 작품들과 결이 다르면서도 가장 김혜수적인 작품입니다. 현수를 만나고 나면 김혜수 배우를 더 조목조목 좋아하게 될 거예요. 


영화의 중심에는 세 여성의 강한 연대가 있어요. 열아홉 살의 세진(노정의 분), 40대 정도로 추정되는 현수, 그보다 10여 년쯤 더 산 듯 한 순천댁(이정은 분)이 그들입니다. 

범죄의 주요 증인으로서 CCTV가 가득한 섬에 혼자 격리되었던 세진이 어느 날 사라집니다. 세진이 살려고 노력한 흔적을 들여다보고, 살도록 돕고, 살아있다고 믿은 사람은 어떠한 혈연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순천댁과 현수밖에 없었어요. 바꿔말하면 순천댁과 현수가 있었기에 세진은 살 수 있었지요. 세진이 ‘해 지는 풍경 빼고는 삶에 아쉬운 것이 없다’는 유서를 썼지만 해 지는 풍경이 삶의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외딴 섬이라는 배경과 세진이 죽었길 바라는 듯한 사람들, 검은돈의 행방, 순천댁의 의뭉스러운 표정과 단서를 찾아 헤매는 현수의 수사 과정으로 영화는 미스터리 스릴러처럼 전개되어요. ‘누가 범인인가’에 포커스를 맞추던 저는 중후반이 지나도 떡밥이 수거되지 않고, 두 여성과 세진의 유대 관계에 완전히 공감하지는 못해 미심쩍게 영화를 보고 있었어요. 어찌 보면 ‘아이가 그렇게 되어 안타깝지만 내 코가 석자라 신경쓸 겨를이 없었던 사람들’의 눈을 빌려서 본 것이지요. 그러다 갑자기 1년 후의 타국으로 이동하니 혼란스러웠어요. 엄청나게 많은 물음표를 가지고,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봤어요. 

첫 장면에서 물속으로 뛰어드는 수직 시점이었던 카메라는 마지막 장면에서 같은 속도이지만 수평 시점으로 멀어지며 해 지는 풍경을 담아요. 세진과 현수가 웃고 있는 그곳은 ‘죽던 날’의 절벽과 장조와 단조처럼 닮았어요. 

어떻게 변주될지 몰라. 인생이 네 생각보다 훨씬 길어. 영화는 온 힘을 다해 이 말을 전합니다. 조금 먼저 ‘죽던 날’을 지나온 여성들이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이렇게까지?’ 싶을 만큼 직접적으로 ‘같이 살아 있자’라는 메시지를 보내요.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하고 싶은 말이구나. 애틋함과 고마움에 뒤늦게 눈물이 났어요. 


영화를 다시 보는 동안 처음엔 영화를 향했던 물음표가 방향을 바꿔 돌아왔어요. 왜 나의 눈으로 보지 못했을까? 또래 여성들의 죽음을 연달아 접하고 ‘우리’가 더는 죽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왜 나를 ‘우리’에 넣지 않았을까?
누군가 저에게 살아 달라고 하는 건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니 그제야 실감 나는 것이 있더라고요.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 일주일 간 장면들을 곱씹었어요. 현수, 순천댁, 세진의 존재가 마음 한 켠에 자리를 잡은 느낌이었고, 그게 흐릿해질 때쯤엔 이 영화를 다시 보면 되겠다는 안도감이 들었어요. 영화가 삶을 직접 구원할 순 없지만 이렇게 하루를 더 살게 한다는 생각도 드네요. 


<아워 바디>의 현주도, <걷기왕>의 수지 선배도, 주인공의 인생을 직접 구해 주진 않았어요. 다만 달리는 등 뒤로 기운을 나누어주거나, 서울까지 같이 걸어가 주었지요. 순천댁은 세진에게 스스로를 구할 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어요. 세진의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현수도 자신을 구할 힘을 얻었고, 살아서 세진을 만났지요. 김혜수 배우는 신인 박지완 감독이 12년 만에 장편 영화로 데뷔하도록 그를 믿어주었고, 그렇게 나온 <내가 죽던 날>이 여성 관객들을 살게 합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우리는 생각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나봐요. 


추신.
<아워 바디>, <걷기왕>, 그리고 <내가 죽던 날>의 연결고리를 찾으셨나요? 바로 김정영 배우인데요. 김현수 경위의 상사 역으로 등장했을 때 의자에서 벌러덩 나자빠졌답니다. 앞으로 간부급 경찰 역을 논할 때 진경 배우, 전혜진 배우와 함께 반드시 이분을 꼽을래요. 그동안 엄마 역할로만 본 게 억울할 정도로 너무 좋았네요.

김정영 배우가 주연을 맡은 단편 영화 <자유로>도 추천할게요. 속이 뻥 뚫리는 '생활 액션'을 볼 수 있답니다.

그럼 계절이 바뀔 즈음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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