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디딜 틈도 없이 혼잡한데요……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는……]

간간이 자동차가 지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조용한 밤거리. 경구의 한쪽 손에 들린 스마트폰에서 생중계가 한창이었다. 괴도키드의 팬이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촬영 중인 개인 방송이라는 것 같았다. 괴도키드가 예고한 시각인 저녁 8시가 때마침 퇴근 시간과 맞물린 덕분에 경구와 시호는 액정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란히 걷고 있었다.

“네 여자친구도 저기 가고 싶어 하겠다.”

“이미 가 있을걸.”

“저긴 서울인데?”

“응. 서울인 게 왜?”

시호가 멈칫했다. 롱디 커플인가. 물론 이곳에서 서울까지는 차로 2시간밖에 걸리지 않으니 롱디라기에는 애매했다. 그러나 떠나온 시호에게 서울은 막연히 머나먼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시호가 떠나온 도시. 정확히는 범죄자인 셰리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나온 도시.

“아…… 당연히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인 줄 알았어.”

“아아. 아냐, 여자친구는 서울 살아. 나도 지금은 이모네 일 돕는 것 때문에 잠깐 내려와 있는 것뿐이고.”

“그럼 자주 못 만나겠네?”

“응. 요즘은 거의 못 만난다고 봐야지.”

시호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경구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괜스레 복잡해지던 마음. 그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시호는 오늘 내내 경구에게 묻고 싶던 질문을 던졌다.

“보고 싶지 않아?”

시호가 보기에 경구는 온종일 한눈파는 법 없이 일에만 열심인 사람이었다. 경구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온 이유는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경구가 누구와 알콩달콩 연락을 주고받는 모습을 시호는 본 적이 없을뿐더러 경구는 경구대로 여자친구가 있다는 티를 낸 적이 없었으니까.

“그야 당연히…….”

와아아아. 지금, ……괴도……, ……현장.

버퍼링이 심하게 걸리며 화면 속 영상이 툭툭 끊어졌다. 현장의 함성이 커진 거로 보아 괴도키드가 나타난 것 같은데 노이즈가 너무 심해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었다. 경구가 전파를 잡아 보려 핸드폰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시호가 보기에 전파를 수신하는 쪽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트래픽이 몰린 것 같네.”

“그러게.”

몇 번 더 형식적으로 핸드폰을 흔들던 경구가 이내 앱을 종료했다. 간헐적으로 튀는 소음이 사라지니 이따금 지나는 자동차를 제외하고는 주위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경구가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말했다.

“실은 무지 보고 싶어.”

“…….”

“그런데 어쩔 수 없어. 여자친구가 당분간은 만나지 말자고 부탁했거든.”

“부탁?”

“응.”

혹시 여자친구가 헤어지고 싶어 한다든가? 시호는 얘기를 이어나가야 할지 망설였다. 더 캐물었다가는 괜히 분위기만 무거워질 수 있었다. 시호가 화제를 가볍게 바꾸려는데 경구가 말을 이었다.

“여자친구가 올해 고3이야. 수능 때까지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다고 해서 알았다고 했어. 나도 방해되는 건 싫으니까.”

고3이라면 경구와 시호보다 한 살 아래였다. 비록 한 살 차이지만 연상인 경구와 연하인 여자친구는 시호가 보기에 썩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경구는 성숙하고 듬직하니까 분명 어린 여자친구에게도 좋은 남자친구가 되어 주겠지. 그러고 보니까……. 시호는 문득 경구 위에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

“연락도 여자친구 쪽에서 거의 못 받는 것 같고. 진짜 못 받는 건지, 일부러 안 받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

“평소에도 연락을 자주 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이상하게 아예 못 한다고 생각하니까 거꾸로 미친 듯이 연락하고 싶어지더라고. 사람이 참 간사한 것 같아.”

경구는 웃었지만 왜인지 괴로워 보였다. 여자친구 얘기가 나오니 그는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사소한 변화로도 느껴지는 경구의 애틋함에 시호는 문득 외로웠다.

“그래서 시호 네가 편지 쓰는 거 보고 나도 편지나 한번 써 볼까, 그런 생각도 했다니까.”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다. 평소라면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야 하지만 경구는 전광판을 확인하고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버스 올 때까지 기다려 줄게.” 시호도 경구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버스가 오기까지 아직 10분이 남아 있었다.

“요즘도 맨날 편지 써?”

“맨날은 아니고…….”

“편지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별이 총총 박혀 있는 캄캄한 밤하늘. 시호는 환한 달을 반쯤 가린 희뿌연 구름 조각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강준영이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으니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별. 달. 태양. 차라리 그런 식의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몰랐다.

눈부실 만큼 환한 빛.

“고마운 사람이야, 나한테는.”

“……보고 싶지 않아?”

경구에게 던진 질문을 시호가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시호는 불현듯 준영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기다릴게요, 라고 말했다. 그 사람.

“글쎄.”

“편지를 주고받는 거 보면 얼굴을 자주 볼 수 있는 사이는 아닌 것 같고, 답장도 못 받는데 매일매일 편지를 쓰는 거 보면 또 그렇게 멀기만 한 사이는 아닌 것 같고…….”

흠. 경구가 턱에 엄지손가락을 받친 포즈로 열심히 궁리했다. 시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떤 사이인지 궁금해?”

“음…… 안 궁금하면 거짓말이지.”

구름이 서서히 몰려들며 달빛을 가렸다. 다행히 만월에 가까운 달은 구름에 가려도 제 존재감을 충실히 뽐냈다. 아무리 두껍고 먹먹한 구름이 몰려와도 모조리 헤쳐버릴 것같이 환한 달이었다.

“달과 구름.”

다른 말로 하면 경찰과 범죄자. 남이 듣기에는 잠꼬대 같은 중얼거림이었다. 경구가 눈을 깜빡였고 시호는 그저 웃으며 밤하늘을 가리켰다.

“예쁘다. 그치?”

경구의 시선이 시호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알쏭달쏭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던 경구도 이내 작게 미소 지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가로등에 의해 그림자 두 개가 앞뒤로 겹쳐졌다. 낑낑대며 집 앞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면 추운 날씨에도 제법 몸에 열기가 돌았다. 확실히 주택가라서인지 이 근처는 밤만 되면 무섭도록 조용해졌다. 끼익. 가끔 바람이 불 때마다 금방 귀신이 튀어나올 듯 스산한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리는 집도 더러 있었다.

빌라 입구의 센서 등이 켜졌다. 시호가 시린 손을 가방 앞주머니에 넣어 열쇠를 찾았다. 2층 계단을 오를 때쯤이면 슬슬 숨이 차올랐다. 현관문을 열어 신발을 벗은 시호가 매트리스에 무너지듯 몸을 던졌다.

아아. 힘들어.

이대로 그냥 잠들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씻어야 했다. 씻어야 하고, 또. 편지도 써야 했다.

편지.

이제는 거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느낌이랄까. 이젠 쓰지 않으면 허전했다. 일기 대신 편지를 쓴다는 느낌도 들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도 문득 정신을 차리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쓸거리를 찾는 자신을 발견했다. 시호가 흰 천장을 바라보았다.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익숙해진 풍경. 이곳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지난 한 달 동안 무수히 많은 편지를 보냈다.

읽고는 있을까. 너무 많이 보내서 지겨워하는 건 아닐까. 설마 읽지도 않은 채 쌓아 두는 건 아니겠지. 한번 시작된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괜스레 외롭고 공허한 마음. 애초에 답장을 바라고 보내는 편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상대에게 읽히지 못할 편지를 쓰기는 싫었다. 읽고 버려도 괜찮으니까 읽어 주기만 해도 좋을 텐데.

시호가 상체를 벌떡 일으켜 힘차게 도리질을 쳤다. 잡생각이 더 이어지면 곤란했다. 시호는 서둘러 보일러를 켜고 옷을 벗었다. 춥다고 옷을 입은 채로 가만히 누워 있다가는 외풍과 냉기에 체온이 금세 싸늘해지기 일쑤였다. 냉동고나 다름없는 화장실은 들어갈 때마다 겁이 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온수로 전환되기까지 꼭 한나절은 걸리는 것 같은 수돗물을 틀고서 시호는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시호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돌돌 감싸고 수면 잠옷으로 중무장을 했다. 시호는 수면 양말까지 꿰어 신고 나서야 좌식 책상 앞에 앉았다. 편지를 쓰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강아지 캐릭터가 그려진 편지지. 요즘은 편지지를 사는 데도 재미가 들렸다. 아직 포장을 뜯지 못한 편지지가 수두룩했다. 시호는 펜을 들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강준영 씨에게.」

쓰고 싶은 말은 넘쳐났다. 오늘 아침 교통카드를 어디에 두었는지 까먹어서 한참을 헤매다 지각할 뻔한 일. 유난히 바쁘던 오늘의 점심시간. 그 와중에 음식 맛이 이상하다며 다 먹어 놓고 환불을 요구하던 진상 손님. 그리고…… 시호에게는 정말 뜻밖이었던 경구의 여자친구 얘기.

솔직히 놀랐다. 여자에게 관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던 경구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의외로 경구가 여자친구를 엄청나게 아끼는 것 같아서 그게 또 놀라웠다. 게다가 두 사람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당분간은 만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두 사람에게는 다시 만날 기약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기약이 있는 기다림과 기약이 없는 기다림. 시호는 둘 중 무엇이 더 괴로울지 가늠했다. 그리고 기다리겠다는 준영의 절박한 음성을 떠올렸다. 무얼 기다린다는 말이었을까. 아니, 당연히 편지겠지만.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까.

내 편지, 꼬박꼬박 읽어 주고 있을까.

시호는 팔을 교차해 그대로 얼굴을 파묻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오늘 내내 뭔가 울적하더라니. 대체 무엇 때문일까, PMS인가. 춥다. 보일러 온기로 실내는 어느 정도 훈훈해졌는데 이상하게도 추웠다. 마음이. 공허해. 찬바람이 들락거려.

결국 경구의 이야기는 편지에 쓰지 않았다. 대신 시호는 지각할 뻔한 일이며 진상 손님 에피소드를 빼곡히 적어 내려갔다. 괜스레 아무렇지 않은 척 행복한 척 즐거운 척을 하느라 편지가 쓸데없이 길어졌다. 그렇다고 다시 쓰자니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서 이제 그만 드러눕고 싶었다.

안시호. 편지 말미에 이름 석 자를 적은 뒤 편지지를 곱게 접는다. 접은 편지지를 편지 봉투에 넣은 뒤 풀칠을 한다. 그다음은 주소를 적는다. 그동안 하도 많이 써서 이제는 달달 외워 버린 그의 정체 모를 주소를 적는다. 그리고.

그리고 시호는 처음으로, 보내는 주소를 또박또박 적기 시작했다.


***


“시호 너는 수강신청이 언제야?”

“응?”

질문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시호가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시호는 김치볶음밥이었고 경구는 비빔밥이었다.

“나는 다행히 월요일이라 일에 지장은 없을 것 같거든. 시호 너는 일이랑 겹치면 하루 쉬어. 내가 이모한테 말씀드릴 테니까.”

“아…….”

시호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어느새 2월. 스무 살이라면 대개는 입시를 끝마치고 지원한 학교의 합격 발표를 받은 시점이었다. 그동안 시호는 경구와 대학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시호는 한국의 고등학교를 다닌 적도 입시를 치른 적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경구는 어림짐작으로 시호 역시 자기와 똑같은 신입생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경구가 서둘러 사과했다.

“미안. 혹시 재수해?”

“어? 으응.”

시호가 상황을 모면하려고 얼결에 대답했다. 그러자 경구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시호가 도리어 민망해졌다.

“그렇구나…….”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시호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이 내심 즐거웠다. 재수하는 게 이렇게까지 동정받을 일이구나. 여태 알지 못하던 또 다른 세계, 평범하고 일상적인 세계의 일원이 된 느낌. 비록 동정을 받을지언정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기대되겠네, 대학 생활.”

“기대도 되고 긴장도 되고 그래.”

“그럼 이 일도 곧 그만두는 거야?”

“응. 이번 달까지만 하고 다시 서울로 가야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헤어짐을 통보받으면 아무래도 섭섭했다.

“괜찮아, 나 없어도 잘할 수 있을 거야.”

시호의 침울한 표정을 놓치지 않고 경구가 말했다. 시호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젠 일도 제법 익숙해졌고 바쁜 시간대야 혼자서는 빠듯하겠지만 여차하면 사장이 새로운 사람을 뽑아 줄 것이었다. 다만 시호는 섭섭했다. 서울에서 도망쳐 온 이곳에서 제일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곧 떠나버린다는 사실이.

“…그럼 이제 못 만나는 거네.”

시호가 김치볶음밥에서 밥과 김치를 분리하는 작업을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한 달이나 가까이 남았는데 벌써 그럴 필요는……. 그리고 왜 못 만나. 또 만나면 되지.”

“서울로 간다며.”

“내가 여기로 올 수도 있고, 시호 네가 서울로 올 수도 있고.”

“…….”

“아니면 나한테도 편지를 써 주든지. 나는 꼭 답장할 테니까.”

시호가 고개를 들어 경구와 눈을 마주쳤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시호는 기쁘면서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자기에게 답장을 주지 않는 누가 떠올라서.

편지 봉투에 보내는 주소를 적어 보낸 때가 벌써 일주일 전. 이후로도 시호는 꼬박꼬박 편지를 썼지만 차마 부치지는 못했다. 나아가서는 후회했다. 그날 괜히 울적한 기분에 휘둘려 충동적으로 주소를 적어 보낸 것 같아서. 외로움은 정말이지 사람을 한순간에 바보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한순간의 실수든 아니든 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시호는 내심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아직 그에게서는 답장이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지 몰랐다. 동시에 시호의 마음속에 꿈틀대던 작은 의심의 싹, 그가 편지를 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자라났다.

“정말 답장해 줄 거야?”

“그럼.”

“……고마워.”

시호는 어느새 밥과 김치로 깔끔히 분리된 접시를 들고 일어섰다. 더 먹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시호 학생. 이거 가져가.”

“이게 다 뭐예요?”

뒷정리를 모두 마치고 막 앞치마를 벗으려는 시호에게 사장이 말했다. 아까부터 분주히 움직이던 그녀는 시호에게 묵직한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이번에 밑반찬을 했는데 좀 가져가라고. 집에서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거 아냐?”

“아……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

“이럴 때는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거야. 이모. 제 거는요?”

경구가 시호의 작은 뒤통수에 손을 얹고는 살짝 눌렀다. 시호는 얼떨결에 사장에게 꾸벅 인사했다.

“넌 내일 줄게. 오늘은 시호 학생 집까지 가져다주고 와.”

“네? 아뇨, 괜찮은데…….”

“이번에도 생채 담갔어요?”

시호가 당황해하는 사이에 경구가 사장에게 쇼핑백을 건네받고 안쪽을 확인했다.

“무가 별로라서 이번에는 안 했어. 그냥 파김치 좀 담그고 우엉 좀 무치고 감자탕도 좀 하고.”

“어쩐지 좀 묵직하더라.”

“감자탕은 냉장고에 넣어 놨다가 먹을 때마다 덜어서 데워 먹어. 알았지?”

“아…… 네.”

정말 받아도 되는지 시호는 계속해서 망설였다. 그러자 경구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얼른 준비해, 가게.” 시호가 이끌리듯 서둘러 앞치마를 벗었다.

버스는 예정된 10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다. 바람이 유난히 찼다. 둘둘 말아 올린 목도리를 코끝까지 치켜올리며 시호가 다시 전광판을 확인했다. 곧 도착한다는 버스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경구는 춥지도 않은지 쇼핑백을 끌어안은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시호는 추워서 빨개진 그의 손이 슬슬 신경 쓰였다.

“손 시리지 않아? 내가 들고 있을게.”

“아냐, 됐어. 버스 금방 올 텐데 뭘.”

혼자서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어서 시호는 괜스레 미안했다. 얼른 버스가 오면 좋으련만.

“나는 시호 네가 이 근처 대학에 입학하는 줄 알았어.”

“…….”

“안 그러면 서울에서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잖아.”

서울에서 왔다고는 언젠가 시호가 경구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경구가 이상하게 여길 만도 했다. 재수한다는 사람이 재수 학원은커녕 지방에 내려와 온종일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으니. 시호는 어떻게 하면 과거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지 않고 둘러댈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그때 어둠을 뚫고 멀리서 마을버스가 다가왔다. 점멸하는 깜빡이에 눈이 부셨다.

“게다가 핸드폰도 없이.”

텅텅 빈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경구가 앉자마자 조금 전의 대화를 이어 나갔기에 시호는 곤란한 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깥은 캄캄하고 버스의 형광등은 유난히 쨍했다. 시호에게는 창에 비친 자기 얼굴이 보였다. 무지무지 곤란해하는 얼굴.

“그냥 좀…… 조용한 데서 쉬고 싶었어.”

가만가만. 경구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유리창에 비쳤다. 거슬릴 것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경구와 함께할 때는 이런 식의 침묵이 많았다. 시호는 무언가를 말하기에 앞서 지레 경계할 때가 많았다. 자칫 이야기가 길어졌다가는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마저 꺼내야 할까 봐 겁났다. 반면에 경구는 이런저런 계산 없이 애당초 말수가 적은 타입인 것 같았다.

“괜히 걱정돼. 나 서울 가고 너 혼자 여기 남을 생각하면.”

“……그래?”

“시호 너는 꼭 어딘가에서 도망쳐 온 사람 같달까…….”

버스가 급커브 하는 구간에 들어섰다. 두 사람의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 쏠렸다. 본의 아니게 경구에게 체중을 싣게 된 시호가 짧게 사과했다.

어쩐지 아까부터 버스 덕분에 대화가 중요할 때마다 끊기는 것 같아 시호는 내심 안도했다. 가만 보면 경구는 둔감한 것 같아 보여도 때때로 아주 예리했다. 이를테면 조금 전에 한 말. 도망쳐 온 사람 같다니, 그건 시호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이었다.

“이모가 음식도 이렇게 자주 해 주시나 봐?”

아, 응. 이모도 음식 솜씨가 보통이 아니거든. 나는 이모가 해 주시는 생채 진짜 좋아하는데…… 어쩌고저쩌고.

시호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경구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경구의 낮고 담백한 목소리. 좌우 앞뒤로 가볍게 흔들리는 차체. 며칠째 쌓인 피로감. 모든 것이 겹쳐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시호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시호야. 이제 내려야 해.”

“어?”

“여기 맞지? 청우아파트 정류장.”

잠깐 사이에 시호는 깜빡 잠들었다. 경구가 먼저 일어났고 시호도 비틀비틀 일어났다. 무슨 정신으로 버스에서 내린지도 몰랐다. 시호가 뒤늦게 가방이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잠깐 눈만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제법 긴 시간이었다. 시호가 멋쩍게 웃었다. 쌩쌩 부는 바람에 금세 정신이 말짱해졌다.

“이놈의 언덕은 진짜 가파르단 말이야…….”

정류장에서 한 블록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면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아파트 외곽을 따라 걷다 보면 놀랍게도 엄청난 언덕이 버티고 서 있었는데, 바로 뒤쪽에 산이 자리하기 때문이었다. 지대가 높은 덕분에 시호의 집에서 보이는 전망은 꽤 봐줄 만했다.

“일 끝나고 여기 올라갈 때마다 진짜 힘들겠다.”

“이젠 익숙해져서 괜찮아. 나름대로 운동도 되는 것 같고.”

“되게 긍정적이네.”

중턱에 다다랐다. 빌라는 언덕의 끝자락에 있으니 반절을 더 올라야 하는 셈이다. 무시무시한 칼바람에 집집마다 대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이제 다 왔어. 여기부터는 내가 들고 갈게.”

“아냐, 집까지 들고 가 줄게.”

“괜찮아. 너도 힘든데.”

“이거 액체라서 생각보다 무거워. 딱 집 앞까지만 놓고 갈게.”

아니, 진짜 괜찮은데. 그게 내가 편해서 그래. 그래도……. 옥신각신 두 사람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시호에게 절대 넘겨주지 않으려 쇼핑백을 뒤로 감추다, 경구는 문득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에 꽂힌 시선을 따라 시호도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등진 실루엣이 어쩐지 눈에 익어서 시호는 무심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 시호가 탄성을 흘렸다. 그 소리에 경구가 시호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금 다가오는 존재에게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체격으로 보아 남자였다. 그것도 균형이 아주 잘 잡혀 있는 몸. 필시 오랜 기간 운동과 훈련으로 단련된 몸이었다. 경구는 자기가 상대를 탐색하듯 상대 역시 자기를 탐색한다고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가 풍기는 압도적인 분위기는 결코 평범한 일반인의 것이 아니었다.

한 발짝. 두 발짝. 팽팽해지는 긴장감. 경구는 시호를 자기 뒤에 숨기듯 한 걸음 내디뎠다. 남자가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지. 흉기라도 들고 있나. 그러나 위협적인 의도로는 읽히지 않았다. 경구가 바짝 긴장한 태도로 남자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기준이라고 합니다.”

다가온 남자는 뜻밖에도,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오경구 씨 되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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