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by ian dooley on Unsplash



너희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 전서 16:14



버키는 의무병에게 약을 더 내놓으라고 실랑이하고 마침내 승리해서 약병 가득 채운 후에 막사의 입구를 걷고 밖으로 나왔다. 어둡고 막혀있던 공간에 있다가 나오자 바깥 공기는 그을음이 있었지만 달았고, 햇빛은 투명하고 기분 좋았다. 이탈리아의 강렬하고 진한 햇빛과는 다른 온화하고 꽃잎처럼 아름다운 햇빛. 주변엔 군 막사 뿐이고 마을의 건물은 반쯤 부서져 덩어리로 뭉쳐 있고 나무는 모두 잘려 나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봄은 아름다웠다. 버키는 한 부대가 구호를 외치며 앞을 달려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천천히 가로질렀다. 

눈꺼풀이 감겨 어둠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 짧은 순간에도 가끔 웅성거리는 소리에 독일어가 섞여있진 않은지, 눈을 뜨면 다시 아자노의 포로 수용소에, 그 실험실에 묶여있는 건 아닌지 혼란이 찾아와 때때로 뱃속이 얼음처럼 서늘해졌다. 아자노에서 도망친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발목에 매달린 추처럼 지옥에 끌어내리려는 그 무게가 항시 느껴졌다. 그러나 꿈은 아니었다. 몇 년 전에 본 악마가 단지 악몽 속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졸라가 도망가고 그 뒤에 커진 스티브 로저스가 나타나 그를 풀어준 것 또한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버키는 약병을 까서 진통제를 한 알 입에 넣었다. 날씨가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버키는 백전노장답게 표정은 ‘바쁘게 해야 할 신속할 일이 있으니 건드리지 마시오’로 만들어낸 다음에 바쁜 척 여기저기 어슬렁렸다. 한참을 흠뻑 햇빛을 받고 난 다음에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쩌면 진통제 때문인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뭐라도 좋았다. 버키는 이제 조금 신난 기분으로 절정을 지난 해가 더욱 풍부하고 반짝거리는 오후의 햇살을 내리쬘 때에 막사로 돌아왔다. 

하울링 코만도즈의 막사로 돌아왔을 때, 그들 막사의 바로 앞에서 버키는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사람은 스티브 로저스였다. 예전에 비해 거대해진 스티브. 갈비뼈가 고스란히 드러나 깃털 뽑힌 새처럼 앙상했던 가슴은 두툼해지고 폐를 괴롭히던 천식은 사라지고 무릎에 남아있던 찢어진 상처마저도 사라진 스티브. 그러나 여전히 더티 블론드 아래의 이마는 반듯하고 코는 복싱 선수답다. 버키가 발견한 스티브 로저스의 반짝거림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갈색머리의 페기 카터. 장교들이 속속 모여 회의가 이어졌기 때문에 둘 모두 군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 둔한 정복마저도 그들이 가진 아름다움을 덮지 못했다. 허리에 손을 얹고 있는 페기가 턱을 똑바로 들고 스티브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페기의 어조는 온화하지 않았지만 표정은 온화했다. 반짝이는 갈색의 눈동자, 그리고 싱그러운 입가의 미소. 멀리서도 그 생기를 알아볼 수 있었다. 스티브는 정신없이 페기를 눈깜빡임도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색도 모두 볼 수 있게 됐으니, 이제 입술의 저 붉은 색을 볼 수 있겠지. 질병이 모두 깨끗할 정도로 스티브 로저스에게서 사라졌다. 그들이 엉켜 뒹굴다가 의자에 찧어서 찢어졌던 허벅지의 붉은 흉터마저도.

버키는 귓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생각했다. 완벽한 한 쌍이었다. 페기 카터는 전쟁에서 자신의 능력을 확인시킨 사람이었고, 스티브 로저스는 말할 바도 없다. 아자노 포로 수용소를 괴멸시킨 슈퍼 솔져. 하울링 코만도즈가 결성되던 날 펍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때의 스티브는 사랑에 빠진 눈이었다. 수줍고, 그러나 뻣뻣하고, 서투르고, 할 말을 가득 담은 채 한 번도 페기 카터에게서 떨어지지 않던 눈동자. 

페기가 시원스럽게 웃으며 스티브의 소매를 잡아당기자, 스티브가 머뭇거리고 당황하다가 천천히 등을 수그려 페기의 입술에 짧게 입맞췄다. 아이들이나 할 법한 짧고 부드러운 키스였지만, 버키는 벼락이 관통하는 것처럼 굳었다. 

저건 내 거였는데. 나만 볼 수 있었는데. 

그전부터 이미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진실로 절실하게 버키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그 날 밤 무엇을 바쳤는지. 모두 그저 잃어버린 것만이 아니었다. 스티브와 단단히 맞잡은 손바닥과 고요히 감기는 얇은 눈꺼풀도, 봄바람 같은 입술도, 키스할 때 짓는 표정도, 모두 다른 사람의 것이 된다는 뜻이었다. 스티브 로저스가 버키 반즈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쏟는다는 의미였다. 그가 다른 이를 네게 하듯이. 깨달음이 이제야 간신히 버키를 벼락처럼 내리쳤다. 사랑하게 되리라.

그 때 등 뒤에서 누군가 등을 가볍게 쳤다. 버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버키는 절망에 잠겨 숨이 막혀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누군가가 그의 등을 치고 건져내준 셈이다. 숨이 갑자기 탁 트이자 버키는 밀려들어오는 달콤한 공기를 급하게 마시고 콜록거리면서 앞으로 한두 발자국 비틀거렸다. 

“뭐하고 있어?”

버키가 뒤를 돌아보자 같은 하울링 코만도즈 대원인 제임스 몽고메리 폴스워스, 몬티였다. 몬티의 얇고 턱이 가는 잉글랜드 얼굴에는 엄격한 걱정이 있었다. 몬티는 버키가 더 쓰러지지 않도록 한쪽 팔을 잡고 샅샅히 몸을 훑었다. 

“몸은 어때?”

그 말에도 버키의 반응은 조금 느렸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쓰고 표정을 바꾸기까지의 그 짧은 사이에서, 몬티는 버키의 표정에서 어떤 절망을 읽을 수 있었다. 어떠한 희망도 없이 고통에 잠겨 있다가 눈에 빛을 잃게 만드는 무기력함으로 덮이는 절망. 그러나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해왔다는 듯이 솔직하게 절망에 빠진 표정은 곧 사라졌다. 

버키는 잡히지 않은 다른 쪽 팔로 손가락을 들어 입 앞에 대고 몬티에게 쉿쉿 하는 포즈를 해보였지만, 이미 스티브와 페기도 이쪽을 눈치챘다. 그들 역시도 그들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새삼 주위의 존재를 깨닫고 씩 웃었다. 

“너 때문에 눈치챘잖아!”

버키는 단짝 친구의 연애를 훔쳐보다 걸린 사람처럼 가볍게 웃었다. 몬티는 웃지 않았다. 

“막사에 가서 누워있어. 짐 데려갈게.”

질겁하며 버키가 약병을 들어보였다. 

“약은 받아왔어.”

몬티가 잠시 눈가를 찌푸리더니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불러온다 해도 이러한 약 처방 외에는 더 바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도, 버키도 알고 있었다. 몬티가 추궁을 그만뒀지만 이번에는 스티브가 혼자 후다닥 달려오더니 버키의 허리에 팔을 감듯이 싸안으며 걱정어린 소리로 말했다. 

“어디 아픈 거야? 문제 있어?”

몬티가 정중한 눈치로 스티브가 감은 팔을 곁눈질했다. 그 사실을 알아챈 버키는 주먹을 쥐고 팔꿈치로 스티브를 밀어내며 웃었다. 스티브의 손은 곧 떨어졌다. 

“없어, 없어. 넌 가서 데이트나 해.”

입밖으로 그 단어를 내뱉자 가슴에 박힌 거대한 얼음덩이가 비틀렸다. 다른 사람에게 스티브를 떠미는 말, 그런 말을 하는 자신에게 현기증이 났다. 자신이 진실로 무엇을 바쳤는지 버키는 방금 전에 깨달았고 이제야 이해하는 중이었다. 스티브가 귀끝이 새빨개져서 변명했다.

“데이트 아니야. 회의 때문에 상의할 게 있어서 그…….”

한 때 자신에게 쏟아졌던 그의 사랑이 반짝반짝 빛나고, 아름답고, 깊숙하고 고요하게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쏟아지는 것을 바라보며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심장을 태우며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저주하고 슬퍼하고 스티브를 원망해서도 안 된다는 것. 자신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몬티와 합세해 엉덩이를 차 페기 카터에게 스티브를 돌려보낸 후에 버키는 막사 안으로 돌아왔다. 손에 익은 대로 잘 개켜진 모포를 펴고 딱딱한 침상에 눕자 진통제로 눌러놓은 마음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버키는 신경질적으로 돌아누워 어둑한 막사 저편을 쏘아보았다. 

그 밤 이후에 고백하지 않아서 잘 됐지. 고백했다면 걔가 날 구하러 미친 것처럼 아자노에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렇게 가까이에서 영웅이 된 스티브 로저스를 보지 못했을 테니까. 그대로 죽었을 거야. 갑자기 사랑한다고 고백하더니 내가 널 살렸다고 징징거리는 호모가 아니라서, 가장 친한 친구라서, 죽음을 무릅쓸 정도의 친구라서 정말…….

의식하지 못하던 눈물이 뚝 코를 타고 흘러 베개로 떨어졌다. 버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게 다 견딜 수 없었다. 스티브 로저스가 살아남기라도 한다면 무엇이든 바치겠다고 했지만 대가가 이런 식이었다는 것을 버키 반즈는 몰랐다. 단지 그가 살아있으면 좋겠다고 빌었을 뿐이다. 제발 행복하게 해달라고 빌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잘 이루어졌다. 

어리석었다.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에게 무엇을 교환하게 될 지도 모른 채 덥석 그 제안에 응할 만큼 어리석었다. 그러나 그게 정말 이만큼의 고통을 감내해야 할 정도의 어리석음이었는가. 누구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하지 않은가. 

버키는 오열하며 입을 모포로 틀어막았다. 숨 찬 흐느낌이 작게 새어나가고 모포가 침으로 젖어들었다. 사생활이라고는 전혀 없는 군대에서 이런 식으로 울다가는 뻔히 들킨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인내력이며 자제력은 방금 전에 스티브 앞에서 모두 써버렸다. 그의 앞에서 씨발, 내가 널 위해서 뭘 희생했는지 아느냐고 말하지 않으려고 모두 써버렸다. 마음이 닳아빠진 타이어처럼 무기력한 공회전을 했다. 

스티브를 살려달라는 소원은 들어주셨으면서 왜, 왜 내가 아직도 스티브를 친구로만 생각할 수 없죠? 내 사랑은 스티브보다 부족했는데도 왜 바뀌질 않죠?

몇 달쯤 흐르면 보답없는 사랑은 천천히 말라죽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스티브의 사랑만큼 버키의 사랑은 고결하지 않고, 소중하지 않고, 중요하지도 않으면서도,  그러면서도 결코 말라죽지 않았다. 

버키는 주먹을 꽉 쥐고 신에게 항의했다. 왜 스티브가 날 구하게 만드셨죠? 나는 그냥 옆에서 스티브를 돕고 구할 수 있기만 해도 만족했을 텐데 왜 내쳤냐고요, 그 애 옆에선 아무 것도 못하고,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병신으로 남게 한 거냐구요. 나는, 스티브를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을 텐데…….

등 뒤의 막이 걷어지는 두터운 펄럭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분과 질투로 범벅되어 울고 있던 버키는 뒤늦게 눈치챘다. 완전히 눌려있던 이성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한 걸음을 내딛는 짧은 사이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쪽팔리고, 그러나 사실은 누구라도 좋으니 알아줬으면 싶고, 두렵고, 변명거리를 찾고 싶고, 나가라고 소리지르고 싶기도 하고, 그러나 전쟁 한복판의 막사에서는 이래서는 안 되었다. 눈물은 사적인 일이었고 군대는 사적인 무언가를 털끝만큼도 보호할 수 없는 곳이었다. 

버키는 속으로 욕하면서 울음으로 들썩이는 어깨를 억누르려 했지만 소원을 빈 그 날 밤부터 한 번도 터트리지 않고 껴안고 있다 마침내 터져버린 상처의 고름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는 버키의 목멘 울음 소리에도 멈칫하지 않고 곧장 버키가 누워있는 침상으로 걸어왔다. 아, 스티브라면 어떡하지. 버키는 모포를 악물었다. 이 사이에서 꾸깃하게 접히는 보푸라기가 잔뜩 일어난 얇은 천.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모포에 박으며 버키는 생각했다. 만약 스티브라면, 만약 스티브가 내 어깨를 잡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면. 

그러면 터져나온 고름처럼 고백마저도 터져나올 것이다. 스티브의 어쩔 줄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는 얼굴 앞에 두고 헷갈리지 않도록 또렷하게. 너를 사랑한다고, 아주 오래 전부터.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예전 이사를 할 때 스티브 로저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때 버키는 어떻게든 친구 자리라도 지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 정말로 과거의 자신은 모두 멍청이일 뿐이다. 멍청하고, 답을 눈앞에 두고도 모른다. 그 때 자신은 다시는 스티브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리라 예감한 채 스티브의 입술의 온도를 그리워했을 뿐이었다. 몇 년 간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리워하며 친구 자리에서 맴돌기만 했다. 정말 멍청하다는 말 밖에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 때 버키 반즈는 당연히 다른 것도 떠올려야 했다. 다른 사람이 그 입술의 온도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순간에조차 그는 친구로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위악적인 자신이 자신에게 다그친다. 대체 왜 그렇게 친구로 남고 싶다고 지랄을 했어? 대체 왜? 걔를 또 구할 일이라도 있으면 뭔가 달라질까봐? 널 사랑해줄까 봐?

누군가가 가만히 버키의 침상 옆에 앉으며 손을 어깨에 누르듯이 얹었다. 버키의 어깨가 부르르 떨었다. 

“몬티가 너 상태 안 좋다고 해서.”

가브리엘 존스였다. 상태가 좋지 않은 버키 반즈를 추스르기 위해 아자노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부터 함께였던 107 연대인 티모시 듀간과 게이브 둘 중에서 그가 선택된 모양이었다. 덤덤은 천성적으로 신경줄이 두껍고 대범해서 이런 일에는 그다지 맞지 않았다. 부대원 관리에 대해서 병장인 버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쉽게 그런 결론을 낼 수 있었다. 

다행이야.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다. 고백하지 않아도 된다.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안도와 그리고 가슴이 반으로 부러지는 듯한 슬픔이 교차되듯 치고 올라왔다. 

게이브는 그 이상 별 말 없이 버키의 어깨를 쥔 채로 가만히 있었다. 전쟁 중의 그들은 때때로 히스테릭하게 변했다. 존스의 존재가, 그가 잡고 있는 어깨가 마치 닻이라도 된 듯 버키를 천천히 현실에 끌어당겼다. 절망과 후회의 폭풍우는 현실 앞에서 가라앉고 있었다. 현실의 일이 끼어든다. 이제 앞으로 죽도록 쪽팔리겠다는 것, 바이스에 머리를 넣고 죄이는 듯한 두통, 게이브에게 어떤 변명을 해야 할까 하는. 젠장, 누가 좀 구해줬으면. 

그러다 버키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눈물은 여전히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웃겨서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잔웃음과 함께 계속 울었다. 누가 스티브 로저스를 구하고 있었다고? 맙소사, 자신한테도 거짓말 하지 마, 버키 반즈. 걔가 널 구했지. 불량배 몇 쫓아버린 걸로 뭘 생색을 내려고 해? 언젠가 사라질 스티브 로저스의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여기에서 이렇게까지 징징거릴 게 대체 뭐야. 친구로라도 남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알면서. 구원받은 건 언제나 나였는데. 

걔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건 언제나 나였는데. 겁쟁이 페어리, 호모 새끼 같으니라고. 

먼저 스티브를 끌어당긴 것은 버키였다. 스티브는 원래부터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단지, 가장 가까웠던 버키가 안달을 내며 고백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버키에게 가장 귀한 것을 스티브가 주었다. 악마도 그렇게 말했지 않은가. 환난과 궁핍 속에서 자신의 몸과 같이 너를 사랑하는 자가 있으니 네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이다. 버키는 헐떡거리며 얼굴을 가린 양 손의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모든 것을 빼앗아간 악마가 한 말에 기대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게이브가 나직하게 말했다. 

“물 가져다 줄까?”

버키는 모포를 뱉어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브가 잠시 어깨를 놓고 막사 가운데 놓인 쇠주전자로 일어났다. 그 사이 버키는 팔뚝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얼굴 전체가 화끈거리고 아팠다. 코를 마시자 더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주 어렸을 때 말고 한참을 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이브가 쇠컵에 물을 반 채워 내밀었다. 버키는 반쯤 몸을 일으켜 세우고 받았다. 미지근한 물이 바짝 마른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한 미지근함조차도 버키에게는 차갑게 느껴졌다. 어깨를 들썩이게 하던 울음이 잦아들고 때때로 아직 삭이지 못한 숨이 목을 간지럽혔다. 

게이브가 물었다. 

“괜찮아?”

만일 악마가 다시 나타난다면, 그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었음을 확실히 아는 버키 반즈 앞에 악마가 나타난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물론 괜찮지…….”

버키는 쉰 목소리로 대답하고 자주 짓는 ‘어쩔 수 없잖아’ 하는 듯한 미소를 잠깐 지었다. 시선은 멀리 있었다. 물론 버키 반즈는 다시 한 번 무릎을 꿇을 것이다. 자신이 한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이제 그는 똑똑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가슴이 몽땅 찢어지고 헤어져 너덜너덜해지겠지만, 이미 한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스티브 로저스가 스티브이며 버키 반즈가 버키인 이상 이 모든 게 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이것이 모두 버키 반즈의 선택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받아들여야 했다. 

“들어온 게 너라서 다행이다.”

버키가 중얼거렸다.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게이브는 코로 길게 한숨을 쉬고 침상에 앉은 버키를 내려다보았다. 오래도록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버키의 눈가는 거뭇하게 죽어 있었다. 

“약이나 일단 먹어.”

게이브는 타박하며 잔에 물을 한 번 더 채워주었다. 






스티브가 안전하게 착륙하기란 무리라며 강제착륙을 시도하겠다고 말하자, 관제실에서 그의 연락을 받아 화색이 돌았던 버키 반즈는 목 뒤가 쭈뼛한 두려움을 느꼈다. 관제실에 함께 있던 페기 카터와 짐 모리타, 체스터 필립스 셋 역시도 한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모두가 알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한 버키가 몸을 굽혀 관제실의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잘 찾아봐! 스팁, 제발!”

페기가 바로 이어서 말했다. 

“스타크에게 연락할게. 그가 방법을 알 거야.”

스티브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또한 단호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필립스 대령이 그 순간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것이 캡틴 아메리카의 마지막이다. 그는 나이들고 노회한 사람답게 눈치가 빨랐다. 필립스는 조용히 모리타의 어깨를 건드리고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모리타 역시 혼란스럽게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곧 필립스의 신호를 받고 왜 나가자고 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러니 그의 연인과 남겨두고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모리타는 잠깐 망설이다가 완전히 넋이 나간 버키를 건드렸다. 

버키는 여기에 있는 누구보다 훨씬 더 떨고 있었다. 모리타는 캡틴 아메리카가 아자노에 혼자서 누굴 구하러 왔는지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이해했다. 그럴 만 하지. 가까운 사이일수록 죽음은 더 크게 다가오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잠시 자리를 떠나줘야 할 때였다. 

무전 너머에서 스티브는 잠시 침묵하고 있었고, 그 사이 모리타가 더 강하게 버키의 팔을 잡아당기며 턱으로 페기를 가리켰다. 입술까지 새파랗게 질려있던 버키는 멍하게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그제야 간신히 몸을 돌려 일어났다. 거의 제대로 서지 못하는 버키를 부축하고 모리타는 먼저 나간 필립스를 따라갔다. 필립스는 입구 쪽에서 서 있다가 둘이 절뚝거리며 나오는 것을 보고 눈짓으로 더 멀리 보냈다. 버키는 정강이 뼈라도 부러진 사람처럼 계속 휘청였지만 흐느끼지는 않았고 어떻게든 간신히 그 눈짓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을 방해하지 말자는 눈짓이었다. 한순간에 방해자가 된 버키는 시선을 아래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스티브 로저스의 마지막에 있을 사람이 내가 아니구나. 분노에 가까운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갔고 곧 속이 한순간 녹아내리는 듯 시큼하게 타들어가는 아픔이 밀려들어왔다. 버키는 눈가를 찡그리며 아픔을 참아냈다. 그는 한 번도 스티브 로저스의 마지막에 있을 사람이 자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당연했다. 아예 스티브의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

스티브의 등 뒤에서 지키며 버키 반즈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조차 스쳐지나가지 않는 스티브를 보고 항상성을 느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보충되어 들어오고 누군가는 전입하고 같은 군복일지라도 수없이 바뀌는 얼굴들 사이에서 하울링 코만도즈의 소대는 단 한 명도 바뀌고 죽지 않았다. 그들이 해온 또라이 같은 작전을 생각하면 그것은 기적과도 같았다. 그 생각을 했을 때, 버키 반즈가 무엇을 생각했겠는가. 그가 바친 대가가 아직도 유효하게 스티브 로저스의 생명을 지키고 있노라고 자만하지 않겠는가. 혹시 총탄이 스칠까, 혹시 분해되어 사라질까, 혹시… 로 시작하는 각종다양한 걱정들을 쓰라린 대가로 눌러버리고, 버키는 자신이 먼저 죽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해왔다. 속터져 죽던가 아니면 그냥 운이 없어 죽던가. 

그러나 스티브 로저스가 빨랐다. 그는 캡틴 아메리카로 죽었다. 






1945년 5월 서부 유럽 전선과 동부 유럽 전선은 완전히 끝나고 같은 해 8월 중일·태평양 전쟁도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연합군의 승리가 선언되기까지 버키는 스티브의 유지를 잇겠다는 일념으로 버텼지만 마침내 승리가 선언되고 그 자신도 승전보를 가지고 미국의 브루클린으로 귀환한 후에는 무언가 부러져서 주저앉았다. 

시체를 찾지 못한 성대한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버키뿐만이 아니었다.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자신의 몸을 희생해 수많은 목숨을 구한 캡틴 아메리카는 죽음마저 영웅적이었다. 첫 삽이 성조기를 씌운 관 위에 흙을 뿌리고 관 뚜껑을 부슬부슬한 흙이 두드리는 순간 버키는 자신이 저 관처럼 텅 비어서 작은 충격에도 빈 소리가 울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 사람은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 살아있는 한 시간은 상처를 아물게 하고 새살을 돋아 흉터가 남을지언정 붙여놓는다. 그러나 영영 잃어버리는 것도 있다. 다시는 차오르는 새살을 느끼지 못할 만큼 떨어져나가 아문 뒤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실이 있다. 버키 반즈가 그랬다. 북극 어딘가에 스티브 로저스와 함께 버키 반즈의 일부분도 깨진 채 가라앉아 있었고, 그 날 깨져나간 부분은 너무나 거대해 도저히 채워지지 않았다. 상실된 자리는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았지만 바람이 쓸고 지나갈 때마다 거대하게 빈 소리가 울렸다.

하울링 코만도즈는 흩어져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댈러스, 뉴욕, 런던, 파리, 오를레앙…… 버키는 잠시 뉴욕에 머물렀다가 다른 낯선 동네처럼 변해버린 집을 팔아버리곤 다시 입대했다. 덤덤 듀간과 짐 모리타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들 셋은 당연히 한 부대에 배속되어 세계대전 후의 남은 잔재를 처리하기 위해 싸웠다. 하이드라가 뻗은 손은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 곰팡이처럼 보이지 않는 포자가 어딘가에 스며들어 조용히 좀먹어들어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머리를 날리고 또 날려도 말 그대로 ‘히드라’처럼 어디선가 또 기어나오는 식이었다. 

하이드라에게 분노가 일어야 마땅한데도 버키의 분노는 무감각한 부분이 있었다. 분노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분노하는 것 같았다. 세상은 흑백처럼 어두웠고 때때로 강렬한 순간들만이 색채되었다. 이를테면 죽을 뻔할 때, 몇 년을 함께 군대에서 굴러놓고도 덤덤 듀간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때나, 혹은 페기 카터가 잠시 합류해 같은 미션을 하고 다시금 미국으로 돌아가는 때라거나. 여간해서는 어떤 일에도 감흥이 없어진 버키였지만 같이 온 톰슨 요원이 페기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덤덤이 아무렇지도 않게 페기를 대우하며 톰슨을 찍 소리도 못하게 무시하지 않았다면 너무 놀란 나머지 톰슨의 얼굴에 주먹질을 할 뻔 했다. 

그 외에는 망망대해에서 고무보트에 탄 것처럼, 방향조차도 잡지 못하고 그저 둥둥 뜬 채 파도며 폭풍우가 다가오기만을 멍청하니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나중에는 덤덤마저도 화를 내며 버키를 몰아붙였다. 

“자꾸 이렇게 죽을 자리 봐놓는 사람처럼 굴 거야?”

버키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내가 언제?”

“아주 넋이 나갔잖아!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알아? 지금처럼 굴면 목숨이 몇 개라도 부족해.”

덤덤의 말이 맞았다. 처음에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은 민첩하게 일에 몰두할 수 있었지만 버키는 차츰 그토록 격렬하고 자극적인 임무 중에도 불구하고 지치고 초연해지며 냉담해졌다. 아무 것도 삶에 자극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은 의도적으로 반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위험한 곳에 내던지고 그 때서야 간신히 살아서 기어 돌아오는 일에 만족을 느꼈다. 

“왜 그럴까?”

버키가 고개를 떨구고 웅얼거리자 마음이 조금 약해진 덤덤이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버키, 내가 보기에 너하고 이런 일하고 별로 안 맞는 것 같다.”

하울링 코만도즈부터 지금까지 몇 년을 같이 굴러놓고는. 버키가 고개를 살짝 돌려 비난이 섞인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덤덤은 눈썹을 치켜올리기만 할 뿐이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닐 수도 있잖아. 늦게 알았을 뿐이지.”

덤덤이 포치에서 담뱃값을 하나 꺼내 버키에게 권했다. 버키는 말없이 한 개피 집어들고 입에 물었다. 덤덤은 자기도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돈도 벌었으니까 같이 끝내주게 은퇴하자고.”

“내가……. 이렇게 아무데도 안 다치고 죽지도 않고 살아있어도 될까?”

그 말을 듣자마자 덤덤이 버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고맙다고 감사 기도는 못 올릴 망정 그게 무슨 헛소리야!”

멍청하게 있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버키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도 떨어뜨리고 맞은 자리를 손으로 감쌌다. 

“아프잖아!”

“아프라고 때렸다! 그건 느껴져? 대체 무슨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안 다쳤으면 안 다칠 운이 있는 거고 안 죽었으면 안 죽을 운이 있는 거지, 꼭 다치거나 죽어야만 돼? 누구한테 빚졌어? 대장 따라서 죽으려고?”

덤덤은 일어나서 자신의 담배를 내팽개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덤덤의 얼굴이 순식간에 술을 들이부은 것처럼 붉어졌고 숨은 기차 화통 소리처럼 씩씩거렸다. 그가 소리쳤다. 

“스티브가 죽었다고 너까지 언제까지 이럴 거야? 이젠 너도 갈 길을 찾아야 할 거 아냐!”

버키는 대답하지 못했다. 덤덤은 그 앞에서 다시 엉덩이에 불 붙은 사람처럼 빙글빙글 돌며 화를 내다가 버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퀭한 눈으로 듣고만 있자 쓰으읍 하고 잇새로 공기를 빨아들이며 멈췄다. 

“제대해. 계속해서 군대에서 요원이니 병장이니 하는 소리나 듣고 있으니까 아직 2차 세계대전을 못 벗어나는 거야. 휴가 한 번 안 가니까 미국 분위기도 모르지. 거긴 완전히 전쟁 같은 건 다 잊었어. 못 잊는 건 너 혼자뿐이야!”

잊을 수 있다고? 물론 그럴 것이다. 버키는 덤덤의 말에 일부 동의했다. 매일 같이 죽어버린 스티브 로저스가 그리운 건, 그 당시와 환경이 바뀌지 않아서일 지도 모른다. 왜 스티브는 죽었는데 나는 살아있을까, 왜 이토록 총탄이 여름 소나기처럼 쏟아지는데 그 중 어떤 것도 맞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고통과 죽음을 가져다 줄 불운을 기다리는 것은.

버키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가 생각의 방향을 돌렸다.

“너는?”

“나도 곧 제대할 거야. 돈은 모을 만큼 모았어.”

“너 혼자 제대하기 싫으니까 날 끌어들이는 거 아니냐?”

“내가 인생 하나 구제해주는 거지. 남쪽으로 내려와, 버키. 너 같은 북부 멍청이에겐 남부의 햇빛이 필요해. 이런……”

덤덤이 콧수염을 매만지던 손을 허공을 향해 뻗었다. 

“창백한 겨울 같은 햇살을 받고 있으니까 울증에 시달리는 거야. 남부의 햇빛에 작신작신 두들겨맞다보면 울증은 없어져. 도저히 눈을 뜨고 올려다볼 수 없는 태양이 지글거리고 피부가 타고 벗겨진다고. 나쁜 생각 같은 건 정오의 아이스크림처럼 순식간에 녹아버리지. 그러면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어. 모은 돈으로 텍사스에 와!”

“난 바다 없는 데서는 못 사는데……. 거긴 완전 사막이잖아.”

버키가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덤덤이 코웃음 치면서도 사탕으로 개미를 꼬이듯이 버키에게 밀어붙였다.

 “거 뭐냐, 플로리다도 있잖아. 거기는 같은 서부 해안인데다 오렌지도 맛있지.”

“플로리다…….”

어쨌거나 버키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낯선 지명을 입에서 굴려보았다. 플로리다는 교과서에서 종종 나왔고, 대공황 시절에는 신문에 떠들썩하게 이름을 올렸었다. 안 좋은 의미로.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호황이라니 분위기가 어떨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는 재입대를 한 이후 휴가도 반납해서 미국으로 돌아가 본 적이 없었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때때로 전 하울링 코만도즈 멤버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미국의 사정 같은 것은 전혀 관심이 없었고 대체로 서로의 안부만을 묻는 내용이었다. 

버키의 중얼거림이 드디어 덤덤의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좀 더 열성적으로 플로리다와 남부를 찬양하며 버키의 구미를 끌어당기려고 노력했다. 버키는 슬쩍 고개를 들어 덤덤을 바라보았다. 덤덤의 남부 찬양은 어느새 천천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변해 있었다. 덤덤에게 향수병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덤덤도 107연대에서 만났을 초반엔 지긋지긋한 텍사스라고 투덜거렸지만 십여 년간 일 때문에 해외에서 정착하지도 않고 떠돌아다니다 보니 이젠 그 지긋지긋함이 은연 중에 그리워지는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버키 역시 눈을 감으면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 늘어서 있는 브루클린 하이츠의 모습이 모였다. 지상철이 올 때 땡땡거리며 울리는 종소리, 맨하튼으로 건너가는 브루클린 브릿지의 철장, 빠르고 성급한 뉴욕 사투리, 차갑고 습기찬 공기. 그러나 그 어느 순간에도 스티브 로저스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추억이 어디에나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었기 때문에 어느 페이지를 넘긴다 해도 스티브의 고통스러운 부재를 실감할 뿐이었다. 

문득 덤덤이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서른 중반은 넘기 전에 결혼해서 아들이든 딸이든 낳아서 애지중지하고 살아.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고 있잖아.”

“하워드 스타크도 결혼 안 했는데 뭐 어때.”

“그 사람은 부자잖아!” 덤덤이 어이 없다는 듯 대꾸했다. “누구한테 비교하는 건지 모르겠네, 거 참.”

그러면서도 덤덤은 결혼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워드 스타크는 잘 먹히는 핑계였다. 덤덤이 머쓱하게 군화로 바닥에 떨어진 장초를 비볐다. 얇은 종이가 육중한 군화 아래서 터져서 안의 담배가 흩어졌다. 

“아까워 죽겠네, 누구 때문에 장초 두 개피나 버리고.”

“야, 솔직히 니가 내 뒤통수를 쳐서지.”

“멍청한 소릴 하니까 그렇지. 아까 뭐라고 했더라? 넌 인제 제임스 ‘또라이’ 반즈 해.”

입가에 의미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버키가 대꾸했다. 

“티모시 ‘덤덤’ 듀간이 그런 말 하니까 웃긴다 그치?”

버키는 멀리 지나가는 군용 트럭의 뒤꽁무니를 한참 바라보았다. 큰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바퀴의 뒤를 따라 먼지가 무성하게 일어나는 모습. 마른 먼지는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고 덤덤은 평소 급한 성격답지 않게 같이 그 먼지구름을 보고 있었다. 버키는 문득 덤덤에게 시선을 돌렸고, 이제 서른 중반이 된 덤덤의 수염에서 흰 가닥을 몇 개나 발견했다. 군모 아래의 머리카락도 그럴 것이다. 그들은 이제 젊지 않았다. 젊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버키는 마침내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하곤 진짜 플로리다나 갈까봐.”

“잘 생각했다 또라이야. 솔직히 텍사스는 내 고향이지만 너 같은 연약한 뉴요커는 발 대기 힘들거든.”

“여어어언약?”

먼저 제대한 덤덤은 자신이 산 농장 주소를 적어주고 갔다. 뒤따르듯 버키 반즈도 제대하고 나서 정말로 플로리다로 향했다. 버키는 배낭 하나만 매고 올랜도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다음 해변 쪽으로 해서 계속 남하했다. 같은 북대서양을 끼고 있지만 북위 사십도와 북위 이십오도의 차이는 컸다. 축축한 마음이 말려지는 듯한 쾌청한 날씨가 연일 이어지다 곧 숨막히게 덥고 무성하게 비가 내리곤 했다. 

그는 마이애미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씩씩하게 멕시코만에 면한 반대편으로 향했고 충동적으로 크리스탈 리버 부근에서 이층 집을 샀다. 바다는 가깝고 주변에 이웃이 별로 없는 장소로, 별장으로 이용되다 팔린 것이다. 마당은 좁았지만 히비스커스가 만발했고 지붕은 주황색으로, 벽은 밝은 베이지 색 페인트로 깨끗하게 칠해져 있었다. 이국적인 식종이 늘어서 있는 도로 주변 곳곳에 보트 선착장이 보였다. 버키 반즈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온화함과 평화를 덧붙여 만들어 놓으면 마치 이러한 곳이 될 것 같았다. 

몇 달 동안은 생활 습관이 갑자기 달라진 데다 주변 정리를 하느라고 부산했다. 아는 사람들에게 제대하고 이사를 했다는 편지를 내고, 세금을 처리하고, 주변을 탐색하고, 몇 안 되는 이웃을 만나 정중하게 만남을 축복하자는 식의 파티를 열고, 혹은 초대되고, 가구를 들이고, 차를 사고, 기타 등등. 그 사이 덤덤 듀간이 결혼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아, 그러면 ‘덤덤’이라고 편지봉투에 쓰진 못하겠군.’ 그 편지에 바로 뒤이어 짐 모리타에게는 막내아들을 낳았다는 편지도 왔다. 버키는 축하 편지를 쓰고 선물을 고르느라 일주일을 홀딱 넘겼다. 

마침내 플로리다의 생활이 익숙해진 밤, 버키는 포치에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어가려다 밖으로 나왔다. 밖은 가로등도 없고 주변의 인가도 드물었기 때문에 하늘의 별들만이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농후한 남색 어둠이 고여 있었다. 뉴욕의 꺼지지 않는 불빛을 생각하면 플로리다의 밤은 미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마귀의 모습을 백 가지는 보여줄 수 있을 것처럼 어둡고 고요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버키의 마음에서 공포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는 이보다 더한 어둠과 공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닷바람이 일어서 버키의 짧게 자른 머리를 약간 흐트러뜨렸다. 그는 포치에서 한두 걸음 내려와 하얀 자갈이 깔린 마당을 건너 바다로 향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익숙했기 때문에 걸려 넘어가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웅성거리는 파도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발길에 축축한 모래가 밟히기 시작할 때 버키는 멈춰섰다. 손톱만큼도 되지 않는 작은 별들이 쏟아내는 별빛이 좁은 해안과 물결 위로 쏟아져 수많은 반짝임이 솟아올랐다. 사위는 고요하고 농후한 어둠과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했다. 

버키는 그 순간 뚜렷하게 자기 자신의 텅 빈 자리를 느꼈다. 스티브 로저스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 이제는 영영 채워지지 않을 자리. 

‘소원은 너를 위해서였다고 생각했는데.’ 

바닷물이 얇은 샌들의 바닥을 적셨다. 멕시코 만 저편을 노려보며 버키는 꽉 다물었던 입술을 조금 벌렸다.

소원을 빌었을 때, 버키는 자신이 온전히 스티브 로저스를 위해서 소원을 빌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까맣게 기억을 잃어버린 채 버키를 친구의 바운더리로 밀어내고 새로운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며 원망했다. 소원의 득을 본 것은 스티브 로저스인데 어째서 손해는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지 이기적인 짜증이 밀려올 때가 있었다. 

‘근데 아닌 걸 알아. 너를 위한다고 하면서 나는 내멋대로 한 거지.’

스티브 로저스에게는 악마와의 무시무시한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의 이성이 있었기 때문에 악마가 찾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스티브에겐 언제든 죽음을 받아들일 만한 담력이 있었다. 버키로서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버키가 스티브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만큼의 백분의 일 만큼도 스티브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통스럽고 괴롭지만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처럼. 

스티브 로저스의 죽음 후로 이제 십 년이 되어가는 데도 그는 아직도 스티브의 상실을 이겨내지 못했다.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니, 교회에서의 스티브가 죽지 말라고 빈 소원은 오로지 버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스티브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를 잃어버린다면 비참하게 무너질 자신을 위해서 소원을 빌었던 것이다. 

날 위해서였어.

그러면 억울할 것도 없다. 손해 보았다고 징징거릴 일도 없다. 스티브 로저스의 사랑을 영영 잃고 그의 사랑이 다른 사람을 향해 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아서 가슴이 찢어졌다고 해도,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스티브 로저스가 살아있었다면. 살아 있었다면. 

버키가 주저 없이 한 두발자국 앞으로 걷자 바닷물은 발등 위까지 고여 발목을 감싸고 복숭아뼈에서 위아래로 찰랑거렸다. 남쪽의 바닷물은 따뜻했다. 태양으로 하루종일 데워진 바다는 차가워지지 않은 채 부드러운 온기를 여전히 품안에 지니고 있었다. 버키는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걸었다. 

무릎까지 바다에 잠긴 채로 버키는 어둠 속에서 고래의 등처럼 느리게 뒤채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면 발 아래가 갑자기 푹 꺼져 수심이 깊어진다. 해상보안대에게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경고를 받았었다. 한 번 그렇게 꺼지면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 해도 혼자 빠져나오기도 힘들며 누군가의 도움도 쉽게 받을 수 없어 한참 후에야 시체를 찾을 수 있다고. 그러니 조심하라고. 

버키는 눈을 감았다. 왜 그래선 안 돼?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고, 눈 안쪽에서 여전히 수많은 별빛이 반짝였다. 






버키의 102번째 생일을 축하하면서!


MCU:CA STUCKY

오란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