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용 소액이 걸려 있습니다)
예정 시간보다 20분 늦었다. 약속 시간은 퇴근에 맞추어 잡은 건데 벗어나기 오 분 전 업무 연락으로 늦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안 받을 수도 없고. 댄스 아카데미에 정식으로 소속되어 있지만 외주는 들어오는 대로 받는 프리랜서 쇼타로는 시안 영상은 추후에 다시 얘기 나누는 걸로 대화를 마치고 부랴부랴 퇴근. 나가면서 부재중 띄워져 있는 화면을 확인했다. 먼저 퇴근한 은석이 이자카야에 들어가 있겠다고 메시지가 와 있다. 발걸음이 더욱이 빨라졌다.
미안 나 조금 늦을 것 같아 먼저 먹고 있을래? 답장은 곧장 왔다. 괜찮아요. 다른 직장인보다 늦는 퇴근 시간이라 택시를 잡는 데의 어려움은 없었다. 금요일 저녁이므로 번잡해서 생각보다 더 늦긴 했다만. 급하게 나오느라 와이드 셔츠 카라가 마구잡이로 접혀 있는 걸 보고 그제서야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마저 뭐 하나 걸치고 있는 게 디폴트인 쇼타로는 가방에서 뿔테 안경을 꺼내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고 옷부터 머리까지 전부 올 세팅. 셀카 모드 카메라를 통해 정리하는 모습을 본 택시 기사가 허허 청년 데이트가는거여? 얼른 밟아야겠네, 너스레에 데이트는 아니구요...... 왜인지 작은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자리가 없었는지 중앙에 자리잡은 은석이 한눈에 보였다. 정확히는 여자 두 명에게 받은 합석 제안 혹은 번호 따기를 거절하는 은석. 폰을 주머니에 넣고 가는 여자를 보아하니 후자였나 보다. 사람 좋은 미소로 고개를 저었고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나는 광경을 한참 쳐다봤고 멀뚱히 서 있는 쇼타로를 발견한 은석은 머리 위로 손짓했다. 지각생 왔어요? 이것 봐요 형 기다리다 목 빠진 거 보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젓가락으로 앞접시를 툭툭 건드리며 꼽을 주는 태도엔 장난이 한껏 묻어 나왔다. 이런 은석을 초반엔 받아치기 어려워했으나 그를 통해 st 인간 다루는 백 가지 방법을 통달한 쇼타로가 지지 않고 반문했다. 그냥 가지 왜 기다렸어? 은석은 오 좀 치네 같은 얼굴로 웃었고 쇼타로는 메뉴판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살게.
실제로 은석은 쇼타로를 오래 기다렸다. 은석의 정시 퇴근 여섯 시. 쇼타로의 본 퇴근 시간은 여덟 시. 보통 같으면 주말에 만났겠지만 마침 금요일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소식도 있었다. 은석의 이별. 지인의 이별 특히나 아끼는 동생이 헤어졌다는 얘기면 정 많은 쇼타로가 위로하지 않을 수 없는 토픽이었다. 추운 날씨 탓에 약속 잡기를 미루다가(사실 쇼타로는 날씨 상관 없이 늘 외출하지만) 금요일에 만나잔 연락에 여자친구는? 물었더니 아 저 헤어졌어요 라는 담백한 대답이.
에에. 또?
또가 뭐야. 헤어진 사람한테 너무하네.
너무하단 말을 누가 해야 할지. 쇼타로가 은석을 알고 지낸 후로 벌써 세 번째 이별이었는데.
은석은 결단코 가벼운 사람은 아니다. 먼저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기보다 오는 사람에게 관심을 주는 타입. 쇼타로가 먼저 아는 체하지 않았더라면 아는 사이가 될 리는 만무했다. 그만큼 진중한 성격이기도 했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을 적 전 여자 친구와 삼 년 만났단 이야기도 들었다. 장난 빈도수가 하늘을 찌르지만 신중한 면모도 종종 보여서 결론은 연애도 잘하겠다 생각했는데 들려오는 소식이 죄다 만났다 n달 만에 깨짐이다. 너 저주 걸린 것 아냐? 진지하게 물으면 이 심연의 블랙 쉐도우에게 저주 따위는...... 오타쿠처럼 말해서 말을 말았다.
"뭐 시킬까요. 오코노미야끼?"
"여긴 그것보다 나베가 맛있어."
"나이스. 오늘 소주네."
"늘 내가 다 마시잖아."
후엔 위로 없는 대화가 전부다. 은석네 회사 박 부장의 막 나온 꼰대 썰. 춤추다 허리를 삐끗한 수강생의 이야기. 모처럼 구내 식당 반찬이 괜찮았다는 평. 다음엔 나도 먹어 볼래에 형이 대신 일하란 투정. 쇼 사원?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오 사원이려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할 때마다 안 그래도 웃음 많은 쇼타로가 눈꼬리 접고 웃어대면 뿌듯함을 느끼는 은석이다. 쇼타로가 고른 모츠나베에 사케 한 병. 천천히 배 채우고 병 비우며 알딸딸해질 때쯤 조심스레 물었다.
"이번엔 왜 헤어지자고 했대."
"제가 찼을 거란 전제는 아예 없죠?"
"당연히."
"별거 없어요. 지루하대요."
지루하다는 말을 들으며 헤어진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추가로 주문한 오코노미야끼 가운데를 갈라 접시에 옮겨 놓았다. 쇼타로에 먼저, 그 다음은 자기 접시에. 뜨거우니까 식혀 먹어요. 장남 역사 14년 은석은 애 다루듯 누군갈 곧잘 챙겼다. 형님 먼저라는 한국적 배려에 물들어 아리가또, 자연스럽게 받아 먹었다. 마음 괜찮아? 힘들진 않아? 진심으로 물어본 거였고 한두 번도 아니고 뭘요라는 대답 역시 진심이었다. 처음에만 좀 아팠고, 회사 생활 시작하면서 스스로 루즈해졌다 느낀 건 사실이었으므로 연차 더 쌓이면 여유도 생기겠거니 했다. 대화 주제는 사케 말고 소주 한 병 시키잔 이야기로 흘러갔다.
내내 피곤했던 일주일이라 일찍 파하기로 했다. 돌아다니기 귀찮아하는 은석을 위해 그의 집과 가까운 곳으로 잡은 이자카야. 버스로 한참 가야 하는 쇼타로는 걷고 싶다며 다른 정거장까지 걸어갈 작정으로 헤어지는 인사 건넸다. 얼른 가 은석 피곤하겠네. 형은요? 난 좀 걸을래. 보부상 가방 어딘가에 박혀 있을 에어팟을 찾는 중에 그럼 저도 같이 걸어요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나는 뭐 걷지도 말라?"
"그게 아니라 너 피곤할까 봐. 나 오래 기다리기도 했고."
"형 맨날 길 잃어서 안 되겠어요. 버스 잘 타는 것 보고 가야지."
유치한 말장난의 시작이었다. 나 계속 걸을 건데, 버스 안 탈 건데. 버스 탈 때까지 따라다니면서 괴롭혀야지. 괴롭히기 전에 먼저 걸을 거야. 그럼 먼저 못 걷게 손잡고 걸을 거예요. 말문 막힌 쇼타로에 이겼다는 듯 승리의 피스를 보이며 한 발자국 먼저 걸었다. 헤남의 의도 없는 공격에 무참히 당해버렸다. 아, 왜 저래. 속으론 머리를 쥐어뜯고 난리블루스 추는 쇼타로는 고개 떨구고 은석을 따라잡았다.
잔정 많은 은석을 오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성향을 숨기는 동시에 가까워졌다? 우린 친구 하는 열린 마음 쇼타로니까. 누구에게든 가볍게 다가가고 오는 사람 반가워하는 등 발 넓히는 게 재주인 쇼타로와 달리 좁은 바운더리에 적절하게 채웠다 빼는 게 재주인 은석과 친해지기는 비교적 무수한 시간이 소요됐다. 얼떨결에 친구의 친구의 친구 생일 파티에 입장한 쇼타로는 그곳에서 은석을 만났다. 우와, 핸섬 가이. 처음엔 이미지 관리하는지 말이 없었고 후엔 그런 시끄러운 자리는 질색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도 쇼타로가 가자고 하는 곳이면 군말 않고 잘 따라다니는 것도 애가 착해서, 라고 생각하고 싶었는데.
날이 갈수록 도를 넘는 언행에 오늘처럼 속절없이 무너지는 횟수가 한계치에 다다랐다. 남자인 친구 백 명(오버 아니고 실제) 사귀었지만 손잡겠단 말을 느끼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애는 은석 너밖에 없다고! 정적에도 어색함 없는 사이라 쇼타로가 속 시끄러워 조용히 걷기만 하니 은석은 음 이 형 조용히 걷고 싶어 하군, 눈치껏 입 다물고 속도 맞추어 걸었다. 그러다 너무 말도 없이 걸었나 싶어 숙였던 고개 들어 은석의 옆모습에 시선이 꽂혔다.
옅은 가로등 불빛에 붉게 빨개진 귓가가 드러났다. 은석 술 진짜 안 받는다. 엥 갑자기요? 목이랑 귀 엄청 빨개. 그럼 또 눈치껏 대화를 맞추는 은석의 태도가, 쇼타로는 엄청 좋으면서도 너무도...... 자기와 알게 된 직후부터 여자 친구와 만나는 족족 헤어지고, 부르면 싫다면서도 나오고, 아무 말이면 끝까지 매가리 없는 아무 말만 하지 손잡겠단 말이나 하고. 왜 이런 플러팅 같은 장난 역사 삼백 개 만들어.
쌓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질까 봐 너무도 곤란했다.
겹경사가 터졌다. 첫째로 은석의 연봉 상승. 연봉 협상 무경험자 은석은 천원부터 불러야 하냐며 농담 치면서도 떨려 하더니 마음에 드는 숫자로 책정됐나 보다. 긍정적 동태눈으로 내내 일하다가 쇼타로에게 이야기했다. 맛있는 거 살 건데 언제 볼래요? 한 삼... 마침 오전 수업을 마친 쇼타로가 메시지를 보며 삼 뭐 삼 일 뒤? 보내자,
3... 초
2초
1초
땡 바로 지금!
순 어그로였다. 앉아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끔 보면 제일 미쳤다더니 역시.
축하할 소식에 얼른 봐야겠다며 언제 날을 잡을지 캘린더만 보다 시간이 지나던 중 쇼타로에게도 기쁜 일이 생겼다. 유명 가수의 요청으로 보낸 안무 시안이 채택되었단 소식에 방방 뛰며 아카데미 식구들과 기뻐했다. 실력 출중하고 나이 걸맞게 신선하고 창의적인 안무를 눈여겨보던 가수에게 콜 받는 건 당연하면서도 소중한 시작이다. 친한 형들과 축하 파티 후 거나하게 취해 귀가하던 쇼타로는 문득 은석이 생각났다. 분명 같이 기뻐해 주겠지? 말하는 내내 입김 불며 추위에 떨겠지만 전화를 걸었다.
새벽 한 시라는 매너 없는 시간. 대기음 몇 번 울리더니 곧장 잠에 들 것같이 낮은 목소리의 은석이 쇼타로오, 불렀다. 여보세요도 아니고 이름. 늦은 시간인데도 다정하게. 순식간에 들떠 버린 쇼타로는 오늘 겪은 일과를 전부 이야기했다.
취해서 발음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고 저도 모르게 일어로 이야기할 때도 있어 일본어는 애니로만 배운 은석은 살짝 난항을 겪었다. 몇 번의 되물음. 그러니까 형 안무를 그 사람이 받았단 거죠? 어! 혼또니 신난다구~ 귀엽게 말아 주는 한본어에 한참 웃고 본론을 꺼냈다.
그걸 이제야 알려 준다고요?
"형들이랑 헤어지자마자 말하는 거 은석이 처음이야."
와아. 난 연봉 오른 거 확정되자마자 첫 번째로 말한 게 형인데. 섭섭하다 섭섭해.
"아니..."
축하 파티도 첫 빠도 뺏겼네.
얘 또 시작이다. 약간 장난스러우면서도 조금만 귀기울이면 섭섭함 묻어나오는 진실의 말투. 전에 만났던 연하 남친이 이랬던 것 같은데. 쇼타로는 또 당한 듯한 느낌에 입술 불퉁하게 굴리며 짓궂게 굴었다. 그럼 지금 나와.
은석에게 새벽 한 시에 받아 몇십 분씩 떠드는 통화야 거뜬하지만 외출은. 고멘 고멘, 졸음 묻어나오는 말투에 시간을 확인했다. 얼른 자 내가 깨운 거지? 나도 고멘 고멘.
전화 끊으려는데 많이 취했냔 질문에 적당히라니까 도착하면 연락 하나 남겨 놓으래서 얼척없어졌다. 은석 혹시 남자 친구야? 술김에 장난인 척 과감히 물어봤다. 다 큰 남자 어른 걱정하는 남자는 애인 아니면 없대도. 그러나 헤테로 세상 속의 은석은 생각도 없다는 둥 픽 웃곤 졸리다며 끊었다. 당연한 반응이라 뭐 이렇다 할 것도 없었다. 아니사실조금짜증났긴해.
그 다음 날 직장인이 연락 가장 잘되는 시간 은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형도 술 사요 전 밥 살게요. 마다하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쇼타로는 가고 싶었던 장소들을 찍어 보냈고 은석이 여기 어떠냔 식으로 고르며 주말을 기다렸다. 이거 진짜 데이트하기 전 과정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다가도 오해하면 안 된다고 제 자신을 누르고 또 눌렀다.
겨울치고 초봄처럼 따뜻해 배 채우고 호수 공원도 걸었다. 형 이런 데서 릴스 찍어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장소도 점 찍어 주긴 했는데 조명이 약해서 패스. 너 인스타 별로 안 하는 거 아니냐니까 형이 올리는 건 다 본대서 또 입을 꾹. 쇼타로의 속내가 어쩐지도 모르고 장작더미 던져 불을 지피다 못해 화를 불렀다. 그저 은석의 대화법이라고 생각해야 할 걸 알면서도 새벽에 되뇌이면 속상할 만할 짓을 하길래 쇼타로는 복수하기로 한다. 대단한 건 아니고 반 잔씩 비우는 송은석 꼽 주기 정도? 그동안 내가 당한 게 얼만데. 그리고 그 결과.
택시 안 잡혀. 오늘 진짜 붐비나 봐.
형 너무 어지러워......
... 안 듣고 있지?
쇼타로가 은석을 처음 봤을 때 느낀 게 술 적당히는 마실 것 같다는 인상이었다. 반반하게 생겼지만 말술은 아닐 느낌? 그건 완전 틀려먹은 감상평. 한 병은 마신다더니 일곱 잔 채우기도 전에 울긋불긋했고 제 페이스(복수) 맞춰 준다고 더 마셨더니 비틀비틀 장난 없었다. 워낙 마른 애인데도 취하면 별명 따라 돌덩이처럼 무거워져 벽에 기대 두었는데도 그랬다.
완전 실수였다. 취한 사람을 감당해야 하는 건 취한 사람 보면서 술 깬 사람이거늘. 서 있는데도 조는 것처럼 고개까지 휘청대길래 도저히 못 봐주겠어서 손바닥을 볼에 갖다댔다. 은석 서서 자? 어지러워요... 배 누르면 사랑해! 외치는 곰돌이처럼 말 걸기만 하면 어지럽단 말만 늘어놓는 은석을 보며 애긴 애구나 싶었다.
손바닥에 입술이 닿기 전까지는. 한 손은 은석의 볼에, 또 한 손은 택시 제발 하나만 잡히라고 염불을 외며 무한 택시 호출을 누를 때. 유난히 폭신하고 따뜻한 것이 닿길래 봤더니 눈은 꼭 감은 채로 제 손바닥에 입술 맞댄 은석을 보자마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야야야 너 뭐 하냐. 아 살 것 같다 시원해. 큰 편에 속하는 쇼타로의 손에 은석의 얼굴이 감춰지고 시원하단 이유로 부비적대는 모습은 꼭 그루밍하는 고양이 같았다. 처음 봤을 적부터 줄곧 모델 같은 비율이라 생각하긴 했는데 얼굴이 너무 작아 한손에 쏙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사고는 끊이질 않고 더 큰 사고를 부른다. 잠결 아니 술결인 걸 알면서도 손바닥에 얼굴 딱 기대고 있으니 숨 막힌지 입술을 뻐끔대니 꼭 손바닥에 키스라도 하는 것 같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까슬거리지도 않고 너무 부드...... 야 송은석. 너나 나나 정신 차리고자 목소리 깔고 부르니 동공 반도 안 보이게 게슴츠레 뜬 눈으로 쇼타로를 바라볼 땐 이름 괜히 불렀다 싶었다. 얘가 이렇게 섹시할 리가 없어.
이건 아니다 싶어 손을 떼니 힘 없이 제게 기대 오는 은석에 입을 다물었다. 술 냄새 사이로 시원한 스킨 향 비스무리한 게 코끝을 맴돌았다. 향수 잘 안 쓴다며. 무게 실린 은석에 의해 벽으로 기대게 된 쇼타로는 이 꼴 상당히 키스하기 좋은 자세라 숨을 훕. 안 돼 안 돼 진짜 이러다가! 제 어깨에 기댄 은석이 목 가까이 들숨 날숨 오가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형."
"왜, 왜. 많이 어지러워?"
"어깨 편하다고."
목 언저리에 볼 문대느라 너깨 퍼하다거 따위로 발음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쇼타로는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우으음 하고 아예 고갤 폭 박아 버리는 탓에 다시 입을 꾹. 은석이 왜 가끔 내힘들다 거리는지 이해했다. 힘내야 하는데 너무 힘들다. 예민한 목 부근을 향해 직격타로 쏘는 알코올로 지배된 숨이 이렇게 자극적이었던가. 아랫도리 묵직해질 걱정하기 직전 택시가 잡혔다. 믿지도 않는 신에게 얼마나 감사 인사 전했는지 모른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애 혼자 보내면 무슨 일 생길까 봐 함께 택시를 탔다. 처음엔 창가에 냅다 기대 어지러 어지러 하다 급정거에 고개가 꺾여 쇼타로 어깨에 문대는 꼴이 됐다. 새로운 위기였다. 형 향수 냄새 좋네요... 술 마시고 어지럽단 말 백 번 하던 애가 향수엔 질식 않고 쇄골즈음에 콧등 얹어 중얼거렸다. 기사님 조금만 빨리 가주세요. 예? 얘가 토할 것 같다 그래가지고... 택시 기사님께 거짓말한 건 죄송하지만 일단 저가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은석의 집 앞에 내렸다. 조심히 가세요. 인사하고 늘어진 은석의 허리를 잡아 당겨 끌어안았다.
"여기부턴 너 혼자 가야 돼. 집 몇 호인지 몰라."
"301호."
"허."
술 깬 거 아닌가 싶어서 고개 숙여 보니 눈이 반쯤 감겨 있다. 이 상황에 쓰는 단어 은석이 알려 줬는데 뭐였지.
스불재 쇼타로는 원룸 현관 비밀번호를 물었다. 취해서 뭘 말하는지도 모르다가 다섯 번 틀릴 위기에 야 송은석 똑바로 말해 했더니 또박또박 네 글자 부르고 다시 쇼타로 어깨에 부비작대며 쓰러졌다. 아무리 말랐대도 180 아픈 데 없는 성인 남자를 다신 취하게 만들지 말아야지. 가끔 까부는 것 보면 꿀밤 한 대 때려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잠깐 던져 놓고 싶었다. 다시 주워서 데려다 놓아 줄 테니까 한 번만... 진짜 너무 힘들...... 지만 다 내 잘못이지, 참. 돌이킬 수 없는 상황 맞닥뜨리며 301호 앞에 도착했다. 드디어.
"비밀번호 쳐서 얼른 들어가. 들어가는 것 보고 갈게."
"형 어디 가요?"
"나도 집 가야지."
"여기도 집인데."
은석 진짜 취했구나. 벽에 기대 두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아 푸하항 웃을 여유가 생겼다. 웃는 게 버릇이라지만 취한 은석은 처음 보는지라 웃기기도 했고. 비밀번호 누르라는데 꿋꿋이 어디 가냐고 묻는 얘는 참 고집불통이라는 생각도 하고. 취하건 멀쩡하건 쇼타로 골리는 건 한결 같아 재미있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안 나쁘지. 누군가 아무리 장난을 걸어도 헤헤 웃는 쇼타로에겐 귀엽다고 아껴 주기나 했지 아 제가 알아서 할게요 수달아 같은 스타일은 없었는데, 잘못 보면 무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기분 나쁠 수가 없었으려나.
"나 집 가고 싶어. 너 들고 와서 힘들어."
"자고 가요."
"뭐?"
"집."
검지 손가락 세워 제 집 문을 가리킨 은석은 벙찐 쇼타로를 뒤로 하고 다른 때보다 천천히 비밀번호 여섯 자리를 눌렀다. 맞게 누르길 성공하고 먼저 발걸음을 옮겨 현관에 섰고 뒤돌아 반쯤 감은 눈으로 쇼타로를 기다렸다.
"자고 가라니까요."
"... 취했다 취했어. 갈게."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 더이상 그냥 아는 형인 척할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계단으로 내려와 일단 걸었다. 이젠 내가 어지러워, 은석.
지금부터 제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선을 넘어버리겠구나. 쇼타로는 택시 안 차가운 창가에 이마 식히면서 다짐했다. 일정거리를 유지하겠노라고.
***
미안! 지금 형들이랑 다 같이 춤 짜고 있어ㅠㅠㅠ
오늘로써 쇼타로에게 전화 씹힌 지 세 손가락을 채운 날.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통화보단 카톡을. 카톡은 주로 낮에, 통화는 어쩌다 한 번 밤에. 암묵적인 룰을 정해 놓은 은석과 쇼타로의 연락 텀은 주로 낮에 빠르게 활성화되곤 했는데 요 며칠간 쇼타로의 안부 전하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오늘 무슨 춤을 췄는지, 나오기 전에 불 끄는 것 깜빡한 것 같다고 한다든지,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라는 등 툭툭 던져 주는 사소한 일과가 일할 때 은근 리프레시 되는 소재다. 은석보다 조금 더 자율적으로 일하는 쇼타로는 일이 없는 날에는 필시 외출하는데 새로운 술집이나 밥집을 보면 은석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은석 성수에 이거 생겼다? 처음엔 오 그렇구나였고 지금은 언제 갈래요?가 됐다. 형이랑 가면 즐거우니까.
상냥하고, 그러면서도 톡 건드리면 리액션 좋게 나오고, 그러다가도 제 이야길 경청해 주고. 외에도 취향은 다르지만 존중할 줄 알고 오히려 그 다른 취향이 궁금해진 사람이 이젠 하루에 두 번은 연락 오나. 은근 기다리던 은석은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전화 걸었더니 시모시모, 너무 멀쩡해서 놀랬다. 은석 왜? 아무렇지 않아서 말문도 막혔다.
"뭐 해요?"
나 다음 수업 코레오 짜는 중~ 은석은?
"일하는 중이구나. 그냥 퇴근하고 쉬죠. 늦게 끝나요?"
응? 아니아니. 정리만 하면 돼서.
"오늘 바빴어요?"
이게 본론이다. 그러니까 오늘 바빴어요? 안에는 리터럴리 진짜 바빴냐도 있지만 뭐 얼마나 바쁘길래 연락할 시간도 없었냐?도 있었다. 대답이 가관이었다. 별로...? 늦잠을 자긴 했는데 막 엄청 바쁜 건 아니고. 그래서 반박하려고 했는데 입으로는 아 그랬구나만 나왔다. 알겠어요 수고해요. 끊고 왜 못 따졌지? 생각을 해 본다.
이거를 왜 따지지? 솔직히 이유가 있긴 하지. 일할 때의 낙인 스몰톡(이라기엔 길고 긴 대화지만. 대화... 라기도 뭐하게 저학년들의 대화처럼 유치했지만)인 건 맞았다. 이 대화는 퇴근하고도 이어지게 된 것도 꽤 됐다. 야근한다거나 일정이 있으면 넘어가는 날도 많지만 어쨌든 '별로 안 바빴다'잖아. 근데 전화도 씹고 메시지도 그냥 넘어가?
는 게 맞지. 은석은 제 입장을 반박했다. 십 년 지기 친구놈들도 몇 달에 한 번씩 연락하는데 쇼타로라고 매일 연락하란 법은 없지. 반박은 반박을 낳았다. 근데 하다 안 하니까 이상하다고. 부재중 띄운 거 왜 그냥 넘어가. 스치기만 해도 미안하다고 하면서 이건 왜 말도 안 꺼내. 은석 너 진짜 재미있다 자주 보니까 더 미친 거 많이 봐서 너무 웃겨, 개그맨이라고 좋아해 줄 땐 언제고 지금은 왜.
이 정도면 일상의 낙 아니야? 은석은 골똘히 생각하다 무언가 잘못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형이 왜 내 삶의 낙이야...? 오늘 피곤했나 보다 자야겠다. 불을 끄고 알람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보통 이러면 몇 번 뒤척이다 잠드니까. 암막 커튼이 도시 속 불빛을 모두 가려 주었으므로 잠만 잘 자면 된다.
...
......
미치겠네. 새벽 세 시 십구 분 찍힌 것 보고도 잠이 안 왔다. 안 하던 잡생각이 사고회로를 뒤덮었다. 쇼타로가 왜 일생의 낙이 되었는가. 내일 오전 개처럼 갈릴 오전 팀 회의 생각 하면서 자야 돼 자야 돼 하지만 종국엔 또 다시 쇼타로가 왜 내, 아 제발 송은석 미친놈아 쇼타로 생각 그만해 쇼타로 생각하려고 태어났어? 그렇게 뜬눈으로 아침 해를 맞았다. 잠 못 잔 출근길 돼서야 뇌가 텅 비어져 드디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되었다. 이게 맞지. 아니 이게 맞나. 카페인 빨면서 핸드폰 확인하는데 와중에 이 형은 또 연락이 없네. 화장실 가며 본 제 몰골이 처참했다. 쇼타로고 뭐고 오늘은 진짜 잘 자야겠다.
퇴근하고 한 열한 시 오십 분까지는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어제 이후로 끊긴 쇼타로의 답장이 이제야 왔다. 은석은 막 깊은 수면에 빠져 잠들기 직전이었지만 [쇼타롱]을 보자마자 메시지 눌러 확인했다.
[쇼타롱: 곰방와]
[쇼타롱: 은석 모해]
[쇼타롱: 나 오늘 버스 잘못 탔다...ㅋㅎㅋㅋ]
이 형 또 나 몰래 시트콤 찍었네. 엎치락뒤치락 제 머릿속을 덮었던 생각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무거운 눈 힘 줘 떠 가며 답장을 보냈다. 길잃는 거 이어서 버스도? 대화창 끌 여력 없어 계속 보고 있었는데 금세 메시지가 왔다.
[쇼타롱: 응...]
[쇼타롱: 그래서 지금 너네 집 근처야]
[쇼타롱: 언제 다시 가지 😩😩]
그 순간 벌떡 일어난 은석이 사고 과정 거칠 시간 따윈 없이 전화를 걸었다. 대기음 몇 번 울리다 은석의 이름을 불렀다. 에 갑자기 전화? 오늘도 멀쩡한 목소리였다. 취해서 버스 탄 건 아녀 보여서 다행이었다.
"집 근처라고요?"
421번 버스인 줄 알고 탔는데 21번 버스 타고 왔어... 진짜 웃기지.
"이 형 진짜 뭐 하는...... 막차는요?"
아직 있어. 근데 버스 너무 많이 타서 그냥 택시 타게.
"돈 번 거 다 택시비로 쓰고 그래라."
놀리려고 전화했구나 그치.
안 피곤하면 잠깐 볼래요? 물어볼까 말까 엄청 망설였다. 은석은 이럴 거면 끊을래 하는 소리에 맨날 이러는데 새삼스럽게? 말은 여유 걸쳤지만 몸은 겉옷 걸치려고 일어났다가 옷장 주변을 서성이다가 난리였다.
하여튼 생각나서 전화했어. 진짜 근처라서. 은석 피곤하지 끊을게.
"저 안 피곤해요."
구라가 술술 나오는 이유를 정말 모르겠지만.
"형만 괜찮으면 잠깐 볼래요?"
주저 없이 내키는 대로 움직였다.
쇼타로는 너 안 피곤해? 괜찮아? 재차 물어보다 은석의 도어락 풀리는 소리에 집 앞으로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집업 하나 걸치고 나가려다 낮에 본 자신의 몰골이 신경쓰여 비니 눌러쓰고 꾀죄죄한 직장인 티 안 내려고 애쓰며 자주 안 쓰는 향수도 뿌리고 나갔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쇼타로의 댄스 팀이 해외 워크숍으로 한 달 못 보다 오랜만에 마주했을 때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잠깐만, 내가 떨린다고? 베이비 디나이얼은 자기 감정에 대해 영문도 모른 채 허둥지둥 집밖을 나선다.
공동 현관 나서자 보이는 건 코앞 편의점 앞에서 휴대폰을 두드리는 쇼타로. 저렇게 쥐고 살면서 연락은 안 했다 이거지. 누구 때문에 잠도 못 잤는데 진짜 이 형은 오늘 죽었다.
물론 마음가짐과 다르게 쇼타로오, 다정한 목소리 튀어나왔다.
뭘 하고자 얼굴 보러 내려온 게 아니고,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지가 궁금했다. 쇼타로는 밤 늦게까지 일했으면서 집에 늘어져 있던 은석보다 멀끔했다. 그리고 충격받았다. 형 뭐예요? 은석의 얼떨떨함에 쇼타로는 괜히 뒷머리 긁적였다. 잘 어울려? 머리 끝이 엄청 상하더라구. 쇼타로의 샛노란 탈색모가 진한 흑색의 헤어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언제 했어요?"
"삼 일 전. 그저께?"
"몰랐네."
진짜 왜 유치뽕짝처럼 느끼나 싶은데 이번에 느낀 감정은 섭섭함이 맞았다. 하루아침에 쇼타로에 대해 모르는 일들이 많아진 기분이다. 매일같이 붙어다니던 짝꿍 남에게 빼앗긴 기분. 아니 근데 이 형 톤다운 왜 이렇게 잘 어울려? 하마터면 머리 위로 손 얹을 뻔했다. 안 될 건 없지마는.
야야, 너 야근 많이 했어? 얼굴 좀 상했다. 며칠 새 은석의 다크는 딥하게 진행 중이었다. 형 때문이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는데 좀처럼 떠들진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집 언제 갈 거예요 일부러 저 보려고 온 거죠? 틱틱대도 헤헤 웃으면서 그런가 봐~ 하는 것 보니까 좀 살 것 같았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택시 잡으러 나갈 큰길까지 같이 걷기로 했다. 진짜 얼굴만 볼 줄 알았는데 데려다 준다는 은석의 말에 몇 번을 만류하다 결국 옆에 서로 끼고 걸었다. 매번 지면서 매번 거절은 왜 해. 착한 쇼타로 이겨먹었다고 뿌듯했다.
사람 없는 길거리, 거리마다 세워져 있는 가로수, 드문드문한 가로등.
옆에서 허밍하며 살아 움직이고 걷는 쇼타로를 보니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도 왜 남자인 친구 하나 봤다고 호들갑인지 모르겠으며, 허구한 날 허접짜리 일상 보고는 갑자기 끊어 서운하게 만들면서도 왜 내가 서운하지라는 마음에 묵묵히 걷는 은석을 보고 쇼타로는 조금 후회했다. 그러게 피곤하면서 왜 나와. 갑작스러운 음성에 삑사리 내며 답했다. 안 피-곤하다니까...... 푸하항 너 목소리 왜 그래? 몰라요.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집 가면 연락해요. 주소 제대로 찍었어요?"
"예 선생님. 알았습니다. 얼른 가세요."
"다음엔 버스 번호도 좀 제대로 보고. 아니면 차 끌고 다니든지,"
"은석, 잔소리할 거면 빨리 가."
"... 잔소리 안 하면 천천히 가요?"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넵.
저 멀리 신호 걸려 멈춰 있는 택시가 보였다. 저거 형 타는 거 맞아요? 차 번호 뭐예요? 3945래 저거 맞아. 택시가 둘 앞에 섰다. 잘 가요. 응 데려다 줘서 고마워. 짧은 인사 끝에 서로 씨익 웃고는 떠났다.
그대로 폰을 들어 택시 뒷번호 보이게 사진을 찍고 뒤돌아섰다. 은석은 제가 한 행동이 무엇인지 집 앞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여친한테 써먹던 행동 쇼타로한테 써먹은 거다. 좋아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는 행동. 몇 날 며칠 잠 못 자 괴로웠던 이유. 쌓이는 부재에 느끼는 섭섭함과 텅 빈 감각. 얼굴 보니 눈녹듯 사라진 서러움 자리에 들어찬 안정과 설렘.
나 쇼타로 좋아하네.
인정이 이렇게 쉬울 줄 알았음 진작할걸 그랬나. 사진에 차창 너머 흐릿하게 찍힌 동그란 뒷머리에 길고 닳게 눈길이 잡혔다. 이제 내 마음은 알겠고, 지금부터는.
***
은석이 내가 남자가 되는 건지 아니면 쇼타로라 되는 건지 생각보다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즈음. 쇼타로는 암담했다. 역시 연락하는 게 아니었어.
몇 날 며칠 필사적으로 연락을 피했다. 얼굴 덜 보면 마음도 멀어질 것 같아 결정한 행동이다. 은석의 바뀌지 않는 프로필 사진과 뭣도 올리지 않는 인스타는 많이 확인하긴 했는데. 고등학생도 아니고 꿈에도 나와 아침에 깨서 이게 뭔가 싶기도 했는데. 그래 놓고 아카데미 나오자마자 버스 도착 일 분 전 표시 보고 뛰어가 버스 번호 확인도 않고 탄 게 은석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일 줄이야. 무의식이 은석 피하기를 방해했다.
제일 써먹기 좋은 핑계인 바쁘단 말로 읽고 씹었던 은석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역시. 답장 안 해도 별말 없지. 당연한 거야. 아마 게임을 하거나 자고 있겠지. 기대 없이 연락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뭐라고 보낼지 고민하다가 평소처럼 아무 말이나 보냈다. 곰방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읽어 좀 많이 당황해 켈록, 기침하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랜만이라 떨리고 이 떨리는 감정이 싫지 않은 게 너도 그러길 바라는 마음은 절대 숨기고선.
집 근처란 얘긴 또 괜히 꺼냈나. 나오라고 말한 느낌이려나. 그치만 됐다는데도 굳이 굳이 나오겠다는데 어떡해. 쇼타로는 아무 게시물도 눈에 안 들어오지만 스크롤만 주구장창 내렸다. 인기척에 고갤 들자 또 복잡해졌다. 그동안 은석을 너무나도 보고 싶어 했다는 걸. 얼굴 보니 체감했다.
자칫 실수로 보고 싶었다 고백할까 봐 아까 연습하면서 들었던 노래 음만 흥얼거렸다. 다행히 별탈 없이 헤어졌다. 은석과 쇼타로 사이는 앞으로도 이럴 것이다. 나만 맘 접으면 돼.
그러나 예상 외로 은석은 마음 접을 틈을 주지 않았다. 그전까지 쇼타로가 연락하지 않으면 은석도 하지 않길래 이대로 쭉 스탠스를 유지해야겠다 싶었는데 이젠 읽지 않아도 연락을 쌓았다.
[돌님: 바빠요?]
[돌님: 오늘 구내식당 맛없어서 토할 뻔했어요ㅋㅋ]
[돌님: 위로의 한 잔 해야 할 듯]
[돌님: 뭐 해요 쇼타롱]
원래 이러는 애 아닌데. 쇼타로는 쏟아져 오는 연락 막을 힘까진 없어 오는 대로 다 받았다. 연락하지 말아야 하는 걸 알지만 바보처럼 생긴 수달 사진 보내며 형 이거 닮았어요 하는데 어떻게 답장을 안 해. 아니거든에 눈 찍찍 그으며 답장하는 쇼타로의 눈은 한껏 접혀 있었다. 눈떠 보니 약속도 잡아 버리고, 또 한 번 감았다 뜨니 성수역 4번 출구 앞에서 은석을 기다렸다.
"오늘 길에 차가 막혀서..."
"지하철이 어떻게 막혀?"
"안 통하네. 많이 기다렸어요?"
오늘의 장소는 또자카야. 쇼타로가 한 달 전 쯤 새로 생겼다고 찍어 보낸 그곳이다. 이른 저녁이라 사람이 많지 않아 들려오는 건 매장 음악으로 틀어 둔 제이팝, 두 테이블 남녀가 떠드는 소리, 그리고 은석의 형 먹고 싶은 거 시킬까요. 어? 나 아무거나 좋은데. 쇼타로가 메뉴를 고를 때 은석은 그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어디 하나 동글동글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머리도 동글동글 눈도 콧볼도 입술도 동글동글. 얼굴에 직선뿐인 은석이 거울을 볼 때 느낄 수 없는 곡선형의 얼굴. 전부터 귀엽다곤 생각했는데 하나하나 빼어 보니 푸흡 웃음 나오게 귀엽다. 유자 하이볼과 베이직 하이볼 중 뭘 고를지 고민하던 쇼타로가 ?? 왜 은석? 해서 시선 거두고 메뉴 고르라고 채근했다. 그리고 불쑥 꺼내는 질문 하나.
"형은 남자 좋아해 봤어요?"
푸학. 입에 대고 마시려던 물이 그대로 역주행했다. 술도 안 마셨는데 술이 다 깨네. 은석 너는 무슨 그런 질문을 이런 상황에.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되물으니 말 그대로요, 하곤 통일시켜 주문해 막 나온 유자 하이볼을 맛 봤다. 오오 맛있네. 짠도 안 하고 마시냐고 뭐라 하기엔 충격이 컸다. 혹시 티가 났나? 하지만 쇼타로는 결단코 은석을 좋아하는 티지 않(기 위해 노력함)았다고 생각했다.
먼저 연락하는 횟수나 만나잔 이야기를 줄였다.ㅡ대신 은석이 배로 횟수를 늘리는 바람에 똑같지만ㅡ 외에는... 뭐 귀여워 보여도 웃고 말거나 의도치 않게 얼굴 들이밀 땐 어엉? 하고 뒷걸음질 치고 은석이 뒤돌았을 때나 가슴 부여잡았지.
"그냥 궁금해서요."
쇼타로. 해맑아도 분위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눈치 하난 타고났다. 심상치 않은 은석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요 며칠 달고 살던 거짓말은 내려 놓을 타이밍이란 것. 그치만 약간은 자포자기인 심정으로. 나랑은 진짜 편한 사이구나. 오늘로 은석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아야겠구나.
"응. 좋아해."
"... 네?"
되게 고백 같이 말하는 바람에 둘 다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동공에 지진 온 쇼타로가 다급히 덧붙였다.
"... 아니 그니까 남자를 좋아, 좋아해 봤다는, 그런 거."
"연애 감정으로요?"
"응."
"그럼 연애도 해 봤어요?"
"... 응, 해 봤지."
오오...... 뭘 오오야.
물 흐르듯 한 커밍아웃인데도 평소의 은석 같았다. 워낙 세상사에 그러려니 하는 놈이니 예상은 했었다. 쇼타로는 괜히 고개 으쓱하며 짠, 제안했다. 아 너 빨리 마시지 마. 불현듯 지난 불상사가 떠오른 쇼타로가 잔 비우려는 은석을 제지했다.
"왜요? 지난번에 잘 들어갔어요, 저."
"은석 필름 아예 끊겼어?"
"그냥 형이 데려다 준 기억은 있는데."
"와아. 나 그날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 자꾸 나한테 기대고, 비밀번호도 다 틀리고. 집 다 데려다 줬는데 자고 가라고 해서,"
"......"
"어... 음...... 귀찮았다고."
상황 모면의 짠 한 번이 이루어졌다. 갑자기 짠? 어어 그냥 짠. 그날은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갔다. 그날이라면 또 다른 날이 있더냐? 예스.
한강 뭔 축제 한대요
오오 그렇구나
같이 가실?
따위로 하루를 통째로 함께 보낸다든가.
친구 생일 선물 사 줘야 하는데 머스크 향 잘 알아요, 형?
어? 나도 그 냄새 좋아해. 우디도.
저 향알못이라. 형이 같이 골라 주세요.
라는 이유핑계로 함께 시간을 보낸다든가.
보통 술집, 어쩌다 한 번 카페나 밥집이 전부였던 둘 사이에 멀쩡한 정신상태에서의 추억이 하나둘씩 남겨지고 있었다. 절대 편견이나 오해 그런 거 안 하고 싶던 쇼타로도 남자 좋아해 본 적 있냔 질문한 뒤로 부쩍 붙어 다녀 버리니 마음을 접기는 무슨 세모를 접은 다음 네모 두 번 접고 이렇게 저렇게 접은 후 하트 모양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마음속 쇼타로는 진짜 이러면 안 돼 함부로 오해하면 안 된다고! 라고 외쳤지만,
은석 이거 잘 어울린다.
이건 형이 잘 입고 다니는 스타일이지.
너도 잘 어울려. 예뻐.
친구끼리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합리화 돌리며 사심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헤어진 당일 밤 후회했다. 걔는 친구로 생각하고 있을 건데... 좋게 생각하면 아닐 수도 있다. 남자를 좋아하냔 질문, 어쩌면 은석도?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근래에 만날 때마다 은석의 폰 화면에 띄워지는 [채은지]만 보면 그 당일은 잠 못 이루는 새벽을 보냈다. 은석이 하던 폰게임을 나도 해 볼래, 하고 대신 받아 하던 중 뜬 메시지를 봐 버렸다. 은떠기 뭐 해~ 은떠기가 뭐지? 육성으로 말해 보니 은떠기였다. 그러니까 애교를 가득 담은 은석이.
가만 있다 은떠기 어택 당한 송은떠기는 본인 이름 혀 꼬여 잘못 말한 줄 알고 엥?형지금저한테애교부린거예요?은?떠기? 장난기 일 년 치 모았으나 쇼타로가 아니아니아니연락온거나도모르게읽은거야폰위에떠가지고그런거아니야악 하고 가슴팍에 폰을 휙. 상황은 수습됐으나 채은지 씨의 은떠기가 자꾸만 생각났다. 잊고자 할 때면 다음 약속에선 전화가 걸려 왔고 그냥 받으면 될 것을 지금 안 받아도 되는 전화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 왜인지 죄책감이 들었다. 은석을 마음에 들어하는 누군가에게서 허락받지 않고 은석을 빌린 기분. 그 기분은 EsFp 쇼타로를 다운되게 만들었다. 그래도 일단 닭꼬치는 먹고... 형 이것도 먹어요. 웅 아리가또... 은떠기아니공은석도 먹어. 형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요라는 말은 기 팍 죽은 쇼타로에게 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여느 때처럼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울 만큼, 술이 아닌 밥을 먹고 은석의 손엔 딸기라떼, 쇼타로는 가스활명수 빈 병을 들고 공원을 걸었다. 오늘도 빠지지 않고 채은지 씨에게선 전화가 왔다. 다른 날은 부재중 하나 뜨면 다신 전화 안 하는데 한 번 더 콜 오는 걸 보고 형 전화 하나만 받고 와도 돼요? 래서 보내 주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은석이 전화 받으러 나간 그새에 쇼타로는 주먹 꽉 쥐고 올라오는 감정을 절제했다. 나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현타 제대로 맞는 쇼타로는 통화 일 분 컷으로 끝낸 은석이 돌아온 줄도 모르고 멍하게 떨리는 제 주먹만 보았다. 더 상처받기 전에 그냥...... 형 왜 안 먹어요?
"입맛에 안 맞아?"
"응? 아냐. 속이 좀 안 좋아서."
어영부영 식사를 끝내고 잠시만 기다리라더니 편의점에서 사온 소화제를 쇼타로에게 건넸다. 하나는 지금 먹고요, 남은 건 집 가서. 아니면 지금 집 갈래요? 쇼타로를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 아니거든 오바왕 은석쿤. 걸으면 좀 나아질 것 같았는데 같이 있는 시간이 이제 부담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왼쪽을 힐끔 보면 지난주 코엑스에서 쇼타로가 예쁘다고 잘 어울린다고 했던 자켓을 걸치고 있는 은석이 묵묵히 걷고 있었다. 어으, 좀 쌀쌀한디. 형 안 추워요? 시선을 살짝 낮추고 마주치는 쇼타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 추어. 뭘 안 추워요. 입 얼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네. 속도 안 좋다면서 안 들어간다고 황소고집은. 안에 두터운 후드티 입었다면서 자신의 자켓을 벗어 쇼타로 어깨어 걸쳤다.
은석은 곧바로 걸음을 멈춘 쇼타로를 따라 속도를 줄이고 뒤를 돌아본다. 쇼타로는 우뚝 멈춰선 채로 곧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야야."
"네."
"나한테 이런 거 그만해."
"이런 게 뭐지."
나한테 진짜 왜 그러냐...... 은석이 걸쳐 준 자켓은 온기가 남아 따뜻했다. 이거 받아 입을 채은지 및 아무개가 부러워졌다. 이런 게 뭐긴 뭐야. 예쁘다고 칭찬한 옷 입고 만나러 오고, 자기가 더 춥게 입고 왔으면서 상대방한테 외투 입혀 주고, 시시때때로 연락하고 만나자고 하는 것도. 만나면 자꾸 웃어 주는 것도 그렇고 특히 이상한 플러팅 쳐서 사람 미치게 만드는 거.
그리고 그 여자랑 연락하는 것도.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을 해야 알겠지만서도 입술에 본드 붙인 것마냥 떼지지가 않았다. 입 여는 순간 우리 사이 완전 무너지겠지. 그러나 더이상 마음고생하기 싫었다. 고개 살짝 숙여 쇼타로가 입 열기만을 기다리던 은석과 눈을 마주쳤다. 회피는 싫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용기 내서 포기할 기회의 타이밍.
"채은지 씨가 누구야?"
"채은지요? 왜요 형도 알아요?"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너랑 전화하고 카톡한 분."
"대학 동기예요. 입사 관련해서 물어보길래,"
"만나?"
"뭘 만나... 형 설마 여친이냐고 묻는 거 아니죠."
알면서 왜 물어봐. 울컥했는데 티 안 내려고 고개 푹 숙이고 웅얼거렸다. 네 맞는데요라고 할 은석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만나냐니까."
"그냥 동기예요. 대학 친구."
"...그렇구나."
대답을 들어도 시원찮은 기분은 여전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풀죽은 정수리 보며 상황 파악 마친 한 아는 동생, 아니 연하남이 있다. 먼저 입사한 은석에게 정보 캐내랴 바쁜 은지가 요새 자주 연락한 건 맞는데 그런 식으로 오해할 만한 사이는 아니다. 동그란 머리통만 보여 주는 것 보면 많이 속상했음을 짐작했다. 내가 다른 사람과 연락하는 걸 속상해하는 쇼타로. 상대방은 지금 오해로 머리 아프고 속 쓰려 죽겠는데 왜 기분이 좋지. 어퍼컷 맞을 상황은 상상도 못 한 채 튀어나오는 웃음 꾹 참은 은석이 진지한 얼굴로 쇼타로 어깨 잡고 설명하려고 했다.
근데 있잖아 은석. 말문을 튼 쇼타로 입술에 눈길 맞추었다.
"너 그때 이자카야에서 한 질문 이후로 나한테 계속 잘해 주는 거."
"......"
"나한테 너무 안 좋아. 힘들어 솔직히."
"어떤 게 힘든데요. 말해 주세요 고칠게요."
"좋아한다고 헷갈리게 하는 행동만 하잖아."
"......그거는요,"
"우리 그만 볼래?"
이렇게 자주 보는 거. 내가 너한테 더 마음 생기기 전에 그만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자질구레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터 너를 좋아했으며 따위의 이야기. 어차피 오늘이 끝이잖아. 고백하고 나면 마음이 좀 가벼워질 것 같았는데 그러긴커녕 명치에 큰 게 얹힌 것마냥 무겁고 어지러웠다. 커다란 눈동자가 이런 자신을 보고 있어서라고 생각했다. 저기에서 벗어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근데 웬걸. 아니요, 들려 오는 세 글자에 뒷골이 당겼다.
"싫어요."
"허."
"계속 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거 너는 그냥 친구로써 하는 말이잖아. 듣는 사람 생각 안 해? 넌 나 같은 사람 본 적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런 말 계속 들으면."
오해해. 좋아한다고.
져 주는 게 몸에 배인 쇼타로도 자신이 지는 말만 것도 제 입으로 하자니 자존감 깎아내리는 기분이라 결국 눈가에 일렁이는 파도가 생겼다. 미안해요 형. 울려서 미안하다는 뜻인 줄도 모르고 이제 진짜 끝인 걸 실감하며 넘실대는 파도를 개방했다.
"근데요 형."
"......"
"모르는 것 같으면 알려 줘야죠."
형 같은 사람은 또 뭐예요? 그거 약간 차별적인 발언이에요. 소매 끝으로 눈물 꾹꾹 찍어 누르는데 이상한 말이나 내뱉고 송은석 진짜 최악이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오는 찰나 허리 감아 끌어안는 은석에 눈물도 뭣도 정지. 뚝. 귓가에 엄한 척 울리는 음성과 어색하게 토닥여 주는 행동 지금 상황과 참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런 거 하지 말라니까 싫다고 더 하는 송은석. 마지막까지 다정한 송은석.
"언제부터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는데요. 형만 일방향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뭐가."
"내가 매일같이 보러 오는 거 알면서 왜 마음고생해요."
"......"
"좋아한다고 말을 해야 알아요?"
으이그 쇼타로.
그럼 말을 해야 알,...... 어엉?
이게 뭔 소리야. 평소처럼 놀리는 말투길래 어떤 문장으로 고백하는 줄도 모르고 듣다가 눈 커진 쇼타로가 은석을 퍽 밀치며 품에서 떨어졌다. 아야야. 아니 무슨 소리야 너? 은석은 아픈 척 쇼맨십 좀 부리다 그 앞에 제대로 섰다. 떨리는 것 꾹 참고.
저도 형 없을 때 마음고생 깨나 했어서 아는데요. 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이렇게 꺼낼 줄 몰랐던 티 나게, 그래도 해야 할 말은 껴넣어서 완성되었다. 그럴 땐 얼굴 보니까 다 풀리더라고요. 속상한 거 안 풀리면 한 대 때리게 해 줄게요 그만 보자고 한 거 취소하고 계속 봐요. 저는 형이 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요 나만 좋아하는 줄...... 못 들을 거 들은 것같이 손바닥으로 입 가리고 경악하는 쇼타로 보고 마구 웃음을 터뜨렸다. 와 예상 진짜 진짜 못했어 이거는... 울먹이던 쇼타로는 없고 심장 터질 듯한 두근거림에 맥 못 추리는 쇼타로만 남았다. 아 안 받아 줄 거예요? 고백 최악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리액션에 또 까일까 봐 툴툴댔더니 주먹으로 어깨 부근을 툭 쳤다.
"한 대 때려도 된다고 했잖아."
"이걸 진짜 때리네."
"나 이런 기회 잘 안 놓쳐."
알아요 형 똑똑하잖아요. 쇼타로의 눈가에 미처 닦지 못한 자국 아프지 않게 슥슥 문질러 닦아 주었다. 어찌 됐든 울린 놈이 나쁜 놈이니 온신경이 우는 쇼타로에게 향했었으므로. 한바탕 치르고 난 공원은 조용하고, 새로 시작하는 커플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아 나 근데 너 옷으로 눈물 닦았는데 어떡하지. 손 뻗어 소매 보여 주면서 멜랑꼴리한 분위기를 애써 모면했다. 세탁해서 줄까? 이 정도로 뭔 세탁을 해요. 그러면서 보이는 장신구 가득한 쇼타로의 손. 은석은 가만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간신히 약지 손가락 끝을 살짝 잡았다.
형 반지 진짜 많이 끼네요.
응 좋아하니까.
여기 딱 커플링 자리 남겨 두면 되겠다.
으으. 은석 느끼해.
견디셔야지 뭐.
은석과 쇼타로는 다시 평소로 돌아왔다. 틱틱대는 것 닮아 한 마디도 안 지면서도 얼굴 보면 다 풀리는 안정과 애정이 확실해진 채로. 손잡고 걸음을 맞추는 귀여운 행동은 추가된 채로.
뒤늦게 모르면 알려 달라는 말이 떠오른다. 사랑을 어떻게 알려 달라는 건지 애도 아니고 뭐야. 약간 상기된 얼굴로 먼저 잡은 손 꼭 잡고 걷는 은석은 알려 주지 않아도 초장부터 잘하고 있어 보였다. 그냥 지금처럼만 하면 돼. 끈질긴 시선 느낀 은석이 쇼타로와 눈을 마주했다. 저절로 우러나오는 미소에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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