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수술 3번, 팔꿈치 한 번, 이번엔 발목 골절. 담담하게 이력을 읊어주는 의사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남자는 보라색 셔츠가 꽤 잘 어울렸다. 전에는 노란색도 입었던 것 같지만. 눈을 깜빡거리는 동안에도 남자는 찬찬히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2주는 결장이겠는데요. 남자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던 건 순간이었다. 너덧 번 들으면 퍽 익숙해질 말이었다. 결장이라니, 이젠 별로 무섭지도 않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남자도 그렇게 끄덕인다. 일단, 오늘은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성이 없이 고개를 까딱이고 나가려는데, 눈앞에 목발이 들이밀어 졌다.

“절대 휴식이라니까요.”

별말 없이 집어 들고 나서, 남자는 기어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뛰는 데 전혀 문제없을 겁니다.” 그다지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럼로우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발을 짚었다. 두 발로 들어왔다가, 절뚝거리며 세 발을 하고 나간다. 마치 패잔병 같다고 생각했다.




목덜미의 초상




1. 개를 줍다

정규리그 막바지 부상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다. 단장이 구단주로부터 직접적인 전화가 왔었다고 알려준 것도 충격적이었다. 언제나처럼 월드시리즈 우승이 목표니, 부상을 빨리 회복해달라는 부탁을 했다던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회복이야 얼마 걸리지 않을 테지만, 최근에 에러가 잦았다. 구단주인 알렉산더 피어스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었던 건지는 치워두고서라도. 단장이 직접 전화를 한 것도 만만치 않게 충격적인 일인 건 분명했다. 조만간 방출되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의례적인 안부를 묻는 목소리에 말이 굳어서 대답이 어려웠다. 발목에 뿌린 약이 입에 잔뜩 붙어있는 것 같았다. 나으라는 발목은 지지부진인데, 입술과 입술 사이에 새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떨어지질 않아서 눈에 띄게 말 수가 줄었다.

캡틴은 그걸 걱정하고 있었다. 가히 캡틴답다고 할 만했지만, 럼로우는 그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캡틴은 훈련에 열중해야 할 바쁜 사람이었다. 그쪽이야말로 엄청난 부상에서 재활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아무튼,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던 전화가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설명서라도 좀 나왔으면 싶었다. 아니면 경기 결과처럼 대략적인 평균이라도 좀 나오던가. 럼로우는 멀뚱히 액정에 찍힌 이름을 바라보며 뜸을 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벨 소리가 꽤 울리고 나서 받았더니. 전화를 끊을 뻔했다는 말이 먼저 들려왔다. 간지럽게 시작된 통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캡?”

-아니, 그냥 해 봤네.

캡틴은 별명이었다. 아메리칸리그에서 독보적인 승률을 지니고 있는 스티브 로저스의 목소리는 어디서 신뢰에 푹 담갔다가 빼낸 것처럼, 진중한 구석이 있었다. 뉴욕 쉴드에서 자랑하는 투수 중의 하나인 로저스를 다들 장난삼아 캡틴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클럽하우스의 절반 이상은 실제로 그를 정신적 지주처럼 생각하고 있는 게 경기 결과로 드러났다. 유독 로저스의 선발 등판 때만 떨어지는 에러 횟수와 비례하듯 치고 올라오는 안타, 홈런의 숫자가 그런 추측을 증명했고. 이제는 로저스의 별명이 캡틴이라는 걸 미국 국민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캡틴 로저스.

럼로우는 투수가 가져간 별명치고는 퍽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소리 내서 말하지는 않았다. 로저스의 계약 기간은 겨우 1년이 남아 있었다. 5년 계약 중에 3년을 재활로 날려 버리고, 쉴드에서 날아오르기 시작한 건 고작 1년째. 쉴드는 로저스와의 재계약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그가 떠나고 난 이후를 준비해야 했다. 럼로우는 그런 것들을 남의 일 구경하듯이 멀찍이 떨어져서 볼 수 있었다. 럼로우의 계약 기간이야 아직 3년이나 더 남아 있고, 사실 본인은 누구랑 짝을 맞춰서 마운드에 올라서든 상관이 없었다. 그저 오는 공을 잘 받고, 잘 보고. 잘 던져서 집만 잘 지키면 되니까. 그래서 더욱 로저스에게 의지하는 다른 팀원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걸지도 몰랐다. ‘트레이드되면 끝이지 뭘.’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얻어맞는 것도 맞는 거지만, 팀의 분위기를 다 망쳐놓을 게 분명했다. 말을 안 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까. 럼로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쉴드는 로저스를 영입한 이후로 분위기가 좋아졌다. 그건 아마, 로저스가 남자치고는 세심하게 사람들을 챙기는 탓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머리로 추측은 했었지만, 몸소 체험하게 되니 제법 어색했다. 럼로우는 보이지도 않을 전화 속 로저스를 향해서 어깨를 으쓱이며, 걱정 어린 말을 받았다.

“당분간은 시트웰과 바람피워도 용서해 드리죠.”

[바람이라니, …아. 시트웰이 다음 경기 때 대신 출장하는 건가?]

로저스가 실없는 말을 하면서 통화를 질질 끌고 있었다. 럼로우는 그를 어디까지 받아줘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서, 대충 떠들어 댔다. 당연히 시트웰이죠. 누구겠습니까. 의미 없는 웃음이 입안을 울렸다가 사라지고. 로저스는 머뭇거리면서 몸조리를 잘하라는 닭살 돋는 말을 던져 놓고, 뚝 전화를 끊었다. 실없는 통화였고, 낯간지럽기도 했다.

“…누가 들으면 애라도 낳은 줄 알겠네.”

부상은 일상인데, 굳이 이렇게 전화를 하지 않으면 속이 불편한 이 늙다리 같은 젊은 남자는 뭐로 만들어진 걸까. 럼로우는 그런 의문을 품은 채로 여전히 절뚝거렸다. 병원에서 아파트까지 어정쩡한 거리라서 걷기로 했던 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아파트는 보이지도 않았고, 쇼윈도에 비춰 보이는 다리를 절뚝이는 모습에 괜히 속이 불편해졌다. 목발은 지독하게 불편했다. 손을 억지로 발로 만들려고 들었으니 별수 없기도 했다. 불편하게도, 여전히 다리는 세 개고. 럼로우는 봉사활동을 갔다가 마주했던 병든 셰퍼드를 떠올렸다. 구조견으로 쓰이고 쓰이다, 퇴직한 늙은 개는 다리를 절뚝거렸다. 마지막 임무에서 크게 다쳤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 봉사한 덕분에 그 개는 늘그막에 좋은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 따위를 얻었지만, 심하게 부서진 다리는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했다. 젊음을 팔아 만든 노후라. 럼로우는 한참을 절뚝거리며 지친 개가 낮잠 자는 모습을 떠올리다가, 목발에 툭, 걸린 뭔가를 향해서 시선을 내렸다.

사람이 널브러져 있었다.

럼로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생각을 하다가 할렘가로 흘러들어 온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주변을 둘러봐도 익숙한 골목이고, 아파트가 바로 이 앞이었다. 럼로우의 시선이 다시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남자에게 닿았다. 후줄근한 브이넥 반소매는, 요즘 입기에는 좀 얇았고, 그마저도 바닥의 물웅덩이에 젖어서 남자의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혹시 재수 없게 시체를 발견한 건 아닐까 싶어서, 목발로 툭 쳐봤더니, 드러누운 남자가 번쩍 눈을 떠서, 목발을 잡아챘다. 순발력이라면 제법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럼로우는 순식간에 목발을 빼앗기고, 비틀거리다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남자의 몸을 적시고 있던 물웅덩이에 주저앉은 럼로우가 말없이 눈을 깜빡이는 동안에, 남자는 꽤 적대적인 표정을 하고서, 저가 빼앗은 목발을 살펴보다가, 럼로우에게 내밀었다.

럼로우는,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할 거로 생각했다. ‘미안.’ 이라던가, ‘실례했습니다.’ 혹은, ‘미안했수다.’ 라던가.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이상한 영국식 억양을 구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는 들었다가. 이내 아무런 말도 없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을 내미는 모양을 빤히 보고 있어야 했다.

“…나, 참.”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럼로우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뭔가 잘못했다는 건 아는 모양인데, 입이 무겁다. 럼로우는 문득 그가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딱히 대화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이, 럼로우의 그런 추측에 힘을 실었다. 럼로우는 더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남자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손은 시리도록 차가워서 잡는 순간 꼴사납게 몸이 움찔거렸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키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시린 손이 저를 꽉 잡아 일으키는 동안, 럼로우는 지저분해진 옷과,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목발을 겨드랑이 끼웠다. 엉덩이 쪽에서 구정물이 뚝뚝 떨어지며, 밝은색의 바지를 잔뜩 적셔 놓은 것도 생각보다 불쾌하지 않았다. 럼로우는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남자가 목발을 짚지 않은 자신의 오른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뭔가, 더 할 게 남았나, 싶어서 쳐다봤더니, 남자는 럼로우의 오른팔을 꽉 붙잡고 앞으로 당겼다. 부축이라도 해줄 모양이라, 럼로우는 가볍게 남자를 밀어냈다.

“됐어. 다리병신도 아니고, 그냥 골절일 뿐이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내가 먼저 건드렸던 것도 잘못이니까. 그냥 이걸로 퉁 치자고.”

럼로우의 말에도 남자는 팔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얇은 후드 아래로도 느껴지는 남자의 차가온 손에 럼로우는 괜히 어깨를 슬쩍 떨었다가 걸음을 옮겼다. 시험 삼아, 일부러 휘청거렸더니, 남자는 럼로우의 옆으로 딱 붙어서 럼로우의 허리까지 잡아 부축했다. 제 옆으로 바짝 끌어당겨서 세워주는 통에 걷기에는 수월할 것 같았지만, 미간이 슬쩍 찡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허우대 멀쩡한 자식이 왜 저러고 있었는지도 의문이었고. 어째서 자신을 도와주는 건지도 분명치 않았다. 혹여, 깁스한 다리와 목발이 남자의 동정심을 샀나 싶어서, 기분이 조금 가라앉으려는 찰나에 남자가 다시 럼로우를 끌어당기면서 아파트로 향했다.

몇 개 되지도 않는 계단을 오르면서 신중한 표정을 짓는 남자의 옆얼굴 밑으로, 목에 걸린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군번줄인 게 분명한 목걸이가 백열등 아래서 번쩍거리는 동안에도 남자는 착실하게 럼로우를 부축했다. 계단에 다 올라서고 나서, 이제 됐다는 식으로 다시 남자를 밀어내려고 손을 들었을 때. 남자의 축축한 옷이 럼로우의 손바닥에 닿았다. 그쯤에 가슴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손바닥 아래로 휘감기는 축축한 옷과 역시 별로 높지 않은 남자의 체온에 럼로우는 입을 다물었다. 이러고 밖에 더 있다가는 틀림없이 감기에 걸리거나, 탈이 날 거다. 관심을 둘 부분도 아니었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뻗치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감기도 내버려 두고 바닥에 나뒹굴다가 폐렴으로 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럼로우만큼이나, 남자도 가만히 있었다. 남자는 제 가슴팍에 놓인 럼로우의 손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밀어내면 밀려나겠다는 의사가 다분한 제법 누그러진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처음엔 조금 재수 없는 게 아닌가 싶었던 눈이, 이제는 좀 동그랗게 예뻐 보이기도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걸 내버려두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호의다. 착한 사마리안 같은. 럼로우는 남자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고갯짓을 했다.

“기왕 할 거면, 다 서비스를 해야지. 중간에 하다 마련 안 하느니만 못한 거라고. 그러게 호의는 아무렇게나 건네는 게 아니라니까.”

럼로우가 가볍게 끌어당기자, 남자가 럼로우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도, 럼로우가 밀어내지 않았더니, 남자는 럼로우의 곁에 붙어 있었다. 괜히 시선에 거슬리는 군번줄을 잡아챘을 때, 남자는 잠깐 럼로우는 쳐다보다가 다시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바뀌는 모양을 보고 있었다.

James Buchanan Barnes

럼로우는 적혀 있던 이름을 확인하고 다시 목발에 몸을 기대섰다가, 열리는 문 사이로 걸음을 내디뎠다. 착실하게 저를 따라오며 부축하는 남자는 어쩐지, 보호소에서 봤던 커다란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떠올리게 했고. 그 개는 성대가 망가져서 짖지 못했던 개였던 것 같다. 럼로우가 현관문을 열고서 남자를 쳐다봤다.

“들어오던가.”

남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럼로우는 자신이 지금 개를 주운 거라고 확신했다.


2. 개의 이름

럼로우는 발치에 주저앉아 있는 남자를 밀어냈다. 거치적거린다니까. 약간 타박하듯이 말해 봐도, 남자는 힐끗 올려다볼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기어이 괜히 주워왔다고 중얼거리고 나서야. 옆으로 조금 비켜 앉아서 길을 만들었다. 럼로우가 옆으로 스치듯이 지나가자, 남자가 손끝으로, 럼로우의 맨발을 훑었다. 그러면 럼로우는 남자의 손길이 다 떨어질 때까지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가 다시 걸음을 놀렸다.

이런 의미 없는 행동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실, 남자를 집으로 들인 것부터가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럼로우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털어냈다. 원래 뭘 하려던 거였는지도 잊은 채로, 주방에서 찬물을 한 컵 채워서 마시면서, 힐끗,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럼로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가만히 받아 주기에는 조금 과격한 데가 있었다. 눈으로 무슨 짓을 한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게, 시선이 너무 집요하면 받는 쪽은 불편해지는 게 당연하니까. 럼로우는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훔쳤다.

3일이 지나고 나서, 그에게 이름이 붙었다. 내내 ‘야’, ‘이봐’, ‘너’, 라고 부르다가 갑작스럽게 버키라고 불렀더니, 남자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찡그린 얼굴 같기도 했고. 평소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는 표정 같기도 했다. 다만, 눈빛이. 그냥 아무렇게나 부를 때와는 뭔가 달라서. 럼로우는 남자에게 붙여준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눈이 시선을 옭아매는 느낌에 사로잡혀서 의미 없이 집안을 서성거렸다.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야 한다던 닥터 배너의 말에 따르면 저런 시선에는 굴하지 말고 그냥 얌전히 앉아 있어야 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걸음을 옮겨가며 시선을 잘 피하다가도 어떤 때는 마치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남자를 피해서 뒤로 달려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도망치려는 본능인지, 오메가로서 가지는 기본적인 자기방어 본능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충동에 속이 울렁거림에도 불구하고 럼로우는 그에게 붙여준 이름을 고집스럽게 계속 불렀다. 군번줄에 찍혀 있던 것과는 다른, 이름을 멋대로 지어 붙였음에도 남자는 오히려, 익숙한 것처럼 럼로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버키.”

럼로우가 손을 까딱거리자, 버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원히 소파 밑에 있을 것처럼 앉아 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재빠르게 일어나서 럼로우의 곁으로 돌아오기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럼로우는 손을 들어서 버키의 머리로 가져갔다. 그냥… 이유를 모르겠다. 충동적이었다. 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던 것 같았다. 럼로우는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이고. 그렇게 하려다가, 버키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그리 차이 나지 않는 커다란 손이 손목을 휘어잡고 버티는 힘이 인상적이었다. 문득, 어깨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일종의 직업병 같은 것이기도 했다. 럼로우가 멀뚱히 그를 바라보는 사이에, 버키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손목을 놓아 주었다. 럼로우는 제 손목에 불긋하게 남은 자국을 바라보다가 버키에게 말했다.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거였어.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만….”

럼로우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싫다면 앞으로는 건들지 않겠다는 말을 하려다가 다시 손목을 붙잡혔다. 이번에는 훨씬 적은 힘으로 럼로우의 손목을 잡은 버키가, 럼로우의 손바닥에 제 뺨을 가져다 댔다.

“머리라니까, 뺨이 아니고.”

버키는 럼로우가 정정해 주는 대로 손을 옮기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런 일련의 모습들도 의미 없는 행동의 연장인 건지, 럼로우는 그런 생각 속에서 손을 떨어트렸다. 아마, 이것도 의미 없는 행동의 연장이었다. 그래야 했다.


3. 착한 사마리아인

의도를 의심하면, 호의는 점점 멀어져가기 마련이다. 럼로우는 그런 식으로 떨어졌던 사람들과 버키를 비교 했다. 버키는 이제 럼로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럼로우는 제 머리의 까칠까칠한 부분이 마음에 드는 건가 싶어서 집요하게 쓰다듬는 손길을 견뎠다.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거슬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좀 낯설었을 뿐.

럼로우도 나이가 제법 들었다.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 줬던 것은 까마득히 먼 옛날 일인 것처럼 느껴질 때다. 그 때문인지, 별로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저보다 더 크고, 어린 남자가 머리를 쓰다듬는다는 게. 남자의 자존심을 따져 들면 좀 짜증이 날 법하기도 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면 오히려 기분이 좋다던가, 대충 그런 말로 지금의 기분을 설명할 수 있었다. 퍽 이상한 일이다. 럼로우는 일단 자리에 앉았다. 아직 땀이 흠뻑 밴 옷을 입고 있었지만, 제 곁에 달라붙듯이 앉은 버키를 떨쳐낼 생각이 들지 않아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버키가 익숙하게 따라왔다. 딱, 럼로우만큼의 무게로 옆자리가 가라앉았다. 키는 훨씬 큰데 무게가 비슷하다면 버키가 가벼운 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얇은 티셔츠 너머로 제법 근육이 잘 잡혀 있는 걸 보았으니 걱정할 정도로 말랐다거나, 그런 건 아닌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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