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설원으로 좁고 깊은 발자국이 팬다. 고동빛 털 위로 눈발이 휘날린다. 화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녀석은, 다행히도 냉혹한 추위에 잘 견뎌주었다. 누구든 제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발사되는 우주선처럼 튀어나갈 준비를 마친 네발짐승은 이제 목재식 문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오랜 주인이 저 안에 있었다.


"..너는 살면서 즐거웠던 적이 있냐?"


시선도 주지 않고 껌뱉듯 툭 내뱉어진 질문에, 락은 잠시동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고민했다. 실은 웃고 싶었다. 이 먼 데까지 찾아와서 고작 묻는다는 질문이 그렇게 시시해빠진 거라면, 대놓고 비웃어도 괜찮지 않을까. 좌우지간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지만, 어쩌면 이렇게 변한 게 없을까. 그동안에 살은 더 빠졌고, 주름도 더 늘었으며.....나이도 더 먹었겠지. 조원호도 늙는구나. 이빨은 다 빠졌고, 부리부리한 눈엔 얼핏 눈물이 괴여 있는 것도 같다.


"제 이름이 락樂이잖아요. 아시면서."

"넌 왜 나를 믿었냐."

"질문 타임이에요? 퀴즈쇼? 아님 토크? 커피 다 식는데.... 최고급 원두란 말이에요."

"서영락."

"탁자에 총 올려두고 하는 질문치고는 너무 시시하잖아요. 이제와서 날 믿었냐, 왜 믿었냐 그런 게 중요해요?"

"……."

"그럼 형사님은 왜 절 믿으셨는데요?"


긴 하울링이 배경음처럼 끼어들었다. 타닥이며 타오르는 장작과 묘한 어울림을 생성하며 산등성이 곳곳에 퍼져나간다. 높게 쌓인 눈밭이 또다시 새카만 족적으로 뭉그러질 참이다.

기껏 비싼 커피 대령해놨더니 한 모금도 마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원호를 두고, 락이 먼저 찻잔을 들었다. 오늘 새벽녘만 해도 이런 재회는 기대하지 않았다. 언젠가 저를 찾으러 오겠거니, 살면서 한 번은 다시 마주하겠거니 대강 짐작만 했을 뿐이다. 말마따나 길 가다 마주쳐도 안녕할 사이는 못되니까. 자고로 서영락에게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길 가다 마주칠 일이 없도록 애저녁에 깔끔히 정리가 되었다. 조원호 역시 '그런 부류'에 속한 건 마찬가지였다. 근데 왜 정리가 안 될까.


"....그게 형사님 실수예요. 날 믿은 거. 그리고 내가 형사님을 믿도록 내버려 둔 거. 하나도 아니고 두 가지나."

"……."

"그러니까 지지."


산미酸味가 남은 혀끝으로 입안을 훑는다.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남은 이빨이라도 드러내어 겁박을 한다든가, 당장이라도 이마에 총구 들이대고 질질 짜거나 할 줄 알았는데. 

대한민국의 형사들은 이게 문제야. 대단히 감성적이고 착해빠진 놈들을 형사로 선발한다는 거. 그러니 번번이 당하고 부서지는 거다. 최소한 인간 쓰레기를 상대하려면, 본인 역시 오물에서 진탕 굴러먹은 쓰레기인 척이라도 할 필요가 있는데 조원호는 그러지 않았던 거다.

왜 섣불리 믿었어. 안 믿는 척, 경계하는 눈초리부터가 '나는 너를 믿고 싶다'는 얘길 돌려서 하는 거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하나의 진실만 말해줬을 뿐인데, 남은 아홉 가지도 진실일 거라 덥썩 믿어버린다. 그럼으로써 선량하고 진실한 본인도 함께 드러내는 거다.


"당신네들은 고작 눈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수갑을 풀어주고, 밥을 먹이고. 조금만 어르고 달래면 다 되는 줄 알아. 그 안일하고 틀려먹은 신념이 동료를 죽이고,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는데도.... 그런데도 그 착해빠진 유전자는 바뀔 생각조차 없지."

"서영락."

"씨발, 그 좆같은 이름 좀 그만 부릅시다 예?"

"....이번엔 네가 졌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산미를 훌륭하게 즐길 수 있는 뜨뜻한 예가체프Yirgacheffe 커피가 영락의 상반신으로 쏟아지고, 탁자 위 올려두었던 권총을 손쓸 틈도 없이 빼앗기고 만다. 장전까지 된 권총의 총구가 조원호의 관자놀이에 딱 붙어 겨냥되고…


"안ㄷ..!!"


…막 울린 참이다.




.
.


"..괜찮냐?"

"뭐가요."

"새끼, 말하는 뽄새하고는."

"……."

"..총 말이야. 그렇게 딱 붙어서 쏘면 네가 다쳐. 반대손 끝으로 손목을 잡고 쏴라. 그래야 안 다쳐. 반동도 덜 하고."

"……."

"어떤 새끼한테 배웠는지는 몰라도, 아주 드-럽게 못가르쳤다."


락은 조원호의 실수를 곱씹어본다. 이건 당신의 세 번째 실수였을까. 아니면 내 첫번째 실수였을까. 이제와 복기하는 건 아무 소용없는 짓임을 안다. 결국은, 살면서 즐거웠던 적이 없는 즐거운 이의 비극적인 패배로 남을 것 또한, 알고 있다.

새하얀 설원이 핏빛으로 물든다. 창가 드리운 라이카의 그림자가 분명치 않다.





독전 보고 진짜 짧게~~~ 간만에 영화관 갔스니카 감상도 남겨볼 겸,,,,,,,,,,,,ㅎ1ㅎ1

락이 나중에 혹시나 하구 살펴본 원호 권총은 장전은커녕 총알도 업는 상태엿스면,,,,,,ㅎㅎ(빠-워앵슷

연성나라

댜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