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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

 

 

 

오이카와는 넋이 나간 채 불에 타고 있는 제집만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불길이 거세지면서 주위에서는 소리를 질러댔지만, 오이카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가서 이것 좀 사 오너라. 옆에 있는 시종에게도 아니고, 제게 뜬금없이 심부름을 시키는 어머니의 행동이 조금 의아했지만, 나간 김에 놀다 오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이와이즈미의 손을 잡고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이와이즈미와는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사는 만큼 마음도 잘 맞아서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오늘도 양껏 돌아다니다 뒤늦게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불길이 번져 제 부모와 식솔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노느라 조금 지체한 덕분에, 자신은 간신히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인 걸까.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적어도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었을 텐데.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던 어머니는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라 하겠지. 그렇기에 어머니는 저를 보냈을 터였다.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권력인데, 의미도 없는 가문을 잇는 것이 중요할까? 타오르는 집과 흩날리는 재만을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실없는 생각만 했다. 권력의 위세를 나타내듯 드높았던 집은 형태도 없이 사라져 갔고, 제 부모와 식솔을 잡아먹은 불길이 사그라지지 않고 점점 커져만 간다.


여기 계속 있으면 관료들이 눈치챌 거야. 옆에 있던 이와이즈미가 먼저 정신을 다잡고 오이카와를 일으켜 세웠다. 오이카와의 부모님은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심부름을 시킴으로써 오이카와와 자신을 대피시키려 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마지막 가는 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린 집을 향해 인사하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이와이즈미는 생각했다.


살려주신 만큼, 마지막까지 오이카와만은 지키겠습니다.


나이 어린 아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그나마도 위험한 시국에, 낯선 이들을 받아주지 않을 것을 영민한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또한, 만약 들어가게 된다 해도 잠시는 살 수 있을지언정, 저들 때문에 그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았다.


끝없이 달리다 들어간 곳은 근방에서도 유명한 유곽. 나이 어린 아이들이라도 이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던 곳이다. 짧은 새, 그들이 살 수 있는 곳은 관료들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이 유곽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던 건, 살아야 한다는 본능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지 같은 것들이 어딜 들어오냐고 말하는 기사들에게 그들은 매달렸다. 본능적으로 오이카와의 이름을 함부로 말할 수 없던 이와이즈미는 옆에 있는 녀석만이라도 살려 달라 말했고, 이와이즈미를 보던 오이카와는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던 포주를 알아보고 그에게 달려갔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를 살게만 해준다면 모든 걸 바치겠다 말했다. 하잘것없는 아이들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포주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뭘 바치려고? 네 몸이라도 팔 거냐?”


저들의 긴박함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느긋하게 곰방대를 물며 내뱉은 포주의 말에 이와이즈미는 발끈했지만, 어차피 몰락한 인생 뭐가 두렵겠냐는 눈빛으로 이와이즈미를 바라봤다.


“별 볼 것 없는 몸이지만, 꽤 유용하게 쓰일 겁니다. 이 녀석은 보시다시피 얌전하질 못하나, 몸 쓰는 일에는 뛰어나니 기사로 쓰심이 어떨는지요.”


오이카와는 귀족 자제임에도 수그릴 줄 알았으며, 상대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데에는 훌륭했고, 내성적이지만 어른들은 종종 그의 말솜씨에는 혀를 내두르곤 했다. 장성한 뒤 궁에 들어간다 해도 걱정 없겠습니다. 평화로웠던 어느 날, 주변 어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를 칭찬했다. 그것이 이런 식으로 도움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지만.


“좋다. 그럼 네 이름이 무엇이냐?”

“ㅌ… 타케루라고 합니다.”


행여 누군가가 오이카와 가의 막내아들이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길에 휩싸여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제 조카의 이름을 빌렸다.


물론 포주는 믿지 못하는 듯했지만, 한낱 이름이 뭐 중하겠냐며 그들을 받아들였다. 서로밖에 없다는 듯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최근 시끄러우니 당분간은 여기서 조용히 있으라고 말하고는 두 사람에게 한 방을 내어주었다.


식솔들과 웃으며 농담하던 때는 어디 가고, 어머니의 심부름에 집을 나왔다 돌아오니 불타는 집이 자신을 반기다 못해, 이제는 연이 없을 줄 같았던 유곽에 제 몸을 맡겼다. 오이카와는 이 모든 게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너 미쳤어? 네가 왜 몸을 팔아!”

“그러는 이와쨩이야말로 왜 함부로 죽으려고 해? 같이 살기 위해서 여기 들어온 거 아니었어?”

“그건…! 아무리 그래도 너는 귀족이잖아!”

“어차피 몰락했는데 뭐가 중요해. 다음부터 이와쨩 목숨 함부로 내놓으면…, 오이카와 씨도 따라 죽을 거야.”


이제 오이카와 씨한테는 이와쨩밖에 없단 말이야. 아 오이카와도 아니지 이젠….


처연하게 말하는 오이카와를 보며, 이와이즈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지키겠습니다. 집을 떠나기 전 한 다짐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이와이즈미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가문의 크기치고눈 검소하게 자란 편이라 해도, 어려서부터 남부러울 것 없이 먹고 자란 오이카와가 텃세 심한 유곽에서 적응하기는 조금 힘든 일이었지만, 예의 천성으로 남들과 어울려 제 자리를 잡아갔다.


요리하는 사람들에게 배시시 웃으며 다가가 몰래 음식을 받아오기도 했고, 오가는 귀족들 근처를 맴돌며 아양을 떨어 동전 한 닢을 받아 오기도 했다.

 

오이카와의 제안으로 기사 준비를 하고 있는 이와이즈미와 유곽에 그나마 있는 인정만이 오이카와가 살아가는 원동력이었다.






<春>

 

 

 

 

불타오르던 날을 뒤로 시간은 흐르고, 이와이즈미는 아무나 무시하지 못할 기사가 되었고, 오이카와는 근방에서 모르는 이 없는 기생이 되었다. 글을 쓰지는 못해도 명석했고, 말수는 적었지만 해야 할 말은 할 줄 알았으며, 얌전한 듯 보여도 제 이익은 알뜰하게 챙겼다. 또한, 귀족이었던 세월 특유의 고급진 말투와 빠른 눈치로 저를 찾아온 귀족 자제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맞게 행동했기에, 그들은 가끔 오이카와를 정보통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가진 것 없어 어쩔 수 없이 몸을 팔아야 했지만, 유곽에서의 위치를 천천히 쌓은 후부터는 기생의 신분으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간혹 오이카와를 무시하거나 어떻게든 해보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언제나 옆에서 이와이즈미가 제재를 했기 때문에. 그가 있는 곳에서는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성장기의 오이카와는 어느 순간 갑자기 자라 모두의 관심과 이와이즈미의 걱정을 샀지만, 오히려 그것은 위로 치고 올라가지 못하는 양반들의 가학 심을 부추겼고, 어릴 때부터 여자처럼 꾸며놓은 외모는 높으신 양반들에게도 인기 있는 것이라, 오이카와를 찾는 사람은 줄지 않고 오히려 급증했다.


잘 타지 않는 오이카와의 하얀 피부도 그가 유명해지는 데에 한몫했다.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새빨간 유카타는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하기에 충분했다. 포주는 언제나 오이카와에게 새빨간 유카타를 입은 자신의 눈을 높이 샀다.


“이와쨩도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면, 오이카와 씨가 아름답기는 한가 봐.”


남자로서 몸 파는 인생, 성한 곳이 없었으나 이와이즈미는 항상 오이카와의 몸에서 빛이 난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의 말에 그런 게 아니라며 부정할 필요도 없다. 서로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제 이름을 일부러 말하고 싶어서 하는 농담일 뿐이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와 둘이 있을 때는 꼭 자신을 삼인칭으로 칭했다. ‘토오루’라는 이름은 잃더라도 제 가문만큼은 잊지 않겠다는 듯이. 이와이즈미도 그의 의지를 받아, 둘이 있을 때는 꼭 오이카와라고 불렀다.


“타케루, 지명 들어왔어.”

“응. 나갈게.”

“그런데 너 진짜 이름이 타케루가 맞아? 타케루는 뭔가 너랑은 안 어울리는데.”

“왜 또 남의 이름 가지고 시비실까? 잘나신 도련님께서는 보잘것없는 기생에게 관심 끄는 편이 좋다고 말했을 텐데.”

“뭐. 이름도 없는 무명화가 인기가 많은 게 신기해서.”


오이카와가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지만, 길을 막던 사내는 어깨만 으쓱이고는 자리를 비켰다.




포주의 아들인 마츠카와 잇세이는 그를 신기해했다. 어머니가 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제 또래의 두 사람에게는 흥미가 있었다. 돈이 되는 게 아니라면 관심도 두지 않는 어머니의 눈에 들어와 결국 유곽의 중심을 꿰찬 두 사람. 사람들 사이에서 잘도 어울리면서, 비밀로 가득 찬 두 사람이 마츠카와는 궁금했다.


타케루라 소개한 소년은 일할 때만큼은 절대 제 이름을 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건방지다 말했지만, 그때부터 커지고 있던 오이카와의 영향력에 할 수 없이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옆에 있던 이와이즈미의 표정이 참담했던 기억이라, 서로가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인가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하찮은 인생의 이름이 뭐 그리 중하겠습니까. 소인은 그저 어르신이 부르는 이름대로 따를 뿐입니다. 연모하는 여인이든, 사내든. 혹은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이든. 그 무엇도 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름을 물어보면 돌아오는 오이카와의 말버릇은 유곽에서도 유명했다. 처음엔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것이 건방지다며 때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언젠가 한 번 술자리에서 높으신 분이 오히려 그게 신비하다 칭찬한 이후로 오이카와는 이름 없는 꽃이라 하여 무명화(無名花)로 유명해졌다. 그 이름의 유명세가 올라갈수록 오이카와의 이름을 물어보는 이는 극히 감소했다.


어떻게 해도 주목되는 이목에 오이카와는 조소했다. 어쩔 수 없이 빌려 쓰고 있는 조카의 이름을 일할 때마저 더럽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는데.

 



“못 보던 사람이 늘었네?”


마츠카와와는 다르게, 매사에 관심이 많은 하나마키 타카히로가 유곽 안을 기웃거리며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유곽에 자금줄인 상인 중에서도 마츠카와와 유일하게 친한 사람이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소문을 물어다주곤 하는데 또 그 무게만큼 입도 무거워서, 마츠카와는 그에게 뜬금없이 나타난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귀족 집안도 상대했던 하나마키는 처음 오이카와를 봤을 때 낯익은 기분이 들어 아는 체를 했지만, 성 없이 제 이름만을 밝히는 오이카와에 제가 아는 것을 함구했다.


“맛키는 내가 누군지 아는 거지?”

“오, 나는 영원히 모른 척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뭐,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래도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정보상은 입이 무거워야 하거든.”


하나마키가 무언가 눈치채고 있다는 걸 알아챈 오이카와는 그에게 승부수를 던졌다. 위험한 짓 좀 하지 말라며 이와이즈미가 말렸으나, 오이카와는 정체를 숨기는 사람치고 너무 대담했고, 이와이즈미는 경계가 심했지만 오이카와의 고집을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나마키는 무얼 믿고 숨기고 있는 정체를 드러내는 오이카와의 대담함에 놀라고 제 일인 양 잡아먹을 듯 쳐다보는 이와이즈미에 당황했지만, 남의 인생사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었다.


입이 무겁다는 말과 정체를 알고 있음에도 아무 말 않던 하나마키의 행동에 안심한 오이카와는 처음으로 유곽의 사람이 아닌 외부인에게 경계심을 풀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정체를 저 이외의 다른 사람이 안다는 사실에 조금 후련해진 덕에 하나마키와 종종 회포를 풀기도 했다. 마츠카와는 비록 저만 모르는 사실이 있다는 게 조금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에 조바심을 내지는 않았다.

 



“혹시 15살 쯤 되는 소년을 본 적 있습니까?”


어느 날, 관료들이 찾아왔다. 오래전 역모로 몰렸던 가문의 사람이 살아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는 이유였다. 마츠카와는 또 한바탕 시끄럽겠다 싶어서 일찍이 방으로 들어서던 길, 평소와는 다른 두 사람의 분위기에 발걸음을 멈췄다. 기생주제에 언제나 꼿꼿하던 오이카와의 몸은 하염없이 떨고 있었고, 최고의 무사가 됐다고는 하나 부드러운 기색이 남아있던 이와이즈미는 칼 손잡이에 손을 뻗고 있었다. 여차하면 배겠다는 듯.


마츠카와는 뱀 같은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관료들이 유곽에 찾아온 이유가 저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 두 사람을 관료들에게 넘길지, 아니면 모른 체하고 숨겨줘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여기는 찾으시는 분이 없는 듯합니다. 애초에 그런 수상한 사람이 있었다면 어머니가 바로 보냈겠죠.”


결국 호기심이 이겼다. 두 사람이 안쓰럽다기보다는 제 곁에 두고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어머니가 잠시 일로 유곽을 비운 점이었다. 그녀가 돈이 되는 오이카와를 관료들에게 보내지는 않겠지만, 이 이야기를 약점으로 삼아 오이카와를 어떻게 굴릴지는 그의 아들인 마츠카와가 모를 리가 없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마츠카와의 성숙한 분위기에 관료들은 주춤했다. 게다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포주의 영역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관료들도 포기하고 돌아섰다. 관료들이 나가고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수습하고 나서야 두 사람을 마주했다.


위험에서 도와준 사람에게 보내는 눈빛치고는 두 사람은 경계가 심했다. 정체를 숨겨준 이유가 따로 있을 거라는 생각이겠지. 그게 또 틀린 생각도 아니라서 굳이 해명하지 않고 그 길로 발을 돌렸다.




“오래전에 오이카와 가문이라고 역모죄로 몰렸던 가문이 있었거든. 뭐 늘 있는 권력 뒤집기 같은 거겠지. 그 일과 관련된 다른 가문들은 죄 몰살했는데, 그 가문에서만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나 봐. 아들인지 한낱 식솔인지는 모르겠지만.”


유곽에서의 일을 설명하니, 고민하던 하나마키도 그제야 아는 것을 털어놓았다. 두 사람에게는 비밀로 한다고는 했으나, 유곽에서 벌어진 일을 유곽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마츠카와에게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나마키도 오이카와의 정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도 아니었기에, 어렴풋이 던져두기만 했다.


하나마키에게 이야기를 들은 마츠카와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이 맞는다면 분명 ‘타케루’가 오이카와 가문임은 확실한데. 궁금증을 풀기에는 관료들이 찾아온 지금이 적합한 시기였다. 그가 오이카와 가문에서 어떤 구성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이카와라는 단어에는 민감할 테니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마츠카와는 며칠 동안 그의 앞에서 일부러 오이카와의 이야기를 꺼내 봤지만, 반응이 없는 것에 금세 질려 포기했다.


마츠카와가 더는 이상을 두지 않는 것을 본 이와이즈미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눈치가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건드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마츠카와가 눈치가 빠르더라도, ‘타케루’가 오이카와의 이름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했다는 사실과 살며시 떨리던 오이카와의 손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夏>

 

 

 

“타케루 씨! 어떻게 하면 선배처럼 유명해질 수 있습니까?”

“아 정말! 나는 네 선배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최근 오이카와에게는 큰 골칫덩이가 두 개 생겼다. 하나는 지금도 졸졸 뒤쫓아 오는 카게야마 토비오. 오이카와를 시작으로 남자아이의 가능성을 본 포주가 데리고 있는 아이 중 하나였다.


성인만 받던 포주는 결국 어린아이에게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배고픔에 굶주리고 유곽의 더러움을 모르는 아이들은 포주의 달콤한 말로도 충분히 속이기 쉬웠으며,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다루기도 쉬운 생물이었다. 유곽의 기사들이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잡아 오면, 포주는 그중에서 돈이 될 만한 아이들을 뽑아 두고 교육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카게야마는 돈을 많이 벌고 나가서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하고 싶은 게 뭔데? 옆에 있던 이와이즈미는 기특하다는 듯 물었지만, 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턱도 없는 소리. 돈이 모였다고 쉽게 나갈 수도, 이 근방을 꽉 잡고 있는 포주에게서 도망갈 수도 없는 게 현 기생들의 처지다. 운이 좋아 주인을 맞는다면 모를까, 하물며 그 주인도 정상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현실도 모르는 어린아이라며 비웃고 싶었지만, 순수한 그의 꿈을 마냥 짓밟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저와 같은 길로 오는 건 더욱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그가 상처받지 않는 선에서 내쳤지만, 기사로 전향됐으면서도 카게야마는 언제나 졸졸 따라다녔다. 심한 말을 해야 한다면 할 수도 있었지만, 못했던 이유는 꿈이 가득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이카와의 골칫덩이 중 또 하나는 이름 모를 남자. 첫날 이름을 물어보기에 언제나 그렇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더니, 그 이후로 매일같이 오이카와를 지명했다. 처음에는 이름이 궁금해서 그러는 건가 싶었지만, 남자는 지명까지 해놓고선 오이카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조금 의아하기는 해도, 오이카와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돈은 돈대로 받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신한테는 좋은 일이니까.


언제나 재수 없어 보이는 시종 하나만 달랑 달고 오는 남자가 만만치 않은 가문의 자제라는 것은 걸치고 있는 의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가 어느 댁의 자제인지는 알지 못했다. 과묵하긴 해도, 그 정도의 외모와 예의를 갖춘 사람이라면 웬만한 귀족들 사이에서 연을 맺기 위해 시끄러울 텐데.


초반의 며칠 동안, 남자의 옆에 있던 시종이 오이카와를 향해 대놓고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고는 했었다. 그런 시선쯤은 익숙한 것이라 오이카와는 무시했지만,—오히려 그를 열 받게 하기 위해 그의 주인에게 일부러 들러붙은 적도 더러 있었다.— 언젠가 남자는 오이카와의 앞에서 그를 꾸짖고는, 오이카와에게 사과하기를 요구했다.


‘유곽에 있다 해도, 그도 인격 있는 사람이다. 무시하지 마라.’


높으신 양반이 한낱 기생을 도와준 적도 처음이었다. 첫날 이름을 물어본 이후로 처음 들은 말이 저를 위함이라, 오이카와는 처음으로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지만 제게 호기심은 가져선 안 될 것 중 하나였기에 조용히 묻기로 했다.






<秋>

 

 

 

그렇게 또 몇 년. 유곽에서 안주하던 오이카와는 위험을 감지했다. 본래 눈치가 빨랐던 오이카와가 유곽에 있으면서 늘게 된 기술 중 하나는 엿듣기였다. 그렇게 엿들어 얻은 정보를 조합한 결과, 저를 꼬박 찾아온 사내가 현 황제의 아들임을 알아냈다. 살고 있는 나라의 황태자를 어떻게 모를 수 있나 싶지만, 그가 어리기도 했고 현 황제가 정정했기에, 궁에 있지 않은 백성들은 정식으로 물려받지 않은 황태자의 외모를 알지 못했다.


물론 그가 황태자라는 이유만으로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절대 오이카와에게 해를 가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몸에 손을 아예 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남들처럼 험하게 대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위험에 처한 오이카와를 구해준 적이 더러 있었다.


위험함을 감지한 이유는 최근 드나드는 관료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만 보면 달라지는 눈빛에, 오이카와는 그들이 저를 찾아왔다는 걸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오이카와 가의 막내아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아니면…,


‘요새 폐하께서도 무명화한테 관심 두신다며?’

‘아무리 황족이라도 아비나 아들이나 똑같다는 거겠지. 황태자 폐하가 드나들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무명화라는 기생에게 흥미를 느낀 건지. 황태자라는 높은 위치의 사람이 관심을 가진 것만도 위험한데. 이러다 황궁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유곽을 탈출하겠다는 오랜 계획이 물거품이 될 거다.


돈을 많이 벌어서 유곽을 나가는 게 꿈이라던 카게야마를 속으로 비웃었지만, 사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 역시 그 꿈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마냥 쉽지 않은 현실을 알아서 카게야마를 안타까웠을 뿐이었다.


“이와쨩, 계획을 수정하자.”

“왜? 이제 조금 남았잖아. 이제 곧 너도 성인이,”

“황제가 나한테 관심 있는 것 같아. 잘못했다가는 유곽이 아니라 아예 나올 수도 없는 곳으로 가게 될지도 몰라.”


오이카와는 급한 마음에 이와이즈미의 말을 끊었다. 애써 말하지 않아도 ‘아예 나올 수 없는 곳’이 어디를 뜻하는지 알아챈 이와이즈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는데.


오랜 시간에 걸쳐 유곽에서 뛰어난 기사가 된 이와이즈미는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지만, 정작 기사를 혐오했다. 철없던 어린 시절 그저 유곽의 치안과 기생만 지키면 되는 줄 알았던 기사는 마냥 좋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망가는 기생들을 잡거나, 아니면 포주가 원하는 아이들을 잡아 오거나. 기사가 된 이후로도 일이 하기 싫어 우는 아이들을 보며, 놓아주지도 못하는 자신이 얼마나 역겹고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그토록 혐오하면서도 기사가 된 이유는 단지 오이카와를 지키기 위함뿐만 아니라, 기사로 있어야만 정보를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이카와가 성년이 되면 합법적으로 기방을 나갈 방법을 알려준 사람은 하나마키였는데, 그가 아무리 저들의 편이라고 해도 유곽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쉽게 알려주지 않았을 터였다. 게다가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포주의 아래에 얌전히 있어야 했으며, 제가 있을 수 있는 방법은 기사가 되는 것밖에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기사가 됐을 뿐이다.


내가 준비할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있어. 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하는 오이카와를 위해 위로해줄 말은 탈출뿐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직업을 혐오하면서도, 오이카와가 성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괜찮아. 어차피 맛키가 알려준 방법이 합법이라고 해도 포주가 얌전히 놔줄 리 없다는 거, 이와쨩도 알고 있었잖아. 계획을 조금 앞당길 뿐이라고 생각하자.”


오이카와의 말처럼 포주가 쉽게 놓아줄 리 없었기에, 방법을 하나만 준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되도록 도망 비슷한 방법보다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오이카와를 해방해주고 싶었다. 받지 않아도 될 갖은 수모를 겪고도 버틴 이유가 뭔데. 온갖 것을 착취당하면서 버틴 지 자그마치 10년이었다.


묶인 사람은 자신이면서, 위로하기 바쁜 오이카와를 이와이즈미가 말없이 쳐다봤다.

 

“그래서 그런데 이와쨩…. 날 도와줄 생각 있어?”

 

비록 방법은 달라졌지만 이와이즈미가 원하던 것은 단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널 이용해도 괜찮아?”

“난 그러기 위해서 기사가 된 거야.”

 

오이카와를 탈출시켜야 한다.






<冬>

 

 

계획은 단순했다. 오래전, 포주의 인정을 받아 외출을 허락받은 이와이즈미가 밖을 드나들면서 물색해뒀던 나라로 향하는 배로만 가면 된다. 오랫동안 일하면서 서로 벌어둔 돈으로 배도 이미 준비해뒀다. 준비만 보면 완벽했다.


감시가 엄해서 유곽을 나가 얼마 안 돼서 들키겠지만, 쫓아오는 기사들을 뚫기만 한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비록 어느 누가 저들을 잡으러 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짜 매번 느끼지만, 간도 커.”


그렇다고 해도 처음부터 포주의 아들인 마츠카와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마츠카와가 제 부모에게 정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혈육이었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뭐, 유곽에서 사람 만나면서 눈칫밥 생긴 게 너만은 아니거든. 너희 둘 다 긴장한 모습이 뻔히 보이던데.”

“…막을 거야?”

“글쎄.”


문을 막고 있던 마츠카와는 어깨만 으쓱였다. 이쪽은 사활이 걸렸는데. 그냥 뚫고 지나가? 성격 급한 이와이즈미가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지만, 오이카와는 그를 막고 마츠카와만 쳐다봤다. 잠시간의 대치 끝에, 마츠카와 쪽이 먼저 길을 열었다.


“미리 말하는데, 내가 지금 안 막아도 어머니는 바로 알아차릴 거야. 나도 알아차린 긴장감을 어머니가 모를 리가 없잖아.”

“괜찮아.”

“그래서. 어디로 가게?”

“…나중에 알려줄게. 꼭.”


무사히 도착한다면. 잇지 않아도 뒷말이 무엇인지는 세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 일상이 거짓인 네 말은 딱히 믿어지지 않지만.”


방을 나서는 두 사람을 보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마츠카와에, 오이카와가 갑자기 발을 멈췄다. 뭐 해. 불이 없는 지금 가야 해. 예상치 못한 마츠카와의 등장으로 시간이 지체돼, 조급한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부추겼다.


“오이카와 토오루.”

“?”

“붙잡지 않아 줘서 주는 선물이야. 고마워.”


고작 이름 하나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선물로 주는지. 하지만 마츠카와는 그 이름을 반복해서 발음했다. 그를 만나고 오랜 시간 동안 품어왔던 궁금증을 드디어 해결할 수 있음에 후련했다. 역시 오이카와 가문의 사람이었군. 그렇다면 이름을 불렀을 때 그렇게까지 모른 척할 수가 있을까. 마츠카와는 새삼 오이카와의 집념에 감탄했다.


“역시 거짓말이었잖아.”


뭐, 타케루보다는 어울리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들이 사라진 곳만을 쳐다봤다. 어디까지 도망치는지 지켜봐 줄게. 벌써 제 어미가 입혀둔 새빨간 유카타가 아른거렸다.

 



 



예상치 못한 마츠카와의 등장에 시간이 조금 지체됐지만, 개의치 않고 달렸다. 유곽의 밖까지는 이와이즈미가 기사로 일하면서 알아둔 경로와 다른 기사들의 일정을 토대로 무사히 빠져나왔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완전한 해방이다.


“저기 있다!”


물론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마츠카와의 말처럼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포주는 벌써 그들의 탈출을 눈치챈 모양이다. 이와이즈미가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해도, 오이카와까지 함께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전부 해치우는 것은 무리다. 오이카와가 제 한 몸은 지킬 수는 있다 해도 단련된 무사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목적지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만이 답이었다.


달리던 중, 두 사람의 앞을 막은 인영을 보고 급하게 발을 멈췄다. 다른 기사들의 일정을 확인하고 계획을 세운 거라, 기사들 중에 저들보다 먼저 올 수는 없었다. 누구지? 해가 오르지 않은 새벽, 실눈을 뜨고 인영의 주인을 확인했다.


“쿠니미쨩?”

“…선배.”

“나 참…. 선배 아니라니까.”

“전 이와이즈미 씨한테 한 말인데요.”


하여튼 쿠니미쨩 매정해. 긴 대화도 아니건만, 잠시나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앞을 막은 사람은 카게야마와 함께 들어왔던 쿠니미였다. 딱히 큰 관심 없어 보이는 얼굴로 유곽을 살피던 쿠니미는 오래 전, 포주에게 잡혀 들어온 아이 중 하나였다.


카게야마와 함께 순수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킨다이치와 아무 감정 없이 쳐다보는 쿠니미를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쉬고는 포주가 그들을 기생으로 쓰려는 것을 막아주었다.


‘뭣도 모르는 꼬마들보다는 제가 더 유용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아이를 도와줄 수 없다는 건 알고 하는 말이지?’

‘그럼요.’


포주가 오이카와의 속셈을 모를 리는 없었으나, 결국 그 아집을 꺾지 못해 혀를 차면서 그들을 기사로 돌렸다.


오이카와 덕분에 기사로 전향됐다는 말을 듣고 카게야마는 타케루 씨와 함께 일할 수 없다며 서운해했고, 누구는 돈독이 제대로 올랐다고 오이카와를 욕했지만, 어린 쿠니미는 그가 저들을 위해 구해준 행동임을 알아챘다. 


돈독이 올랐다면 적어도 일하러 나갈 때 그런 표정을 지을 리는 없었다. 이유도 모르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사로도 함께할 수 있다며 되지도 않는 위로하는 킨다이치나, 부러 못되게 구는데도 끝까지 그의 뒤를 쫓아다니는 카게야마를 쳐다보던 쿠니미는 바보 같은 친구들을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너희를 위해서가 아니야. 나를 위해서지. 그러니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포주의 말처럼 모든 아이를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처음 아이들을 보자마자 어릴 적부터 유곽에서 일해야 했던 자신이 겹쳐 보였다. 어쩌면 아이들을 구함으로써, 제 어린 시절을 보상받으려 한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제 발로 걸어왔다고 해도 원치 않던 유곽의 일이다. 어린 자신은 구하지 못하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순수한 눈동자를 어두운 길로 인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쿠니미가 듣기에는 냉정할 수도 있겠으나, 뒷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기분 나쁜 기색도 없었다.


‘그래도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씀해주세요. 도와드릴게요.’

‘괜찮다니까. 정 도와주고 싶다면 이와쨩처럼 실력 있는 기사가 돼서 위험한 아이들을 많이 도와줘.’


그때부터였을까. 오이카와는 어린아이들만 보면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위로하는 것처럼.


“아예 나가시는 거죠?”

“응?”

“다른 기사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황궁에서 타케루 씨를 데려갈지도 모른다고.”

“…알고 있었구나.”

“눈치 보는 건 타케루 씨한테 배운 것 중 하나니까요.”

“…….”

“조심히 가세요. 마지막 인사쯤은 하고 싶었어요.”


말은 오이카와하고만 하고 있었지만, 쿠니미의 시선은 이와이즈미에게도 향했다. 쿠니미는 저를 구해준 오이카와뿐만 아니라, 이와이즈미 또한 동경하고 있었다. 들어오는 아이들 모두에게 정을 주는 이와이즈미는 어린 기사들 사이에서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을 위험으로 빠트리는 오이카와도, 오이카와를 위험하게 만든 아이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들에게 함부로 대할 천성이 되질 못했다. 오히려 그들을 내보내 주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는 남들보다 배로 신경써줬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사회성이 조금 부족한 아이들이 기사들 사이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이즈미 덕분이었다. 아무리 실력 있는 기사라 해도, 어린 이와이즈미가 오랫동안 일한 어른들보다 영향력이 클 수는 없었다. 


유곽에 들어온 아이들이 기생이 되는 상황을 막을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임에도, 이와이즈미는 언제나 미안하다고 말했다. 쿠니미는 그 말이 저들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도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렇다고 저들을 위하는 이와이즈미의 마음이 거짓이 아님도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이 있는 유곽이 마냥 싫지만도 않았다.


“타케루 씨가 말했던 것처럼, 이와이즈미 씨 같이 저도 선배들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아니, 그때 내가 말한 걸 기억한다면, 지금 있는 아이들이나 친구들한테 신경 많이 써 줘. 친구들은 쿠니미쨩만큼 똑똑하진 않잖아?”

“…그 녀석들이야 알아서 하겠죠.”


뒤에서 쫓아오는 기사들의 기척에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부추겼다. 이 이상 붙잡으면 위험할 것을 감지한 쿠니미 역시 길옆으로 비켜섰다. 고마워, 쿠니미쨩.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오이카와가 쿠니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떨어지는 손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폐가 되겠지. 쿠니미는 주먹을 세게 쥐면서, 이젠 마지막이 될 손을 붙잡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감사했습니다.”


잡힐까 봐 뒤를 보지도 못하고 뛰어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저도 함께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안 되겠죠.”

“기회가 된다면 꼭 뵈러 갈게요.”


쿠니미는 저들을 생각해 몸을 바친 오이카와를 위해서라도 잡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인사를 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아,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의 계획을 힘겹게 입수했을 뿐이다. 두 사람의 계획은 이미 오래전에 눈치챘지만 당연히 비밀로 했다. 같이 있던 모두가 서운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두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아이들에게 말했다면, 어수선한 분위기에 포주가 더 일찍 눈치챌 것이 분명했다. 비록 마지막 만남은 긴장감으로 가득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저들에게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무사하세요.”




 



오이카와는 달릴 때 방해만 되는 거추장스러운 새빨간 유카타를 벗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큼 10년의 자신을 나타내는 것도 없어서, 차마 찢지 못하고 최대한 접어 올리기만 했다. 변태냐? 평소라면 한마디 했을 이와이즈미도 가만히 기다려주고는 다시 달렸다.


쉬지 않고 달려 나루터에 도착하자 의외의 인물을 또 마주했다.


“선배!”

“허억, 헉. 뭐야, 넌 또 왜 여기 있어.”

“그게…, 어제 선배가 이상해서…….”

“내가 선배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지.”


쿠니미도 그렇고, 카게야마도 그렇고. 하나같이 말 안 듣는 후배뿐이다. 그나저나 둔하다고 소문난 카게야마도 알 정도니, 포주가 눈치챌 만도 했다. 아니, 어쩌면 그만큼 카게야마도 저에게 집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마지막까지 제 눈치를 보는 카게야마가 조금은 안쓰러웠다. 왜 바보 같다며 밀치기만 했을까. 같은 계획을 한 동료라 생각하며 챙겨줘도 됐을 텐데. 이미 늦었다는 건 알지만, 속으로 사죄했다.


제 발로 들어온 자신과는 다르게, 잡혀 온 아이들에게 마음이 더 쓰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차피 나갈 계획을 하고 있어서, 아무에게도 정을 주지 말자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 유곽에서 지냈지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라도 오이카와는 척을 지었다. 오랫동안 머문 자리에는 저도 모르는 인연이 쌓인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이제는 더 못 보는 건가요?”

“…응. 그동안 고마웠어, 토비오. 너도 무사히 나가길 바랄게.”

“저 선배가 있는 곳으로 가면 안 돼요?”

“그럼 알아서 찾아와보던가.”


먼 나라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해서든 숨어 살 생각이었다. 카게야마뿐만 아니라 그 누구더라도, 아무도 찾아올 수 없이 깊은 곳으로. 하지만 저들의 계획을 용케 알아채고, 저만을 쫓아오는 그에게 더 밀어낼 수는 없었다.


“그때 날 찾는다면, 선배 말고 제대로 된 이름 불러줘.”


타케루가 아닌 본연의 이름을. ‘제대로’에 담긴 의미를 눈치 없는 카게야마가 알 리 없었지만, 단지 오이카와의 욕심이었다. 만약 카게야마도 저와 같이 무사히 빠져나오고, 제가 있는 곳까지 찾아온다면, 그때는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제대로 밝힐 수 있지 않을까.


역시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카게야마는 고개만 갸웃거린다. 그래, 이게 너니까. 그래도 그 눈치나 제게 향하는 눈동자 덕분에 10년이 외롭지만은 않았다.


고마웠어. 쿠니미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카게야마의 머리도 한 번 쓰다듬었다. 다음에 봐.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잠잠한 기사들이 이상했지만, 좋은 일이라 생각하며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재빨리 준비된 배에 올라탔다. 이제 해방이야. 오이카와는 의미 모를 표정으로 유곽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유곽뿐만 아니라 황제까지 탐을 내던 오이카와와 그의 기사 이와이즈미를 마지막까지 마중한 사람은, 카게야마 토비오 혼자뿐이었다.






<春>

 

 

마츠카와는 책상 위에 둔 서신 한 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짐작하는 인물이 있었기에 더욱 열어보지 못했다. 안 읽어요? 그럼 제가 읽을…, 마찬가지로 발신인을 알아챈 쿠니미가 집으려는 것을 잽싸게 낚아채고 서신을 열었다. 저를 째려보는 쿠니미를 무시하고 서신을 읽어나갔다.


[안녕.]


처음 보는 글씨체였으나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산뜻하네. 그나저나 안녕은 무슨. 수년간 함께 했지만 비밀만 가득했던 남자. 글 쓸 줄 모른다더니, 그것 역시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분명 속으로 내 욕하고 있겠지? 하지만 오이카와 씨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


안다. 사람들은 저보다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기 마련이다. 그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누군가가 알았다면, 그는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문맹이라 믿고 저들의 비밀을 토해냈던 귀족들은 아마 오이카와를 소리소문없이 죽였을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 맛층이랑 비슷한 사람을 만났어. 성격이 아주 능글맞아. 가끔 보면 맛층 생각난다니까.]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얀 피부가 도드라지는 새빨간 유카타를 입고 기분 좋게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손님을 맞을 때는 가식적인 웃음을 짓고는 했지만, 적어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 앞에서까진 웃음을 지어내지 않았다. 이걸 쓸 때도 웃고 있었으려나. 그보다 네가 더 능글맞거든? 나중에 만난다면 한 소리 해줘야겠다.

 

[사실 가끔이 아니라 매일 생각해. 우리가 무사히 빠져나온 것은 우리의 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니까.]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마중 나가고 싶다는 쿠니미와 카게야마를 제외하고, 마츠카와는 기사들을 전부 물렸다. 나중에 돌아온 제 어미에게 죽지 않을 만큼 맞았지만, 후회는 없었다.


황제가 원했던 무명화가 사라졌으니 나라가 발칵 뒤집힐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잠잠했다. 마츠카와는 그것이 매일 찾아와 오이카와를 지명하던 남자,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한 일임을 눈치챘다. 너도 도와라. 오이카와가 탈출하고 소란스러운 유곽을 보자마자, 우시지마는 그의 계획을 대충 눈치채고는 마츠카와에게 한마디만 던진 뒤 바로 떠났다.


‘그 녀석이 탈출할 거 알고 있었어?’

‘아니.’

‘그런데도 생각보다 빨리 대처했네?’

‘계획은 몰랐다. 다만 매일 창문만 바라보던 모습이, 몸은 여기에 있으면서도 다른 곳으로 날아갈 것 같았다.’

‘그래서 매일 부르신 거구만.’

‘…빗나간 예상이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으면 사라지지는 않을까 그리 생각했다. 폐하께서는 단지 아들의 취미가 궁금했던 한순간의 유흥이었을 뿐, 무명화의 소식을 듣고는 금세 접었다. 쫓지도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정신이 없는 유곽에 찾아온 우시지마를 붙잡고 물었다. 걱정하지 말란 건 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해달라는 의미라는 것을 마츠카와는 눈치챘다. 그나저나 황태자인데 존댓말 해야 하려나. 그러기엔 이미 늦은 터라, 마츠카와는 전과 같이 굴었다. 맛층 진짜 막무가내라니까~. 귀에서만 맴도는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다.


[유곽이 아예 없어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아이들은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이카와가 생각지 못한 미래 중 하나는 유곽의 존재였다. 제일 큰 돈줄이었던 오이카와를 잃은 유곽은 당연하게도 손님들이 대거 빠져나갔고, 이와이즈미의 중심으로 돌아가던 기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다발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어차피 떠날 운명이라 척을 지내던 그들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인망을 쌓고 있었다.


결국,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부산스러워진 유곽의 포주를 그만둔 어머니를 대신해, 마츠카와는 새로이 점포를 열었다. 유곽에 있었던 사람들은 남아서 일을 돕기도 했고, 가고 싶었던 곳으로 떠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유곽이 없어질 거라는 예상은 못한 듯하지만, 마츠카와는 이렇게라도 그들이 바라던 것 중 하나를 이뤄주고 싶었다.


한 곳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으나, 여러 상인이 오가면서 주는 정보들에는 꽤 쏠쏠한 것도 있었다. 이 서신도 그중 하나였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손님 중 하나가 대뜸 서신을 건넸다. 발신인도 적혀 있지 않은 서신을 어쩌라는 거지 싶어 쳐다보니, 남자는 씩 웃기만 했다. 묘하게 기분 나쁜 웃음이 마치 오이카와를 연상시켜서, 몸에 전율이 돋았다. 본능적으로 서신의 발신인을 예상했다. 정말이지, 오이카와는 어디에 있든 친해지고 싶지 않은 상대다.


‘그 녀석이 잘 지낸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달래.’

‘….’

‘면식 없는 사람이 주면 네가 받지 않을 거라더라. 하여튼 사람을 부려 먹기나 하고 말이야.’

‘귀찮아 보이는데. 그래도 찾아와서 용케 주네.’

‘그야 쿠로오 씨는 친절한 사람이니까.’


오이카와, 네가 말한 대로 능글맞은 사람이구나. 아마도 그 남자가 서신에 적힌 저와 비슷한 남자일 것이다. 그는 점포를 몇 번 사용해본 남자였다. 멀리서 왔으면서도 딱히 물건을 탐내지는 않던 남자. 경계심이 심한 마츠카와를 위해서, 오이카와는 몇 번씩 그와 얼굴을 트게 한 모양이었다. 역시 준비성 하나는 철저했다.


‘가끔 와서 그 녀석이랑 놀아주고 그래. 이때는 맛층이~ 라던가, 맛층은 안 그러는데, 이러면서. 시끄러워 죽겠다니까.’


쿠로오는 시끄럽다고 말한 것치고는 꽤 즐거워 보였다. 그것이 오이카와의 매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마츠카와 역시 대충 답했다. 시간 봐서. 역시 너도 그 녀석 못지않게 성격 나쁘다니까! 쿠로오는 즐겁다는 듯 웃고 점포를 나갔다.


[그럼 기회 되면 볼 수 있기를. 그동안 고마웠어.]

[及川 徹]


처음 보는 한자의 이름이 끝부분에 적혔으나, 편지를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마츠카와는 제 방에서 채비하고 있을 카게야마를 생각하며 서신을 접었다. 점포를 쉽게 비울 수는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나도 언젠가 만나러 가야지. 지저귀는 새소리가 새로운 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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