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대단한 걸 하고 싶은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을 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곽아론의 목적지는 서울 시내의 한 호텔이었다. 어떻게든 8시까지 일을 끝내고 곽아론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려던 나는, 언제나 늘 그렇듯 퇴근을 하기로 마음먹은 시간에서 정확히 한 시간이 모자랄 때 터진 일을 수습하느라 30분을 더 써버렸다. 협력사에서 일이 터졌다고, 조금 늦어질 것 같다는 연락도 할 틈 없이 일을 끝내고 시간을 봤을 때 이미 허무하게 흘러버린 시간에 나는 무작정 재킷을 집어 들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에요, 나 지금 끝났어요, 혹시 아직 사무실이에요?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고, 알려야 할게 가득인데 손은 머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본부장님.”

“네.”

“진심이에요?”

“뭐가요?”

“여기서, 이러는 거.”


어디로 가야 할지, 본부장실과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쪽의 갈림길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던 나는 그러나 그보다 먼저 내게서 선택권을 앗아가는 메시지에 그대로 크게 숨을 골랐다. 천천히 와요, 차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럼 내가 장난치는 걸로 보여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내가 왜 약속한 시간보다 30분이나 늦었는지, 그래서 당신은 어디에 있는지 그 무엇도 설명하고 묻기 전에 완벽하게 내가 움직여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곽아론은 마치 절대 헤매지 않을 북극성 같았다. 거기에 있을 거란 믿음하나로 찾아가면, 정말 거기에 있을 것 같은 모습으로 느리게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나는 그저 긴 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전혀 생각 못했어요?”

“...생각 할 틈은 줬어요?”

“그래서 싫어요?”

“아니 싫다기 보다는..”


싫은 건 아니라는 거네. 단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내가 언제 끝날 줄 알고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냐고, 전화라도 하지 그랬냐는 말에 곽아론은 그저 빙글빙글 웃었다. 어차피 회사 안에 있고, 당신 도망갈 일도 없는데 재촉할 건 무엇이냐며 당신 시간 내가 다 산 것은 잊었냐고. 당당하다 못해 태연한 음성으로 외려 미안할 틈도 주지 않은 곽아론은 내게 이제부턴 정말 내가 당신 시간 쓰겠다 말을 했다.


“그럼 빨리 이리 와요.”

“.....”


좋을 대로 하라는 듯 보조석에 앉아있던 나는 그러나 내비게이션의 음성 끝에 목적지로 걸린 곳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주 예상을 못했다면 유전자에도 없는 내숭을 떠는 걸 테고, 그렇다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끄덕끄덕하기엔 묘하게 뻔뻔한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곽아론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린 나는 곧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도시의 밤만 일없이 눈에 담았다.


“최민기.”

“....아, 진짜.”


몇 번 와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키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곽아론의 뒤를 조금의 여유를 두고 따라 걸었다. 그런 나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인 곽아론은 곧 조심스레 내손을 붙잡으며 묵직하게 위로 오르는 것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침묵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안도감에 나는 그제야 숨을 고르며 열리는 문 밖으로 곽아론과 걸음을 맞춰 걸었다. 적당한 온도와, 좋은 향기가 나는 공간이었다. 생전 처음 와본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사람과는 확실히 처음인 공간을 빤하게 둘러보던 나는 곧 씻고 나오라는 친절한 목소리에 그대로 머뭇거리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요, 내가 준비한 거.”

“..네, 좋네요.”

“맛있어요?”

“그럼 곱창이 맛없겠어요?”


나 원래 곱창 좋아해요. 그렇게 대꾸하며 눈앞에 놓인 것을 입 안으로 밀어 넣은 나는 곧 그럼 다행이라는 듯 제 젓가락도 반으로 쩍 가르는 것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헛헛한 웃음을 뱉어냈다. 옷을 입고 나가야 하는 걸까 한참을 고민을 하다 어차피 벗을 건데 꼼꼼히 챙겨 입는 게 웃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벗고 나가자니 너무 밝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못된 짓을 하다 걸린 중학생처럼 다급하게 대답을 했다.


“여기 서울에서 제일 잘하는 집이라던데.”

“누가요.”

“개발팀 황 팀장이요, 그래서 내가 아까 전화해서 미리 예약했어요. 그래야 한다길래.”

“황 팀장이 곱창은 호텔에서 먹어야 한다고도 알려줬어요?”

“에이, 설마.”


뭐 그런 것 까지 알려주진 않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는 곽아론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곧 앞에 놓인 것을 다시 한 입 밀어 넣었다. 갈아입을 옷 앞에 둘게요.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도 한 번 나의 고민을 완전히 해결해버린 곽아론에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내가 보지 못하는 순간까지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도로 안심이 되었다.


“근데 하필 왜 곱창이에요? 그 많은 음식 중에.”

“먹어 보고 싶었거든요.”

“.....”

“방송 같은 거 봐도 사람들이 되게 맛있다고 하니까.”

“.....”


물론 지나치게 앞을 바라봐 정말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늘 향수를 챙겨 다니는 스스로의 준비성에 감탄하며 완벽하게 단장을 마치고, 정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담담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온 나는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풍경에 내내 컨트롤 하고 있던 표정이 완전히 무너졌다.


“먹어보고 싶었는데, 못 먹었어요.”

“....”

“나는 여기에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


다 씻었어요? 하며 나를 반기는 얼굴은 거짓됨이 없었다. 조금의 장난기도 없이 순도 백프로의 신남을 담고 있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곧 테이블 위에 먹기 좋게 놓인 것들을 주욱 둘러보며 이내 어색하게 곽아론에게 다가섰다. 이게, 다 뭐예요 그런 목소리와 함께.


“그렇다고 회사 사람들하고 가기엔, 그 사람들에게 내가 피해를 주는 거니까.”

“.....”

“나 한국에 아는 사람.”

“.....”

“최민기씨 뿐이거든.”


먹고 싶은 게 있을 때 이렇게 먹자고 할 수 있는 사람, 나랑 같이 맛있는 걸 먹어 줄 수 있는 사람 그거 오로지 너 뿐이라는 말을 순박한 얼굴로 일말의 슬픔도 없이 중얼거리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곧 앞에 놓인 곱창을 양껏 들어 입 안 가득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곧 그것을 우물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곽아론을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황 팀장님이 아예 거짓말 한 건 아닌가 봐요.”

“그래요?”

“나도 곱창 좀 먹을 줄 아는데, 여기 진짜 맛있어요.”

“오, 다행이다.”

“그러니까 본부장님도 좀 먹어요. 나 먹는 것만 쳐다보지 말구.”


먹고 싶어서 그랬다는 말이 무색하게 내내 내가 먹는 것만 바라보고 있는 곽아론을 향해 곱창을 집어 내밀자 잠시 머뭇거리던 입이 얼른 벌어진다. 어때요? 맛있어요? 내말에 잠시 입 안의 것을 우물거리던 곽아론이 곧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장님 이제 큰일 났다, 곱창 맛을 알았으니 아주 큰일 났어. 이거 자다가도 생각 날 거라고, 어떻게 하냐고 중얼거리는 나를 보며 곽아론이 신이 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떡하긴, 최민기가 같이 먹어주면 되지.”

“.....”

“먹고 싶다고 할 때마다 당신이 같이 먹어 주면 돼.”


그럼 간단한 일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는 곽아론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나는 곧 옆에 놓인 맥주를 가볍게 들이켜고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또 해보고 싶었는데 못했던 거 있음 말해요.”

“....”

“내가 같이 할게요. 말해 봐요.”

“....”


하고 싶었던 거라. 내 물음에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곽아론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렀다. 그런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자 곧 어색한 웃음과 함께 작은 얼굴이 가만히 가로로 흔들린다.


“모르겠네. 그렇게 갑자기 물어보니까.”

“하고 싶은거 없었어요? 한국에서?”

“정확히 말하면 하고 싶은 게 없었다기보다..”

“....”

“굳이 하고 싶은 걸 만들 필요가 없었어요.”


곽아론의 얼굴은 어른이 된 나에게 누군가 꿈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의 얼굴 같았다. 더 이상은 내 것이 아니기에 생각해본 적 없었던 것을 누군가 끄집어냈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뒤섞인 멋쩍음을 뒤집어쓴 얼굴은 나를 보지 않고 허공을 한참이나 응시하다 곧 느리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있는 곳이 한국인지 미국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

“밤낮이 바뀔 뿐, 나는 그 곳에서나 여기에서나 똑같은 일을 하고.”

“....”

“똑같은 얼굴, 똑같은 생각으로 살 테니까.”

“....”

“미국에서 하지 못한 것을,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어요.”

“....”


그저 하루하루 흘러가는 대로 산다는 것, 그 속에서 무언가 소망을 찾는 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맛있는 케이크를 먹겠다는 사소한 계획조차도 선뜻 날을 잡아 실행하기 쉽지 않은 하루 속에 사는 것은 곽아론도 마찬가지였다. 곽아론에게 한국이라는 곳은 애초에 특별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일을 하기 위해 잠시 들른 곳, 머무르는 곳, 돌아가서도 미국과 다를 것이 없이 기억 될 곳.


“내가 최민기를 만날 줄은 몰랐으니까.”

“.....”


그 곳에서 만난 내가 곽아론에게 어떤 의미일지 나는 짐작이 가질 않았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감히 가늠할 수 없을만큼의 크기 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선뜻 그래도 생각해보라며 재촉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린 나는 곧 오롯이 내게 시선을 맞춘 채 바라보는 얼굴을 그저 빤히 들여다보았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

“딱 하나예요.”

“.....”

“최민기가 행복한 거.”


그 말에 먼저 시선을 떨어뜨린 나는 곧 잠시 눈앞에 놓인 것을 바라보고 있다 이내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그리고는 곧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런 나를 보며 왜요? 하고 놀란 듯 물어오는 곽 본을 보다 나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본부장님은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죠.”

“....어.”

“나도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

“그러니까 얼른 양치해요.”


그리고 욕실에서 그대로 들고 나온 칫솔을 내밀며 나는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양치하고 행복이 무슨 상관이 있냐는 듯 나를 바라보는 곽아론을 향해 보며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


“키스하고 싶어요.”

“...아.”


근데 지금 이 상태로 할 수는 없다는 듯 미간을 찡긋거리자 잠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곽아론이 곧 그대로 칫솔을 입에 물었다. 그런 곽아론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돌아서 욕실로 들어선 나는 곧 거울 안으로 스윽 모습을 드러내는 얼굴을 보며 결국 먼저 웃어버렸다. 그런 나를 뒤에서부터 가볍게 한 손으로 끌어안고 허리를 간질거리는 손을 장난스럽게 쳐내며 서둘러 입을 헹궜다. 그리고는 얼른 돌아서서 여전히 칫솔을 물고 있는 곽아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그대로 붙잡았다.


“빨리 안 끝내면 키스 안 할 거예요.”

“....”


무슨 그런 협박을 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곽아론의 얼굴을 붙잡고 있다 나는 가볍게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빨리 하고 나와요. 그 말과 함께 먼저 곽아론에게서 물러나 밖으로 나온 나는 곧 침대 위에서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내 것이 아닌 휴대전화의 발신 번호는 저장되지 않은 것이었다. 얼핏 보기에 국제전화 같은 번호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곧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는 소리에 그대로 돌아섰다.


“본부장님 전화..”

“.....”


오는데 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먼저 내 입술을 찾아드는 곽아론의 입술에 모든 것이 막혀버렸다. 가볍게 내 얼굴을 붙잡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는 곽아론의 목을 감싸 안으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대로 놓아버렸다. 툭,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굳이 신경도 쓰지 않고 내게 입을 맞추는 것에 집중하는 얼굴을 살며시 눈을 떠 바라본 나는, 나를 가볍게 밀어 침대에 눕히는 곽아론을 굳이 멈추게 하지 않았다. 내 얼굴을 붙잡고 있던 손이,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내 얼굴을 어루만지다 곧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손을 붙잡았다.


“최민기씨.”

“.....”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게 있는데.”

“.....”

“그거 하게 해줄래.”

“.....”


묻는 것 같기도, 허락 같기도 한 목소리에 나는 말해보라는 듯 가볍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곽아론이 곧 그대로 내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쓸며 중얼거렸다.


“우리.”

“....”

“자자.”

“....”


어쩌면 허락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는,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말이었지만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음 역시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머뭇거리는 나를 보며 곽아론은 다시 묻는 대신, 그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

“그냥 이렇게 푹 자자.”

“....”


머뭇거렸던 것은, 곽아론의 말이 가지는 의미 때문이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모양은 같지만 뜻은 전혀 다른 음성에 순간 눈이 커진 나를 끌어안은 채 곽아론은 모로 누워 눈을 맞추었다.


“최민기씨 잘 자게 해주고 싶었어요.”

“.....”

“요즘 피곤했을 테니까 여러 가지로.”

“.....”

“내가 당신 시간 가진 동안만큼은, 좀 편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바라는 것은 오롯이 전부 나를 향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도, 해주고 싶은 것도 모두 자신을 위해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나는 곧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피곤해보여요? 그렇게?”

“아니, 예뻐요. 나한텐.”

“.....”

“언제든 나한텐 예쁘게 보여요, 그렇지만.”

“.....”

“그렇게 맨날 예쁘려면 또 피곤할테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살짝 미간을 구기자, 곽아론은 진심이라는 듯 빙긋 광대를 올려 웃는다. 예쁘다는 말이 싫지 않았다. 그것이 단순한 외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상처와, 내 치부와, 그리고 내 후줄근함을 모두 알면서도 나를 예쁘다 말 할 수 있는 곽아론은, 나라는 사람을 그저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후회 하지 않겠어요? 오늘 같은 기회 자주 오는 거 아닌데.”

“오늘 같은 기회가 평생 없다고 해도 괜찮아요.”

“.....”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당신이지 그런 게 아니니까.”

“.....”

“아, 물론 최민기씨가 원한다면 뭐..”


내가 원한다면 뭐요, 하고 냉큼 말꼬리를 붙잡자 곽아론이 금세 눈을 가늘게 뜨고 본다. 난 최민기씨가 원하는 건 다 해줄 수 있어요 그게 뭐든.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얼굴을 보며 나는 됐다는 듯 흥 콧소리를 내고는 곧 나를 바라보고 있는 곽아론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본부장님이 왜 나를 좋아하는지.”

“.....”

“근데 그거 구구절절 설명한다고 달라지는 거 없다는 것도 알아요.”

“.....”

“마음이라는 게 설명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실패 할 일도 없을 테니까.”

“.....”


여전히 셔츠 차림 그대로 누워 있는 곽아론을 보며 나는 곧 손을 붙잡은 채로 조심스럽게 곽아론의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날 왜 좋아하는지는 궁금해 하지 않을게요, 그렇지만.”

“.....”

“날 왜 좋아하게 됐는지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아요.”

“.....”

“아무것도 받은 것 없이 퍼주기만 하다가는 지칠지도 몰라요.”

“.....”

“그럼 후회하게 될 수도 있어요. 나를 좋아하게 된 걸.”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이곳에서 나라는 사람 때문에 의미를 만들어 버린다면, 그건 곽아론의 마음이 어떤 크기이든 우습게 볼 일은 아니었다.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이 가지는 생명력은 생각보다 엄청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아무것이 되는 일은 그만큼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행복이든, 기쁨이든, 후회든, 분노든.


“그것도 내가 최민기를 좋아한 결과니까 상관없어요.”

“.....”

“나는 내 사랑이 무조건 좋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슬픈 사랑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싫은 사랑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 대신.”

“.....”

“그것이 사랑으로만 남아있으면 돼요. 미움이 아니라.”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곽아론을 그저 빤하게 바라보자 내 입술에 가볍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입을 맞춘 곽아론이 나를 완전히 제 품 안에 가두었다.


“해피엔딩이 아닐까봐 두려워서.”

“.....”

“지금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고 싶진 않다는 말이에요.”

“.....”

“적어도, 당신에게 만큼은.”

“.....”


두근거리는 마음이 온전한 진심을 대신하고 있었다. 오롯이 해피엔딩만을 바라서 아무것도 시작하지 말자 했던 나를 향해 조금의 반항도 없이 그러자 말을 했던 곽아론의 진심에 나는 이내 울컥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왜 나는, 단 한번도 이런 사랑을 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서러움이었다.


“그런데 최민기.”

“.....”

“네 끝은.”

“.....”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어.”

“.....”


나는 어떤 사랑을 해왔던 걸까. 나는 단 한번이라도 누군가의 행복을 빌어준 적이 있었을까.


“내가 당신의 옆을 떠나야 당신이 행복해진다면, 내 끝은 슬프겠지만.”

“.....”

“난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

“그러니까 언제든지 말해요.”

“.....”

“이 마음이 부담스러워 진다면.”

“.....”


아무것도 아닌 관계의 사람에게,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제 행복을 저당 잡힐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땐,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


이런 사람을 내가 감히 해피엔딩을 바란다는 이유로, 이렇게 헐겁게 붙잡고 있어도 되는 것일까.


“그럼 당신은 행복해 질 거예요.”

“....”


그것을 행복한 결말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내가, 곽아론을 놓쳐버리는 것이.


“잘 자요.”

“.....”


시작도 하지 않은 연애에 해피엔딩은 없다.




*

오랜만에 왔는데 짧아서 죄송합니다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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