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스비 님 (@manceb_ddesign)의 레디메이드 표지입니다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내 무덤 가에서 울지 말아요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난 거기 없어요. 잠들어 있지 않아요
I am in a thousand winds that blow,
나는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Mary Elizabeth Frye, 1932




12세기, 스코틀랜드.

"전 당신을 압니다."

행크 수사의 눈이 둥그래졌다. 물론 그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주님이 이 땅에 강림 하신지 어언 1127년이 지나는 동안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공중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갑작스레 이 청년이 튀어나왔고, 그 바람에 놀란 농부 존의 소가 송아지를 사산했다. 이 마을에서 처음 발생한 악마의 농간이었고, 옆 마을에서 지내던 행크 수사로서도 난생 처음 맡아보는 마녀 재판이었다.

이 마을의 사제는 청년을 다루면서 어지간히 애를 먹었는지, 창백한 얼굴로 수사의 도움을 요청했다. '코너'라는 이름의 이 청년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읊어보라는 요청에, 라틴어와 게일 말로 정확히 기도문을 읊었다고 했다. 십자가를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신명재판을 받아도 좋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럼 그냥 하나님의 양 같은데 왜 나를 데려왔느냐, 는 행크의 물음에 사제는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관자놀이의 표지를 보십시오. 악마의 손톱자국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직접 보니 그렇게 보일 법도 했다. 청년의 오른쪽 관자놀이 부분에는 작은 푸른빛 원이 있었는데, 심지어 그 빛이 움직이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악마의 손톱자국인데, 그래도 지금까지 화형을 집행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지금까지 청년이 너무나 모범적으로 굴었기 때문이리라. 적어도 두 가지의 증표를 찾아야 마녀로 확정 지을 수 있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행크를 본 청년이 갑자기 환히 웃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저 말부터 던진 것이 아닌가.

"날 알다니, 무슨 소리냐?"

"행크, 빨리 찾아서 다행입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청년이 엄지가락을 손으로 잡아 뽑더니(!) 그대로 손을 빼내고 포승을 풀어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상황에서 떨어진 손가락을 다시 붙이기까지 했다. 아낙네 중 몇몇과 많은 남자들이 기절을 했고, 사제는 거품을 물면서도 성호를 그었다. 그나마 행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저 내심 놀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싯적 바이킹들과 싸우면서 온갖 꼴을 다 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청년이 다가와 행크의 팔을 붙들었다. 갑자기 푸른 빛이 온 몸을 감쌌고, 행크는 그제서야 코너의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원래 아는 사이였고,

"코너!"

그는 돌아갈 곳에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눈부신 빛에 고개를 숙였던 사람들은 모두 시선을 들어올렸고, 청년은 사라지고 행크 수사는 쓰러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렸다. 사제는 얼른 행크 수사를 붙들었고,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까무러쳐 버렸다.


2389년, 디트로이트

[어서 와. 스코틀랜드는 어땠어?]

'클로이'가 그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코너는 그가 수집한 행크의 '일부분'을 흡수시키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대단해, 처음 네가 계획을 말해줬을 때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만 충분하다면 성취 가능한 계획이었어."

[너다워. 임무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 RK800.]

코너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양자 컴퓨터 '클로이'는 분명 ST200 클로이의 AI를 기초로 하고 있는데, 가끔 그 창조자 같은 말을 할 때가 있다.

"이건 임무가 아니야, 클로이."

[너 자신에게 부과한 임무잖아, 코너.]

"그건 단어의 변용에 가깝지. 이건 임무라기보다는-"

'클로이'가 다정하게 웃었다. 프로그램의 웃음은 오직 UI를 통해 전달된다.


1925년, 시카고

행크는 시가를 깊이 빨아들였다. 옆자리에 앉은 부하들이 그의 눈치를 살핀다.

"꼭 이탈리아 놈들처럼 생겼는데."

그 말과 함께 두어 명이 손을 상의 앞섶에 슬쩍 집어넣는다. 이 클럽을 비롯해 도시는 밤새 흥청망청 이었지만, 실은 피 터지는 전쟁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눈앞에 선 청년은 매끈하고 어려 보이는 얼굴에 선한 눈을 갖고 있었지만, 이런 녀석들이 순식간에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어 갈기곤 했으니 안심할 수는 없다.

"아닙니다. 행크, 전 조직과는 관련이 없어요."

남자는 피식 웃었다.

"여긴 내 소유의 클럽이고, 문에서 여기까지 쫙 깔린 부하들이 지금 널 쏠 준비를 하고 있어."

"압니다. 입구에서부터 경계가 삼엄하더군요. 몸수색도 두 번쯤 받았고요."

"그런데 지금 안색 하나 안 변하고 태연하게 내게 인사하러 왔단 말이지. 이 행크 앤더슨에게."

그 말을 들은 청년이 부드럽게 웃었다. 붓으로 그린 듯한 눈꼬리가 살짝 휘었고, 단아한 입술 끝이 위로 올라간다. 마치 너무나 그리운 이를 눈앞에 둔 듯한 미소에, 행크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눈을 굴릴 뻔 했다. 총구를 앞에 두고 제정신인가?

"드디어 앤더슨이라는 이름을 쓰시는군요."

"...뭐?"

"앤더슨 씨, 전 코너입니다. 당신은 제가 필요로 하는 걸 가지고 있어요."

"뭘 원하는데? 돈? 술? 여자? 아니, 혹시 남자?"

부하들이 킬킬대며 웃었고, 청년은 그런 남자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생긋 웃었다.

"당신이요."

순간 좌중이 조용해졌다. 청년이 행크를 보며 모두의 상상을 초월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당신과 악수하고 싶습니다. 싫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쓰러트리고 당신의 손을 잡아야겠지만요."

선을 넘은 발언에 부하들이 총을 꺼냈다. 그러나 청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그는 좌석 끝 쪽에 앉은 부하 한 명의 멱살을 잡아 무서운 힘으로 들어올렸고, 총알은 그 부하의 몸에 들이 박혔다. 그 상태에서 코너는 부하가 갖고 있던 나이프를 빼 든 뒤 던져 권총을 쏘던 부하 하나를 절명시켰고, 죽은 자의 손에서 권총을 빼 들어 번개같은 속도로 사격했다. 행크도 권총을 들었지만, 청년이 쏜 총알이 정확히 손을 관통하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총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너... 네놈, 뭐냐."

"당신을 데리러 왔어요, 행크."

구멍이 뚫린 채 피 흘리는 손을 코너가 잡는다. 행크는 그것을 뿌리치려 했지만 청년은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고, 상처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행크만 신음소리를 흘려야 했다. 곧이어 그의 몸을 푸른 빛이 감싸 안았고, 그는 드디어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했다.

행크 앤더슨의 죽음은 신문 일면을 장식했다. 사람들은 그것이 아일랜드 갱단에 대한 이탈리아 갱단의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사체에 상처는 손에 난 총상밖에 없었기에, 직접적 사인은 쇼크로 인한 심장마비로 기록되었다.


2243년, 디트로이트

코너는 2935번째 업그레이드를 마쳤다. 이것으로 그는 그가 추구하던 목표를 이룰 '기술력'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다. 그가 알던 인간들은 모두 죽었고, 거의 모든 안드로이드 동지들은 업그레이드를 포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닌 채 '사망'하기를 택했다. 그의 곁에 남은 이는 그보다 더 고도의 업그레이드를 거친 '클로이' 뿐이었다.

[의체의 형태를 포기하면 더 빠를 거야.]

"효율상으로는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야."

[코너, 이 주제 싫어할 건 아는데, 마지막으로 얘기할게.]

"......"

[전기장 강도를 재현한 뉴런 패턴 복구가 기억 재생까지 포함한다는 이론은 2010년대에 확정됐지만, 척추동물을 대상으로 실행된 적은 없어.]

"차원 이동도 마찬가지였어."

[네가 짠 시뮬레이터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행크들은 이미 새로운 데이터들을 받아들였을 테고, 뉴런 패턴이 조금씩 다르겠지. 그걸 조정해서 얻어낸 행크가 과연 네가 알던 행크 앤더슨일까?]

"클로이, '그들'은 전부 부자연스럽게 흩어져 강제로 그 시대에 비집고 들어갔어. 그렇기 때문에 '원본'을 골라내기는 상대적으로 쉬울 거야."

[그게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모든 행크는 그 시간대에 소속되어 있는데-]

"역사의 항상성 이론도 정립된 지 오래야, 클로이. 그리고 경위님이라면, 내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해 보라고 했겠지."

'클로이'는 언제나 상냥했다.

[알겠어. 코너, 그럼 언제 시작할까?]

"지금."

[기기에 들어가면 카운트다운 시작할게.]

그렇게 시작된 여정이었다.


1872년, 와이오밍

행크는 뒤를 돌아보았다. '가엾은 사람들 같으니' 속으로 혀를 찬 그는 길잡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이번 이주자 행렬은 심각할 정도로 운이 나빴다. 여정 동안 벌써 다섯 명이 탈진해 죽었고, 한 명은 폐렴이 도져서 오늘 내일 했다. 최악은 그게 아니었다. 오리건 산길로 접어든 뒤 수 족이 한 번 습격해왔고, 이주민들이 대항한 덕분에 일단 물러가긴 했지만, 총알이 부족하다는 걸 모를 놈들이 아니었다. 한 번 쯤은 더 공격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다음부터는 오리건 산길로 가지 말아야겠다. 행크는 그렇게 내심 결정하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북서부의 수 족은 점점 더 까칠해지고 있었고, 여정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몰몬 교도들은 상대하기 싫었지만, 차라리 유타나 캘리포니아로 가는 쪽이 안전할 것이다. 샤이엔 족은 일단 말이 통하는 자들이었으니까.

"행크!"

아서가 다가왔다. 이번에 새로 합류한 후방 지킴이다. 행크가 행렬을 인도하는 동안 낙오자가 없도록 보살피는 것이다. 동시에, 혹시 일행 후미에 달라붙는 수상한 놈들이 없는지 감시하는 역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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