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세계관이라 적폐가 많습니다

가볍게 읽어주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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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이지 중요한 데서 운이 없는 사람인가보다.

 

학생때는 반장도 많이 했었고 대학교 때 학생회장에 행시 합격까지. 지금까지 리더의 역할을 도맡아 했었고 선배들에게나 후배들에게나 신임도 많이 받았다.

 

위기관리국으로 발령받기 전까지는.

 

항상 책상에서 공부만 해오며 살았다가 현장직을 하니까 죽을 맛이었다. 이렇게나 적성에 안 맞는 일이 또 있을까. 너무 바쁘고 여기저기 사소하게 많이 다치기도 했으며 현장일이 끝나면 보고서를 써야 했다. 랭글리 상관님이 있을 땐 그나마 괜찮았다. 그런데 그녀가 다른 부서로 가고 난 후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게다가 장관님은 사람들을 1분도 가만있는 꼴을 못 보는 사람이었다. 님짜는 뺄까. 어차피 혼잣말인데.

 

게다가 일하는 사람들도 너무 보수적인데다 복장 규정도 숨이 막혔다. 항상 검은 셔츠에 검은 정장바지, 검은 신발까지.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많이 했고 커피도 너무 많이 마셨다. 술마시는 회식은 지옥이었다. 사람들은 왜 이 독한 소주에 맥주까지 타 마시는지 모르겠다. 양주는 그냥 식도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마시는 건가?

 

담배는 입에도 안대며 살았는데다 카페인에도 약한데 사람들이 하루에 2-3잔은 커피를 사줬다. 집에서 커피를 안 마시고 나와도 된다니 너무 행복하네. 내가 우는거 같니? 눈이 좋네.

 

예고도 없이 닫힌 정문 때문에 후문으로 또 빙빙 돌아서 출근해 위기관리국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3일 뒤가 새해지? 1월 1일. 지리산에 가야겠어.

 

운동은 꾸준히 했지만 근육도 잘 붙질 않고 피부가 흰 편이라 그런지 근질이 선명하게 보이는 타입도 아니었다. 근력운동은 너무너무 싫었고, 간혹 달리기를 하면 기분이 나아졌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학생때부터 돈을 쉽게 쓰는 성격도 아닌데다 등산과 수영은 큰돈도 들지 않았고 정신없이 하고 나면 몸과 마음이 개운해져 제일 좋아하는 운동이었다.

 

행시 준비는 앞이 보이지 않는 싸움 같았다. 공부라는게 늘 그랬으니까. 일은 말할 것도 없지. 죽어야 일이 끝날까. 그런데 등산은 3-4시간. 진짜 힘든 코스도 10시간이면 끝났다.

 

정상을 찍고 내려온다. 그것도 하루만에.

 

얼마나 짜릿한가. 내려올 수 있어서 더 아름다운 정상. 발이 빠른 편은 아니지만 포기만 하지 않으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남들보다 1시간 정도 더 걸리면 어때. 1시간 더 일찍 출발하면 되지.

 

지리산 정상에서 장관이 바뀌길 기도하는거야.

 

사람이 너무 힘들면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고들 하던가. 아니. 난 정말이지 이성적이다. 난 쓸데없는 미신도 믿질 않았다. 초등학생 때 혈액형, 별자리운세도 안 믿었었고 사주도 한 번도 본적이 없으며 심지어 이름을 빨간펜으로 쓸 수도 있다. 이 얼마나 이성적이야.

 

설악산은 정말 예뻤다. 바위산이어서 새하얗고 바다까지 볼 수 있어서 곳곳이 장관이다. 한라산은 정상석이 제일 크고 멋있으며 제주도가 한눈에 보인다. 게다가 인증서까지 준다.

 

하지만 난 지리산을 제일 좋아한다. 왜냐면 지리산이 제일 크니까. 내가 원래 큰 걸 좋아한다. 게다가 지리산은 머물면 지혜로워진다고 했다. 여기에 오를때마다 어른에 한발씩 가까워지는거 같다. 아직 나는 아닌거 같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공부를 하다 힘이 들 때면 지리산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큰 산 안에 숨으면 아무도 날 찾지 못하겠지. 나의 쓸모를 숫자로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오늘 올라가면서 처음으로 후회를 하고 있다. 아니네. 사실 산을 올 때 초반에는 늘 후회를 했었네.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가지며 올라가 정리할 생각에 음악도 준비하질 않았다. 1월 1일인데 너무 많은 걸 가지고 올라가네. 이거 다 어떻게 버리지. 산이 다 가지고 가주나.

 

정상이 바로 저기인데 다리가 잘 안 움직여진다. 그 와중에 또 한 명이 내 뒤에 붙는다.

 

“바로 앞이에요. 조금만 힘내요.”

 

“감사합니다. 먼저 가세요.”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상 바로 코 앞에서도 누군가에게 따라 잡히다니.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들 부럽다. 아니야. 사실 재수없어. 짜증나고 얄밉다. 나는 느리지 않아. 너희들이 너무 빠르다. 저렇게 빠른 사람들때문에 가끔 같이 빨리 가야할것 같다. 그래서 힘드냐고? 아니. 정상이 바로 앞인데 내가 왜 힘들어. 같이 도착했는데. 그래서 내가 산을 타는데.


속도가 다를뿐 나도 같이 정상이다. 어차피 사진은 많으니 기념으로 정상석 사진만 대충 찍고 주위를 둘러본 다음에 간절히 빌었다.

 

상사 바뀌게 해주세요.

 

그리고 구석에 앉아서 차가워진 김밥을 꺼내 그냥 씹었다. 옆에서 어떤 사람이 건네준 귤을 까먹는데 갑자기 바람이 휙 분다.

 

“추워?”

 

누군가가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담아 건네며 말했다.

 

“아 네. 고맙습니다.”

 

반말은 좀 그렇지만 일단 추워서 받았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물이 다행히 좀 들고 있으니 식어서 홀짝인다. 몸이 좀 따뜻해진다.

 

“혼자 왔어?”

 

“네.”

 

“몇 살?”

 

어이가 없다. 갑자기 나이는 왜 물어. 여자니까 대답해줄게요.

 

“00살이요.”

 

“어려 보이네. 난 조야.”

 

쓸데없이 이름을 말해. 여자에 키 크고 잘생겨서 봐줬다.

 

침묵이 흐르고 불편해져서 자리에 떴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 때문에 일찍 자리에 뜨긴 처음이네. 보통 여자들이랑은 주절주절 말 잘하는데.

 

“줘. 쓰레기.”

 

“아 네.”

 

어정쩡하게 종이컵을 건네고 장갑을 끼고 내려갈 준비를 했다. 이제 내려간다. 많은 걸 가지고 올라왔는데 하나쯤은 사라져 있길. 기왕이면 장관님. 제발.

 

비적비적 내려가는데 끝이 안 보이는 철계단이 야속하다.

 

“파스 있어?”

 

아까 그 여자다. 키 크고 예뻐서 또 보는 재미는 있네. 원래 이렇게 멋있나? 혹시 수영하나? 이 어깨는 접영을 해야 하는데. 쓸데없는 생각이 막 들어온다.

 

“예?”

 

“파스 있냐고.”

 

“아뇨.”

 

“잠깐 여기 앉아봐.”

 

힘 엄청 세. 억지로 나를 끌어 앉히더니 가방을 뒤져 뿌리는 파스를 흔든다.

 

“뭐해. 바지 걷어.”

 

“아 네.”

 

치익 치익. 그러니까 이 소린 파스 소리다.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이 높은 산 때문이고.

 

“감사합니다.”

 

“잘 내려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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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다. 지리산 가려고 했는데.

 

조야는 원래 가려는 시간보다 1시간 늦게 출발했다. 준비물은 늘 간단했다. 에너지바 보온명 파스. 그리고 처음으로 늦게 출발한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 사람이 정상이 코앞인데 나아가질 못한다. 정상 바로 앞이라 너그러워져서일까. 원래 사람들에게 잘 하지도 않는 말을 한다.

 

“바로 앞이에요. 조금만 힘내요.”

 

“감사합니다. 먼저 가세요.”

 

“네.”

 

그리고 앞질러 가려는데 바로 귓가에 따뜻한 말이 들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힘들어서 헉헉 거리면서 말을 건넨다. 새해 복은 그쪽이 먼저 받아야 할 것 같은데.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앞에서 보니 땀으로 젖어있는 얼굴이 참 예뻤다. 어차피 정상에서 만나니까.

 

천왕봉 사진 찍으려면 긴 줄을 서야하는데 일부러 좀 늦게 섰다. 그 사람 바로 앞에 서서 사진 찍어주려고. 어. 나타났네. 그런데 사진 찍는 줄에 서지도 않고 터덜터덜 가더니 정상석만 사진 찍고 구석으로 가서 맛대가리 없어 보이는 편의점 김밥을 무표정으로 먹는다.

 

“야. 저 여자 이쁘지.”

 

“혼자 온거 같은데?”

 

“귤 줘볼까? 말 걸어 볼래?”

 

“야 니가 말 걸어봐.”

 

하여튼 산까지 오면서 이 여자 저 여자 찝쩍대려는 사람들이 문제다. 무슨 일 있으면 다가가려 했는데 별 말 안하고 귤만 받아서 먹는다. 원래 다른 사람들이 주는거 잘 받아 먹나.

 

뭐 줄 것도 없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추운지 몸을 떤다.

 

“추워?”

 

그러니까 그냥 추워 보여서 그랬다. 보온병의 물을 건넸다. 원래 산이란 사람을 너그러워지게 하니까. 저 사람이 예뻐서도 아니고 따뜻하게 인사를 해서도 아니고 추워하니까.

 

“아. 네. 고맙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는데 엄청 경계하는 눈치다. 하긴 혼자 산에 오르면 이런저런 소리 많이 듣겠지. 이래서 저 사람들이 귤만 주고 갔구나.

 

“혼자 왔어?”

 

“네.”

 

“몇 살?”

 

“00살이요.”

 

“어려보이네. 난 조야.”

 

정말이다. 난 나보다 어린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이를 괜히 물어봤나 대답은 해줬는데 되게 불편해하는 눈치여서 얼른 이름을 말해줬다. 별로 분위기가 나아지진 않았지만. 괜히 쓰레기나 받아들었다. 스치는 손이 참 차다. 빨리 장갑 껴야겠네 이 사람. 짐을 싸는데 가방에 새겨진 문구가 눈에 띈다. 00부대 위기관리국. 저 비실거리는 몸으로 거기에서 일 해? 고생 좀 하겠네.

 

천천히 내려가면서 등산 스틱을 바닥에 질질 끌고 간다. 저럴거면 왜 들고 와.

 

정말이지 못 봐주겠다. 그냥 그 때문이었다. 파스나 뿌려주려고. 계단에 앉히니 가만 앉는다. 내가 혹시 밀고 들어가면 밀려줄까. 쓸데없는 생각이네.

 

걷어져 드러나는 종아리가 하얗고 예쁘다. 운동 때문에 좀 부어있지만.

 

“감사합니다.”

 

인사를 잘하네. 이래서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려나.

 

“잘 내려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덕분에 새해복 두번 받았네. 올해는 복 터지겠다. 조야는 뛰다시피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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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출근하면서 나는 그 사람 생각을 하느라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리다 빠져야 할 타이밍을 놓쳐 조금 길게 돌아와야 했다. 다행히 넉넉하게 출발하는 성격 덕분에 지각은 안 했지만 속이 썼다.

 

어제는 산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기름이 다 떨어져 불이 들어왔는데 휴게소를 그냥 지나쳤다. 다음 휴게소가 나올 때까지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모르겠다. 원래 삶을 계획적으로 딱딱 맞춰 살아왔는데 산 정상에서 만난 사람 하나 때문에 이렇게 정신을 놓고 운전을 하나?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며 후회했다. 번호나 물어볼걸. 이름밖에 아는 게 없네. 키도 크던데. 말했다시피 난 큰 걸 좋아한다. 그래서 지리산을 좋아하는 거고.

 

그나저나 내 소원이 이루어졌으려나. 오늘 1월 2일에 인사발령 공지가 걸린다고 했는데. 제발. 산신령님.

 

 

상사들은 그대로다. 바뀐게 없다. 하지만 내 후임이 바뀌었다. 이름이 조야. 조야??

 

잠깐. 나보다 어렸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정말이지 중요한 데서 운이 없는 사람인가보다.

 

 

난 연상이 좋은데.

 

 

 

 

 

 

 

 

이제 고민이 든다.

 

 

 

 

 

 

연하는 어떻게 꼬시지?

 

 

엘산나 무기미도팜 / 남덕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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