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행이 크레베이스 빙괴에서 하얀 옷의 남자를 구해 데려온 지도 벌써 사흘째. 그는 아직도 정신을 잃은 채 계속 자리에 누워있다.

온 몸에서 나던 고열은 조금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정상 체온이라고 말 할 수는 없었으며 가끔씩 홧홧 치솟아올라 다시금 그를 집어삼켰다.

 그럴 때마다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사경을 헤매며 상행의 이름을 끊임없이 불렀다.

 

상행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그의 열을 식혀주고 가끔 허공에서 방황하는 그의 손을 잡아서 진정시켜 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의 진단명은 '과로'.

그리고 굳이 하나 더 덧붙이자면, '상심'.

 

그를 진단해 준 의료대원이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가 설원을 달리다 넘어져 삔 발목에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는 것 뿐.

그를 쓰러지게 한 진정한 원인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가 마음의 상처를 이겨내고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그리 말하였다.

 

그 말을 듣고 상행은 그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분명, 이 사람과 나는 같은 일을 하며 지냈을 터.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눈에 띄는, 검정과 하양의 색깔만 다른 독특한 모양의 옷을 함께 맞춘 듯이 똑같이 입고 다니지는 않을테니까.

아마도 내가 해야 할 일까지 그가 대신 해주다가 몸이 상했음에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상심'... 이라...

나와 이 사람, 어떤 관계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정말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쯤은 알 수 있어. 그야 이렇게나 닮았는걸.

'닮았다' 정도가 아니야. 비록 내가 히스이에서 살게 된 이후로 외모 관리라고는 통 하지 않아서 이렇지, 만약 관리를 했었다면 이 사람과 정말 똑같이 생겼을걸.

이 사람, 나의 가족... 인 걸까. 그런데 내가 그를 제대로 기억해주지 못해서, 이토록 절망한걸까.

그렇다면, 정말로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해주세요.

저는-

 


 " 으으... 상... 행? "

 


 !!!

 


 그 사람이, 드디어 눈을 떴다.

 

상행은 꿇어앉은 자세를 유지하면서 그의 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괜찮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 없이 상행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오랜 침묵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 상행, 나, 배고파. "

 

 " ... 예? "

 

 " 배고프다구. "

 

 " 아, 그, 그렇죠. 사흘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심하게 앓았으니 당연히 많이 배고프시겠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간단한 죽이라도 끓여 올테니까요! "

 

 

상행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식사를 준비하러 움막 밖으로 나갔다. 하행은 허둥지둥하며 나가는 상행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그러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상행, 바보, 멍청이... "

 


하행의 한쪽 눈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하행이 깨어난지도 어느덧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났건만, 상행과 하행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아직도 미묘했다.

 

아니, 숨막힐 정도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틀간, 하행은 그의 배꼽시계가 울릴 때마다 배고파 라는 말 외에는 상행에게 정말로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행은 그런 하행에게 착실히 식사를 가져다 주면서도, 도저히 그에게 뭐라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가 그렇게 자신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이유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삼일째 되는 오늘에서야, 하행이 답답하다며 바람 좀 쐬고 싶다기에 드디어 움막 밖으로 나가서 부락 주변을 함께 산책했다. 그러나 하행은 여전히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 없이 그저 앞만 주시하며 걸었다.

 

상행은 불안했다.

 

 

그가 나에게 너무 큰 실망감을 느껴서, 다시는 나에게 처음 만났던 순간에 보여주었던 그 환한 미소를, 더 이상은 보여주지 않으려는 걸까?

나라는 존재를, 그의 안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려고 하는 걸까? 이제 더 이상, 그런 크나큰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몸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마음은 너무나도 멀기만 하구나. 

다 내 잘못이야. 왜 그에 대한 것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그를 이렇게 마음 아프게 만드는 걸까.

전부 다 내 잘못이야. 그가 나에게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 것도 당연해.

전부,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할 업보인거야.

 

 

상행은 하행에게 보이지 않도록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살짝 훔쳤으나 하행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내딛던 발걸음을 멈추고 하얀 장갑을 낀 두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상행은 그런 하행을 보지 못하고 계속 걸어가다가 같은 속도로 걷던 하행이 어느 순간 그의 옆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하행의 그 모습을,

분노에 가득 찬 모습을 보았다.

 

 

 " 상행!!! 왜 네가!!! 네가 왜!!! 눈물을 보이는거야!!! 정작 울고 싶은, 울어야 할 사람은 난데!!!

 너 때문에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홀로 서럽게 울어왔는데!!!


 그렇게 울면서도, 내가 너무 울기만 하면 어딘가에서 날 지켜보고 있을지 모를 네가 슬퍼할 거라는 생각에, 꾹꾹 눌러서 겨우겨우 참아본 것도 수백 번 수천 번인데!!!


그렇게 온갖 고생을 다 해가며 드디어 만난 너인데!!!

너는 날 새카맣게 잊어버렸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네가 어떻게 이런 식으로 나를 엿먹일 수가 있어?!!

어떻게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눈꼽만큼도 기억하지 못 할 수가 있냐고!!!!! "

 


상행은 갑작스러운 하행의 포효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계속해서 그에게 몸을 숙이며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하며 거듭 사과했다.


결국에는, 구부정한 허리를 아래로 한껏 낮춰 차가운 바닥에 두 손을 갖다대곤, 도게자를 하면서 이마를 몇 번이고 땅에 박아댔다.

상행의 까진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주변에 쌓인 새하얀 눈을 붉게 적셔 들어갔다.

그러나 상행의 그런 처절한 모습은 오히려 하행의 불난 마음에 더 기름을 들이붓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행은 이대로 있으면 분명히, 자신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 형을, 그대로 제 발로 걷어차 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지금, 그러고 싶은 욕구가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 안 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상행과 나와의 관계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틀어져 버리고 말 거야.
참아야 해. 참아, 참아라, 하행. 참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 버려.
내 눈 앞에서, 내 무자비한 폭력의 희생자가 될 지도 모를 형을, 당장 치워버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기라고!!!

 


하행은 자기 마음속에서 스스로에게 내린 명령을, 그대로 따랐다.

 

상행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그를 애타게 부르며 붙잡으려고 했지만 하행이 눈을 부릅뜨고 따라오지 말라고, 또 한 번 눈사태가 일어날 만큼 크게 소리쳤기에, 그를 잡으려 뻗은 한 손을 그대로 다시 제 가슴 앞으로 거둬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그 손을 펴서 자신의 주름진 손바닥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어느샌가 눈물이 터져나와 볼을 타고 줄줄 흐르는 한쪽 눈으로 가져가 꾹 누르며, 하염없이 흐느꼈다.

 

상행의 그 울음소리를, 하행이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무작정 앞으로, 앞으로 걸어나갔다.

 

 



 

 

... 춥다. 정말 지독히도 추워.

 이거, 나름 겨울용 코트인데, 아무리 꽁꽁 싸매도 이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지 못하는구나. 아니면, 내 마음이 텅 비어버려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하... 어느 쪽이든, 추워 죽을 것 같아.

이런 꼴을 보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상행을 찾아다니지 말 걸 그랬어.

진짜 이게 뭐야. 나만 바보가 된 것 같잖아.

아니야, 내가 왜 바보야?

단 하나뿐인 자기 동생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행이 바보지?!

상행은 진짜 바보야. 바보, 바보, 바보, 멍청이!

정말 못됐어. 아주 못되먹었다구!!!

 


하행은 끊임없이 중얼거리면서 새하얀 눈과, 저 멀리 자신이 이전에 가로막혔던 커다란 빙괴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설원을 정처없이 걸었다.

딱히 갈 곳도 없지만, 가만히 멈춰 있다가는 정말로 얼어죽을 것 같은 추위에 그렇게라도 몸을 움직여야만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거기서 더 추워질 리도 없다고 생각한 것도 완벽한 오산.

갑자기 엄청난 눈보라가 몰아쳐왔다.

 

 

우웃, 뭐야?! 무슨 징조도 없이 갑자기 이렇게 폭설이 내리는게 어디있어?! 아으, 돌겠네! 어디 바람이라도 피할 데 없나?!

아, 저기 동굴이 하나 보인다! 저기에 가서 눈이 그칠 때까지 버텨야겠어!

 

 

 그러나 그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는 사방이 차가운 강물로 막혀 있었다.

하행은 점점 거세지는 바람에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도 계속해서 어떻게 해야 저곳으로 넘어갈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때, 저 멀리서 자신에게 익숙한, 그러나 분명 뭔가가 다른 모습의 물고기 포켓몬들이 무리를 이루어서 하행 쪽으로 헤엄쳐 다가왔다.

 

 

엥, 뭐야. 얘낸 분명 배쓰나이인 것 같은데, 배쓰나이의 몸에 나 있는 줄이 흰색인 종류도 있었나...? 아닐텐데?! 분명 적색근과 청색근의 모습밖에 없을 텐데, 내가 지금껏 잘못 알고 있었던건가?

그나저나 잠깐, 저게 배쓰나이라면 나, 지금 엄청 위험하잖아?! 빨리 도망쳐야... 응? 얘내는 딱히 공격적이진 않은 것 같네? 오히려 나한테 뭐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하행은 강가에서 달아나려던 발을 멈추고 자신에게 다가와 고개를 물 밖으로 빼꼼 내밀고서 입을 뻐끔거리며 이리로 오라는 신호를 보내는 듯한 배쓰나이? 들에게로 다가갔다.


다행스럽게도 하행의 걱정과는 달리 그 포켓몬들은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고 몸통 위로 나 있는 두 줄의 하얀 선 사이의 검은색 머리 부분을 자꾸만 강조하며 들이댔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뭔가 회의를 하듯 속닥속닥 거리더니 이내 대열을 맞춰 징검다리를 만들어 동굴로 가는 입구까지 쫙 늘어섰다.


하행은 그 광경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들의 이마를 살짝살짝 조심스럽게 밟아 강을 건너갔다.

 

하행이 강을 다 건너자 배쓰나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지며 물 속으로 사라졌다. 하행은 다시 한 번 그들이 사라진 물 속을 향해 깍듯한 경례를 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동굴 안은 몇 개의 광석 덩어리만 보일 뿐,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나 넓은 동굴이라면, 이 안에 누군가 자리를 잡고 살 만도 할 텐데, 사람은 커녕 포켓몬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뭐, 지금은 그저 눈보라를 피하기 위해 온 것 뿐이니, 나에겐 오히려 잘 된 건가. 확실히 바람이 차단되니, 훨씬 낫네.

불이라도 피울 수 있으면 더 좋을텐데, 지금은 도저히 장작을 구하러 나갈 수도 없고 불 피울 만한 것도 없으니까 그냥 가만히 앉아있자.

 

 

하행은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두 다리를 모아 바닥에 앉았다. 잠시 멍하니 동굴 천장만 바라보다가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눈보라가 그치면 여기에서 저쪽까지는 또 어떻게 건너가지? 또 한 번 배쓰나이들이 와 줄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진주부락이라고 했던가, 그곳 사람들이 설원을 오가며 눈보라를 피할 때 이 동굴을 이용할 법도 한데, 왜 이리로 건너오는 다리를 만들어놓지 않은거야?

... 그러고보니 상행도, 그곳 사람들과 같은 옷을 서브웨이마스터 제복 안에 입고 있었지.

그리고 그곳 사람들이 상행을 부르기를, 캡틴, 이라고 했어. 여기서도 꽤나,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는 것 같던데.

이곳 사람들에게 상행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다른 세상의 사람일 뿐인데 그렇게나 존경을 받는 걸 보면, 역시 저 상행은 내가 알고 있는 그 성실하고, 예의바르고, 모두에게 상냥한, 내가 동경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로 그 상행이, 나의 쌍둥이 형이 분명해.

그런데 그런 상행이, 어쩌다가, 뭣 때문에, 예전의 모든 기억을 잃은거야? 나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던 세상에 대해서도, 심지어 예전의 본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도, 다 잊은 것 같아.

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상행? 또 여기서 어떤 일을 겪었길래, 그렇게 너덜너덜한 차림새가 되어 있는거야? 알려줘, 상행. 그리고, 제발 떠올려줘.


너를, 나를, 우리를!!!

 

 

하행은 또다시 감정이 북받쳐올라 울음이 터져나오려 했다.

그 때-

 

 

쁘쁘잇~!!!

 

 

... 응?!

 

 

 갑작스레 들려오는 어떤 포켓몬의 울음소리에 하행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숙인 고개를 치켜들고 앞을 바라봤다. 눈 앞에는 작은, 색이 다른 은빛의 이브이 한 마리가 하행을 바라보며 복실복실한 꼬리를 좌우로 살랑이고 있었다.


하행은 잠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곧 자신의 손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이브이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그는 이브이를 두 손으로 안아들고 제 품에 폭 파묻었다. 이브이는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쓰다듬는 하행의 그 손길을 즐겼다.

 

 

귀엽다... 귀엽고 보들보들하고 참 따뜻해.

나를 위로하러 와 준 걸까.

 

 

곧, 하행은 이브이에게 자신의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행에 대한 서러움, 자신이 없어도 10년 동안 이곳 사람들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아주 잘만 지내고 있는 것에 대한 심술. 그리고, 다시는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걸까, 하는 입에도 담기 싫은, 생각도 하기 싫은 엄청난 두려움.


이브이는 하행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다가 갑자기 그의 품에서 폴짝 뛰쳐나와 동굴 밖으로 토토톳 뛰어갔다.

 

 

아, 이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람.

그저 놀아달라고 다가온 포켓몬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헛소리만 주절주절 늘어놓다니.

내가 이브이였더라도 지루해져서 당장 도망가 버리는게 당연하지, 으응.

 

 

혼자 후회하고 있던 하행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침 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딱히 하는 것도 없는데 왜 이곳에선 이렇게 배가 자주 고픈거야. 으, 일어날 힘도 없어. 몰라 귀찮아, 그냥 최대한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버티고 있자.

저녁때까지도 내가 안 돌아가면 아무리 상행이라도 잔뜩 걱정하겠지.

나만 이렇게 억울하게 슬퍼할 순 없지!

상행, 너도 맛 좀 보라구!

 

 

그런 심술궂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까 그 이브이가 다시 동굴로 들어왔다. 입에 왠 나무열매를 잔뜩 물고와서, 그가 배가 고픈 것을 어떻게 안 것인지 바로 하행에게 건네주었다.

하행은 고마워하면서 열매를 받아들다가 잠시 의문이 들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이 동굴을 둘러싼 입구에는 열매가 달린 나무라고는 하나도 없었는데? 열매나무 뿐만 아니라 식물이라고는 풀 한 포기조차 보이지 않았어.

그러고보니 이브이는 대체 어떻게 강을 건너서 여기까지 온거지? 헤엄쳐서 왔을리는 없지. 이렇게 온 몸이 뽀송하잖아?!

게다가 아직도 저렇게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데 눈도 그렇게 많이 맞지 않은 것 같아.

마치, 동굴 앞에서 누군가가 몬스터볼에서 바로 꺼낸 듯한,

 

 

?!

 


!!!

 

 

동굴 입구를 쳐다보던 하행의 눈에, 누군가가 황급히 벽 뒤로 숨는것이 보였다.


그러나 숨은 그 사람은 밖에서 불고 있는 거센 바람에 나부끼는, 찢어진 옷자락이 보일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행은 흩날리는 그 초라한 검은 코트자락을 잠시 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풉- 하고 짧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입구 바로 안쪽에 서서 벽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 상행, 이미 다 들켰어! 그러니까 밖에서 눈 맞고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상행이 벽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쭈뼛거리며 차마 들어오지 못하자 하행이 그의 손을 잡아서 안으로 데리고갔다.

 방금 전까지 하행이 앉아있던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브이가, 동굴 안으로 끌려 들어온 자신의 주인의 품으로 폴짝 뛰어올라 안겼다.

하행이 흐음~ 하고 이브이와 상행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니 상행이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 그... 당신 혼자 이 눈보라 속에 내버려두기가 너무 걱정되서요...

 보아하니 데리고 있는 동료 포켓몬도 없으신 것 같은데, 위험한 야생 포켓몬들이 즐비한 이 순백동토에서 홀로 돌아다녔다가는 바로 공격의 대상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제 이브이를 당신에게 맡길게요. 몸집은 작지만 꽤 강한 아이랍니다. "

 

 

상행이 제 품에 안긴 이브이를 두 손으로 잡고, 팔을 뻗어 하행에게로 건넸다.

하행은 가만히 서 있다가 이브이를 받아들었다.

 

순간, 아까전에 땅에 잔뜩 힘을 주어 부딪혀 까져버린, 치료는 커녕 지혈도 하지 않고 피가 말라붙을때까지 그대로 놔둔 상행의 이마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하행은 한 팔로 이브이를 안고, 다른 한 손을 상행의 이마로 가져가 그 상처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 바보 상행. 그 우둔하면서도 착실한 네 성격은, 기억을 잃어도 여전히 변치 않는구나. "

  

" 그, 그랬었나요? "

 

" 그래, 게다가 어정쩡하게 숨는 것도 예전이랑 똑~같고 말이야.

그래서 숨바꼭질 할 때면 항상 너는 어디에 숨어도 찾기가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었잖아.

반대로 난 너무 꽁꽁 숨어버리는 바람에 네가 날 찾는데 꼬박 반나절이나 걸렸고. 그래서 숨은 내가 깜빡 잠들기도 했었지. "

 

  

상행은 자신도 떠올리지 못하는 본인의 예전 이야기를 듣자 기분이 묘해졌다.

동시에 다시금 눈 앞에 있는, 자기자신과 똑같이 생긴 이 사내의 이름과 그와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걸 지금 물었다가는, 조금은 어색하지만 그나마 살짝 풀어진 듯한 그의 심기를 또 건드릴까봐, 차마 그러지 못했다.

 

하행은, 상행의 그 생각을 정확하게 캐치해 낸 모양이었다.

 

 

 " 그러고보니, 나야 당연히 너를 알고 있지만 너는 지금껏 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끙끙댔었지?

 내 이름, 궁금해? 알려줄까? "

 

 

 

상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행은 드디어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난, 하행!(ぼく,くだり!)

너의 쌍둥이 남동생이야!(君の双子の弟だよ!) "

 

 

상행은 그 말을 듣자마자 왈칵 눈물을 쏟았다.

하행은 당황했다.

안절부절하며 왜 그러냐고 물었으나 상행은 끅끅거리는 소리마저 내면서 더 슬프게 울었다.

 

하행은 지난 며칠간 그에게 서러웠던 감정 같은 건 벌써 잊어버리고 지금은 그저 자신 앞에서 엉엉 울고있는 형을 달래주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하행은 상행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상행 역시, 하행의 등뒤에 두 손을 가져가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

 

 

" 하행... 하행... 그렇군요. 저의, 쌍둥이 동생... 그래서 이토록, 많이 닮은 거였군요...! 아아... 저에게도, 가족이 있었던 거군요...! 정말 기뻐요!

지금까지, 이 히스이지방에서 살아가면서, 처음에는 그저 이방인으로서 따가운 의심의 시선만 받았지만 노력하고 노력해서 결국 하나의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았고, 남들 앞에서는 항상 강직한 사람인 것 처럼 보이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해왔고 그렇게 인식되어왔지만,

결국 하루의 모든 일과를 끝내고 제 움막으로 돌아올 때면 삼삼오오 모여 들어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저는 항상 혼자여서, 아무리 가장 작은 움막에서 살고 있더라도 저 말고는 아무도 없는 텅 빈 그 공간이 너무도 공허하고 외로워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운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이제서야, 저도 함께 잠들 수 있는 가족을, 드디어 만났군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하행! 저를 만나러 와 줘서! 그리고 미안해요. 그런 당신을, 기억하지 못해서, 당신을 아프게 만들어서, 정말 죄송해요!!! "

 

 

하행은 그 말을 듣고서 그 역시 눈물이 왈칵 솟아나왔다. 그 이전까지 그가 흘렸던 눈물과는 명백히 다른 의미의 것이었다.

 

 

상행이 지금껏 흘렸던 눈물 역시, 나 못지 않게 많았었구나. 상행도 역시,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구나.

그런데 나는 내 서러움만 생각해선, 그의 기분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성질을 부리면서 심한 말을 하고 말았어.

그 결과로, 이렇게 아픈 피를 철철 흘리게 하고 말았어! 어쩌면 마음 속에도 커다란 멍을 냈을지도 몰라!

미안해, 미안해 상행 형! 정말로 미안해! 기억을 잃은게, 어떻게 형의 잘못이겠어! 형도 그것 때문에 충분히 힘들었을텐데!

 

 

비로소 진정으로 만난 두 형제는, 서로를 함께 얼싸안은 팔에 힘을 더 주어 그동안 상대방이 견뎠을 아픔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계속해서 눈물 흘렸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며 동시에 안을 팔을 풀어 서로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각자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바깥에서 휘몰아치던 눈보라는 그쳐있었고, 은색 털의 이브이는 두 명의 주인을 올려다보며 쁘브잇~ 하고 외치며 두 형제의 주변을 통통 뛰며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다 제 속도에 이기지 못하고 어지러워진 이브이는 빙빙 도는 눈을 하고는 폴싹- 넘어져버렸다.

이브이의 그 귀여운 모습을 지켜보던 두 형제는 울던 것을 그만두고 환한 미소를 띄우다가 결국 깔깔대며 박장대소했다.

정신을 차린 이브이 역시, 머쓱했는지 이가 드러나도록 씨익 웃으며 복슬복슬한 제 목도리털을 꼼작꼼작 만져댔다.



어느새, 눈보라가 그친 동토의 하늘에 청명한 빛이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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