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화는 트리거 요소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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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강변에 도착하더라도 강을 다시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윽,"

울창한 수풀 한가운데 여성의 무릎이 무너져 내렸다. 마차로도 꽤 걸린 거리를 눈에 띄지 않게 숨어가며 뛰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성인 남성을 업고 있다면 더더욱. 여성의 옷에 진흙과 자갈이 묻어났다. 오러를 다리에 둘러봐도 금방 희미하게 번졌다. 피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무작정 강변으로 향하던 여성은 자라드를 잠시 내려놓았다. 당장에 빠르게 달려가도 부족하지만 무리하다 자신이 정신이라도 잃으면 큰일이었다. 

툭-

여성은 바로 옆 바위에 기대어 섰다. 몸에 힘을 푸는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그녀는 당장 자세를 바로 했다.

"하하하하! 이 정도로 약한사람은 아니었는데. 해이해졌네."

풀벌레 소리에 그녀는 죽으려던 때를 기억했다. 달이 손톱보다 얇았던 날에 이곳과 비슷한 느낌의 절벽을 찾아갔었다. 아끼던 검을 더럽히기 싫어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어쩐 일인지 차고 넘치던 의뢰가 뚝 끊긴 시점이었다. 죽음은 한 달 동안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술을 마시다 결심한 일이었다. 비 오는 날마다 왼쪽 손목이 시큰거리는 게 싫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주제 살아있기가 버거웠다. 아무도 저를 찾지 않기를 바랐으면서 정말 찾지 않으니 고독했다. 꽤 오래 모아두었던 돈은 친하게 지내던 마담에게 팁이라며 모조리 안겨줬었다. 마담이 그날처럼 환하게 웃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덩달아 웃었던 기억이 있다. 

"자라드."

여성이 왕의 이름을 멋대로 입에 담았다. 사형 감이었다. 발음이 부드러워 잠든 얼굴에 대고 몇번이나 불러보았다. 뭐, 동생인데 뭐 어떤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자라드, 놓아버리기 직전에야 느껴지는 것들이 있어."

바람이 왕의 은발을 흔들었다.

"네 호위기사는 너무 미련해서 그제야 지독하게 원하는 게 떠올랐다니까. 너…. 너, 호위를 아주 잘못 골랐다고."

여성은 다시 바위에 기대었다. 이번에는 좀 괜찮았다.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래도 갈아치우지는 마. 갈 데 없으니까."

"그럼 경은 집 잃은 강아지 신세군요."

"…"

"그게 무슨…"

'?'

여성은 눈을 떴다. 다섯 걸음 앞에 생글생글 웃는 녹안이 보였다. 폴 아이작이었다.

"너 이 새끼, 언제?"

여성은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오러 없이 그저 날카롭기만 했던 검은 견고한 금빛 오러로 둘러싸인 단도에 가로막혔다.

"이런, 지금은 제가 이길지도 모르겠네요 경."

"닥쳐, 지금 여기서 뭐하려는거지?"

폴은 여성의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러로 검을 부서트렸다. 여성의 몸이 휘청이자 그가 안아 들었다.

"너무 저를 경계하지 마세요. 그리고 경이 먼저 저를 공격하셨잖습니까?"

"뭐 하려는 거냐고 물었어."

 폴은 여성의 태도가 우스운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게 안겨서 하는말이 왜 그렇게 앙칼집니까? 아, 집 잃은 고양이었나."

"헛소리좀!"

여성이 폴을 밀쳐냈다. 딱히 힘이 실려있지 않았으나 폴은 순순히 밀려났다. 그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 숙제도 잘 했고 누구한테 오러 보여준 것도 간만입니다. 제게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금빛 오러는 꽤 예쁜 빛이긴 했다. 하지만 여성이 의아한 건 그 부분이 아니었다.

"숙제?"

"네, 숙제요."

폴이 요사스럽게 웃으며 단도에 오러를 죽였다. 그리고 여성과 눈을 마주쳤다.

"단도 연습. 숙제로 내주셨잖습니까?"

폴이 제 단도를 슥 핥았다. 그 모습을 본 여성이 굳었다.

'단도는 연습을 좀 해.'

설마 그따위 말을 숙제라고 받아들인 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여성은 진심으로 이 남자의 뇌 구조가 궁금했다. 여성이 아무 말이 없자 폴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왜요? 제가 너무 예쁜가요?"

폴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버의 몸이 괜찮은 수준이었다면 폴의 머리는 이미 날아가고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 묻지. 여기 왜 왔지? 내가 업무나 잘 보고 있으라고 했을 텐데. 숙제도 걸러 듣나?"

잠시 가만히 있던 폴이 여성에게 다가갔다. 여성은 등이 바위에 걸려 물러 날 수 없었다. 폴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그의 손이 여성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뭐 하는…"

달칵.

폴은 그녀에게서 투명한 수정을 빼냈다. 

"이럴 때 쓰라고 드린 건데, 왜 사용을 안 하셨습니까?"

"뭘 믿고 네가 준 걸."

"하하! 그렇기에는 너무 잘 가지고 계시는걸요."

폴은 수정을 쥐고 자라드에게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폴이 자라드에게 손을 대려 하자 여성이 막아섰다.

"그만."

폴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경. 제가 뭔 짓을 하려거든 이미 했겠지요."

여성이 무표정하게 쳐다보자 그는 다시 천진하게 미소 지었다.

"이리오세요."

여성은 움직이지 않았다.

"참, 이리 오래도."

그래도 여성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말 안 듣는 고양이네요."

폴은 빠르게 자라드와 여성 사이의 좁은 틈에 끼어 들어갔다. 

챙!

그녀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폴은 수정을 깨트렸다. 곧 주변이 하얗게 점멸했다.







소설 [죽은 장작에게]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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