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정 - 콩딱콩딱

프롬님 :)

민윤기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14




다리를 다쳐서 어떡해. 홀 매니저가 여주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여주가 괜찮다며 빈 접시를 가지러 가긴 하는데 절뚝거리느라 느림보 그 자체였다. 그리고 여주보다 한 발, 아니, 세발이나 빠르게 앞질러 가 일을 자처하는 태형 때문에 여주의 얼굴엔 미안함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내가 해도 된다니까..."

"괜찮아요."

"그럼 네가 내 시급 가져가... 계좌번호가 뭐니."

"괜찮아요, 누나."



내가 안 괜찮다니까 그러네. 여주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윤기는 여주에게 다쳤으니 알바를 쉬라고 했지만, 아직 첫 월급도 받지 못했는데 그럴 순 없다며 책임감을 운운했다. 윤기와 작게 한바탕하고 나왔더니 이번엔 태형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제 신세가 답답해진 여주가 입술을 뾰로통 내밀었다. 의사 선생님이 붕대 일주일만 차고 있으면 된댔으니까…, 미안함에 계속 중얼대는 여주였다.



"야, 여주야. 너 다리 왜 이래? 누가 이랬어? 민윤기야?"



그리고 매일 오겠다는 약속을 그 누구보다도 잘 지키는 정국까지 합세하니 여주는 정신이 없었다. 우리 오빠가 내 다리를 왜 이렇게 만들어. 여주가 인상을 쓰며 쏘아붙였다.



"그럼 누가 이렇게 했는데."

"너야, 너."

"무슨 소리야, 여주야. 나 그런 하드한 취향 아니야."





"나는 너 취향 같은 거 관심 없거든."

"왜~ 관심 좀 가져주지. 미래의 남친이 될 수도 있는데."

"이 미친놈이."

"네가 미친놈이라 해주니까 좋네. 나 하드한 취향 맞나 봐, 여주야."



아아, 말 하나도 안 통해. 여주가 짜증스럽게 정국을 밀치고는 절뚝거리며 홀을 걸었다. 정국은 여주와 보폭을 맞춰 걸으며 계속해서 말을 걸기 바빴다. 태형은 조금 떨어진 채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러니까 여주 누나가 싫어하지.



"너는 언제까지 여기 올 거야. 그만 좀 와. 메뉴 안 질리니?"

"뷔페에 메뉴가 몇 갠데. 괜찮아. 너 보러 오는 거라서."

"그러니까 나를 보러 왜 뷔페까지 오냐고..."

"그럼 따로 데이트 신청해도 돼?"

"안돼."



정국은 퉁명스럽게 내뱉는 여주의 말투조차 귀엽다는 듯 여주의 볼을 주욱 당겼다. 으아, 노라고... 노아... (놔) 여주가 성질을 냈다. 여주야, 너는 성질낼 때가 제일 귀여워. 정국에겐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윤기는 지환의 괴롭힘에 많이 지쳤지만 싫은 내색 한번 보이지 않았다. 그런 덤덤한 모습이 아무래도 지환의 심기를 더욱 거슬리게 한 건지, 텃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윤기와 같이 인턴을 하는 동기들도 왜 저 형이 너한테만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위로했지만, 윤기는 뒷담조차 까지 않았다.



"너 어차피 이따가 볼링인지 뭔지 쓸데없는 수업 들으러 갈 거잖아. 그럼 나머지는 내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

"내가 너 뒤치다꺼리해 주려고 있는 사람인가?"

"죄송합니다."



매일매일 실험실에 나오는 게 아니다 보니, 윤기의 실험을 위해서는 선배들의 도움이 어느 정도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DNA 하나조차도 뽑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과정들이 많은데, 격일로 나오는 학부생 인턴들이 실험을 준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선배들은 후배 양성이라는 목적으로 흔쾌히 실험을 도와주었으나, 윤기의 사수인 지환만은 달랐다.



"볼링 칠 시간에 나와서 실험 하나를 더 배워, 윤기야~"


볼링 수업을 위해 짐을 챙기는 윤기 옆에 서서 계속해서 시비를 걸었지만, 윤기는 그저 묵묵히 가방만 쌌다. 군대에서도 이런 또라이는 없었는데. 석사 3학기생이 예민할 대로 예민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윤기는 그게 다른 이유 때문임을 잘 알았다. 제 여자친구를 좋아하는 전정국이 일부러 괴롭혀달라 시킨 걸 알았지만, 기분 나쁜 티는 내지 않았다. 이건 여주가 절대 알아서는 안되는 부분이었다.



"여주야, 병원 한 번 더 안 가봐도 돼? 내가 업어다 줘야 할 거 같은데?"

"사실 비밀인데 나 몸무게 오백킬로야. 나 업으면 아마 너 그대로 땅속으로 꺼져버릴 듯."

"여주랑 함께라면 지구 내핵까지도 들어갈 수 있는데."



볼링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여주와 정국의 모습은 윤기의 심기를 뒤틀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둘을 지켜보던 승완과 호석이 윤기의 등장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여자친구에게 대놓고 플러팅을 거는 남자를 보는 기분이 좋을 리는 없으니까. 윤기가 굳은 얼굴로 다가가 여주의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있던 여주의 얼굴이 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일찍 왔네, 윤기!"

"응. 뭐 하고 있었어."

"아무것도!"



졸지에 '아무것도'가 된 정국이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여주, 수업 잘 들어. 정국은 오히려 실실 웃으며 여주의 볼을 톡 건드리고는 강의실 앞으로 걸어나갔다.





"왜 쟤랑 있었어?"

"몰라... 자꾸 와. 짜증 나 죽겠어…."

"..."

"미안해…. 내가 더 확실히 쫓아냈어야 하는 건데."



아니야. 윤기가 피식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여주가 얼마나 정국을 밀어내느라 애썼는지는 안 봐도 훤했다. 여주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는 걸 알지만 짜증이 났다. 잘못은 저 새끼가 했는데 굳이 여주와 싸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그 짜증을 여주에게 풀어낼 생각도 없었다. 굳이 굳이 따지자면 유여주가 사랑스럽다는 게 문제일 거다.



"형, 근데 저 체대생은 좀 심한 것 같기는 해요."



여주가 승완과 떠드는 틈을 타 호석이 윤기에게 말했다. 누구보다 윤기가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네가 좀 잘 봐줘. 윤기가 넌지시 말했지만 호석은 고개를 도리 저을 뿐이었다. 살면서 저런 미친놈은 유여주 말고 처음, 아, 아뇨, 형. 여주가 미친 건 아니구요. 호석이 급히 말을 바꿨다.

출석 부를게요~ 강단에 선 정국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퍼졌다. 웅성거리던 강의실이 점차 조용해졌고, 정국은 차례대로 출석부에 적힌 이름을 불렀다. 유여주, 를 부르며 사랑의 총알을 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음 주부터 볼링 수업은 이론이 아닌 실기로 진행됩니다. 크게 과별로 나뉘고, 각 과의 인원이 많으면 교수님께서 한 번 더 나눠주실 거예요. 질문 있으시면 지금 해주세요~"



껄렁거리는 정국의 말에 수영부 학생 하나가 손을 들었다. 다른 과랑 같은 조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나요? 학생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수영부 학생 전체가 킬킬거리며 정국을 쳐다봤다. 나름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여주를 쳐다보는 정국을 보니 윤기는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여주는 본인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윤기에게 꼭 붙어 재잘대고 있었고, 승완과 호석은 한 번 더 윤기의 눈치를 살폈다.





"..."



윤기는 저를 쳐다보는 태형의 시선에서 많은 감정이 교차되었다. 네가 보기에도 이건 좀 과한 것 같나 보지. 윤기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빠꾸 없이 여주에게 들이대는 정국을 지켜보는 것도, 태형의 묘한 시선을 받는 것도. 윤기의 기분을 개같이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윤기야, 나 얘기하는데 왜 자꾸 딴 데 봐. (부들부들)"

"어, 아니야. 뭐라고 했어?"

"오늘 저녁 마라탕 먹자궁ㅎㅎ"



제아무리 유여주의 사랑이 올곧게 저를 향한다 하더라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스트레스였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유여주가 술을 마다하다니~! 호석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당연히 마다해야지. 여주가 가슴팍을 내밀며 당당하게 말했다. 온종일 풀 수업인 목요일이었지만, 저녁만을 오매불망 기다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진로 탐구를 위해 현장학습을 나간 4학년이 곧 돌아올 시간이었다.



>( ღ'ᴗ'ღ )

: 이제 출발한다

: 수업 끝나는 시간이랑 비슷하게 도착할 거 같아



진로 탐구 학습에 윤기를 빼앗겨버리는 바람에 분자생물학도 같이 못 들은 여주는 피가 말라갔다. 윤기랑 같은 강의실에 있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요일을 교수님들이 뺏어가 버렸다 (철저히 여주 입장). 우리 윤기 내놔, 윤기 보고 싶어... 여주가 온종일 쫑알댔다.

이제 형 오신다며. 호석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온종일 쫑알대는 걸 옆에서 듣느라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흥. 호석을 째려본 여주는 올곧은 자세로 대학 영어 교재를 펼쳤다. 사실 윤기가 보고 싶어서 하나도 집중 안 되지만.



옵빠오빵

머 먹을 거야??


>( ღ'ᴗ'ღ )

: 너 먹고 싶은 거


난 오빠가 먹고 싶은 거!


>( ღ'ᴗ'ღ )

: 새로 생긴 즉석떡볶이집 갈까


통했닿ㅎㅎㅎ



주말에 붕대 풀고 술 한번 조지자~! 호석이 강의실을 빠져나가며 소리쳤다. 붕대 풀면 한번 찐하게 마셔줘야지. 사실 오늘 윤기한테 졸라서 맥주 한 잔만 먹자고 할 생각이었지만. 오빠 도착했을까. 여주가 생글거리며 윤기와의 카톡 대화창을 켰다. 그리고 여주의 표정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 ღ'ᴗ'ღ )

: 학교 도착했는데

: 실험실 잠깐만 들렀다 갈게

: 미안ㅠ 앞에서 기다릴래?



대학원 개 나쁜 놈. 여주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혼자 씩씩댔다. 그래도 어쩌겠어. 여주가 과학관 앞으로 향했다. 십 분이면 될 줄 알고 과학관 앞에서 기다린 시간은 어느덧 한 시간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쪼그려있다가도 문이 열리면 혹시 윤기일까 벌떡 일어났고, 묵묵부답인 핸드폰은 고장이 난 건가 싶어 세 번이나 껐다 켰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여주의 얼굴에 점점 그늘이 드리워졌다. 바쁜 거야 알지만 연락 하나 못 줄 정도인가... 앞에서 기다리는 것도 알면서.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마음은 서운함 가득이었다. 마지막으로 카톡 보내보고 답장 안 오면 집에 가야겠다. 여주가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며 카톡을 전송했다.

결국 집에 가기로 마음먹은 여주가 몸을 일으켰다. 떡볶이 포장해서 윤기 집에 가 있을 생각이었다. 유자랑 놀다 보면 늦게라도 오겠지. 오면 제대로 몸통 박치기해줄 거야. 민윤기 완전 미워. 여주가 잔뜩 삐진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까꿍. 여주 어디 가?"



핸드폰만 쳐다보며 걷던 여주가 고개를 들었다. 요즘 너무 내 앞에 나타나는 거 아니야. 여주가 속으로 생각하며 정국을 올려다봤다.



"요즘 우리 너무 자주 만나는 거 아니야? 나야 좋지만."

"..."

"남친은 어디 두고 혼자 가?"



말이 통했다는 건 여주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통했다고 생각하며 들들 볶을 정국을 생각하니 벌써 피곤해졌다. 바람맞았다는 말은 넣어두려다가, 정국의 친한 형이 윤기의 실험실 선배라는 게 떠올랐다. 여주가 눈을 반짝이며 돌아보니 정국이 양손으로 심장을 부여잡는 시늉을 했다.



"여주야. 그렇게 귀엽게 쳐다보면 나 죽어."

"시끄럽구. 너랑 그 친한 석사 오빠 있잖아. 지금 그 오빠랑 연락돼?"

"지환이 형? 그 형은 왜?"

"..."

"설마 민윤기가 실험한다고 너 바람맞혔어?"




"..."



민윤기 안 되겠네, 여주 바람이나 맞히고 말이야~ 정국이 능글맞게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필 들켜도 정국한테 들켰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래도 지금 여주가 유일하게 윤기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여주가 입술을 꾹 깨물며 까치발을 든 채로 정국의 핸드폰을 넘봤다. 어어, 핸드폰 보는 거 금지. 정국이 핸드폰을 머리 위로 들었다.



"아, 보여조."

"기다려봐. 전화 걸고 있잖아. 어, 형. 난데."



여주가 귀를 쫑긋 세웠다. 뭔 놈의 핸드폰 성능이 그리 좋은 건지 지환의 목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여주가 잽싸게 귓구멍을 후비고 다시 까치발을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포기한 여주가 얌전히 정국이 전화를 끊기만을 기다렸다.



"민윤기 실험실 안 왔다는데, 오늘?"

"그럴 리 없어. 윤기가 실험실 갔다가 온다고 했단 말이야. 너 거짓말하는 거지!"

"내가 거짓말을 왜 해. 오늘 너네 과 4학년 현장 학습 뭐시긴가 갔다며. 그래서 오늘 안 왔다는데?"



팩트를 동반한 정보를 전달해 주니 정국의 말에 신뢰가 더해졌다. 순식간에 여주의 눈꼬리가 축 처지며 입술이 댓발 튀어나왔다. 윤기가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는데. 혹시나 뭐 기념일 같은 거여서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실험실에 간척 한 건가? 그렇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기념일은 아니었고, 한 시간이 넘도록 연락이 안 되는 건 심했잖아. 여주가 충격받은 얼굴로 가만 서 있었다.



"남친이 거짓말도 쳤네. 야, 대박이다. 진짜."

"…조용히 해, 너."

"유여주, 울어?"

"…안 울어."

"우는 거 같은데? 너 지금 눈가 엄청 촉촉한데? 눈물 떨어질 것 같은데?"





"아아아아안 운다고오! 하지 말라고옥!"



에잉, 쯧쯧. 여주야,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거야. 정국이 여주의 어깨를 토닥였다. 평소였으면 손 치우라고 어깨를 흔들었을 테지만 윤기를 향한 서러움이 복받쳐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 아, 자꾸 우냐고 하지 말라고…. 옆에서 정국이 자꾸 부추기니 안 나오던 눈물도 흐를 지경이었다. 짜증 나서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붕대를 감은 발은 제 속도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밥 먹었어?"

"..."

"밥 사줄게. 나랑 밥 먹으러 가자."



여주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정국아, 손 치워.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여주야, 붕대는 언제 풀어? 정국이 여주 앞에 수저를 놓아주며 물었다. 21년 살아오며 이렇게 징한 놈은 처음 봤어. 결국 항복한 여주는 먹고 싶었던 즉석떡볶이집에 정국과 마주 보고 앉았다. 언제든 윤기의 연락이 오면 튀어갈 기세로 핸드폰은 테이블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었다.



"내일 풀 거야."

"아팠겠다. 내가 집까지 업어다 줄까?"

"나 이제 잘 걸어."

"아까 보니까 기어가던데?"

"…네가 빨리 걸어간 거야."

"에이. 나 우리 과에서 걸음 제일 느리기로 소문났어."



진짜 한 마디도 안 지네. 여주가 중얼거리니 정국이 씩 웃었다. 원래 미인을 쟁취하려면 그런 거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보글보글 끓는 떡볶이가 나오니 잠시 기분이 좋아진 여주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바뀌는 여주의 표정이 웃겼던 정국은 괜히 여주가 떡볶이에 손대지 못하게 장난을 치기도 했다.



"죽고 싶어? 치워라!"

"떡볶이 보니까 어떻게 표정이 그렇게 확 변해?"

"내가 원래 떡볶이를 제일 좋아하거든. 내 최애 안주야."

"그래? 그럼 술 시킬까?"



정국은 여주가 거절하기도 전에 직원을 불러 소주 한 병을 시켰다. 현란한 동작으로 소주를 따는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다리 다쳐서 일주일 가까이 금주 중인데... 술 먹지 말라고 했던 윤기의 말이 떠올라 거절하려다가, 금방 서운한 마음이 치밀어올라 여주의 표정이 이랬다저랬다 붉으락푸르락했다.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 나 혼자 먹지, 뭐."

"한 잔만 줘!"



그럴 줄 알았다. 정국이 씩 웃으며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둘이서 한 병이면 뭐, 간에 기별도 안 갈 테니까! 여주가 소주를 원샷하고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꼭 윤기랑 와서 먹어보고 싶었는데... 여주의 입술이 댓발 나온 걸 본 정국이 떡 하나를 찍어 여주의 입에 넣어주었다.



"맛있지? 많이 먹어. 오늘 남친 때문에 기분도 안 좋잖아. 맛있는 거 먹고 기분 풀어."

"우웅..."



여주가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정국과의 식사는 멀쩡하게 흘러갔다. 평소에 과하게 장난을 치고 못살게 굴어서 빨리 먹고 튀려고 했는데 의외로 정국은 여주의 식사 속도까지 맞춰주고 있었다. 윤기를 향해 삐죽인 마음을 풀 곳이 없었던 여주가 서운한 걸 쏟아내는데도, 장난도 치지 않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면서.



"근데 지환이 형 보면 대학원 진짜 빡세던데. 네 남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걸?"

"..."

"앞으로 말이야. 최소 2년은 지금이랑 똑같으리라 본다. 원래 대학원 가면 다 헤어지고 그래. 바빠서."





"우리는 아니야!"



구라 치네. 넌지시 말하는 정국의 말에 여주가 할 말을 잃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진짜야, 내가 헤어지자는 말만 안 하면 안 헤어질 텐데, 우리.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애써 말했지만 자꾸만 윤기가 했던 거짓말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실험실 안 가면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민윤기 진짜 미워.

여주는 술을 먹어서 알딸딸했지만 정국과 함께여서 나름 정신줄을 바득 잡고 있었다. 취하면 취할수록 윤기의 얼굴이 선명해졌지만, 여전히 연락이 오지 않는 핸드폰에 이제는 서운함을 넘어서 화가 났다. 오늘 같이 떡볶이 먹으려고 얼마나 기다렸는데. 나쁜 민윤기.

정국은 여주가 다리를 다쳤다는 이유로 집에 데려다주었다. 거의 다 나았으니 괜찮다며 극구 사양하는데도 그랬다. 아직도 민윤기 연락 안 왔어? 정국의 물음에 여주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더 이상 표정 관리 따위는 하지 못했다. 정국의 앞에서 이런 모습 보여주면 나중에 더 흑심 품고 난리 칠 게 뻔하다는 걸 알면서도, 서운함이 앞서는 바람에 그것까지는 캐치하지 못했다.



"여주, 나 가?"

"그럼 가야지."

"집까지 데려다줬는데 뭐 마시고 가라는 말도 안 해?"

"미쳤구나!"

"아~ 역시 유여주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래서 겁나 매력 있어."



씨, 진짜 끝까지! 여주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화를 냈다. 하나도 안 무서워, 여주야. 정국이 배를 접어가며 웃었다. 윤기는 내가 이렇게 화내면 말 들어주던데. 끝까지 드는 윤기 생각에 여주가 고개를 도리 저었다. 오늘만큼은 민윤기 생각은 하나도 안 하기야! (스스로와의 약속)



"들어가. 오늘 재밌었어."

"으응, 나도 생각보다는 재밌었어."

"그럼 다음에 또 데이트할까?"

"아니."



그래, 뭐. 정국이 미련 없다는 얼굴로 여주의 머리를 꾸욱 눌렀다. 나 간다! 잘 가라! 여주가 손을 붕붕 흔들며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 신발을 벗고 입고 있던 후드티를 훌렁 벗으니 그제야 취기가 올라왔다. 정국과 함께여서 바득 잡고 있던 정신 줄이 슉 풀리는 기분이었다. 에휴... 민윤기 미워. 취기가 오르니 민윤기는 더 미웠다.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연락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구. 전화라도 한 번 더 해보기 위해 핸드폰을 찾아 가방 안을 더듬었다. 엇, 내 핸드폰 어딨지. 여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방을 헤집었다. 가방을 까뒤집어 쏟아져 나온 잡동사니 속에서도 여주의 핸드폰은 없었다. 또 어디다가 흘렸나... 술 먹고 핸드폰 잃어버린 전적이 세 번이나 됐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아, 귀찮은데에..."



내일 핸드폰을 찾으러 가야겠다 싶다가도, 윤기와의 연락을 위해서는 꼭 오늘 찾아야만 했다. 연락 안 되면 여주가 답답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으니까. 연락도 안 되는 나쁜 놈 때문에 떡볶이집까지 다시 가야 하다니! 여주가 투덜대며 신발을 꿰어신었다.








진로 탐구 학습의 연장선으로 교수님 호출에 실험실로 불려간 윤기는 일 폭탄을 맞았다. 교수님과의 면담은 잠깐이었지만, 윤기를 물고 놔주지 않는 지환 때문이었다. 학회에 참여해야 해서 바쁘니 본인이 해야 할 모든 실험을 윤기에게 떠넘긴 지환은 휘파람까지 불고 있었다. 끽해봤자 몇 달 되지도 않은 실험실 경력이라 서툴렀던 윤기는 혼이 나갈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형. 이거만 다 하면 되는데."

"아, 그래? 그럼 이거 하나만 더 해주라."

"..."



또다시 앞에 놓인 실험에 윤기는 한숨을 뱉었다. 너 지금 한숨 쉬었냐? 지환의 말에 화를 꾹 누른 윤기가 말했다. 저 여자친구한테 연락 한 번만 하고 올게요. 의외로 지환은 쉽게 허락해 주었다.



>내꺼

: 전정국이 그러는데

: 오빠 실험실 안 갔대

: 어디야?



무슨 소리야

나 지금 실험실인데

한 시간 정도 더 걸릴 것 같아

집에 가 있을래?

끝나자마자 갈게... 미안해 여주



노란 1이 금방 사라지지 않자 안달 난 윤기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한참이나 갔지만 여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안쪽에서 윤기를 부르며 화를 내는 지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씨발, 진짜. 윤기가 두 눈을 꼭 감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퇴근할 수 있었던 윤기는 바로 여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과학관 앞에는 없었고, 승완에게 전화를 걸어도 모르겠다는 말뿐이었다. 여주의 집으로 향하면서 끊임없이 전화를 수십 번 건 이후에야 덜컥,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주야."

- 민윤기?

"...누구세요?"

- 아, 나 전정국인데. 저 알죠? 지환이 형이랑 친한~



그쪽이 왜 여주 전화를 받아요. 윤기가 우뚝 멈춰 선 채 사납게 말을 뱉었다. 여주 지금 우리 집에서 자고 있는데요. 어, 깼다. 끊을게요~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리는 정국의 웃음소리에 윤기의 이성이 뚝 끊겼다.

지체 없이 뛰어간 여주의 집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알고 있는 비밀번호를 눌렀지만, 헤어졌을 때 비번을 바꾸고 아직 되돌리지 않은 탓에 계속해서 경고음만 울렸다. 다시 여주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정국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개새끼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허공에 고함을 내지른 윤기가 일단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지환에게라도 전화해 정국의 집 위치를 물어볼 생각이었다.



- 정국이 집? 모르겠는데.

"형. 저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 아니, 내가 모르겠다는데 왜 나한테 지랄인데. 전정국이 뭐 했냐?

"그 새끼가, 하. 아니에요. 끊겠습니다."



이 미친놈이…! 지환의 말은 중간에 뚝 끊겼다. 아, 제발. 윤기가 여주 집 앞 골목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 싸맸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평소에 이성적이던 머리는 하나도 돌아가지 않았다. 유여주가 걸리니 머릿속이 새하얘져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아쒸, 핸드폰 어따 흘린 거야……."

"유여주!!!!"



엄마야. 윤기? 여주가 화들짝 놀라 그대로 굳었다. 떡볶이집에서도 핸드폰을 찾지 못해서 시무룩했던 여주의 얼굴이 윤기를 보고 환해졌다. 그렇게 서운했는데, 그래도 윤기 얼굴을 보니 기분은 좋아진 거였다.



"오빠, 오늘 어디 갔,"




"너 미쳤어?"

"뭐...?"

"아무리 애같이 산다지만 그렇게 생각이 없어? 어떻게 거기 갈 생각을,"



여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서운한 건 난데 왜 윤기가 이토록 화를 내는 건지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눈물부터 차올라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애같이 산다니. 잊고 있었던 과거의 상처가 다시 떠올랐다. 여주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띄엄띄엄 말을 뱉었다.



"왜, 화를 내. 거짓말, 흡, 한 건, 오빠잖아. 그리고, 애 같다고, 하지 말랬잖아. 내가, 그거 싫다고…,"

"이렇게 네 멋대로 할 때마다 나도 돌아버리겠다. 울지 마. 내가 더 울고 싶어."

"..."

"진짜 내가 어디까지 맞춰줘야 되냐, 여주야."



얼굴 봤으면 됐으니까 들어가. 처음 보는 윤기의 차가운 눈빛에 여주가 말을 잇지 못했다. 서운한 건 난데, 나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 거 같은데…. 변명을 내뱉을 새도 없이 윤기가 뒤를 돌았다. 어디 가는데에!!! 뒷모습에 대고 소리쳐도 윤기는 뒤 한번 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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