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아침은 빨리 온다. 온통 하얗기 때문일까 해가 나기 시작하면 금세 훅 밝아지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 하얀 설원이 햇빛을 반사하고, 빛이 창문을 통과해 침실까지 들어왔다.

 

“후우...”

 

발코니에 서 코끝을 시리게 하는 차갑고 투명한 공기를 들이마시던 리리아는 등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제 어깨에는 굵은 실로 짠 두터운 숄이 둘러져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리리아 아가씨.”

“고마워요, 엘마. 곧 아침식사 시간이죠? 식사 준비가 되면 말해줘요. 시간 맞춰 내려갈게요.”

“알겠어요, 아가씨.”

 

얇은 잠옷 차림의 리리아가 걱정되어 숄을 둘러준 엘마는 그녀가 북부의 아름다운 새벽을 조금 더 감상할 수 있도록 뒤로 살짝 물러났다.

 

“아, 공작님이다.”

 

그때, 누군가를 발견한 리리아가 발코니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저 멀리서 햇빛을 받은 금발이 반짝였다. 며칠 전과 똑같이 얇은 셔츠 차림의 디어노레인 헤스턴 공작이었다.

 

목에 수건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고 방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얇게 입고 있으면서 춥지도 않은 걸까..리리아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을 때였다.

 

“아, 후훗..”

 

찰랑이는 금발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리리아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기척을 느낀 디어노레인이 그녀가 있는 발코니 쪽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 엘마. 공작님께선 늘 이 시간에 연무장에 들르시나요?”

“그럼요, 하루도 안 빼먹으신답니다. 새벽까지 업무를 보고, 3시간 정도 잘까 말까 해요. 누구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분이에요.”

 

이 제국에서 가장 일찍 아침이 온다는 북부에서, 가장 빨리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 디어노레인은 부지런하고, 쉴 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몬스터 크러쉬에는 기사들하고 교대로 성문도 지키셔요. 참 부지런하고 좋은 영주이시죠.”

“그렇게나..힘드시지 않을까요..?”

“글쎄요. 이곳 헤스턴에서 나고자란 사람들에겐 익숙한 일상이랍니다. 영주님은 헤스턴의 가주이니, 힘들어도 버틸 때가 있겠지요.”

“.....”

 

리리아는 애정이 가득 담긴 눈을 하고서 담담한 말을 내뱉는 엘마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조용히, 누군가를 떠올렸다.

 

“리리!”

“괜찮아, 리리. 넌 내가 지켜.”

“괜찮단다..울지 마렴.”

 

편지 한통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여동생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을 사람.

 

‘오라버니..’

 

북부의 공작님.

 

03화. 그녀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와인을 한모금 넘긴 디어노레인이 물었다. 마찬가지로 와인 잔을 든 리리아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표시를 했다.

 

“네. 아주 맛있어요.”

“다행이군요. 많이 드십시오.”

“감사해요.”

 

북부의 음식은 몬스터 고기를 베이스로 한 육류 위주의 식사로, 무척 기름졌다. 남부의 곡식 및 과일 위주의 식사와는 상차림부터가 달랐다.

때문에 수프를 먹은 첫날이 지나가고, 처음으로 함께 만찬을 들게 된 리리아는 조금 놀랐다.

 

다만 기름진 고기는 지방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어, 높은 풍미를 자랑하니 금방 그 맛에 적응할 수가 있었다. 해산물과 채소 위주의 식사만 해왔던 리리아도 어느새 육류를 즐기게 되었다.

 

“남부의 라스티나에 저택이 있다고 하셨죠.”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디어노레인이 꺼낸 이야기에 리리아는 굳어버렸다. 하지만 곧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시다면 저택의 정확한 위치를 저희에게 알려주시겠습니까? 그곳의 사람들에게 당신이 헤스턴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합니다.”

 

디어노레인은 아주 정중한 태도로 비비안 가의 저택의 위치를 알려달라 부탁했다.


“저..공작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잠깐의 침묵 끝에 리리아가 입을 열었다. 갸날픈 목소리가 잔뜩 떨리고 있었다.

 

기탄 없이 말해보라며 미소 짓던 디어노레인은 잘 먹고 잘 쉬어 겨우 뽀얗게 만든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고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큼성큼 움직여 긴 식탁을 가로질러 다가온 그가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무슨 일 있는 겁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

“..집에 돌아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침묵은 곧 긍정이다. 디어노레인은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리리아를 보고 확신했다. 꿇었던 한쪽 다리를 펴고 자세를 똑바로 한 디어노레인이 할스를 불렀다.

 

“할스. 비비안 백작가에 대한 조사는 중단한다. 재개하라는 명이 있기 전까지는 대기를 하라는 소리네. 알아듣겠나?”

“예, 각하.”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 되었다. 디어노레인이 뒤돌아 리리아에게 다가왔다. 리리아는 쿵쾅쿵쾅,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리리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당신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들 헤스턴의 사람들은 당신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겁니다.”

 

아..심장이, 다시 일정하게 뛴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부드럽게 풀리는 게 느껴졌다.

 

“리리아. 괜찮습니까? 아직 표정이 안 좋은데..”

“아..”

 

긴장은 풀렸지만 표정이 굳어있나 보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특, 정신 차린 리리아의 눈에 찰랑이는 금발이 들어왔다.

 

“어쩌지...아, 혹시 얼음에서 스케이트 타본 적 있습니까?”

“.....”

“없다면 내가 가르쳐줄게요. 꽤 재미있어요.”

 

찰랑이는 금발처럼,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짓는 디어노레인은 꼭 소년 같아 보였다.

 

두근, 두근, 심장이 또 다시 세차게 뛰었다.

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


어느새 노을이 지는 시간이었다. 디어노레인의 손에 이끌려 성안의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다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이다.


리리아는 저녁 먹기 전에 꽁꽁 언 몸을 녹일 겸 목욕을 하기로 했다. 욕조 한가득 담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밖으로 넘쳐흘렀다.


따뜻한 물을 이렇게 마음껏 써도 되는 걸까..


리리아는 붉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어깨까지 찬 물이 일렁였다.


며칠 전 목욕 때마다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주는 것에 놀라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물었을 때는 엘마와 할스, 공작까지 전부 웃었지만...


북부는 얼음과 불이 넘쳐나서 생각보다 따뜻한 물이 귀하지 않다며 한참을 웃었다. 그러고는..


참 귀여운 질문이네요.


따뜻한 물 만큼이나 따뜻한 대답을 해주었다.


북부의 사람들은 따뜻한 난롯불과 같았다. 디어노레인 공작을 닮은 것일까. 처음이라 서툰 저를 세심하게 배려해주고, 실수해도 절대 나무라지 않는다.


잘하고 있어요. 점점 더 잘하게 될 겁니다.


북부에서의 생활은 무척 즐겁다. 너무 따뜻하고 포근해서 계속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북부의 주인은 곧 떠나갈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고, 그를 꼭 빼닮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손님을 가족과 같이 여긴다.


홧김에, 도망치듯 온 곳이지만 진정한 고향에 온 것처럼..편안하고 좋았다.


하지만..결국 돌아가야겠지..


하지만, 결국 저는 돌아가게 될 것이다. 비비안 백작가의 일원은 얼마 뒤면 하나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리리아. 안에 계십니까..? 저입니다. 저녁식사 준비가 늦어진다고 하여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디어노레인이었다. 듣기 좋은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이 문 너머에 있다. 답이 없자 디어노레인은 다시 한 번 똑똑똑, 노크를 했다.


리리아? 계십니까?

“잠시만요- ,


리리아는 급히 목욕 가운을 입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은 뒤 문을 열었다. 놀란 듯 눈이 커진 디어노레인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리리아..?


아..죄송해요, 공작님.

모..목욕 중이셨군요..헌데 어째서 엘마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겁니까?


가운차림의 리리아를 본 디어노레인이 고개를 돌린 채로 물었다. 귀가 터질 것 같이 달아올라 있었다.


혼자 목욕하고 싶어서 엘마한테 부엌에 내려가 보라고 했어요.

그랬군요..알겠습니다.


상황설명을 듣자 이해했다는 듯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디어노레인은 꽤 귀여웠다. 리리아는 어느새 미소 짓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장난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놀라신 것 같네요.

예...안 놀랄 수가 없죠. 아무튼..실례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저녁식사 때 다시 뵙죠. 몸이 식고 있으니 얼른 들어가십시오.


여인의 가운차림을 보는 게 처음이라서 당황한 걸까, 디어노레인은 다급하게 다음을 기약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리리아가 붙잡았다.


차 한잔 들고 가세요, 공작님.

리리아..?

드릴 말씀이 있어요.


디어노레인은 자신의 손목을 붙든 하얗고 자그마한 손을 바라보았다. 곧 문이 끽 소리를 내며 닫혔다.


**


비비안 백작가는 조만간 귀족 명부에서 지워질 거예요.


자리에 앉아 찻잔에 차를 따르기가 무섭게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찻잔을 놓칠 뻔한 디어노레인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담담한 얼굴의 리리아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조부님에겐 아들이 제 아버지 한 명뿐이었고, 아버지는..어머니와 함께 10년 전 마차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비비안 백작가에 남은 일원은 리리아 당신이 유일한 겁니까?

아니오.


예..? 그렇다면..디어노레인의 얼굴에 잠시나마 의문이 스쳤다.


오라버니가 있어요. 루카스 비비안. 제 유일한 혈육이죠. 그리고..


그날의 디어노레인은 리리아 비비안의 두 눈에 슬픔이 스미는 것을 보았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루카스 오라버니는, 곧 죽을 거예요. 불치병에 걸렸거든요.

.....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는데..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주 자리에 오르고, 이때다 싶어 저희 가문을 공격하는 사람들로부터 저를 지키려고 무리를 하는 바람에...


아아, 그건..찰나에 스쳐지나간 슬픔은, 유일한 혈육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체념에서 나온 것이었구나.


디어노레인은, 그녀가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저 아리따운 얼굴에 스미는 감정이 고작 두려움과 슬픔 따위라니.


..리리아.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루카스 비비안에게 혈육은 없냐거나, 혹 없다면 양자를 들이라고 권해볼 생각은 없냐거나..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그는 전부 삼키고선 물었다.


만약, 그대의 오라버니가 죽어 그대가 가주의 자리를 승계해야 한다면. 할 겁니까?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으냐고.


..모르겠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부터 제게 가문은 족쇄 같기만 했으니까요. 늘..도망치고 싶었고, 무리를 하는 오라버니를 보는 것도 너무 힘겨워서..


버티고 버티던 고개가 수그러졌다. 물기가 잔뜩 어린 목소리는 금방 흐느낌으로 변했다.


는..저는, 저를 백방으로 찾고 있을 오라버니에겐 미안하지만..가문을 위한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요..

.....

오라버니가 죽을 날만 기다리기도 싫고, 그깟 가문을 위해 가주의 자리에 올라야 하는 것도..이제 허울 뿐인 가문인데..


두 손에 얼굴을 묻은 리리아는, 그대로 한참을 흐느꼈다. 그녀가 그동안 속으로 삼켜야만 했던 불안과 슬픔, 힘듦을 전부 토해냈을 무렵.

디어노레인이 입을 열었다.


리리아. 저는 그대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다 알 수는 없어도, 일부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저 또한..어릴 적에 부모님을 잃고 홀로 살아왔으니까요.

.....

자신을 지켜주던 안락한 세계가 깨질 때의 그 괴로운 느낌을 압니다.


굳은 살이 마디마디 박힌 단단한 손이 작고 하얀 손을 감쌌다. 조심스레 턱을 받친 손이 부드럽게 뺨을 매만졌다. 고개를 들자 연한 갈색의 온화한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은 흔들림 없이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이번 일은 어쩌면 당신의 오라버니께 크나큰 상처를 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네..?

그대의 오라버니, 루카스 비비안은 지금쯤 단 하나뿐인 동생인 그대를 찾고 있을 겁니다. 아주 간절히요.


디어노레인은 놀란 얼굴의 리리아를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나뿐인 가족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이루길 바라는 게 있다면, 그건 옳은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중한 사람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

그대가 가주 자리를 승계하지 않고 싶어, 아무 말 없이 북부에 온 것이 그대의 가족에게 상처를 주었다면..그건 그대의 잘못인 겁니다.


갈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꼭, 빨려들어갈 것 같아서..리리아는 두려웠다.


리리아. 원하는 만큼 이곳에 머물러도 됩니다. 하지만, 더 이상 후회할 선택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디어노레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 리리아를 끌어당긴 그가 품속의 그녀에게 속삭였다.


결심이 서면 말씀하십시오. 편지지와 깃털펜, 잉크를 넉넉하게 준비해두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마법사도.


다정하고 강한 사람. 후회할 선택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견을 굽히지 않는 사람.


..네.


리리아 비비안은 그런 그가 지금 이 순간 자신과 함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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