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인

도시국가 헤일로, 에버블루 마을, 필리컬 스트리트 13, 아디아포라 저택

아디아포라 일동



친애하는 아디아포라의 여러분에게.


안녕하세요, 비비입니다. 평온한 봄바람이 최근 리베라 서던크로스의 만개한 꽃을 가볍게 흔들고 있습니다. 늦은 추위로 꽃잎에 눈이 내려앉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런 눈마저 모두 녹아 꽃을 적시는 양분이 되었지요. 헤일로에도 그만큼 따스한 봄이 도래하였는지 궁금합니다. 모쪼록 아디아포라의 앞마당에도 늘 그러하였듯이 꽃망울을 다채롭게 피웠기를, 또 피워가기를 바랍니다.


지난 편지에 대한 답장이 늦어 심려를 끼치진 않았을까 우려스럽습니다만, 아디아포라에서 온 답장도 그 지난번 제 편지를 보낸 후 일곱 달 만에 온 것으로 기억합니다. 허니 이번 답장이 일 년쯤 가지 않은 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리라 여깁니다. 보낸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 편지일 터이니 꼭 답이 하루 만에 온 듯이 느껴지겠지요. 결단코 제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출가 후 17년 만에 첫 편지를 먼저 보냈으나 그 답이 일곱 달이 지나서야 와, 그 보복으로 편지를 늦게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아디아포라의 구성원 일동이 헤일로에서 맡은 바 일이 있듯이 저 역시 저의 소임을 다하느라 바빴을 뿐입니다.


이쯤에서 여러분께서는 지난 편지로 제가 놀고먹는다는 것만 아셨을 텐데 무슨 일을 하느라 바쁜지 궁금하실 것으로 사료됩니다. 우선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여기서 저의 아침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물고 늘어질 포르테 누님께 말씀드립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놀랍게도 스트레칭부터 시작해 가벼운 운동을 합니다. 네. 운동이요. 비록 비비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어리고 귀엽고 말랑말랑하긴 해도, 저도 건강을 챙길 나이가 되었음을 모두 아실 겁니다. 물론 자발적인 행위는 아니었습니다만. 이후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진 후, 아침을 먹습니다. 슬프게도 제가 아는 가장 훌륭한 쉐프께서 부재중이어서 열심히 (이 단어에 의문을 제기할 라르고 누님께, 다시 한번 앞선 코멘트를 전합니다.) 밥을 해 먹어야 하죠. 같이 사는 사람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제가 요리파괴왕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지나친 사생활의 공개는 상호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마땅히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상의 내용만으로도 제가 무척이나 바쁘고 보람찬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셨을 겁 (이후 약간의 잉크가 떨어진 흔적과 여백) 니다. 펜을 들고 있는 채로 다른 사람의 말에 반응하는 건 정말 좋지 않은 습관이라고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때 이 어쩔 수 없음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 고작 잉크 자국 따위로 새 편지지를 꺼내기엔 전 물자의 소중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둘, 지금 공방 나와서 일하는 척하고 편지 쓰고 있는 거라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면 제가 땡땡이치고 있는 걸 들키지 않겠어요? 그러므로 이런 저를 견디세요.


아, 그러고 보면 공방 하니 생각난 일입니다. 헤일로에 있던 저의 공방은 십 년이 넘도록 정리하시지 않고 아디아포라에서 소유하고 있었다는 말을 최근 헤일로에 다녀온 가족에게서 확인받았습니다. 그 건물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국가의 재산으로 귀속되게 하지 않고 번거롭게도 건물을 인수 하여 그대로 두었다면서요. 대체 왜 여러분께서 그런 비효율적인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없지만, 그건 지난 편지에서 답을 받았듯이 아직 아디아포라가의 저택에 제 방이 남아있는 것과 동일한 이유겠지요. 언제나 제게 그런 ‘쓸모없는’ 일을 왜 하느냐고 말씀하신 가족들의 행동과 불일치하지만…


네, 사실 모르지 않아요. 여러분께서 저를 무시만 한 게 아니듯이, 감정 또한 무시할 수 없잖습니까. 그걸 어머니도, 아버지도, 두 누님께서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저는 여러분과의 관계 개선을 포기하고 집을 나왔고, 심지어 헤일로를 떠나며 아디아포라마저도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십 년 동안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음에, 저 역시 감복하여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거고요. 하하, 지금쯤 제 기울임꼴 글씨를 보며 성질머리가 여전하다며 혀를 차는 포르테 누님이 상상이 갑니다. 사람이 어떻게 쉽게 변하겠습니까. 저를 사랑하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걸 여러분이 39년간 지속해온 것도 그러한 연유인 것을. 지금도 저를 당신들의 주관에서 판단하기 어려워하면서도 어떠한 가족으로서의 애정을 제게 보내기 때문에 일 년 만에 온 편지를 읽고 계시잖아요? 물론 이 변하지 않음의 예시에는 제가 여러분을 외면한 십 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을 어느 한 편으로는 사랑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효력을 발휘함도 포함됩니다. 여전히 외면한 것을 마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제 면상 대신 종이를 보고 계시지만요. 피차일반이니 이를 두고 너무 책망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마땅히 전해야 할 말은 전합니다. 사랑하는 아디아포라의 가족분들께, 저를 사랑하였음에, 그러므로 저를 포기하지 아니하였고 또 저를 위하여 헤일로에 반기를 드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뿐으로, 제가 집을 나오며 일방적으로 끊어내어 지워버린 관계에 제대로 마침표를 찍으려고 합니다. 다음 문장이 시작되는 조건은 이전의 문장을 끝내는 것이니까요. 새로운 문장을 가지고 올 편지는 모쪼록 일곱 달보다는 빨랐으면 좋겠군요.


예전처럼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이 멋지게 꼬아서 격식 있는 편지의 어투를 보면 아시겠지만 말이에요. 아니었다면 직접 찾아가서 얼굴을 비추지 귀찮게 펜을 들었겠습니까. 저는 여전히 변함없이 비비입니다. 그러하나 비비가 비바체의 애칭이 아닌 온전한 이름 비비로 불리는 저는, 여러분께 퍽도 낯설 것입니다. 이것이 이름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영민하신 여러분께서는 아시리라 믿습니다. 사람은 단지 주변에 있는 이가 달라지는 일만으로도 다른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변화라 부르기보다, 저는 차이라고 부르렵니다.


그래요. 이곳에서 저는 가끔씩 바람을 맞고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으냐고 누군가에게 말합니다. 성야제에 가장 큰 나무를 모두가 다 같이 꾸미고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과할 정도로 화려한 장신구를 홀로, 혹은 함께 만들어 이곳저곳을 장식합니다. 종종 한데 모여 춤을 추고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십니다. 또 많은 나날에 제 삶의 동반자와 둘이서 머나먼 곳을 여행하고 눈과 머리에 추억을 담고 함께 오지 않은 이들을 위한 기념품을 삽니다.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의 이름에서 아디아포라가 떨어져 나가 다시 붙지 않을 이유입니다. 납득하시겠지요?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저는 모든 존재하는 삶에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여깁니다. 살아간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 어떠한 생조차도 단지 하나의 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고 긍정 받아야 함을 알고 있다고요. 그러므로 친애하는 오래된 가족 여러분, 이따금 폄훼되었으나 이따금 인정받은 비바체 아디아포라의 생 역시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하나의 생입니다. 저는 그것이 저의 삶에서 없었어야 하는 시간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뿐입니다. 그리고 그뿐인 이야기기에, 저는 다시 한번 더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 편지에 선물이 동봉되는 이유입니다. 이 역시 납득하실 수 있겠지요?


이전의 나날 중 언젠가에 저의 새로운 가족 중 한 명에게 그가 제게 가진 애정만큼의 이야기보따리와 함께 선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달을 닮은 귀걸이에요. 그 사람은 제게서 달을 떠올렸다고 했고, 또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했으며… 그러므로 저 역시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달이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도 언제나 달은 떠 있듯이, 언제나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마음 한 켠은 행복이 자리 잡기를 바랐다고요. 여러분께 보내는 꽃을 테마로 한 액세서리 한 세트는 이에서 무관하지 않은 의미입니다. 한 번 진 꽃은 다음 해에 또 새로운 꽃을 피워내지 않습니까. 비록 이것이 이전번에 진 꽃은 아니더라도, 여러분에게는 그것이 중요치 않으리라 여깁니다. 새로 핀 꽃에 기뻐하고, 새로 핀 꽃을 가꾸고, 다시 그 꽃이 지면 아쉬워하다가, 이듬해에 또다시 피는 꽃에 기뻐하잖아요. 그거면 충분하기에.


제 사견으로는 귀걸이 한 쌍은 라르고 누님께, 목걸이는 포르테 누님께, 반지는 어머님께, 팔찌는 아버님께 어울릴 것을 추측합니다만, 뭐 알아서들 나누십시오. 각각 한 명당 한 세트가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저는 우선 앞서 말한 대로 매우 바쁘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로는 귀찮습니다. 어쩌겠습니까? 한 세트를 만드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여서 더 이상의 액세서리 제작에 영 기운이 나지 않는 것을.


이제 할 말이 떨어졌습니다. 효율을 중시하는 여러분께서 여기까지 한 번에 꼼꼼히 읽으셨을까요? 아니면 한 번 후루룩 훑고 중요하다 싶으면 다시 읽으셨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비비 비바체가 여러분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바쁜 아디아포라를 위한 편지의 한 줄 요약:

비비는 지금의 가족들과 굉장히 잘 지내고 있으며, 동봉하는 장신구는 아디아포라의 여러분을 위하여 한 세트 직접 만들었으니 알아서 나눠 써주기를 바람.


쓰고 보니 두 줄이군요. 앞서 길고 우아하게 편지를 써서 손에 쥐가 난 비비는 이만 짧은 인사말로 편지를 마무리해야겠어요. 많이 행복하시고요, 원하는 만큼 건강하세요. 저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1838년 4월 15일

애정을 담아, 비비 올림


추신. 저의 교양있는 말투에는 제 몸속에 들어있는 제 가족 중 한 명의 영혼의 일부가 (그리고 그와 늘 대적하는 또 다른 가족에 대한 기억이) 도움을 줬답니다. 재미있었죠?



발신인

리베라 서던크로스, 입구로부터 28번째 건물, 비비&유리 공방

비비 비바체




Tmi: 잉크 자국은 이후의 화제를 위해 일부로 흘렸다. 비비가 일하면서 땡땡이를 치는 건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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