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 어떻게....이 시간에....” 

“가슴이 두근거려서 일을 할 수 있어야 말이지. 이상하게, 딱 이 밤에. 자기가 여기 있을거 같더라고.” 


며칠 못 본 사이 더욱 희어진 장영휘가 귀신처럼 붉은 입술을 끌어올려 웃고 있었다. 살이 내린 건지 가뜩이나 퇴폐적인 얼굴이 처연한 미모까지 발산하고 있어서 그 와중에도 나는 충격을 받았다. 


“너....” 

“이제 좀 살거 같다. 자기 보니까.”


더없이 상큼하게 웃는데 기가 질렸다. 


“미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뒤돌아 미친 듯 뛰었다. 


“거기 서.” 


장영휘의 쉰듯한 목소리에 귓가로 소름이 죽 내달렸다. 

나는 건물 반대편으로 나가 달렸다. 뭐지? 갑자기 장영휘가 보이지 않았다. 

놈이 건물을 가로질러 쫓아올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다. 

그게 더 공포스러웠다. 


“서! 정우수!” 

“미쳤나? 서란다고 서게?!” 


내가 버럭 화를 내자 장영휘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게 보였다. 


“자기야, 너 그 놈이랑 뭐 했어? 아니,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나랑 가자. 지금 잡혀주면 다 용서할게.”

“웃기지 마! 용서는 개뿔! 해도 내가 해!” 

“우수야, 잘못했어. 건물로 들어가지 마. 차라리 여기 내 앞에서 도망쳐.” 

“뭔 개소리야!” 


건물로 들어가면 너한테 잡히는데. 내가 미쳤냐?


하지만 장영휘는 나보다 발이 훨씬 빨랐다. 가로등 아래 허연 머리칼을 휘날리며 날 잡으러 오는 놈의 모습이 미치도록 무서웠다. 그때부터 시야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오직 아스팔트 길과 막다른 건물 뿐이었다. 저기 사선관! 


저기는 콘서트나 강연회를 하는 곳이었다. 


<성공한 동문의 밤 -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사람의 상반신 사진과 플래카드가 건물 앞이며 문에 잔뜩 걸리고 붙여져 있었다. 강연 중인가? 에이씨. 


그때 등 뒤로 장영휘의 숨소리가 들릴 듯 가까워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헉! 자기야 잡았!” 


나는 사승관의 자동 유리문을 열리자마자 그곳으로 뛰어들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당의 두꺼운 가죽문을 열었다. 

장영휘 니가 뛰어들어와도 시커먼 강연장 안에서 날 찾기는 쉽지 않을 거다.


“응?” 


문이 열리자마자 시커먼 어둠이 날 감쌀줄 알았는데.

밝은 빛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무대 위의 조명이었다. 설마 이거 또?! 


나는 공구만의 배 안에서 상품이 되어 조명을 맞던 게 생각나 몸을 떨었다. 여기 대체 뭐야.


“헉....”


수백명의 관객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무대를, 정확히는 무대에 난입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긴 아까 그 성공한 어쩌고 하는 동문의 밤 강연회장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남의 강연장 무대에 난입한 거다. 


다른 의미로 등줄기가 싸했다. 


뚜벅-뚜벅-뚜벅-


그때 내 앞으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이 강연장의 주인공인 듯했다. 


“허억...헉...허억....” 


숨소리를 죽이려 해도 장영휘에게 쫓기며 뜀박질하던 몸은 좀처럼 평온해지지 않았다. 최대한 숨을 죽이며 뒷걸음질 칠 때였다. 


발소리가 정확히 내 앞에서 멎었다. 


“아니, 저 죄송합니다. 제가 일부러 그런-”


“찾았다.” 


남자의 나직하고도 묵직한 목소리가 내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 


차은성은 모교인 한국대 강당 무대에 서 있었다. 그는 수백 명의 학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여러분도 노력하면 하늘이 나를 돕는다는 말이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하늘이 나를 돕는다.’


차은성도 그렇다고 느꼈다. 


3년 내내 2등만 하던 영재 중학교에서 어느 날 1등이 병에 걸려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싸우기 힘든 상대와 고전을 거듭하다 그 상대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리고 수많은 회사의 위기마다 해법을 찾아낼 때. 


세상에 대해 비교적 일찍 파악한 차은성은 남들과는 확연히 다른 발군의 재능을 보여주면서도 적당한 미소와 겸손한 태도가 주변에 제 편을 만들기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우쳤다. 


이미 난 집안에서 태어나 상향 평준화된 기대에 부응하고 밝은 낮의 세계에서는 유능한 젊은 기업가로, 어두운 밤의 세계에서는 잔혹하고 머리 좋은 보스로 살아왔다. 


무엇이건 노력하면 가질 수 있다. 그것이 차은성의 신조였다. 하지만 노력이라는 인내 없이 가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재미가 없었다. 

남들보다 월등한 신체나 두뇌를 가진 대신 차은성은 차가운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빠져본 적도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다. 오직 눈앞의 일과 제 조직, 대한염창건설의 사업을 키우는 것만 관심이 있었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소한 싸움이라던가 불법적인 일은 제 알바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차은성은 칼에 찔렸다. 그날 세상이 바뀌었다. 차은성이라는 사람이 가진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무언가로 채워졌다. 칼에 찔린 후 자신을 구해준 누군가 때문이었다. 


정우수. 


잠시 품에 들어왔던 그 작은 아기새 같은 아이. 소년이라기엔 너무도 남자답고 어른이라기엔 아직 개구쟁이 같고 여린 그 모습. 

찹찹한 말투와 조금은 성질 더럽게 생긴 새침한 생김새. 우람한 어깨와 숫사슴같이 긴 목 튼튼해 보이는 몸은 왜 그렇게도 한 줌에 잡힐 듯 가녀려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얼굴은 또 얼마나 예쁜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을 구해줄 때 보여주던 그 침착함과 똑똑함. 

아니, 그런 건 사소한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차은성은 정우수를 본 순간 심장을 칼에 찔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비현실적인, 느낌이라는 것이 차은성의 실체인 몸을 쥐고 흔들었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흔히 그것을 세상에서 사랑이라 불렀으나 차은성은 그런 건 믿지 않았다. 


그저 갖고 싶었다. 정우수를. 가져야 했다. 


차은성은 정우수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노력했으나 소득이 없던 경험 또한 난생 처음이었다. 전국 1등도, 각종 스포츠 대회의 금메달도 모두 노력하면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정우수는 증발한 것처럼 찾을 수 없었다. 


혹, 그가 제 강연을 보러와 주지 않을까 해서 수락한 한국대학교 성공한 동문의 밤. 

스케줄을 쪼개가며 강연 자료를 직접 준비했다. 정우수가 볼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 노력은 보상받았다. 지금 바로 제 눈앞에서. 

강연의 막바지가 되어갈 때 쯤이었다. 


“노력해서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 


“허억....허억....허억....” 


갑자기 무대로 난입해 눈앞에서 거친 숨을 내쉬는 아름다운 정우수. 

이번에도 하늘은 나를 도왔다. 

차은성은 환희에 젖어 작게 전율했다. 


“찾았다.” 


정우수를 무대 뒤로 몰며 차은성은 관객석을 향해 말을 남겼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차은성은 강당 안으로 날아온 작은 새를 꼭 껴안았다. 


이제 다시는 너를 놓지 않을 거야.

차은성은 무대 뒤의 캄캄한 어둠으로 사라졌다. 


***


어둠 속에서 나는 어떤 남자에게 안겼다. 숨이 막혔다. 잘 단련된 단단한 팔이 내 허리와 등을 강하게 짓눌렀다. 


“읍 이것 좀!”

“나는 운이 지독히도 좋은 놈이군요. 정우수씨.”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목소리 어디서 들어봤는데! 


“저기 놔주세요. 강연 망친 건 죄송합니다. 근데 제가 빨리 가봐야 해서요.”


장영휘가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 같아 내가 속삭이자 남자가 말을 막았다.


“혹시 쫓기고 있습니까.”

“네. 그러니까 좀 놔주세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통수부터 싸늘하게 식는 감각이 느껴졌다. 

눈앞이 훤하게 밝아졌다.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남자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미친. 이 와중에 얼굴 진짜 잘 생겼네.


“강연은 끝났습니다.” 


남자가 무어라고 속삭였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당신은 강연을 망친 게 아니라 완성했습니다.”


뜻 모를 말을 듣자마자 나는 갑자기 기절했다.


***


“허억!” 


갑자기 의식이 돌아오며 눈이 번쩍 떠졌다.

 

“일어났습니까.”

“누, 누구, 어!” 


내 눈앞에 한 남자가 슈트 차림으로 서서 날 내려보고 있었다. 다행히 장영휘는 보이지 않았다. 


“차은성입니다. 당신이 구해준.”

“네? 그런데 여긴 어디에요?” 


날 구해준 건 이 사람인 것 같은데. 당신이 구해준이라니? 여긴 낯선 방안이었다. 내가 누운 곳도 거대한 킹 사이즈 침대였다.


“여긴 내 집입니다.”

“지, 집이요?” 


당황한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쫓기는 것 같아서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집으로 바로 데려오시는 건.....”

“갑자기 기절하는 바람에 의사를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그랬지. 나는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꼭 누가 때린 것처럼 아파왔다. 하지만 혹은 만져지지 않았다. 


“혹시 제가 왜 기절을 했을까요?”

“거기까진 모르겠군요. 갑자기 기절하는 바람에 놀랐습니다.” 


언뜻 무표정해 보였지만 남자의 당황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나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제 이름을 아세요?” 

“난 당신에게 목숨을 빚진 차은성입니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데? 

“차은성...차...아! 아아!” 


골목에서 칼맞고 쓰러졌던 남자!


내가 당황해 손가락질 하자 남자가 내 손가락을 감싸 잡으며 천천히 내려주었다.


“맞습니다.”

“와...그때 엄청....이제 배는 괜찮으세요?” 

“덕분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큰 상처도 남자에게 흠집을 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왜일까. 내가 구해준 사람인데도 본능적으로 이만 자리를 뜨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사하시다니 다행이네요.”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현기증에 머리가 찡 울렸다. 


“흑!” 

갑자기 닥쳐온 통증에 나는 이불을 쥔 채 신음했다. 


“정우수씨? 고개 들어보세요. 괜찮습니까?” 


남자가 내 머리를 잡고 살며시 들어올렸다. 


“!” 


머리의 통증도 잊었다. 


<장영휘에게서 정우수님을 차은성이 구해주었습니다. 이 남자와 난관을 헤쳐나가보세요>


모처럼 보는 시스템 창이 남자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뭐?! 

나는 후다닥 남자에게서 물러났다. 


“아,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요. 죄송합니다.”


나는 허공에 눈을 부릅뜬 채 시스템 창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남자는 그럴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뒤돌아서 뭔가를 가져왔다. 


“차 들어요.”


뭐가 뭔지 몰라 얼떨떨하고 있는 내 앞으로 침대 위에 놓을 수 있게 다리가 있는 탁자가 놓였다. 나는 차를 앞에 두고 앉아서 차은성 이라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산넘어 산이라더니.

장영휘 다음에 공구만, 다시 장영휘.

그리고 안젤로의 집으로 도망쳐서 시스템이 더 이상 뜨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뭔가 이 장난 같은 상황도 끝이 아닐까 혹시나 기대라도 했던 걸까. 놀람이 가시고 나자 머리가 복잡했다. 

언제까지 이 신의 장난 같은 짓거리에 놀아나야 하지? 갑자기 공포가 밀려왔다. 


그때 차은성이라는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내 정신을 깨웠다. 


“춥습니까? 떨고 있군요.”


장영휘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달리 아나운서처럼 또렷하면서도 낮아서 편안했다. 


“아뇨 괜찮...에취!”


나는 입을 막았다. 여기서 기침이 나올게 뭐란 말인가. 그러자 남자가 내 몸에 이불을 둘러주었다. 


“제가 할게요.” 

“기침 계속 하는데 입이나 막으세요.” 

“읍. 네.”


나는 이불을 쓴 채 남자가 준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고맙습니다.” 


뜨끈한 차가 목으로 넘어오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어느덧 시스템 창은 사라졌지만 나는 아까 그 문구가 눈에 박힌 것처럼 선명했다. 

하지만 왜? 내가 이 사람과 난관을 헤쳐나가야 하는 걸까.


“혹시 내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남자가 내게 묻자 내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무 빤히 쳐다본 모양이다. 

“아뇨. 아닙니다.”

“많이 지쳐보이는군요.”

“.....” 

“우수 씨를 쫓는 사람이 장영휘 대표입니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와 나는 차를 뱉을 뻔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전에 산속 한옥 식당에서 장영휘 대표와 만나던 날 당신을 봤습니다. 그곳까지 일부러 올 일반인은 없죠.”


산속 한옥식당? 혹시 장영휘가 슈트 입은 날 말하는 건가? 그때 나를 봤다고?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니 일단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 그러셨구나.”


그나저나 그곳까지 올리가 없는 일반인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결국 내 눈앞의 이 사람도 일반인이 아니라는 소리니까. 

나는 비장하게 침을 삼키고 물었다. 


“저, 그럼 차은성씨도 사채업을 하시나요?”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날카롭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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