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업하면서 수정하긴 했습니다만 트위터 스타일 인칭, 써방 단어 및 오탈자 여전히 많습니다. 






다음 날 5시, 학교 앞 커피XX. 훈은 5분 정도 일찍 도착하여 음료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 있었음. B는 10여분이 지난 후에야 나타났음. 


"내 껀 안 시켰어?" 

"내가 니 껄 왜 시켜." 

"흠... 어제 충분히 잘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말귀가 어두운 편인가보구나, 너." 


B가 훈의 앞에 놓인 음료를 제 앞으로 가져갔음. 


"아직 입 안 댄 것 같은데. 내가 마실게." 


훈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B는 대답이 필요없다는 식으로 행동했음.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에이드를 쭉 빨아들인 B가 훈을 타박했음. 


"이 집은 자몽에이드가 맛있는데. 잘못 시켰네." 

"됐고, 용건이 뭐야." 


훈은 머리가 아팠음. 주말동안 쉬기는커녕 잠도 제대로 못 잔데다가 신경성 위염이 도져 약까지 먹은 참이었음. 앞에서 깐족거리는 B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듣는 건 정말 고역이었기에 어떻게든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음. 


"선배랑 다시 잘 되고 싶어?" 


방심하던 차에 B가 훅 치고 들어왔음. 훈은 갑자기 목이 탔음. 그러나 제 몫으로 시켰던 에이드는 이미 B가 들고 있는 상태. 제 앞에는 잔 모양 물기만이 테이블 위에 동그랗게 남아있었음. 


"그렇다고 한들,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왜 상관이 없어?" 


B가 환하게 웃었음. 


"설마... 형이랑..." 

"그 표정은 뭐야. 난 뭐 선배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거야?" 

"..." 

"와. 얘 봐. 부정도 안 하네." 


그래, 안 어울려. 사실 B가 아니라 그 누구라 해도 훈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단 옆에 있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음. 차라리... 여자면 몰라. 


"아직 사귀는 건 아냐." 


그 말에 훈이 번쩍 고개를 들었음.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훈이 아는 단이라면 헤어진지 며칠만에 새로운 사람을 끼고 나타날 사람이 아니었음. 


"근데 곧 그렇게 될 거야." 

"...뭐?" 

"지금까지 내가 맘먹고 달려들어서 못 먹은 탑이 없거든." 


B는 자신만만했음.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에게서 나오는 여유였음. 그게 자신감이든 자만이든, 훈에게는 없는 것이었음. 


"그러니까 너 말야, 괜한 미련 보이면서 선배 옆에 다시 알짱거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니가 뭔데 그런 말을..." 

"너, 생각보다 많이 멍청하다." 


B가 씹고있던 빨대를 툭 놓았음. 잘근잘근 씹혀 끝이 엉망이 된 빨대가 훈 쪽을 향했음. 


"내가 기댈 구석 하나 없이 너한테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해?" 

"기댈 구석?" 


B가 제 폰을 훈의 앞으로 들이밀었음.  


"니가 이걸 어떻게..." 


단과 훈의 셀카였음. 단의 폰으로 찍었던. 그냥 일반적인 셀카라면 문제될 건 없지만 이건... 침대에서 찍은 것이었음. 상의를 벗은 단이 얇은 홑이불로 몸을 감은 훈을 뒤에서 껴안고 있는 자세. 훈의 목덜미는 확대하지 않아도 온통 불긋했음. 열에 달아오른 몸. 흐릿하게 풀린 눈. 누가 봐도 관계 후 사진이었음. 


"선배가 보내줬으니까 내가 갖고 있지." 

"형이... 너한테 보내줬다고?" 

"어. 술 많이 마셔서 좀 정신이 없긴 했지만. 너랑 헤어진 얘기 하다가." 

"..." 

"남자랑 자는 거 생각보다 좋았다고 하면서." 


잠시 숨이 멎었음. 훈은 저도 모르게 테이블 위에 놓은 손을 파르르 떨었음. 


"잘 들어. 박지훈. 어쭙잖게 미련 떨면서 선배 근처 알짱거리면," 

"..." 

"이거 선배 얼굴만 가려서 학교 대숲에 올릴 거야." 

"뭐...?" 


B는 핸드폰을 주머니로 집어넣으며 빙글 웃었음. 


"그러니까 알아서 잘 처신하라구. 학교 제대로 다니고 싶으면." 


B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 마신 음료를 훈 앞으로 밀었음. 표면에 맺힌 물기가 잔의 궤적을 따라 흘렀음. 


"난 선배 필기랑 과제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먼저 가볼게. 쓰레기 좀 버려줘." 


B는 들어왔을 때처럼 팔랑거리는 걸음으로 카페를 가로질러 나갔음. 경쾌한 종소리가 울리고 훈은 그제야 고개와 함께 눈물을 떨궜음. 잔 속 얼음도 덜걱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음. 


B가 단에게 받았다고 한 셀카는 사실 단과 라멘을 먹으러 갔던 날, 단이 화장실 간 틈을 타 B가 제 폰으로 몰래 전송한 사진이었지만 -- 단과 훈이 여기까지 알 수는 없었음. 


*


우주대 학생들 사이에서 묘한 소문이 돌았음. 온오프를 막론하고 수군수군. 주인공의 이름이 바뀐 것은 아니었음. 그 내용이 조금 변했을 뿐. 발단은 대숲에 올라온 익명 제보였음. 다들 아시는 공대 남신님 도서관 자리에 용기를 내어 음료수와 쪽지를 올려두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먼저 자리로 돌아와선 쪽지를 쫙쫙 찢어버리고 음료수도 챙겨가버렸다는. 너무 황당해서 이거 그쪽 드리는 거 아닌데 왜 이러시냐고 따져 물었더니 임자 있는 사람 건드리지 말라고 쪽을 주며 웃었다고 했음. 그분 여친 생긴 줄 몰랐고, 설령 있다한들 그분이 직접 거절할 일이지 지인이라는 사람이 대신 나서서 그렇게 무안을 주는 건 무슨 경우냐는, 다분히 저격성 제보였음. 


댓글은 엉망진창이었음.

 - 그분 여친 생겼대요?ㅠ 

- 제대하고 쭉 없어서 은근 좋았는데 망했네. 

- 근데 걔 최근에 여자랑 있는 거 본 적 없는데 (같은 과임) 

- 같은 과라도 사생활 다 아는 건 아니니까요 

- 어쨌든 저 지인인지 뭔지 되게 짜증난다. 엄청 무례하네요. 

- 나 걔 알 것 같은데ㅋㅋ 요새 엄청 붙어다니더라구요. 


아무튼 이 글 이후로 단에게 들러붙는 시선이 훨씬 집요해졌음. 대체 누가 공대 남신의 여친일까, 하는 호기심. 덩달아 B까지 주목을 받게 되었음. 팔이 나을 때까지 과제나 일상생활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거의 하루종일 붙어다니기 때문이었음. 단은 이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다며 매번 거절을 했지만 B는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음. 자신 때문에 다친 거니 비용도 제가 내야 한다며 병원 갈 때도 옆에 붙었고, 교양수업의 레포트를 타이핑 해준다며 단의 집에 들락거리기도 했음. 심지어 손에 물 들어가면 안 된다고 단의 집 싱크대 속 라면 냄비까지 설거지 해줄 정도. 단도 점점 B에게 익숙해졌음. 사실 이렇게까지나 싹싹하게 잘 맞춰주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었음. 애정 관계를 떠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게다가 단은 타인에게 부채 의식이 생길수록 더 다정해지는 성격이었으니. 단이 깁스를 푼 다음 날에도 단은 B와 점심을 먹었음. B는 드디어 훈의 자리를 완전히 잠식했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었음. 


이때쯤 소문에 날개가 붙었음. 단과 B가 사귀는 게 아니냐는 추측. 술자리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돌던 말들이 점점 온라인으로 올라왔음. 그도 그럴 것이, B가 단을 보는 시선과 그에게 던지는 제스처 등이 절대 평범한 동성 선배를 대하는 것이 아니었음.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내숭을 부리며 수줍어하는 얼굴. 농담을 던져놓고 오히려 제가 부끄러워 하며 팔뚝을 가볍게 때린다든지, 은근슬쩍 옷깃을 잡으며 매달린다든지. 묘한 기류는 한두 번이 아니었고 보는 눈도 한두 개가 아니었음. 결국 이름만 안 썼다 뿐이지 누군지 훤하게 보이는 글이 커뮤에 올라왔음. <공대 걔, 여친이 아니라 남친이 있는 것 같은데?> 


글은 순식간에 뜨거운 감자가 됐음. 동조하는 댓글, 반박하는 댓글, 이런 거 명예훼손이라며 진지하게 반응하는 댓글, 이때싶 미확인 썰을 푸는 댓글 등. 한 시간만에 수백명이 달려들어 단을 물어뜯었음. 훈 역시 곧 이 상황을 알게 되었음. 동기 한 명이 대놓고 훈에게 물었기 때문이었음. 너 그 선배랑 친하지 않았냐고, 그 선배 진짜 그쪽이냐고. 수업 직전, 교재를 펼치고 있던 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펜을 떨어뜨렸음. 앞자리 여자 동기가 웃으며 펜을 주워줬음. 기계처럼 고맙다고 말하며 고개를 푹 숙이는데, 훈에게 질문을 던졌던 동기가 대답을 재촉했음. 물러날 곳이 없었음. 


"아..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나도 요새 그 형이랑 잘 안 만나서.."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떨렸음. 더이상은 무리다, 싶었을 때 앞문으로 교수님이 들어왔음. 훈은 수업에 집중하는 척 자세를 틀며 마른 눈물을 삼켰음. 강의가 끝날 때까지 훈은 꼿꼿한 자세로 앉아 칠판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에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음. 그저, 단이 걱정되어 미칠 것 같았음. 



그 시각 단은 온과 낮술을 하는 중이었음. 공모전 준비로 정신이 없던 온마저도 학내에 도는 소문을 알게될 정도니 사태는 심각했음. 그러나 온이 걱정했던 것보다 단은 훨씬 덤덤한 얼굴이었음. 


"너 어떻게 된 거야." 

"뭐가요." 

"몰라서 물어?" 


단은 대답없이 소주를 들이켰음. 


"너 지훈이랑은 어떻게 된 거야." 

"......" 

"...헤어졌어?" 

"네." 


덤덤한 표정만큼이나 깔끔한 대답이었음. 온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납득을 했음. 겉으로는 둘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잘 사귀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음. 그러나 말로 잘 설명할 순 없지만 -- 저변에 깔린 비대칭적인 애정을 온은 보았었음. 올 것이 왔었구나. 온 역시 잔을 쓰게 들이켰음. 단은 자기 잔은 자작한 주제에 온이 혼자 마시는 것은 만류하며 빈 잔을 채워주었음. 이 쓸데없이 착한 놈. 온은 혀를 찼음. 


"야, 그럼 B는 뭐야? 진짜로 지훈이랑 헤어지고 걔 사귀는 거야?" 

"아뇨." 


이번에도 칼같은 대답이 돌아왔음. 온은 이 짧은 대화만 가지고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눈치를 깠음. 애초에 B의 속셈을 먼저 알아챈 것도 온인지라.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단과 훈의 이별에도 B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음. 


"그럼... B는 뭐야?" 

"뭐긴요. 그냥 동아리 후배죠." 


온은 피식 웃으며 단의 잔을 채워주었음. 


"그냥 동아리 후배랑 염문설이 나냐? 너는?" 

"진짜 그냥 후밴데 소문이 그리 나는 걸 어쩌라구요..." 


단이 또 원샷. 소주 한 병이 벌써 다 비어갔음. 손님 없는 김에 사장님도 쉬러 들어가셨는지 홀이 텅 비어있어서 온이 직접 한 병을 더 가져왔음. 


"그니까, 내도 참 어이가 없어요." 

"그래 나도 어이가 없다." 

"정작 훈이 사귈 땐 아무 말도 안 나왔는데..." 

"그만큼 너네가 조심한 거지." 


단이 새 술을 땄음. 유리병의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단이 실소를 흘렸음. 


"형. 나는요, 지훈이 사귀면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 전혀 안했어요." 

"..." 

"들켜도 상관없다 생각했고. 오히려 들키면 좋지. 안 그래도 걔 인기 많은데 임자 있다고 도장 꽝꽝 찍으면 내사 좋죠. 근데 지훈이가 밖에서 티내는 걸 너무 싫어하니까, 엄청 참은 거였어요." 

"그건 지훈이가 현명한 거야." 

"맞아요. 그게 현명한 거죠. 근데 그냥... 사귀는 내내 기분이 그랬어요. 나는 좋아하는 감정이 넘치고 흘러서 주체할 수가 없는데... 걘 표도 안 날 정도로 숨길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감정인 건가. 사실은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닐까." 

"뭔 개소리야. 너네 닭털이 너한테서만 날렸겠냐 설마." 

"그쵸. 아예 안 좋아하는데 사귀진 않았겠죠..." 


술병을 집는 단의 손을 온이 말렸음. 야 좀 천천히 마셔. 안주는 놔뒀다 고사 지낼래? 육회는 싱싱할 때 먹어야지. 단이 술 대신 물을 들이켰음. 벌컥벌컥. 빈 스탠 잔이 테이블을 울렸음. 단의 머리 역시 온에게 정수리를 보이며 풀썩 떨어지고. 


"근데 딱 그 정도였던 것 같아요. 아예 안 좋아하는 건 아닌데, 막 좋아하는 건 아닌."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아니, 사실 나도 알아요." 

"뭘." 


단이 고개를 들며 씁쓸하게 웃었음. 

"B가 저 좋아하는 거요." 

"헐."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데, 모를 수가 없죠." 


단이 드디어 안주 한 점을 집어먹었음. 하얀 볼이 오물오물. 온은 한숨을 쉬었음. 


"그래서, 걔랑 사귈 거야?" 

"아뇨. 걘 그냥 후배라니까요." 

"그거 어장관리인 건 알지?" 

"그런가..." 

"그렇지." 


잠깐의 정적이 흘렀음. 단이 온의 잔을 채웠음. 그리고 뜬금없는 건배. 


"근데... 기분이 나쁘진 않더라구요." 

"뭐?" 

"누가 나 그렇게 좋아해주는 느낌이 나쁘진 않아서. 아니, 오히려 좋아서... 지훈이도 이런 기분으로 나를 옆에 뒀나 싶어요." 


그리고 또 원샷을 때렸음. 온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음. 이런 건 자존감이 낮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음.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제가 알던 단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하는 건지. 생각보다 곪아있는 단의 상처를 본 온은 문득 깨달았음. 이건 타인이 껴들 문제가 아니었음. 어디까지나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 특히 지훈이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문제였음. 온은 어쭙잖게 조언을 건네고자 했던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며, 말없이 술병을 기울였음. 단의 빈 잔이 다시금 가득 찼음.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어느 가을날의 오후였음. 


*


훈이 몇 번이나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즐겨찾기 연락처를 띄웠다 내렸다 하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음. 큰 일교차 때문에 수업 전체에 감기가 한 번 돌기도 하고. 도톰한 아우터를 꺼내야 할 계절이 왔음. 겉으로 봐서 훈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 여전히 모임의 중심에서 주목을 받았고, 지인들에게 생글생글 웃어주었고, 관심과 애정에 파묻혀 있었음. 


그러나 사람들과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간 훈은 항상 현관문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음. 침대까지도 갈 수 없을만치 방전된 훈은 그 차가운 바닥에 멍하니 앉아있곤 했음.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기도 했음. 멀쩡히 다 써놓은 레포트에 결정적으로 이름을 안 쓴다거나, 과목 이름을 틀린다거나. 그런 훈의 옆에서 실수를 바로 잡아주고 바른 길로 끌고 다니는 건 동기 참이었음. 요새 왜 이렇게 넋이 나가 있는 거냐며 타박을 해도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은 훈에게 참은 답답함을 느꼈음.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동기고, 애가 천성이 나쁜 애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답답해도 어떡하나. 그저 데리고 다니면서 술도 먹이고 단 것도 채워주며 친구 그 이상의 도리를 다해주고 있었음. 


그렇게 참에 이끌려 나간 술자리에서 선배들과 새벽까지 달리고, 일요일 정오 무렵에야 일어난 훈은 타는 듯한 갈증에 냉장고를 뒤적이다가 집에 마실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음. 1학기 초에는 가끔 있던 일이었음. 그러나 단과 사귄 후로는 집에 음료가 떨어지는 일 따윈 전혀 없었는데. 훈은 쓰리는 속을 부여잡고 눈물을 쏟았음. 냉장고 앞 장판이 어둡게 물들었음. 


제 손으로 물을 샀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음. 요 앞 큰길 편의점에서 6개들이 생수를 살 때마다 훈의 집 것까지 사서 채워주던 단이었음. 어디 생수 뿐인가. 술자리 나가기 전에 꼭 마시라며 사다준 숙취해소제. 맛없어서 숙취해소제는 잘 안 마신다고 했더니 이건 망고 맛이라 괜찮을 거라며 다음 번엔 웬 노란 포장의 제품을 박스 째로 갖다줬었음. 4개들이 수입맥주, 딸기 우유, 커다란 요구르트에 아이스크림.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편의점 봉투들. 훈은 반대로 자신이 그에게 평소 무엇을 주었는지를 생각해보았음.  


- 없었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훈은 제 자신에게 화가 났음. 이래서야 붙잡을 명분도 없고, 동정심에 기댈 건덕지도 없었음.  


한참을 울어 빨개진 눈가를 비비며 집을 나섰음.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해장을 하고. 6개들이 생수를 사서 나오는데, 그새 비가 내리고 있었음. 아까 나올 때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더니 계절갈이를 하는 것 같았음. 우산도 사야겠네.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려 몸을 트는 순간, 팔을 당기고 있던 무게감이 사라졌음. 


"아..." 


빗속에 서있는 인영을 보는 순간 외마디 감탄사를 흘렸음. 


"이거 써라." 


한 손엔 제게서 뺏어든 생수를 들고, 또 다른 손으론 장우산을 내밀고 있는 단. 훈은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무어라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음. 


"그럼 형은 어쩌고." 


그래서 고작 한다는 말이 이따위. 훈의 건조한 음성에 단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우산을 든 손을 한 번 더 내밀어 재촉했음. 


"가방 안에 우산 하나 더 있다." 


거짓말은 아니었음. 훈이 장우산을 받아들자마자 크로스백에서 이단우산 하나를 꺼내드는 단이었음. 버튼을 누르자 자동으로 펼쳐지는 우산. 펼치는 걸 도와주려고 단 쪽으로 뻗었던 훈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음. 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음. 정신을 차린 훈이 급하게 그 뒤를 따랐음. 


"형.. 우산은 고마운데.." 

"..." 

"생수는 내가 들게. 무겁잖아." 


골목 어귀. 단이 갑자기 걸음을 멈춰섰음. 기대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음. 훈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단의 뒤에 얌전히 섰음. 이윽고 천천히 돌아보는 고개. 우산 아래로 보인 하얀 얼굴엔 웃음기가 없었음. 


"그래, 그럼." 

"..." 


단은 생수 꾸러미를 훈에게 건넸음. 다시금 묵직해지는 오른손의 감각. 훈은 제 손에 들린 12리터의 무게감을 믿을 수가 없었음. 훈에게 짐을 건넨 단은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음. 그립던 얼굴도, 널찍하고 편안했던 어깨도 우산 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멍청히 서있는 훈 앞으로 장대비가 꽂히기 시작했음. 


*


온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매우 바쁜 학기를 보내던 중이었음. 취업으로 진로를 결정한 이상 다음 학기는 무조건 인턴을 뛰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노리는 회사의 공모전 당선이 필요했음. 입대 전 빵꾸난 학점도 급했고 운좋게 승인받은 경영 복전도 팀플 때문에 빡셌음. 


그러던 사람이 공모전 팀 약속을 미뤘음. 지난 번엔 팀플도 깼었는데. 후배 두 명이 돌아가며 속을 썩이는 통에 애꿎은 선배 등만 터져나가는 셈이었음. 어딜 가든 핵인싸였던 온에게 씨씨 두 명이 동시에 상담을 요청하는 것 정도야 뭐 지금껏 없던 일은 아니었음. 그 씨씨가 둘 다 남자 후배라는 점이 특이사항이었을 뿐. 


온은 제 앞에 엎어진 훈의 뒷머리를 문질렀음. 술자리에 잘 껴다니는 것 치고 술이 그다지 세지 않은 훈은 이미 만취해서 정신을 반쯤 놓은 채였음. 그러고 보니, 얘가 술을 좋아하는 타입이었던가? 온은 고개를 갸웃했음. 술 마시자고 불러내는 선배들의 콜에 꼬박꼬박 응하기는 하는데, 훈이 먼저 나서서 마시자고 한 적은 거의 없었던 듯. 그 드문 두 번의 경우가 모두 단 때문이라는 걸 되짚어낸 온이 훈을 안타깝게 내려다 보았음. 애정의 표현이 비대칭적이긴 했어도, 애정이 존재하지 않은 건 아니었음. 둘 사이에 불만과 오해가 쌓인 게 분명한데, 그걸 해결해줄 힘은 없는지라. 온은 그저 소중한 동생들을 따로따로 위로해줄 뿐이었음. 


"형..." 

"왜." 

"다니엘 형이요..." 

"걔가 왜." 


훈이 꿍얼거리며 고개를 들다가 다시 툭, 머리를 박았음. "뭐라고?" 온이 재차 묻자 훈이 테이블 바닥에 한숨을 토했음. 니스칠 한 월넛색 탁자가 입김으로 뿌옇게 흐려졌다가 본래 색으로 천천히 돌아왔음. 


"진짜로... 걔랑 사귄대요?" 


참 멀리도 돌아왔음. 처음부터 이게 묻고 싶어서 불어낸 술자리면서 말이지. 2학기가 다 끝나갈 시점이 되어서야 진짜 박지훈의 단면을 본 것이었음. 사람 보는 눈이 없는 편도 아닌데, 온은 정말 몰랐음. 훈은 워낙에 밝았고 사랑받고 자라난 티가 났었음. 그래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애정을 받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어 보였음. 처음에 단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이유도 이런 것이었음. 태생이 다정한 단과 사랑을 받는데 익숙한 훈. 빛과 빛이 만나 아주 밝은 연애를 하겠거니, 하고 방임했더니 이게 웬 걸. 생각보다 어두운 훈의 내면에 단마저 빛을 잃을 줄이야. 온은 훈의 어깨를 도닥이며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음. 


"아냐. 안 사귄대." 

"정말요..?" 


부시럭대며 몸을 일으키는 훈의 눈가가 붉었음. 온은 잠시 망설였음. 듣기 좋은 위로를 해줄 것인가. 지금 당장 다치더라도 등을 떠밀어 줄 것인가. 


"근데 B 걔 하는 것 봐서는 머지 않은 것 같다." 


결국 후자를 선택했음. 크게 뜬 눈이 초점을 잃고 흔들리다가 이내 눈물을 쏟았음. 소리도 없이 뚝뚝 흐르는 눈물에, 온이 더 당황하여 티슈 어딨냐며 허둥지둥 테이블을 더듬었음. 테이블 가장자리 서랍을 열어 티슈를 왕창 뽑아냈음. 훈은 온으로부터 티슈를 받아들고도 한참이나 넋을 놓고 있었음. 꼭 말아쥔 두 손이 무릎 위에서 바들바들 떨렸음. 카멜색 바지 위에 눈물점이 떨어지고 떨어지다 결국 커다란 얼룩을 남겼음. 


"지훈아." 

"...흡..." 

"이렇게 힘들 거면 뭐라도 해보지 그러니." 

"...흐흑." 

"너, 헤어지고 다니엘한테 연락도 안 했다며." 


온이 물 한 잔을 새로 따라 훈의 앞으로 밀어주었음. 컵을 겨우 들어올린 훈이 재차 터져나오는 눈물에 한 모금도 못 삼키고 다시 내려놓았음. 


"어떻게 연락해요..?" 

"뭐?" 

"저는... 진짜... 그런 거... 못하겠어요." 

"그냥 눈 딱 감고 해. 다들 그렇게 하고 살아." 


훈이 아까 뽑아놓은 티슈를 들어 눈가를 훔쳤음. 온은 몇 장을 더 뽑아 훈에게 건넸음. 


"지훈아." 

"...네." 

"먼저 사과하는 게, 지는 게 아니야." 

"......" 

"사과할 일이 없어도 사과할 수 있어.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도 나중에 보면 내 잘못일 때가 있거든." 

"제가 잘못한 거 알아요. 근데 무서워요." 

"뭐가 무서운데?" 


훈이 입술을 깨물었음. 겨우 앉은 피딱지가 이 아래에서 뭉개지며 새로운 피가 스며나왔음. 욱씬. 아릿한 통증이 턱을 타고 흘렀음. 이렇게 입술을 깨물 때마다 그러지 말라고 턱을 잡아채주던 커다란 손이 있었는데. 그랬었는데. 


"모르겠..어요. 진짜... 이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괜찮아 괜찮아, 말해 봐." 


훈이 여즉 축축한 눈가를 손등으로 닦았음. 눈꼬리의 연한 살들이 벌겋게 쓸려 따끔거렸음. 


"저는 왜... 진짜 좋아하는 사람한테 더 못 되게 구는 걸까요." 

"아......" 

"그냥 아는 사람들한텐 기분 나빠도 웃고... 그냥 넘어가고 그러는데... 이상하게 다니엘 형 앞에선 그게 안 됐어요. 형이 싫어서가 아니라... 아, 난 이런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닌데. 형이 과분하게 잘해주니까 괜히 속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자꾸 시험하게 되고.." 


온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음. 말도 안 돼.  지금껏 주위에서 몇 번인가 보았던 케이스긴 하지만... 이건 절대적으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의 애정관이었음. 마음 속에 깊고 어두운 구덩이가 있는 이들은 필요 이상으로 발톱을 세우고 덤벼드는 경향이 있지. 선한 마음으로 다가온 상대마저 수렁으로 함께 빠뜨리고 마는 파멸의 악순환. 


온은 대체 왜 이 잘생긴 후배가 그런 어두운 내면을 갖게 된 건지, 그리고 그것을 단이 아닌 다른 이들에겐 어떻게 이리도 완벽하게 잘 숨겨왔던 건지 궁금해졌음. 하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묻는 건 큰 실례겠지. 그래서 온은 돌려 묻기로 했음. 


"그렇게 하면서, 다니엘이 상처받는 건... 안 보였어?" 

"......" 


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음. 


역시 알고 있었구나.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비수를 던지는 타입. 솔직히 말해서, 친구가 이런 타입과 연애를 한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 따라다니며 말렸을 것임.  


"죄송... 죄송해요. 흑." 


하지만 둘은 이미 사귀어 버렸고, 헤어져도 버렸고,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내가 너무 싫어..." 


둘 다 아파하고 있어서,  


"지훈아." 

"네.. 흑, 흡." 

"이 말을 다니엘 앞에서 그대로 하면 돼."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조언을 했음.  


"하지만... 지금까지 너무 잘못해서... 용서 받지 못할 거에요. 저." 

"그걸 판단하는 건 니가 아냐." 

"아..." 

"넌 그냥 잘못을 말하고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면 돼. 그것도 못하겠어?" 

"...해볼게요.." 

"나한테 약속할 필요는 없고." 

"네?" 

"어디까지나 너네 둘의 문제니까 니가 하기 싫거나, 무서우면 안해도 돼." 


온은 남은 소주를 두 잔에 나눠 털었음. 목까지 벌개진 주제에 막잔을 필사적으로 비우는 훈을 보니, 이 삽질도 어떻게든 답이 나오겠거니 싶었음. 



다음날, 술이 깬 훈은 며칠 전 사온 생수를 마신 후 단에게 연락을 했음. 만나자는 훈의 말에 건조하게나마 알았다고 하는 단의 대답이 이어지고. 둘은 오랜만에 약속을 잡았음.  수능이 끝난 주의 금요일 10시 -- 단의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자취촌으로 돌아오는 시간이었음.



트위터 @tejava_mil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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