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정국아”

“이병 전정국”

 

“지민이랑 같이 못 나가서 섭섭하냐?”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 얼굴에 다 써 있는데”

“정말 괜찮습니다!”

 

 

정국은 오해를 하고 있을까? 지민은 자신의 본의와 다르게 조정되어버린 휴가 날짜 때문에, 정국이 지민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정국이 여자친구들 틈에 기어 깔깔거리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와 다른 날짜의 휴가를 택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정국은 섭섭하게 여길 것이다. 아직 지민은 자신이 왜 정국과 다른 휴가 날짜를 택해야만 했는지에 대해 이유를 밝히지 못했다.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지민이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해명은 행보관이 직접 할 모양이다. 행정반에 불려 간 정국의 표정은 밝지 않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들을 배불리 먹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지민은 그것이 자신이 정국과 다른 날짜의 휴가를 택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너랑 지민이랑 휴가 날짜가 다른 이유는 지민이 부모님이 직접 전화를 주셔서 그런 거다”

“아....”

 

“지민이 할아버님이 지금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는데, 가능한 한 빨리 휴가를 보내 줄 수 없느냐고 요청을 하셔서. 그래서 가능한 날짜 중에서 제일 빠른 날짜를 골라서 보내는 거다. 너는 원래 갈 수 있는 날짜에 가는 거고. 그러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진 마라”

 

“네 알겠습니다”

 

 

정국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오고가는 것 같다. 지민은 자신이 눈치를 볼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 정국의 표정 변화를 살핀다. 이것은 지민도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직접 중대장에게 전화를 할 정도로 심각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정국이 면회를 가 있던 사이에 아버지가 중대장에게 전화를 했고, 그래서 중대장이 행보관에게 일러 가능한 가장 빠른 날짜에 지민을 보내야겠다고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아쉽지만 뭐, 휴가가 이번 한 번만 있는 건 아니니까 -

 

정국은 그제야 안도하는 것 같다.

 

 

 

 

 

 

 

 

 

 

“어이구, 전정국 운다 울어”

“앗..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에 다 쓰였는데”

“하하하....”

 

아이를 집에 홀로 두고 떠나야하는 부모의 마음이 혹시 이런 것일까. 휴가 당일 아침, 지민은 그토록 기다리던 첫 휴가이지만 쉽게 발길을 떼지 못한다. 정국의 휴가와 지민의 휴가는 단 하루도 겹치지 않는다. 지민이 첫 휴가를 다녀 온 이틀 후 정국이 첫 휴가를 떠난다. 함께 휴가를 가기로 굳게 약속했던 것은 보람이 없게 되었다.

자의로 일으킨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민은 마음이 무겁다. 더군다나 지금 정국의 표정을 보면 더욱 마음이 물에 젖은 듯 무겁고 축축하다. 입대한 이후로 처음 서로 떨어져 지내게 된다. 마치 태어나서 한 번도 엄마 품을 떠나 본 적 없는 아이가, 고작 몇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는 것 같다.

선임들은 그런 정국의 표정을 읽고 장난스럽게 놀린다. 정국은 한사코 아니라고 하지만 그만큼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는 증거다.

 

지민은 정말 아이만 혼자 집에 두고 가는 부모처럼 정국에게 당부를 한다.

 

 

“정국아”

“어?”

 

“내 며칠 뒤면 온다”

“안다”

 

“............ 밥 잘 챙기 묵고”

“아 내가 뭐 알라가”

 

“그래. 아는데. 그냥 걱정이 돼서”

“갈 거면 빨리 가라 그냥”

 

심통이 난 아이처럼 괜히 툴툴거리는 그. 섭섭함을 온몸으로 표출하는 것 같아 뒤돌아 서도 눈에 밟힐 것 같다. 군인에게 휴가란 그 어떤 선물보다도 달콤하고 위대한 것이다. 그러니 지민 역시 이 휴가를 꿈에서도 간절히 그렸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달콤하거나 즐겁지가 않다. 할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리지만 그만큼 정국도 눈에 밟힌다 .

 

 

“지민아”

“이병 박지민”

 

“나가면 매일 저녁 점호 전에 부대로 연락하는 거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뭐 너야 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마음대로 놀지도 못 하겠다”

“잊지 않고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라. 전정국 울 것 같으니까 한 번씩 정국이랑도 통화 하고”

“네 알겠습니다”

 

 

휴가를 맞은 지민의 옷은 정국이 입은 후줄근한 전투복과는 다르다. 지민이 휴가를 나간다고 해서 선임들의 그의 군복을 빳빳하게 다려 놓았고, 전투화도 광이 번쩍번쩍나게 닦아 놓았다. 비록 계급장은 이등병이고 언뜻 보아 정국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정국은 어쩐지 그 모습이 황홀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떼지 못한다.

 

박지민 예쁘네 -

 

만일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면, 정국은 이런 말을 소리 내어 읊조렸을지도 모른다.

 

 

 

 

 

 

 

 

“어 내 잠만 전화 좀”

“부대에서 전화 왔나?”

 

“어어”

 

막 첫 잔을 들이키려던 참이다.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지민의 폰이 요란하게 운다. 지민은 발신자의 번호를 확인하고는 싱긋 웃는다.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들에게는 부대에서 온 전화라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뜬다. 거짓말은 아니다. 부대에서 걸려 온 전화는 맞다. 하지만 정확히는 부대에 있는 전정국에게서 걸려 온 전화다. 시계를 보니 저녁 점호와 청소를 하기 전 개인 정비 시간이다.

 

“어 정국아”

 

[전화를 와 이래 안 받노!!]

 

 

전화를 늦게 받는다고 대뜸 잔소리다. 하지만 듣기 싫지 않다. 오히려 지민의 입꼬리는 귀에 걸려 있다. 정국의 목소리를 멀리서 전화로 듣는 일은 색다른 설렘을 준다.

 

 

“임마. 최대한 빨리 받은 거다”

 

[아 진짜. 나는 무슨 일 생긴 줄 알았네]

 

“저녁은? 오늘은 별 일 없었나?

 

[어. 별 일은 없었다. 근데 재미가 없다. 형 없으니까]

 

“뭔... 군생활을 재미로 하나”

 

[형은 재미있나. 내 없이]

 

“아니. 재미 하나도 없다”

 

[맞제? 거 봐라. 형도 글타 아이가]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입대 후 첫 휴가가 꿈같지 않을 수는 없다. 자신이 군대가 아닌 바깥 세상에 나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누군가의 눈치를 억지로 살필 필요도, 숨 막히는 긴장감을 늘 갖고 있을 필요도 없다. 바람은 자유롭고 시원하다.

그러나 마음 한켠은 늘 어둡고 무겁다. 할아버지는 당장 위독한 고비는 벗어났다고 했다. 그래서 지민도 오늘 하루만은 마음을 놓고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무거운 건 홀로 두고 온 정국 탓이다. 정국은 통화를 할 때마다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미련을 떤다. 그걸 지민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얼굴을 보지 못하는 홀로 남겨둔 아이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먹이는 걸 듣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싶다.

밥은 잘 먹었을까. 누구에게 혼이 나진 않았을까. 어디 다친 건 아닐까. 혼자 서러워서 울고 있는 건 아닐까. 굳이 하지도 않아도 될 잡스러운 걱정까지도 한 가득이다.

 

 

“오늘은 무사히 지나갔는갑네”

 

[뭐... 무사하다면 무사한 거고]

 

“왜. 또 혼났나”

 

[안 혼나는 게 이상한 거 아이가]

 

“누구한테 혼났는데....?”

 

[아이다. 뭐 그냥]

 

 

정국의 말투에서 씁쓸함과 헛헛함이 묻어난다. 아마 그의 하루는 여느 때와 같이 순탄함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누군가에게 욕을 먹고 꾸중을 듣고.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아직도 가끔은 서럽다. 그 서러움을 정국 혼자 감당하고 있다는 게 지민의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지금 뭐하는데? 어딘데?]

 

“내 서면이다. 친구들이랑 술 묵는다”

 

[서면?! 수울?!]

 

“어. 왜?”

 

[술 쪼매만 무라! 알았나?!]

 

“참내... 많이 무면 안 되나?”

 

[어.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내 얘기했다이. 술 많이 묵지 말라고]

 

 

 

정국의 목소리는 그 왁자지껄한 술집 주변의 소음을 뚫고 지민의 귀에 스민다. 마음에 꽂힌다. 지민은 정국의 목소리를 듣는 내내 웃고 있었다.

 

 

 

 

 

 

 

 

 


[어딘데?]

 

“집이다”

 

[거짓말]

 

“진짠데? 우리 엄마 바꿔 주까?”

 

그로부터 일주일 후,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이제 전화를 걸어 미련을 뚝뚝 흘리는 건 지민 쪽이다. 지민이 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지 이틀 만에 정국이 떠났다. 마치 일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견우와 직녀가 된 것처럼, 단 이틀의 안타까운 재회를 뒤로 두고 이번엔 정국의 차례다. 지난 주 지민의 휴가 때 일어났던 일들은 녹화해 둔 테이프처럼 그대로 반복된다.

지민도 저녁마다 정국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소재를 묻고 잔소리를 한다. 그 성가실 법도 한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실실 웃고 있는 건 정국 역시 마찬가지다.

 

 

[그 친구들은? 안 만나나?]

 

“가스나들 바쁘단다. 지 남친들 만나야 돼서 내 만나 줄 시간 없단다”

 

 

[다행이네]

 

“어? 뭐라고?”

 

 

[아... 아이다]

 

다행이라고 했다. 그런데 말의 뜻을 선뜻 이해할 수가 없다. 왜 다행이라고 하는 걸까? 지민이 형은 내가 친구들을 만나는 게 싫은가? 싫다면 대체 무슨 이유로 싫어하는 걸까? 자신에게 친구들이 면회를 왔던 날, 그로부터 며칠 후까지도 지민의 표정이 줄곧 어두웠던 일을 떠올린다.

물론 정국도 그런 지민을 의식해 친구들을 만나지 않는다. 친구들도 바쁘다고는 했지만 마음만 있다면 한 동네에 살기 때문에 어떻게든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국은 애써서 그 친구들을 만나려 들지 않았다. 어 내가 시간이 좀 애매한데 - 난색을 표하는 친구의 말에 정국은 쾌히 ‘알겠다’고 대답하며 다음에 만나자고만 했다.

 

정확히 무엇을 의식하고 자신의 행동을 꺼리는지는, 정국도 알지를 못한다.

 

 

“오늘은 주민우 상병이 안 괴롭히드나”

 

‘[오늘? 오늘은 괜찮았다]

 

“괜찮아서 괜찮다는 거가 아님 거짓말하는 거가”

 

[내가 니한테 그런 걸로 거짓말은 왜 하노. 안 글나]

 

 

정국은 주민우의 존재를 가장 거슬려한다. 자신이 지민의 옆을 지키고 있다고 해서 그의 기분 나쁜 행동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지키고 있는 것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차이는 아주 큰 것 같다.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들이 있다. 주민우가 지민의 허리에 팔을 휘감는 모습. 주민우가 능글맞게 웃으며 지민의 볼을 만지는 모습. 마치 굵은 가시처럼 아프게 박혀 지워지지 않는 장면들이다.

 

“아... 박지민 보고 싶다”

 

[어? 뭐라고?]

 

 

“아? 아이다 아무 것도...”

 

실없는 소리는 아니다. 분명 마음 속에 깊이 자리한 말이기는 했다. 그런데 이렇게 불쑥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들키지 말아야 할 비밀을 들킨 것처럼 서둘러 말을 돌린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죄를 짓는 기분인지. 지금 정국은 첫 휴가를 나온 이등병답지 않다. 오히려 빨리 부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다. 오로지 지민 때문이다. 지민이 부대에 남아 있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미친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민은 급하게 전화를 끊는다. 그러니 더욱 정국에게 남는 여운은 길다. 목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쉽게 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내일 전화를 건다고 했지만 곧 전화가 다시 걸려 올 것 같은 착각에 가슴이 찡하다.

 

 

“야 정국아”

“어 엄마 왜?”

 

“니는 진짜 집에 누워만 있다가 갈끼가?”

“아 왜 오랜만에 편하게 누워 보는구만”

 

“다른 아들은 집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다 카든데 니는 우째 된 기...”

“누구 만나면 뭐하노. 돈만 쓰지”

 

 

엄마는 첫 휴가를 나와서도 줄곧 집에만 틀어 박혀 있는 아들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남준아.....”

“불안하게 또 왜 그렇게 제 이름 부르십니까”

 

“나 여기 좀 꼬집어 줘 봐”

“후회 안 하십니까?”

 

“응”

“.............”

 

“아아악!! 야 존나 아퍼!!”

“꼬집어 달라고 먼저 말씀하셨지 말입니다”

 

“하이 씨....”

 

유격 훈련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정신없이 한 가지를 해치우고 나면 또 다른 것들이 와장창 밀려온다. 정국과 지민이 맞는 첫 번째 큰 훈련이다. 정국과 지민은 훈련소에서 아주 잠깐, 스치듯 맛만 보았을 뿐 유격 훈련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선임들의 표정과 눈빛을 보면 만만치 않은 시련이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가장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건 석진이다. 그의 운명은 기구하다. 마지막 휴가를 나가기 2주 전에 유격 훈련이 예정되어 있다. 모두들 그만은 훈련에 참가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아 왜에 안 빼 줘어!!! 나 말년이란 말이야!!!”

“말년은 군인 아닙니까”

 

“전역 한 달 남았는데 유격은 무슨 유격이냐고오!!!”

“그건 다 김석진 병장님의 박복함 덕분이지 말입니다”

 

“야 죽을래 김남준?!”

“헷”

 

 

석진은 방금 행보관과의 면담을 끝내고 나오는 길이다. 석진의 말대로 전역이 한 달 정도 남은 경우, 큰 훈련이 있더라도 보통 말년 병장은 당직을 세우거나 하는 등의 방법으로 적당히 노닥거릴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이 관례다. 그런데 이번에는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고 한다. 야 연대장님 지시사항이야. 말년 병장도 무조건 참석. 난 죄 없다 - 행보관은 애초에 등을 돌리며 이렇게 못을 박았다고 한다.

 

“내 군생활에 유격이 두 번이라니... 혹한기가 두 번이었다니!! 아아아악!!”

 

“정국이랑 지민이는 유격 끝나고 오면 일병 되겠네”

“야. 쟤네가 벌써 일병이야? 와.... 내 시간은 안 가는데 쟤들 시간만 빨라”

 

“아아아 나 유격 가기 싫다고오!!!”

“거 좀 조용히 하십쇼. 그럼 연대장님한테 가서 맞짱 뜨고 오시면 되잖습니까”

 

“흑.... 엄마......”

“얼씨구”

 

정국이 지민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지민은 정국이 왜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지 알고 있다. 정국은 그 자신보다 몸이 약한 편인 지민을 걱정하는 것이다.

 

 

“왜?”

“아이다”

 

“걱정하지 마라. 니 하는 건 나도 다 한다”

“누가 뭐라 했나....”

 

 

역시 지민은 정국의 속내를 말하지 않아도 잘 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잘 읽는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하나 남아 있다. 그것의 정체를 도저히 유추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따금 참을 수 없는 답답함과 간지러움이 찾아온다. 체한 것도 같고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가 피부 속을 기어다니는 것도 같다.

 

 

“김석진 병장님. 이번에도 간식 더블백 준비하지 말입니다”

“당연하지. 간식 더블백 없으면 난 죽는다....”

 

“그럼 이번엔 김석진 병장님이 다 계산하십니까?”

“내가 왜!”

 

“전역하기 전에 후임들한테 거하게 한번 쏘고 가십쇼. 그래야 복 받습니다”

“유격 끌려가는 것도 빡치는데 내가 왜애!!”

 

“그렇게 심보를 곱게 못 쓰시니 유격을 끌려가시지 말입니다”

“죽는다 김남준 진짜!!”

 

석진의 절규는 끝을 모른다. 그의 처절한 원성은 온 부대를 들썩거리고도 남지만 누구도 그를 동정할 형편이 못 된다. 남준은 왠지 고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석진을 보고 키득거린다. 석진은 그런 남준에게 너도 똑같은 일을 당할 거라며 악담을 퍼붓고 베개를 집어던진다.

 

 

 

 

 

 

 

 

 

 

이가 갈린다. 피가 끓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온몸에 알이 배겨 더는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몸을 움직여야 한다. 자신을 극한으로 밀어 붙여야 한다. 유격 훈련의 목적은 바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극기다. 그러나 여기에 놓인 그 누구도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극한의 체험을 굳이 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눈에서 핏줄이 터질 것만 같다. 흙과 먼지를 누렇게 뒤집어 쓴 군인들이 악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르고, 몸부림친다.

 

 

“마지막 동작은 번호 붙이지 않습니다. 피티 8번 10회. 몇 회?!”

“10회!!”

 

“피티 8번 시작!”

“하나! 둘! 셋! 넷!”

 

분명 마지막 동작에는 번호를 붙이지 말라고 했었다. 붉은 모자에 짙은 선글라스를 낀 교관들은 매서운 눈과 귀로 실수를 가려낸다.

 

“일곱! 여덟!”

“하아.....”

 

“마지막 번호 붙인 거 누굽니까!”

“................”

 

“마지막 번호는 붙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하는 겁니까! 정신 못 차립니까?!”

“악!!”

 

유격장에서의 대답은 네 아니오가 아닌 ‘악’이다. 이마저도 입에 붙지 않아 첫날에는 정국과 지민도 몇 차례 실수를 했다. 선임들의 살기 어린 눈빛으로 몇 번 마사지를 받고서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훈련에 임했다. 훈련 이틀째인 오늘도 여전히 얼빠진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친 한숨이 모두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흘러나온다.

 

 

“하....누고 대체....”

“..................”

 

체력 좋기로 유명한 정국도 슬슬 한계를 느끼고 있다. 내가 이런데 이 형은 오죽할까 - 바로 옆자리에서 자신과 함께 뒹굴고 있는 지민 쪽을 자꾸만 힐금거린다. 지민의 안색이 좋지 않다. 얼굴은 터질 것처럼 붉다.

 

내가 대신 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자신조차 한계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지민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감수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석진 병장님 식사 안 하십니까?”

“안 먹어! 안 먹을 거야 나는!”

 

“나중에 후회하지 마십쇼. 다 먹어 버립니다”

“으아아아!! 유격 빡세. 개 빡세 이게 뭐야 내 말년....으아아앙....”

 

“아직도 현실을 인정하지 못 하시는구만...”

 

숟가락을 드는 일조차 힘겹다. 손과 팔이 덜덜 떨려서 이 가벼운 숟가락이 삽보다 무겁다. 지민과 정국에게는 숨 돌릴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야외 취사장에 가서 취사병들이 해놓은 밥과 반찬들을 인원 수에 맞춰 가져 오는 일 등, 모든 사소하고 귀찮은 일들은 정국과 지민의 몫이다. 아직 후임을 받지 못한 정국과 지민의 막내 생활은 넌덜머리가 나도록 길어지고 있다.

 

상병들이 커다란 비닐 봉지를 펼치더니 그 안에 받아 온 밥과 반찬을 모두 쏟아 붓는다.

 

정국과 지민은 여전히 그 광경이 신기하다. 벌써 훈련 이틀째인데도 훈련장에서 이렇게 밥을 먹는 기괴한 풍경이 낯설다.

 

“지민아. 뭘 그렇게 신기한 눈으로 쳐다 보냐? 이렇게 몇 끼 먹었으면서”

“이병 박지민! 아닙니다!”

 

“오늘은 형이 더 맛있게 만들어 줄게. 기다려 봐라잉”

 

 

미리 사서 가져 온 맛다시를 비닐 봉지 안에 탈탈 털어 붓는다. 그리고 다시 비닐 봉지를 묶어 내용물이 튀어나오지 않게 매듭지은 후 꾹꾹 눌러 비비기 시작한다. 참 희한한 일이다. 눈으로 보기에는 마치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 놓은 것 같다. 무슨 맛이 있을까 싶은데, 막상 한 숟가락 떠먹어 보면 눈이 번쩍 뜨인다.

 

“다 됐다!”

“야 남준아. 막내들 먼저 줘라. 애들 배고프겠다”

 

“예. 안 그래도 그럴려고 했습니다. 막내들! 어서 식판 대!”

“앗, 먼저 드시지 말입니다”

 

“야. 이런 거라도 너네가 먼저 먹어야 숨 쉬고 사는 맛이 있지. 어서 대라”

“감사합니다!”

 

지민과 정국의 식판에 비빔밥이 먼저 얹힌다. 아직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불그스름한 비빔밥. 침이 절로 고인다. 아는 맛이 더 무서운 법. 나란히 밥을 받아 앉은 지민이 갑자기 정국을 보고 키득거리기 시작한다.

 

 

“풉”

“왜?”

 

“니 지금 진짜 꼬질꼬질하디. 아나”

“와.. 지는 아닌 척한다”

 

“난 니보다 덜 꼬질꼬질한 것 같은데?”

“웃기고 있네”

 

“형 생각보다 잘 하던데?”

“내가 말했다 아이가. 니 하는 건 나도 다 한다고”

 

“체력 많이 늘었다이”

“내가 좀”

 

지민의 꾀죄죄한 얼굴을 바라보며 웃는 정국의 표정에는 피로나 근심이 조금도 끼어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밥에 정신이 팔려 사족을 못 쓰는데, 두 사람은 서로의 대화에 푹 빠져 밥도 들지 않는 것을 남준은 힐끔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초여름이지만 아직 산 속의 밤은 싸늘하다. 낮 동안은 사람을 들들 볶을 듯이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해가 지기만 하면 어디론가 사라진다.

빡빡 깎은 정수리에 으슬으슬한 찬 기운이 느껴져 잠을 깼다.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죽은 듯 고요한 산 속의 밤이다. 몸이 시달린 것을 생각하면 곯아떨어져야 하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중간에 잠을 깨버렸다. 지민은 그때 문득 자신의 정수리 부분이 시릴 뿐, 몸의 다른 곳은 오히려 후덥지근하다는 걸 깨닫는다.

 

“흐음......”

 

뭐고 전정국. 사람을 이렇게 껴안고 자노 -

 

지민은 그것이 자신을 껴안고 잠든 정국 덕분임을 알아챈다. 어쩐지 핫팩을 터뜨리지도 않았는데 따뜻하다 했는데 정국 덕이다. 정국은 지민을 꼭 끌어안고 제 얼굴을 지민의 목덜미 부근에 묻은 채 잠들어 있다. 그의 쌔근거리는 더운 숨이 지민의 얼굴까지 와 닿는다.

 

냄새 안 날까. 제대로 씻지도 못 했는데.

 

찬물 몇 바가지 뒤집어 쓴 것이 전부였다. 모두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해 꼬질꼬질하다. 그런데도 정국은 제 코를 지민의 목덜미에 박고 잠들어 있다. 지민은 자신의 불편함보다도, 정국이 혹시 더 불편할까봐 그를 살짝 밀어내려 한다. 그러나 마치 못으로 박아 놓은 듯 정국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결국 지민은 정국을 밀어내는 것을 포기한다. 사실 밀어내고 싶지 않은 것이 더 솔직한 심정이다. 정국이 자신을 껴안고 있으면 이곳이 산 속의 훈련장 천막 안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따뜻한 방 안에 편안히 누워 있는 기분이다.

 

그러니 전정국은 참 이상한 사람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힘든 줄도, 추운 줄도 더운 줄도 모른다.

 

지민은 얼른 잠들어야 할 걸 알면서도 선뜻 눈을 감지 못한다. 찌르릉거리는 풀벌레 소리로 귀를 적시며 가만히 눈만 뜨고 천장을 바라본다. 정국아 잘 자 -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로 가만히 중얼거려 본다.

 

밥-뷔진-잠-뷔진-일-뷔진-밥-뷔진... 뷔진 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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