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옆집 대학생 찬열을 짝사랑하는 고딩 백현이가 개수작+끼부리는 거 보고 싶다.




01.


예고 없이 소나기가 내린 날이었다. 그 비를 고스란히 맞아 쫄딱 젖은 백현이 향한 곳은 본인의 집이 아닌, 옆집 찬열의 집 앞이다. 서늘한 한기가 돌아 벌벌 떨리는 손끝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너 왜 이래?”

“으- 추워.”



문을 연 찬열이 백현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거나 말거나 열린 문틈으로 일단 자그만 몸부터 밀어 넣었다.



“야. 꼬맹이.”

“비를 엄청 맞아서, 일단 좀 씻어야 할 것 같아요.”



망설임 없이 교복 셔츠 단추를 푸는 백현의 손목을 붙잡아 행동을 저지시킨 찬열의 미간은 여전히 좁힌 채다.



“네 집 놔두고 왜 여기서 씻겠다는 거야?”

“우리 집 수도요금 안내서 단수됐어요.”

“뭐?”



말도 안 되는 대답에 찬열이 잠시 벙찐 틈을 타 백현은 욕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이 상황에서 따라 들어가 백현을 끌고 나올 수도 없으니, 씻고 나오면 바로 내보내야겠다 생각했다.

소파에 앉아 보고 있던 TV로 시선을 두었지만, 집중을 못 했다. 얼마지 않아 들려온 백현의 목소리 때문에.



“형아! 보일러 올렸어요? 찬물 밖에 안 나와요.”

“올렸어.”

“근데 계속 찬물만 나와요.”



그럴 리가 없는데. 방금 본인이 사용했을 때만 해도 잘 나오던 온수가 갑자기 안 나올 리가 없잖아. 보일러를 확인하고 다시 물을 틀어보라고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형이 들어와서 좀 봐주면 안 돼요?”

“…그냥 찬물로 씻어.”



아무리 봐도 개수작 같았기에 냉정히 뱉은 말이다. 물론 몇 번의 칭얼거림이 들리긴 했지만, 찬열이 대꾸하지 않자 이내 포기한 듯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온수는 무리 없이 잘 나올 터였다. 백현이 괜히 저런다는 걸 드물지 않게 당해봐서 이제는 잘 알았다.

근데 자꾸 ‘아! 차가! 완전 차가워!! 너무 차갑다!’ 이런 말소리가 섞여서 들려오니, 정말로 온수가 나오지 않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 거다. 비를 쫄딱 맞고 온 애를 찬물로 샤워시키는 건 아무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정말 온수 안 나와?”

“아- 그렇다니까요.”



한숨을 내쉬고 문고리를 돌렸다. 제가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았기에.


아니나 다를까, 욕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온수가 아주 잘 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또 당했네.

다시 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알몸의 백현이 쪼르르 다가와 찬열의 허리를 꼭 끌어안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야야야.”

“혀엉-”



백현을 떼어내려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젖은 살결의 촉촉한 감촉에 급히 떨어트려야 했다. 온통 맨살이라 어딜 붙잡아서 떼어내기가 마땅찮다. 간만에 애새끼한테 제대로 당했다.



“미친놈아. 떨어져라.”

“싫어요.”



백현은 찬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 몸을 비볐다. 킁킁 향을 맡기도 했다. 어릴 때만 해도 자주 다정하게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그랬는데. 고등학교 올라갔을 때쯤인가부터는 묘하게 찬열은 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개수작이라도 부려야만 스킨십을 할 수 있었다.



“떨어지라고.”

“조금만요. 1분만요. 언제 또 형한테 안길 줄 알고. 1분만 있다가 떨어질게요.”


 

이런 기회가 거의 드무니 간만에 닿은 찬열이 간절할 수밖에.

 

 

“1분 지났다.”

“아- 치사해.”

“떨어져.”



아쉽지만, 그에게 두른 팔에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급히 몸을 돌려 욕실을 빠져나가는 찬열의 뒷모습이 서운하다. 입을 삐죽이다, 제 팔뚝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그사이에 옅게 베인 찬열의 냄새가 좋아서, 백현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 어렸다.




02.


쿵쿵쿵-

늦은 저녁, 저녁이라고 칭하기보단 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초인종이 있음에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찬열은 감았던 눈을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누구세요.”



이 시간에 제집을 찾을 사람은 옆집 꼬맹이밖에 없었지만, 모르는 척 무심하게 물었다. 다 알면서도.



“형아아. 나 혀니, 백혀니.”



현관문 건너에서 넘어오는 발음이 어째 잔뜩 늘어진 채다.



“꼬맹아. 너희 집 옆이다. 잘못 찾아왔어.”

“녜에- 그르니까, 문 쫌 여러주세여-”



애새끼 술 마신 거 아니야? 문을 열어주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는데. 말투가 영- 거슬렸다. 만약 정말 술이라도 마시고 취한 거라면, 아저씨에게 된통 혼이 날 테다. 검도 도장 관장인 백현의 아빠는 엄격하시고 그만큼 무서우신 분이시다. 아저씨한테 죽도로 볼기짝을 두드려 맞고 제집으로 피신 온 적이 몇 번 있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저 상태로 보낸다면 또 볼기짝을 맞겠지. 눈가가 벌겋게 짓무를 정도로 엉엉 울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은 절 원망할지도 모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도어락을 풀 수밖에.



“혀엉-”



문이 열리자마자 답싹 안겨드는 꼬맹이에게서 역시나 알코올 냄새가 폴폴 풍겨왔다.



“헤헤- 차뇨리형아.”

“너, 이 새끼 술 먹었어?”

“녜에-”



떼어내려 해도 술기운에 힘만 잔뜩 세져서는 몸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별수 없이 그대로 안아 들고 일단 소파로 향했다.

 

 

“형아-”

 

 

찬열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백현이 어린 짐승처럼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적대다, 고개를 빼꼼히 들어 찬열을 빤히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자 “형아 진짜 잘생겨써여.” 배시시 온 얼굴을 잔뜩 허물어트린다. 찬열은 한숨을 늘어트리고 백현의 이마에 딱- 꿀밤을 먹였다.



“아야! 아포요.”

“어린놈의 새끼가 누가 이렇게 술 마시래? 어?”



짐짓 엄한 표정을 짓고 나무라려고 했지만, “에- 형아도 고딩때 술 마신 거 다 알아요. 담배도 피웠자나요.” 입술을 삐죽이며 늘어놓는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고스란히 맞는 말이 찔렸거든. 큼큼- 괜히 헛기침을 했다.



“너 이 상태로 집에 어떻게 가려고. 아저씨한테 혼나잖아.”

“당여니- 오눌은 형아네 집에서 자구 간다고 해찌요.”

“야야, 누가 재워준데?”

“후음- 졸려요.”



그러더니 어깨에 이마를 떨구고 금세 고른 숨을 내쉰다.

 

 

“야. 자?”

 

 

새근새근 숨소리만 돌아왔다. 하, 이 제멋대로인 새끼를 어찌하면 좋을까. 백현을 품에 안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이내 느릿하게 토닥토닥 작은 등을 큰손으로 쓸어내렸다. 어렸을 때는 자주 이렇게 재워주곤 했는데, 오랜만이네. 조그맣기만 하던 꼬맹이가 어느새 이만큼 커서 술까지 드시고, 아주.



잠든 백현을 안아 들고 침대 위에 눕혔다. 이마 위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고 이불을 목 끝까지 꼼꼼히 덮어주었다. 제 침대를 내주었으니, 찬열은 별다른 도리 없이 여분의 이불을 꺼내 들었다. 소등하고 방을 나서려는데,



“형아-”



잠기운이 그득한 목소리가 찬열의 발을 붙잡았다.



“어디 가요?”

“소파에서 자게.”

“왜요? 같이 자면 안 돼요?”

“어. 불편해.”



그 뒤로 대꾸가 없어 문고리를 돌렸다. 하지만 뒤늦게 들려온 축축한 음성에 나서는 걸음이 절로 멈추었다.



“내가 불편해요? 전에는 같이 자구 그랬잖아요. 이제는 나 싫어요? 나 미워요?”

“아냐, 그런 거.”

“형, 알죠? 그래서 그러는 거죠? 내가… 형 좋아하는 거 알구, 그래서 이렇게 거리 두는 거죠?”

“……자라.”



닫히는 문틈을 비집고 새어 나온 말은 못들은 걸로 해야겠다. 그 말에 실린 마음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형한테 뭘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그냥 전처럼만 대해주면 되는데. 나 욕심 같은 거 별로 없어요. 밀어내지 말구, 거리두지 말구… 그냥 잠자코 형 좋아만 할 건데.”



 


03.


주말 오후, 백현은 세훈과 PC방에 가는 중이었다.



어라?

인도의 붉은 색 벽돌만 밟으며 걷던 백현의 발이 우뚝 멈추었다. 카페 유리 너머를 응시하는 눈망울이 떨렸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잎새같이, 가엽게.

 

따라오지 않는 기척이 의아해 앞서가던 세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좀 닥치라고 해야 할 정도로 방정맞게 까불거리던 놈이, 굵은 눈물방울을 후두둑 떨구고 있었다.



“야? 변백?”

“흐- 너 먼저 흐잉, 가….”

“뭔 일인데? 갑자기 왜 처 울고 지랄이야?”



답을 하지 않고 훌쩍거리고만 있는 백현의 시선을 따라간 세훈의 눈썹이 삐죽 솟았다.

 

 

“좆 같네.”

 

 

카페 통유리 너머엔 찬열과 어떤 여자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별다른 사이가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들 주변을 부유하는 공기가 묘했다. 그걸 백현도 느꼈기에 저리 청승 떨고 있는 거겠지.

 

 

“뭘 저딴 걸 보고 울고 있냐. 다 큰 남자 새끼가 길거리에서 쪽팔리게.”

 

 

백현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세훈은 백현이 찬열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친구였다.


 

“어헝- 후나. 저 여자, 형아 여자 친구, 으히잉, 일까?”

“몰라. 씨발.”

“그렇다면… 흐으, 정말 싫잖아.”



세훈에게 질질 끌려가던 백현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카페 쪽으로 달려갔다.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미련 맞게 창유리에 바짝 코를 붙인 채 찬열의 테이블을 노려봤다. 그리고 주먹으로 콩콩 유리를 두드렸다.



찬열과 여자의 시선이 동시에 창으로 향했다. 여자는 의아했고, 찬열의 표정은 퍼석하게 굳었다. 백현이 그득 젖은 얼굴을 한 채 그렁그렁하게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은 저를 원망하고, 유리에 바짝 붙인 코끝은 잔뜩 빨갰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 어떡해. 못 본 척 시선을 돌리고 여자를 향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백현의 마음을 알고, 저는 아이를 받아줄 수 없는데, 희망 고문하고 싶진 않았다.


 

세훈이 다가와서 백현을 끌고 가자, 찬열은 그제야 끌어올렸던 근육을 풀어내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05.


찬열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복도 끝 자신의 집 앞에 쪼그려 있는 작은 인영이 시선 언저리에 걸린 탓이다. 다시금 나지막한 한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날도 추운데 왜 저기서 저렇게 청승 떨고 있어. 속상하게.



“꼬맹아.”



너무도 익숙한 부름인데 어째 목소리가 텁텁하기만 한 지. 큼큼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춥잖아. 여기서 뭐 해.”



백현의 고개가 동그란 무릎 위에서 천천히 들어 올랐다.


아.

복도를 비추는 노란 조명이, 얼마나 울었는지 불그스름하게 짓무른 아이의 눈가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형아 기다렸어요.”



그 말을 하면서도 굵은 눈물방울을 뚝, 뚝- 떨구는데. 아아, 어쩌니. 어찌하면 좋니. 작게 찌푸려진 찬열의 미간이 파삭하게 일그러졌다.



“아까 그 여자… 그… 형아 여친 흐으- 이예요?”



안타까이 떨어지는 눈물을 훔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마 백현은 자신이 울고 있단 사실도 모를 테다. 온종일 울어서 눈물을 흘리는 행위 자체가 익숙해져 버린 탓이겠지.

 

추위에 곱은 손가락을 느릿하게 움직여 바깥의 시린 온도를 여태 머금은 찬열의 바지자락을 꾸욱 그러쥐었다.



“아니죠? 여자 친구 그런 거 아니지요?”



간절한 애원 그리고 바람. 아니길 하는, 아니었으면 하는.



“잘… 후- 그래, 잘 한번 만나보려고 생각 중이야.”



무너졌다.

희망, 기대, 바람 모조리 산산이 부서졌다.

 

엉엉. 설움이 터지고 절망이 차올랐다.



“거, 거짓말. 거짓말이잖아. 그런 거로 장난치지 말아요. 나 그런 장난 별로 안 좋아해.”



고개를 도리도리 휘저으며 부정하는 백현을 찬열은 품에 안아 달래 줄 수도, 거짓말이었다고 아이가 바라는 말을 들려줄 수도 없었다.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시선을 들어 올리고 천장의 조명등을 눈동자에 담아냈다. 전구를 갈아야 할 때가 된 모양이다. 빛이 희미하다.



“꼬맹아. 그만 아프자.”



찬열의 말을 끝으로 정적이 이어졌다. 백현의 흐느낌만이 적막한 공간을 채우는 유일한 소리였다.

한참이나, 한참이나.



“나빠. 박찬열얼 진짜 나빠.”



응, 그래. 내가 나쁜 놈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차라리 욕하고 미워해. 다시는 울지 말고.


 

“후으, 그래요. 알겠어요.”

 

 

물빛 음성에 체념이 서렸다. 백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두 눈은 여전히 눈물을 머금고 있었지만, 눈빛은 전과 달리 날이 섰다. 절 보지 않고 천장에 시선을 둔 그의 코트 깃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나 봐. 나 보라구. 박찬열.”



잔뜩 떨리는 목소리지만 오기가 스며있는 탓에 찬열은 끝내 시선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눈이 마주쳤다. 조명이 내려 번뜩이는 눈빛이 거칠다. 그리고 참 많이도 아파 보였다. 잔뜩 상처 입고 버려진 어린 짐승같이.



“이제, 나 형 안 좋아할 거예요. 너무 힘들어서, 내가 너무 불쌍해서. 형 말대로, 그만 아플래.”



응, 그래. 잘 생각했어. 맞아. 맞는 거야. 속 시원해야 맞는데, 근데… 왜 서운한 감정이 들까. 제가 봐도 너무 모순적이었다. 진짜 나쁜 새낀가 보다, 나.



“그렇지만, 이대로 그냥 끝내긴 나 혼자 짝사랑한 시간이 너무 억울하잖아.”



숨을 들이켠 백현이 코트 깃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발꿈치를 들어 올려 발끝을 세웠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꾹 제 입술을 부딪쳤다.


 

서툴고, 어설프고, 무디기만 한 찰나의 행위가 끝나고, 손등으로 쓱 아무렇지 않게 입 주변을 닦아내었다.



“뭐야, 키스 별것도 아니잖아.”



넋을 뺀 찬열의 얼굴을 한 번 눌러 담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철컥 현관문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닫힌 현관문에 기댄 백현이 그대로 주륵 무너져 내렸다. 별 것 아닌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벌렁벌렁 터질 것 같은 심장이 주체가 되질 않았다. 한 손으로 입술을 꾹꾹 누르고 나머지 손으론 심장께를 두드렸다.

 

그렇게 쏟아냈음에도, 여전히 멈추지 않는 눈물이 뺨을 타고 길게 늘어졌다.

마지막, 정말 마지막이다. 오늘만 울고 이제 마음 눌러 접을 거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06.


“꼬매-”



본 척도 않고 휙- 돌아서는 동글한 뒤통수에 찬열의 부름은 맺어지지 못했다. 백현이 절 무시할 거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괜히 머쓱해져, 작은 입술이 닿았던 제 입가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겨울의 찬 기운 탓인지 손끝이 매우 시렸다.




07.


세 병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 후론 빠르게 비어가는 술병을 헤아려 보지 않았기에 얼마나 들이부었는지 가늠이 안 되었다. 정신이 알딸딸한 걸 보니 꽤나 들이킨 모양이다. 술기운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찬바람을 맞으면서 떨쳐내 볼까, 복도를 서성였다.

 

사실 걸어오는 내내 바깥이었으니 겨울 공기에 적잖은 시간 노출된 상태였다. 그래, 술 깬다는 건 핑계일 뿐이겠지.


복도 끝과 끝을 오가는 찬열의 움직임이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아, 꼬맹아.”



엘리베이터를 나와 터벅터벅 걸어오는 아이의 걸음이 움찔했지만, 요 며칠 그랬듯 찬열을 무시하고 바삐 발을 움직였다. 어서 그를 피해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현관 도어락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차가운 손이 그보다 빨랐다. 교복 카라 깃 위로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 닿았다. 낮은 온도 탓인지, 그의 손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파르르 몸이 떨렸다.



“씨이- 뭐예요!”



그를 향해 고개를 팩- 돌리고 눈을 매섭게 홉떴다. 그의 손을 야멸차게 내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야 봐주네.”



허- 터져 나온 웃음의 의미는 어이없음과 황당함 그리고 조금 저린 마음이 버무려져 있었다. 이리저리 튀는 맘을 힘겹게 다잡으며 겨우겨우 찬열을 피하고 있는데. 그는 이렇게나, 너무도 손쉽게 절 흔들어놓는지.



“형이랑 마주하고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찬열의 속눈썹이 사선으로 떨어졌다. 대체 왜 당신이 상처받았단 표정을 짓는 건데?



“백현아.”



머리꼭지에 닿은 술 냄새와 그 기운 탓인지, 뭉툭한 목소리에 다시금 심장이 저렸다. 뜻대로 되지 않는 마음이 백현은 속상했다. 쿵쿵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다다 찬열에게 쏘아붙였다.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말아요. 나는, 나는요. 되게 노력하고 있어요. 형 그만 좋아하려고. 그러니까 형도 그냥 저 아는 척하지 말고 모르는 사람 취급해요. 이렇게 어정쩡하게 굴지 말라고요. 그만 아프라며, 네가 나한테 그만 아프라고 그랬잖아! 근데 왜 이렇게… 씨발. 흐, 왜 이렇게 날 못살게 굴어. 우스워요? 형은 내가 우스워?”



작은 몸에서 울컥울컥 토해져 나오는 말들이 찬열을 마구잡이로 두드리고 때리고 후려쳤다. 백현이 우스운 게 아닌데, 그런 게 아닌데.



그럼 대체 난 뭐지?

한없이 밀려들 때는 순수한 감정이 그저 부담스러워 밀어내기 바빴으면서, 멀어지니까… 손끝에 잡히지 않으니까. 그게 아쉽고 서운한 이유가 도대체 뭐냐고.


혼란스러운 머리통이 지끈지끈 쑤셨다. 뇌가 온통 소란스럽게 달그락거렸다.



“미, 미안.”


 

볼품없는 사과를 뱉어내고 아이에게서 급히 몸을 틀었다.

몰아치는 감정이, 코앞까지 맞닥뜨린 마음이, 도무지 추슬러지지 않았다.



 

08.


찬열은 텅 비어있는 찬장을 확인하고 허탈했다. 먹을거리가 모조리 동난 상태였다. 시체처럼 가만히 늘어져 있었을 뿐인데, 어김없이 시간 맞춰 허기지는 몸이 짜증스러웠다. 그는 며칠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채 집안에 틀어 박혀있는 중이다. 어차피 방학이고, 딱히 할 일도 없고. 무엇보다 백현과 마주치는 게 왜인지 겁이 났다. 하지만, 당장 먹을 게 없으니 장을 보기 위해 외출할 수밖에 없었다.



상가 마트에 갈 생각으로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나왔는데. 후회됐다. 발가락이 시리다 못해 아려 죽겠다. 오만상을 찌푸린 채 잰걸음을 걸으며 마트로 향하는 길목에 문득 분식집이 시야에 걸렸다. 직접 사 먹은 적은 없지만, 종종 백현이 저 분식집의 떡볶이와 순대, 튀김을 사 들고 찬열의 집을 들이닥쳤기에. 둘 다 매운 걸 잘 먹지 못해 시뻘게진 얼굴로 헥헥 거리면서도 맛있다고 먹었던 게 생각났다.

 

아- 날씨가 너무 춥다.

어쩐지 코끝이 시큰해져 버렸다.



찬열은 이끌리듯 분식집 앞으로 향했다.



“떡볶이 1인분이랑, 순대 1인분 허파 많이요.”



포장되기까지 바깥에서 기다리기엔 발이 너무 시렸다. 분식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차에 멈칫 움직임이 굳었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동글한 뒤통수가 눈에 익은 까닭이다. 백현이었으니까. 고작 집 밖으로 나온 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마주쳐버렸다. 이왕 마주칠 거 얼굴이면 좀 좋아. 뒤통수는 조금 아쉽- 아, 미친 무슨 생각이냐. 결론을 회피하는 마음이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가만히 아이의 뒤통수를 주시하고 있던 찬열의 귀로 백현과 그의 친구 세훈의 대화가 어렴풋이 들렸다. 볼캡의 챙을 아래로 내려 얼굴을 가리고 문가에 바짝 다가가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미친놈아. 잘 먹다가 입맛 떨어지게 갑자기 왜 처우냐고?”

“아니이- 떡볶이가 맛이, 맛이써서. 흐잉. 형아가 생각이 나가지구. 어어엉.”

“하여간, 울보 새끼. 존나 쪽팔리다니까.”



세훈이 식탁 위의 냅킨을 마구잡이로 뽑아 백현의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아, 애 피부 약해서 저러면 죄다 붉게 일어날 텐데. 살살 좀 닦아주지.



“후나. 내가, 내가아- 형아를 잊을 흐이잉. 잊을 수, 있을까?”

“당연하지. 내가 여자 소개해줄게.”

“여자 시러어-”



그가 의식하진 못했지만, 백현의 대답에 찬열의 입꼬리가 꿈틀 올라갔다.



“아, 맞다 너 게이였지. 남자 소개해줄게. 내가 발이 또 넓잖냐. 너 그 옆집 놈보다 더 괜찮은 게이형 소개해줄게. 그 형도 요즘 외롭대.”

“…형아보다 키 커?”

“비슷할걸? 180은 넘어. 사진 보여줄까?”



수긍하듯 조그맣게 흔들리는 뒤통수에 언제 올라간 적이 있었냐는 듯 입매가 굳고, 미간이 콱 찌푸려졌다. 역시 의식하지 못한 표정 변화였다.



“오- 똥백. 좀 흥미가 생기나 본데. 그래 잊을 수 있다니까? 사랑은 사랑으로 잊힌단 말 알지? 한번 만나봐. 이 형 되게 착해. 옆집 놈보다 잘해줄 거야.”



당장 들어가 말리고 싶었다. 이제 고3 되는 애가 공부를 해야지. 무슨 사랑이냐고. 꼰대 같은 말을 해서라도 뜯어말리고 싶었는데. 제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을까. 아니, 애초에 말리고 싶은 이유가 뭐지?



“학생. 포장 나왔어요.”



아아, 나도 백현을.



“잘생긴 학생- 학생? 학생!”



재차 찬열을 부르는 아줌마의 음성에 뒤를 돌려는 백현의 움직임으로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떡볶이가 담긴 검정 봉투를 받아들고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결국 장도 보질 못했다. 검은 봉지만 대롱대롱 든 채 멍하니 백현의 집 앞을 서성거렸다. 어쩐지 제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찬열의 눈길이 빠르게 돌아갔다. 시선 끝에 멈칫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한 백현을 담을 수 있었다. 한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던 찬열이 현관문 앞에 서 있을지 예상치 못했겠지.



찬열은 오랜만에 마주한 백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심장의 울림이 이상했다. 너무나 빠르게 뛰었다. 얘가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왜 예뻐… 보이지?


역시나 짐작대로 붉게 일어난 눈가를 향해 찬열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닿지 못했다. 뾰족하게 눈꼬리를 세운 백현이 그 손을 툭- 매섭게 밀어냈기에.



“차갑다. 꼬맹이.”



다정한 말투에 미묘하게 떨리는 여린 입가를 찬열은 놓치지 않았다. 피식- 웃음을 흘리고 백현의 눈앞에 검은 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나랑 떡볶이 먹을래?”

“…내가 왜 형이랑 떡볶이를 먹어요. 그리고 나 떡볶이 먹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이제 나한테 말 걸지 말아요. 이제 말 걸어도 대답 안 할 거예요.”


 

너무 늦었나.



“…그리고, 양말 좀 신고 다녀요. 보는 내가 다 발 시려.”



아직 늦은 건 아닐까.

꽝- 하고 닫힌 현관문 앞에서 찬열은 조금 웃었다.


 



09.


방학인데 집구석에 처박혀있지만 말고 술 한잔하자는 동기의 연락을 받고 간만에 바깥 공기를 쐬며 걸었다.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발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카페 창가에 앉아 수줍은 듯 미소 짓고 있는 아주 익숙한 얼굴 때문에. 옆집 꼬맹이였다. 알은체하려던 손끝이 맞은편의 남자로 인해 굳었다. 그때 꼬맹이 친구가 말한 외롭다는 그 남자인가? 씨발, 기어이 소개팅하는 거야?

약간의 어색함과 미묘하게 다정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들의 모습에 짜증이 났다. 그리고 불안했다. 남자의 얼굴이 생각보다 꽤 잘났으므로. 백현이 그에게 반하기라도 할까. 아니, 저렇게 어여삐 눈을 휘며 웃는 걸 보니 이미 반했는지도 모르겠다.



창가로 바싹 걸음을 옮겨 백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시선을 느낀 백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고 이내 서로의 눈길이 마주쳤다.



아아, 그날 너의 마음이 이랬을까?

모르는 사람인 듯 무심하게 흘려버리는 시선에 찬열은 심장의 욱신거림을 사무치게 느껴야만 했다. 그 자리에 선 채로 한참을 멈추어있다, 어렵사리 몸을 돌렸다. 바라봐주지도 않는데 그러고 있으면 뭐해, 너무 청승맞잖아.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술이나 진탕 마셔야지. 마음먹으며 앞으로 몇 발자국 걸었다. 하지만 곧 걸음이 멎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못 가겠다. 그냥 지나쳐버리면 이 순간을 밤새, 아니 몇 날 며칠을 후회할 게 분명했다.



카페로 성큼성큼 들어가, 백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별안간 등장한 찬열은 당연히 그들에겐 불청객일 테지. 맞은편의 남자와 백현의 시선이 따갑게 쏟아졌다.



“누구?”

“나 얘 옆집 남-자.”



어쩐지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찬열의 답변에 미간을 작게 구긴 남자가 백현에게 묻듯 시선을 돌렸다. 눈치를 보던 백현의 고개가 살며시 끄덕여졌다. 어찌 되었든 찬열의 말은 사실이 맞았으므로.



“근데 무슨 일로.”

“얘 데리고 나가려고.”



백현의 손목을 덥썩 잡아 일으켰다.



“꼬맹아, 집에 가자.”



갑작스러운 찬열의 행동이 당황스러워 백현은 별다른 저항도 하질 못하고 일으켜졌다.



“아- 혀엉.”



뒤늦게 버둥거리는 아이를 끌고 카페 밖으로 나갔다.



“형! 뭐예요, 진짜?”



팩하고 찬열의 손목을 뿌리친 백현이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대체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이야.



“넌 뭔데?”

“네?”



도리어 돌아오는 질문에 잠시 멍해진 사이 다시 카페로 들어간 찬열이 백현의 코드와 목도리를 챙겨 나와 그에게 입혔다. 코끝까지 목도리도 둘둘 둘러주었다. 고작 몇 분 찬 공기를 쐬었다고 발긋해진 동글한 콧망울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춥지? 빨리 집에 가자.”



코트 소맷자락 아래로 작게 삐져나온 작은 손끝을 쥔 채 제 패딩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아파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어다. 손안에 바르작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아, 쫌- 정말 왜 이래요, 갑자기! 미쳤어요? 약이라도 잘못 먹었나?”

“형아랑 오랜만에 손잡고 걸으니까 좋지 않냐?”

“무슨,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요.”



찬열의 주머니 속에 감추어진 손을 빼낼 순 없을 것 같으니, 조금 흘러내린 목도리를 잡아당겨 코끝을 더 깊이 묻으며 얼굴을 숨겼다. 사람들의 시선보다는 발갛게 달아오른 양 뺨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손을 붙잡은 채로 나란히 걸어 찬열의 집에 도착했다. 찬열이 일부러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는 걸 백현은 아마 모를 테지.



“다 왔으니까, 이것 좀 놔요.”



감싸인 손아귀의 힘이 풀리자 그의 주머니에서 급히 손을 빼내었다. 그가 정말 밉다, 진짜 싫다 그렇게 세뇌하고 부정했음에도, 결국엔 마주 잡은 손 하나에 속절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이 야속하고 또 속상하기도 했다. 한숨을 폭 내쉬고 소파에 앉아 목도리를 풀어 발치에 내려놓았다.



“핫초코 타줄까?”

“네. 아, 아니요. 저 금방 갈 거예요.”

“어딜? 아까 그 자식한테?”



부드럽기만 하던 눈매에 날카롭게 날이 섰다. 흠칫 시선을 떨어트린 백현이 고개를 젓고는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아뇨. 집.”



백현의 대답에 안도한 찬열은 엄지로 제 눈꼬리를 꾹 눌러 풀어내고, 주방으로 향했다.


얼마 후 따뜻한 핫초코가 담긴 머그컵 두께를 들고나왔다. 찬열이 내미는 컵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후후- 표면을 불어 식히고 호로록 한 입 머금었다. 맛있다. 혀끝에 어리는 초코 맛이 참 달았다.



찬열의 엄지 손끝이 백현의 입가를 훔치고 멀어졌다. 다시금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너는 핫초코 먹을 때 항상 입가에 묻히더라. 애도 아니고.”

“…형아.”

“응.”

“나한테요, 왜 이러는 거예요?”

“뭐가.”

“아니, 지금 형이 하는 행동들이-”



웅웅- 백현의 코트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이 말을 끊었다. 발신인은 세훈이 소개해준 형이었다. 찬열의 눈치를 살피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죄송해요. 놀라셨죠.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녜요, 그냥 옆집 형…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네, 네. 다음번에 다시. 네, 제가 연락. 으앗!”



백현의 통화내용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찬열이 그의 폰을 빼앗았다. 망설임 없이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고 아예 폰 전원까지 꺼버렸다.



“형!”

“나 너 좋아해.”



대뜸 내뱉어진 그의 고백을 잘못 들었나 싶다.



“…네? 뭐라고요?”

“나도 널 좋아한다고.”



다시금 되뇌어진 고백은 잘못 들었다고 할 순 없겠지. 백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금세 물기를 그득 머금어버린 눈동자가 물빛으로 반짝거렸다.



“나, 나는… 나는요. 형 잊으려고. 너무,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형 안 좋아하려고, 흐으- 그랬는데에.”



또 그만 울려버렸네. 손을 뻗어 젖은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래서 이제 나 안 좋아해?”



히끅- 숨을 삼키며 애써 눈물을 참아보려 양손으로 제 바짓자락을 꾸욱 움켜쥐었다.



“미, 미운데. 흐으, 엄청 나빴는데….”



다정한 눈빛과 달래는 손길이 미련 맞게 너무 좋아서, 그만 참지 못하고 그의 목에 팔을 둘러버렸다.



“어엉- 형아. 어어엉. 형아아.”



품으로 쏟아져 어린 애처럼 통곡하는 꼬맹이가 찬열은 안쓰러웠다. 연신 등을 쓸어내리는 손끝이 저렸다. 제가 이 정도로 애를 서럽게 했나.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현아.”

“흐으- 으응.”



울면서도 꼬박 나오는 대답이 왜 이다지 먹먹한지 모를 일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 웃고 있는 널 보니까, 미치겠더라.”

“허엉. 내, 내 기분이 어땠겠어요. 나도, 나도 그때 그 여자랑, 형아랑 히잉, 있는 거 봤을 때, 죽을 것 같았는데. 형은, 형은 나한테. 어어엉.”

“미안, 현아. 정말 미안해.”



심장이 조여드는 죄책감으로 연신 미안하다 아이의 귀에 속삭였다. 고작 이런 말 한마디로 아이가 받았을 생채기를 온전히 치유하진 못할 테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은 오롯한 진심이었다. 오늘 제가 느꼈던 순간의 참담한 기분보다, 그때 너의 기분이 더 지독했을 걸 아니까. 아이의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하염없이 미안함을 전했다.




“형아. 정말 형아도 나 좋아요?”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선 작은 입을 달싹이며 묻는 모양이 이렇게 나 사랑스러운 것을, 왜 밀어내고 상처 주기 바빴는지.



“응.”



부드럽게 젖은 뺨을 감싸고 물었다.



“입 맞춰도 돼?”



대답 대신 사르륵 눈이 감겼다. 닿기도 전에 앞으로 쭉 내밀어 마중 나온 앙증맞은 입술이 귀여워서 쿡쿡 웃고 말았다. 이렇게 깜찍한데, 그동안 나 참 바보 같았다. 멍청했고, 미련했다.



입술에 감촉이 없자 살며시 눈을 뜬 백현이 고개를 갸웃하곤 찬열의 볼 붙잡았다. 그리고 마주친 입술.



첫 키스였던 그날의 시린 입맞춤이 아닌, 핫초코 맛이 나는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Fin.






 

찬백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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