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서 춤추는 아컨과 영 페바 단문 / 평소엔 퇴고하면서 필요없는 부분 많이 잘라내는데 이 글은 그냥 다 남겨놨어요... 

BGM: Cecile Corbel - The Wild Waltz




그날은 새까만 하늘에서 두꺼운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그러나 흐리고 어두운 시야 너머 뿌옇게 일렁이는 녹색 불빛이 보였다. 그것은 매섭게 살을 때리는 빗속에서도 마치 비구름을 살라 먹겠다는 양 막대한 양의 수증기를 뿜어내며 생령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돌의 바다를 바수어뜨릴 기세로 내리꽂히는 빗소리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고 나도 육안으로는 녹색 불길 외의 피아식별이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이 어둠 속에서 그가 나의 차고 뻣뻣해진 육체를 알아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은은한 빛을 내는 녹색 수증기 덩어리가 회전하듯 일렁이더니, 산산이 부서지는 목소리들이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안녕, 우리의 페이트바인더.” 아이처럼 들떴으면서 노인처럼 단조롭게 가라앉은 음성이 고막을 진동시키며 두개골 안쪽을 울렸다. 저만치의 빛무리처럼 보이는 그는 언제나처럼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참을 수 없이 즐거워져서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일렁일렁 빛을 내는 녹색 형체는 평소보다 더욱 환영처럼 보였다. 그때 하늘에서 새하얀 천둥이 번쩍여 일순, 시야가 새하얀 빛으로 뒤덮였고

내 가슴은 즉시 뜨거운 환희로 가득 찼다. 하늘에서 내리꽂힌 전류가 가슴 속 불길에 마법적인 열과 빛을 더한 것처럼

나는 곧 죽을 사람처럼 들떴고, 목소리는 노래하는 것처럼 흘러나왔다. “당신도 벼락을 맞기를 기다리고 있었나요?”

내 목소리는 마치 어린날 함께 벼락맞은 느티나무 곁을 숨이 차 쓰러질 때까지 달렸던 놀이친구에게 질렀던 고함처럼 기쁨에 차 있었다. “당신께서도 저와 같은 기쁨을 느끼시나요?” “페이트바인더, 대담하기도 하지! 근 몇백 년간 아무도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 다시 한 번 벼락이 쳤고 내 가슴은 순수한 백색 기쁨으로 불타올랐다. 나는 춤추듯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가, 마치 어린 시절 놀이 친구에게 그러했듯 그의 소매를 감싼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하는 핏빛 옷자락을 붙잡았다. “춤춰요, 함께요 아컨.” 그러자 숨넘어가도록 웃는 소리가 그의 온 몸을 이루는 불꽃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곳에서 새어나왔다. “우리도 미친 짓이라면 일가견이 있지만 너는,” 다음 말은 속삭임처럼 머릿속에 떨어져 피처럼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내가 옷자락을 잡아끌자 그는 낄낄대며 비틀거리며 장단을 맞추어 따라오고, 내가 보이지 않는 음악을 지휘하듯 팔을 움직이자 그의 몸은 갈대처럼 웃음소리처럼 흔들거렸다. 어린아이의 애수와 노인의 열락을 함께 닮은 새된 중얼임들이 음표처럼 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나는 빙글빙글 빙글빙글 우리는 마치 음표들처럼 팽이들처럼, 팔짱을 끼고 원을 그리며 돌고 발을 앞으로 걸고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다시 앞으로 다가서고 

한동안 나는 앓을 것이다. 고열에 시달리고 수증기에 데인 살은 짓무르며 화상 자국은 어쩌면 오래 지워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당장의 순수한 기쁨에 숨이 막히는데 청동 가면 뒤 불로 된 눈이 입이 찢어져라 함빡 웃는 내 얼굴을 본다. 대체 누가 마지막으로 그를 보며 이런 표정을 지었을까? ‘아무도 없었지, 아무도!’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목소리들이 머릿속을 꽝꽝 울리고, 하늘은 까맣고 그는 부패한 녹색 증기를 피워올리고 움직일 때마다 차게 덩이진 머리칼이 목을 때리고, 어린 물집이 올라오는 피부에 가죽 채찍처럼 닿았다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빗물, 빗물들...

지면에 부딪혀 사라지는 빗방울의 갯수만큼 헤아릴 수 없이 값진 비밀들이 매 순간 내 안에 밀려왔다 사라져간다. 가슴은 뜨겁게 데워지는데 등으로는 얼음장 같은 빗물이 흘러내려 나는 이미 열병에 걸려 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틈마다 불길이 새어오르는 가죽 건틀릿이 내 두 손을 꽉 붙잡아 살이 타는 아픔이 벼락같이 뇌를 때리고, 이어진 손을 타고 이 빗속에서 나를 통째로 살라 버리고 싶은 그의 잔인한 마음들이 흘러들어와 나는 지상에서 제일 즐거운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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