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2020년 3월, 코로나가 서서히 맹위를 떨치며 세상을 공포에 몰아넣던 시기에 적은 글이다. 최근까지 오미크론이 퍼지는 기세를 생각하면 그 정도로 겁먹을 건 없지 않았나 싶지만, 그때는 정말 두려웠고 그러면서도 슬기롭게 대처하지도 못했다. )

3월 말에는 코로나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공포에 시달렸다. 아침에 눈을 뜨니 별안간 몸이 무겁고 등이 당기며 은근한 열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냥 몸살이겠지?

그즈음 잠을 잘 못잔데다 근육 운동을 했고, 전날 쌀쌀한데 옷을 얇게 입은 채 상당히 무거운 짐을 지고 돌아다닌 탓에 몸살이 났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래서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가족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만약에’ 코로나라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커지기 시작했다. 짚이는 구석이 없다면 없고 있다면 있었다.

주말에 비좁은 곳에서 여러 명이 모여서 놀았으니까 구성원들 중 누군가에게 감염되었을 수도 있고, 음식 배달부가 문제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대중교통에서 잡은 손잡이 따위에 묻어 있던 바이러스가 마스크를 쓰고 벗을 때 옮겨왔을지도 모른다. 밖에서 뭘 만질 때마다 손을 소독했지만 그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만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불안해서 증상에 대해 온갖 얘기를 검색해봤다(증상 검색과 자가 진단은 대체로 의사들이 하지 말라는 짓이다). 코로나는 증상이 시작된 시점을 특정하기가 힘들고 마른 기침과 인후통, 후각 상실이 주요 증상이라 내 증상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근육통과 무기력감, 열감은 일치했으며, 애초에 코로나가 맞는지 아닌지 의사들도 구분이 힘들다고 했으니 어느 쪽으로 확신을 가질 길이 없었다.

아무튼 일단은 체온을 재야 했다. 하지만 집에 있던 체온계는 박살이 난지 오래라 새로 구해야 했다. 집안에 온갖 공구가 즐비하고 첨단 기능으로 무장한 스마트 기기를 몇 대나 갖고 있으면서 고작 체온 하나 잴 수 없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스크를 쓰고 체온계를 구하러 밖으로 나갔다. 만약 내가 지금 확진자라면 걸어다니는 민폐덩어리겠지만 나간 김에 여차하면 길 건너 보건소로 갈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약국 앞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너무 순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스크도 없어서 그 난리인데 체온계가 남아날 리가 없었다. 문앞에 마스크도 소독제도 체온계도 없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처용의 얼굴을 보고 돌아선 역신처럼 발길을 돌려 보건소로 향했다. 그러자 임시 진료소 앞에서 방역복으로 중무장한 직원이 보건소에 연락을 하고 와야 한다고 말해줬다. 그냥 척척 가서 아프다고 해봐야 검사해주지 않는 것이다.

어디서 확진자가 발생했고 어딜 돌아다녔다는 둥 어쨌다는 둥 다양한 정보를 보면서도 정작 자기가 의심될 때 어떡해야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는 게 한심스러웠다. 걱정을 하면서도 완전히 남의 일, 강 건너 불구경으로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건소에 전화하니 직원은 의심 증상이 있다고 해주는 것도 아니고, 확진자와 접촉이 있어서 보건소 연락을 받은 게 아니면 병원에서 소견서를 받아와야 한다고 했고, 나는 결국 길 건너 내과로 향했다. 인터넷에서 내과에 가서 소견서를 받고 검사를 받았다는 후기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과는 굳게 닫혀 있었고, 문 앞에는 코로나 증세가 의심될 경우엔 안심 진료소를 가라고 적혀 있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확진자가 다녀간 시설이란 시설은 모두 소독하는 실정이니 동네 내과에서 의심되는 분들을 어서오시라고 받아줄 턱이 없었다.

막막한 걸음으로 나가서 이번에는 질병관리본부 1339로 전화했다. 그런 전화가 있는 줄 알면서도 미뤄온 것은, 그 전화를 함으로써 내게 모종의 강제성이 발생할 거라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전화 번호를 기반으로 내 신상을 알아내고 추적 관리를 하면 내가 어느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게 되거나, 혹은 가지 않음으로써 전국적인 민폐 인간으로 거듭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 마당에 가장 전문적인 곳의 조언을 구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결국은 전화를 했고, 안내원에게 증상을 말했다. 약간 피곤한 듯한 안내원은 안심 진료소를 가라고 했다. 그냥 전산처리를 할 테니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말해주길 바랐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기야 개인이 받으려면 16만원을 내야 하는 검사를 의심된다는 말만으로 해줄 리도 없거니와 그렇게 해준다면 전국의 몸살 감기 환자가 보건소로 몰려들어 도리어 위험한 꼴이 될 게 분명했다.

아무튼 내가 갈 만한 진료소는 두 곳으로, 어느 쪽도 버스로 40분쯤 걸리는 곳이었다. 나는 내친 김에 거기까지 갈까 생각했다가 자리에 멈춰섰다. 인터넷에서 의심 증상을 보인 사람들이 현명하게 진료소까지 걸어갔다는 얘기를 몇 건이나 봤는데 나만 이기적으로 버스를 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걸어가자니 너무나도 멀고, 아픈 마당에 자전거를 꺼내 타고 달리는 것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전문 인력 셋이 나란히 퇴짜를 놓는 마당에 별 대단한 증상도 없이 이러는 것도 너무 호들갑이라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체온이라도 잴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상당히 어리석은 방법이었다. 인터넷에서 체온계를 20000원에 주문하고(그나마 양심적인 값이었다) 내일 체온을 재본 뒤에 판단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체온계가 올 때까지 자가격리를 했다. 하지만 말이 자가격리지 실상은 호들갑떤다는 소리나 들을 것 같아서 가족끼리 둘러 앉아 식사하며 찌개만 따로 퍼다 먹은 정도라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에 가까웠으니, 확진자로 밝혀지면 만사 망하는 선택이었다.

(사진과 같은 방식의 전자 체온계를 사서 한동안 쓰다가, 이용 방법이 직관적이지 않아서 비접촉식을 새로 샀다. Polina Tankilevitch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아무튼 이런 글을 쓰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겠으나, 다음날 체온은 정상 범위로 나왔고, 그 뒤로는 오히려 36.5도 밑으로 나오기도 하는 등 아무 문제 없이 컨디션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잠복기가 걱정되어 그 다음 주말의 약속은 포기했고, 그 다음 주에는 모임을 온라인으로 대체했다.

내가 멍청한 과정으로 체험한 코로나의 공포는 그런 것이었다. 좀비에 물린 것과 달라서 걸린 건지 안 걸린 건지 알 수 없다는 점. 내가 아픈 것보다 사회적 비난이 두려워서 실상을 알아보려하지 않게 된다는 점. 희망과 공포가 혼재할 때 편한 쪽을 택하게 된다는 점. 등등등.


(이로부터  2년 후에 진짜 코로나에 걸렸고. 가족들이 다같이 자가격리를 했고, 다행히 큰 후유증이 남지는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세상 일 정말 알 수 없는 법이구나 싶다. 노인들이 후회하는 것으로 ‘괜한 걱정을 너무 많이 했다’를 뽑는다는 얘기도 생각나고. 하지만 나는 그때 느낄만한 공포를 느꼈고, 그때 넘기 힘든 문턱 앞에서 돌아섰다. 그땐 아직 나처럼 겁많고 어리석은 사람까지 좋은 선택을 쉽게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때 이후로 코로나가 횡행하는 동안에는 아프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잘 지키고 있진 않은 것 같다.)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카카오 페이지)을 썼습니다. 일상 속에서 느끼는 두서없는 잡상들을 올립니다. 간혹 게임이나 영화 얘기도 합니다. 트위터 @memocap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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