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없어 불도 켜지 못한 채로 히무로의 방에 들어간 켄마가 아이를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잠든 얼굴이 천사 같았다. 몰래 다가가 볼에 뽀뽀를 해 준 켄마는 발치에 개어놓은 이불을 펼쳐 아이의 몸을 덮어주었다.


오랜만이니까 같이 자는 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히무로가 편하게 자지 못할까봐 쿠로오와 함께 쓰는 다른 방에서 잘 생각이었는데 막상 발을 떼려니 잘 떨어지지가 않았다. 엄마, 엄마니까. 결국 그 한 마디로 자신을 납득시킨 켄마는 옷을 갈아입고 아이의 옆에 누웠다. 히무로보다도 어려진 듯 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켄마는 히무로를 껴안고 눈을 감았다.


“잘 자. 히무로.”


잠든 아이는 예쁜 웃음을 지었다.


*


켄마는 번쩍 눈을 떴다. 옆자리가 빈 침대와 화장실에서 들리는 억눌린 신음소리가 본능적으로 그를 깨운 것이리라. 켄마는 거칠게 이불을 젖히고 안방에 딸린 욕실 문을 열었다. 어둠에 익숙해 진 눈이 환한 욕실의 불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꽉 감긴다.


"...히무로?"


"흐으.. 아저씨. 엄, 엄마. 엄마..흐아앙..."


켄마가 억지로 감기는 눈을 뜨며 다리를 굽혔다. 조심스레 손을 뻗자 작은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고 있는 히무로의 등이 손끝에 닿는다. 그 작은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고 등을 쓸었다. 창백해진 피부와 떨리는 몸, 변기에다 쏟아내려다 못했는지 바닥에 흥건한 토사물. 체했나? 아니면 급성 장염? 의사로서의 본능은 감사하게도 그가 허둥대지 않고 차가운 이성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켄마는 차분하게 오늘 자신의 아이가 무엇을 먹었는지 더듬었다.


"쉬, 괜찮아. 히무로 안 아프게 엄마랑 병원 가자."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잘 먹었고 씩씩했다. 아니, 그게 문제였나. 켄마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로 안방으로 돌아와 협탁에 놓인 핸드폰으로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어, 켄마. 무슨 일이야, 이 밤에?]


"쿠로. 히무로가 아파. 체한 것 같은데 장염일지도 몰라. 지금 갈 테니까 침대 하나만 비워줘."


[...어, 어. 응. 알았...]


켄마는 그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애써 침착한 척 하고 있었지만 부모로서 속이 타지 않을 리 없었다.


"엄...마, 엄마. 팔, 팔이 안 움직여요...아파.. 으, 찌릿찌릿해서.."


품 안에 안긴 아이가 바르작거린다. 켄마는 바싹 말라오는 입안을 짓씹으며 아이의 팔을 주물렀다. 혈액이 제대로 돌지 않아 약한 마비증세가 온 모양이었다. 괜찮아, 별 거 아냐. 속으로 그 말만을 되새기면서 아이에게 작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괜찮아, 히무로. 쿠로오 아저씨가 우리 히무로 다 낫게 해 줄 테니까 아저씨 보러 가자.


아이를 한 팔로 안고 차키를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 몇 시간도 채 안 되어 다시 밖을 나서게 된 꼴이었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하나 씨의 기일이라는 이유로 마음은 무겁지만 그래도 좋은 날이었는데. 히무로가 자신을 엄마라고 처음 불러 준 날이었는데. 켄마는 이를 악물고 핸들을 꺾었다. 하나 씨, 당신의 아이가 당신의 품을 벗어나서 심술을 부리는 건가요? 그렇다면 부탁이니까 아주 조금만 부려줘요. 당신도 히무로가 아픈 건 보고 싶지 않잖아.


"켄마!!"


"쿠로."


역시 혼자 아픈 아이를 보는 것 보다는 안심된다. 켄마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면서 품에 안고 있었던 아이를 쿠로오에게 안겨주었다. 울다 지쳐 잠이 든 아이는 힘없이 축 늘어져 그의 품으로 옮겨간다.


"난 병원 접수부터 하고 올 테니까."


"응. 4층이야."


두 사람의 발길이 각기 다른 곳으로 향한다. 켄마와 헤어진 쿠로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 소아과로 서둘러 올라왔다. 자신이 소아과에 몸을 묻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다행스러울 수가 없다. 자신의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 하나로 침대를 비워 준 동료 직원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쿠로오가 아이를 눕혔다.


"아저씨...나, 아파요. 막, 머리도 아프고.. 누가 막 찌르는 것처럼 배가, 우욱..!"


"...히무로!!"


의료 기구를 준비하던 쿠로오가 잠에서 깬 듯 한 아이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아이가 몸을 비틀어대더니 침대에 토사물을 쏟아내었다. 묽기만 한 그것을 쏟아내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뻣뻣하게 몸이 굳어버린 쿠로오를 지나쳐 간호사들이 서둘러 아이에게 달려간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리고 머리를 친다. 멍청해 진 정신으로 수액만 손에 쥐고 있을 때였다.


"정신 차려, 쿠로. 뭐하는 거야?"


"컥...!"

접수를 하면서 방사선과에 들렀다 왔는지, 켄마의 손에 들린 새하얀 가운이 쿠로오의 얼굴을 냉정하게 후려친다. 얼얼한 얼굴을 부여잡고 몸을 숙인 쿠로오를 내려다보며 켄마가 입을 연다.


"쿠로는 의사잖아. 히무로가 쿠로를 기다리고 있어."


그의 말에 쿠로오가 번쩍, 숙었던 허리를 든다. 엉엉 울면서 쿠로오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자신의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자신의 성을 이은 아이가 아니어도 자신을 닮은 아이였다. 내 아이. 우리의 아이. 의사로서, 아빠로서 아이를 지켜줘야 했다. 그제야 머리가 화하게 개는 기분이 들었다. 맞아, 내가 이렇게 있으면 안 되지.


자신을 후려친 가운을 펼쳐 팔을 꿰어 넣는 켄마에게 재빠르게 도둑키스를 한 쿠로오가 씨익, 웃는다.


"고마워, 켄마. 나키리 상! 수액 달아줘요. 히무로, 아저씨가 배 눌러볼테니까 아프면 말 해. 알았지?"


순식간에 정리되는 병실 내부를 바라보던 켄마가 살며시 미소 짓는다. 역시 쿠로오는 이렇게 상황을 휘두르는 쪽이 어울렸다. 켄마는 조용히 병실에서 나왔다.


아이의 회복은 빨랐다. 정말로 하나 씨가 심술을 부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새벽동이 터 오자 끙끙대던 아이의 신음이 잦아들었다. 아침 회진이 있기 전에 아이를 보러 잠시 내려 온 켄마는 간이침대에 앉아 히무로의 손바닥을 조심조심 매만졌다. 정말 작다. 그런데 이 작은 몸으로 히무로는 큰 성인 남자 네 명을 떠받치고 있었다. 우리 모두 너에게 감사하고 있어. 켄마는 이 아이의 미소에 마음을 빼앗겼던 때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웃음꽃이 폈다.


“뭐해?”


“...그냥. 사람들이 왜 아이를 낳는지 이해가 돼서.”


“예~전에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다가와 켄마의 옆에 나란히 앉은 쿠로오가 장난스레 웃으며 켄마의 단발을 흐트러뜨렸다.


“그보다 부러워~ 나도 히무로한테 아빠 소리 듣고 싶은데.”


“...엄마는 어때?”


“켁.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엄마는 네가 차지해 버렸으니까 난 아빠로 할 거야. 그래야 우리 둘이 부부가 되는 거잖아.”


“...안 부끄러워?”


“엉. 안 부끄러운데? 내가 널 사랑하는 마음이 이 정도라고~”


입꼬리를 당겨 웃는 모습이 능글맞기 그지없다. 켄마는 오랜만에 정강이를 후려차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이제 포기해야지 어쩌겠나. 쿠로오에게 관심을 끈 켄마는 쥐고 있던 히무로의 손을 한 번 꼭 잡았다가 놓았다. 이제 그만 갈 시간이었다.


“난 이만 가볼게.”


“벌써... 아, 회진 시간이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운을 정돈하는 켄마의 턱을 붙잡고 홱 들어 올린 쿠로오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쪽.


“아쉬워서 어떡하나. 점심 같이 먹자. 전화 할게.”


“...응.”


시선을 내리깔며 작게 대답하는 켄마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한 번 더 쪽. 만족스러움에 킬킬 웃는 쿠로오의 가슴팍을 밀어 떨어트린 켄마가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 아아, 귀여워. 자꾸만 올라가는 광대를 좀 진정시켜보자 싶은 마음에 쿠로오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아저씨-?”


흠칫. 히무로가 누워있는 침대를 등진 채로 혼자 쇼를 하고 있던 쿠로오가 어깨를 움찔했다. 설마, 다 봤나. 아직은 아이를 순수한 채로 남겨두고 싶었던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어, 어, 응! 히무로! 언제 깼어?”


“아저씨랑 음, 엄마랑 뽀뽀할 때요.”


“...짜식. 방해 안 해줘서 고맙다.”


히무로가 깔깔대며 웃었다. 순간적으로 튀어나간 본심에 쿠로오가 제 입을 때렸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다. 결국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헤집은 쿠로오가 힐끗 시계를 보고 일어섰다. 히무로의 머리를 꾹꾹 쓰다듬어주며 씩 웃은 쿠로오는 아이가 다시 잠들기를 재촉했다.


“저, 아저씨!”


“응? 나 이제 가 봐야 하는데.”


제 머리를 누르듯 쓰다듬는 쿠로오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은 히무로가 눈을 또랑또랑하게 떴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조금 촉박하긴 했지만 못 들어줄 것도 없겠다 싶어 쿠로오가 느긋한 태도로 침대에 기댔다. 그가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는지 히무로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선생님이 엄마랑 뽀뽀 하는 사람은 아빠밖에 없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쿠로오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고 싶어요. 안 될까요?”


조심스레 건네는 말에 쿠로오는 어쩐지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푸핫. 큭큭대며 웃던 쿠로오는 아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세게 히무로의 머리카락을 흔들어놓았다.


“당연히 되지. 언제 불러주나 기다리고 있었어. 아차차. 나 진짜 가 봐야 되는데. 한 숨 자고 있어. 금방 다시 올 테니까.”


“네!”


켄마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가슴 한 구석을 꽉 채우는 충족감이 차올랐다. 어쩐지 울어버릴 것 같아서 허둥지둥 병실을 나온 쿠로오가 카운터로 바삐 뛰면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아, 이 녀석과 함께 지내면서 행복하지 않은 날이 한 번도 없어. 쿠로오는 다시 한 번 켄마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사람들이 왜 아이를 키우는지 알 것 같았다.


[켄마!!!!!!!!!!!!]


[왜?]


[히무로가, 히무로가....!!!!]


[?]


[나한테, 나한테 아빠라고!!!!! 아빠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우리 이제 진짜 부부!]

[아니, 결론이 왜 그렇게 되는 건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잉♥]


[......]


앞으로도 쿠로오와 켄마, 히무로로 이루어진 단란한 가족은 행복할 것 같다.


-Fin

하이큐 위주 글 연성/ BL, GL, NL 0 / 오이이와, 쿠로켄, 쿠로아카, 보쿠로, 보쿠아카 그 외 등등 / 리버스 전부 괜찮습니다. / 글의 저작권은 시라즈네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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