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1)


사쿠라이의 경우 ↓

너를 처음봤을 때가 언제더라. 그게 언제이든 내 사랑은 그때가 시작이었는데.


처음 이 방송국으로 스카우트 되었을 때, 그때는 어렸다. 객기어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 정도로 자신은 자신이 생각해도 미친놈처럼 굴었다. 처음에 피디가 되어 험한 꼴이란 꼴은 다 보았다. 어리다고 밀려나기도 하였고 주제모르고 나댄다는 말로 실력을 무시당하고, 아이템을 빼앗기기도 했었다. 그러니 사람이 독해지는 것은 별 수 없었다. 거지같은 기억만 가득했던 예전 방송국을 떠나 이 곳에 와서 자신은 그러한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악착같이 살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잘보일 필요는 없었다. 그건 잘해주는게 아니라 호구 잡히는 지름길이었다. 잘해야할 사람에게 잘하고 나머지에게 굳이 웃어줄 필요는 없었다. 처음에는 힘들었다. 성격이 한순간에 변할리 없었다. 그래서 노력하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싸가지 없다 욕하던 사람들은 결국 자신을 인정했고, 자신에게 잘해주었다. 방송국이란 그런 곳이었다. 결국 실력으로 모든 것을 평가받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곳.

그렇게 철저히 혼자가 될 무렵, 그 무렵 너를 만났다.


‘피디님 안녕하세요. 오노 사토시 입니다.’


나보다 이 방송국에 오래 있었던 너는 예전의 나 같았다. 굳이굳이 일을 받아 혼자 울고, 버거워 도망가고 싶었지만 버텨내고, 잘해보자고 한 일은 전부다 호구잡히는 일이 되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런 사람. 그런 네가 처음에는 답답했다. 답답함과 동시에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꼼꼼하고 성실하고 착하기까지한 너에게 눈이 안가는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을까.


‘피디님, 정말 멋져요.’


같이 일을 하기 시작한지 이주. 아직까지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내가 만들어낸 프로그램의 오프닝을 보며 너는 두 눈을 반짝거렸다. 결국 호통을 치고 무섭게구는 내 앞에서 고개한번 들지 않다가 그런 작은 것을 보고 두 눈을 반짝이며 너는 나를 바라보며 웃어보였다. 어둡기만한 편집실이 밝아졌다. 갑자기 창문이라도 달린 듯, 그래서 밖에서 빛나고 있을 태양이 만들어낸 빛이 새어들어오듯, 너는 나를 향해 그렇게 웃어주었다. 그게 너의 반짝이는 눈을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천성이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사실 그런 사람이었다. 초등학생이나 할 법한 좋아하면 괴롭힌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너를 더욱 몰아세우고 호통쳤다. 그럴 때마다, 너에게 한소리씩 할 때 마다 내가 집에 가 얼마나 많은 맥주캔을 비웠는지 너는 알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내 곁에 있어주는 너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는지 너는 알까.

오노 사토시라는 이름이 온몸에 박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너는 알까.

그래서 너의 성공을 바랬다. 나의 성공이 너의 성공이기를. 조금은 자리를 잡은 내가 이제 욕심내고 싶은 것은 다시 한번 너와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하면 너는 뭐라고 생각할까.

네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어디서 또 치이고 치여 그 일을 네가 전부다 떠넘겨 받은게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누구도 혼내지 않았다. 너에게 내가 냈던 화는 그렇게 나에게 아무런 투정도 하지 않는 너에게서 나온 화라면, 그 화의 목적지는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하게 만든 나라면 너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갑자기 성격이 조금 바뀐 너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랬으니까. 천성이 그런 사람이 갑자기 무언가를 바꾸려면 삐걱거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나는 너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절대, 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쓸데없이 장난을 치고, 말끝을 물어 늘어지고, 틱틱거리는 너에게 화를 내는 대신 웃어보일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였다. 네가 그때마다 내 눈을 봐주었으니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네 눈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니까.


일그러진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 자신인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너에게 잘해주었다면, 내가 너에게 의지하는 만큼 너에게도 내가 의지가 되어주었다면 너는 이 거짓말 같은 일을 미리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네가 하는 말을 믿지 않을 내가 아니었으니까.

그걸 내가 너에게 알려주지 않아서, 네가 모르게 해서 우리는 지금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걸까. 네 모습을 한 다른 이에게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지금 듣고 있는건, 과거의 내가 저지른 벌일까.


그럴까, 사토시.



머리가 아팠다. 지금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오노는 더이상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 일을 해도 노골적으로 피했고 둘만 있을 시간 따위 내어주지 않았다. 따로 이야기를 좀 하자 붙잡으러 다니려고 하여도 오노는 요령 좋게 피했고, 제발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는 문자는 벌써 무시당한지 오래였다. 일단 이 미칠 것 같은 감정을 정리하고자 사쿠라이는 방송국 밖으로 나섰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믿어줄 사람은 자신의 주변에 딱 한사람 밖에 없었다. 마나베. 사쿠라이가 급하게 마나베가 있는 방송국으로 향했다. 지금 만나러 갈 것이니 기다리라는 문자 한통을 끝으로 마나베에게서 오는 연락은 받지 않았다. 아직 모두노래의 수록 시간이 아니었으니 만날 수 있다면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급하게 주차를 하고 사쿠라이가 아사히 본관으로 뛰어들어갔다. 그제서야 휴대폰을 켠 사쿠라이는 급하게 마나베에게 전화를 했다.


[사쿠라이! 너 연락도 안받고,]

“지금 본관 1층이니까 빨리 내려와요.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까.”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빨리.”


사쿠라이의 재촉 어린 목소리와 동시에 구두굽이 뛰어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쿠라이는 고개를 들어 에스칼레이터에서 달려내려오는 마나베를 바라보았다. 정말 못말린다는 표정을 하고 내려오는 마나베에 사쿠라이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불러내어 미안하다는 인사였다. 마나베는 휴, 한숨을 쉬며 사쿠라이의 앞에 섰다.


“너 대체 무슨 일이야? 일은?”

“선배라면 믿어 줄 것 같아서.”

“뭐가?”

“사람이 바뀐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사쿠라이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마나베가 어? 하고 되물었다. 장난을 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일도 때려치고 이까지 온 사쿠라이는 자신이 알던 사쿠라이와는 달라보였다. 무언가 초조해보였고 간절해보였다. 마나베는 일단 진정하고 커피라도, 라고 말했지만 사쿠라이는 그런 마나베를 붙잡았다.


“말해봐 선배. 말이 돼?”

“…사람이 바뀐다는게 무슨 말이야? 성격?”

“아니. 말 그대로 사람이 바뀌는거야.”

“……너 그 성격이 심하게 바뀌었다는 AD이야기 하는거야?”


마나베는 바로 사쿠라이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그 AD에 대한 이야기라면 사쿠라이가 이럴만도 하였다. 벌써 그의 짝사랑을 지켜본지도 퍽 오래 되었다. 사쿠라이는 마나베의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성격이 변했다고는 들었지만 그게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마나베는 사쿠라이의 그런 태도에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성격 바뀌는거야, 나도 한순간에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중이야.”

“왜요?”

“내 부하직원 하나도 그렇거든. 원래 껄렁껄렁거리던, 너도 알잖아? 노래 오빠 중에 하나인 야노 켄타. 걔도 성격이 좀 많이 부드러워졌거든. 다른 사람 처럼.”

“……야노 켄타,”


사쿠라이는 무언가 강한 느낌을 받았다. 왜인지 이 일이 연관되어져 있다는 생각. 사쿠라이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급하게 마나베를 향해 물었다. 야노 켄타라는 사람, 지금 어디에 있냐고. 마나베는 어? 하고 되물었지만 사쿠라이의 마음은 급했다. 왜 이 일이 관련되어져있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건가 싶었다. 갑자기 성격이 바뀐 둘. 이렇게 가까이에. 마나베가 휴대폰을 들어 잠시만, 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멀리서 누군가가 마나베를 불렀다.


“피디님!”

“…어, 알아서 왔는데?”

“…저게, 야노 켄타?”


사쿠라이의 물음에 마나베는 자신에게 파일을 들고 뛰어내려고 있는 켄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쟤는 왜, 라고 물으려고 했지만 사쿠라이는 그 길로 바로 마나베의 팔을 놓고 켄타에게로 다가갔다. 아니라고 해도 괜찮았다. 그저 지금, 지금 자신의 감정과 촉에 솔직하고 싶었다. 달려내려온 켄타는 숨을 헐떡거리다가 이내 자신의 앞에 서있는 커다란 남자에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놀라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야노 켄타.”

“……아, 안, 안녕하세, 요.”


사쿠라이는 켄타의 움직임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어쩔줄 몰라하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왜인지 익숙했다. 아무말도 없이 서있는 둘에 마나베는 대체 사쿠라이 쟤가 오늘 왜저러나 중얼거리며 둘에게 향했다.


“야노군. 미안 놀랐지. 인사해. 내 후배 사쿠라이 쇼. TBS PD야.”

“……아,”


켄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을 자신과 마주쳐주지 않았다. 사쿠라이의 머릿속에 마나베가 예전에 했던 말들이 스쳐지나갔다.


‘새로 들어온 노래오빠 말이야. 정말, 뭐랄까 착한 것 같기는 한데 건방져. 쪼끄만 말티즈가 자기가 맹수인 줄 알고 사자 앞에서 으르렁거리는 꼴이라니까?’


마나베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재미있는 녀석이라고, 천성이 착해서 결국에는 좋은 길을 선택한다고. 사쿠라이가 켄타에게 팔을 살짝 뻗었다. 그런 사쿠라이의 움직임 하나에 켄타가 살짝 떨며 급하게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사쿠라이의 눈에 켄타의 행동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스쳐지나갔다. 안경도 끼지 않았으면서 습관처럼 눈 앞에 있는 안경을 치겨올리는 행동. 피, 디님, 이라고 작게 말하는 그 모습까지. 사쿠라이의 눈에 더이상 켄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네가. 사쿠라이가 켄타를, 아니, 오노를 붙잡았다. 갑자기 느껴지는 사쿠라이의 커다란 손에 오노가 깜짝놀라 고개를 들어 사쿠라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거야. 당신은. 사쿠라이가 천천히 입을 열고 작게 속삭였다.


“오노, 사토시.”


오노의 경우 

오노의 머리는 터질 것 처럼 부풀어올랐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그 원인은 딱 하나. 켄타에 의한 것이었다. 갑자기 밤에 전화가 온 켄타는 자신에게 짧게 말했다. 다 걸렸어, 사쿠라이 피디한테. 내가 알아서 할건데, 알아는 두라고. 그 말을 끝으로 켄타는 전화를 끊었고 다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켄타의 목소리가 마치 운 것 처럼 느껴졌다. 뭐라고 말을 더하고 싶은데 전화도 받지 않는 켄타에 오노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다. 전부 걸렸다, 라는 말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건 사쿠라이와 관련되어져 있는 일일까. 오노는 더이상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는 켄타를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무섭기도 하였다. 당신을 만나게 되면 당신은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사쿠라이에게 무슨 말을 들었길래 당신은 그리 운 것 같은 목소리를 내었을까. 오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일주일이었다. 남은 시간은 그정도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믿고 싶은 시간이었다. 오노가 잔뜩 한숨을 내쉬고 있던 중 마나베가 급하게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마나베의 뒷모습을 보다가 오노는 이내 자신의 손에 꼭 마나베에게 빨리 전달하라고 들은 서류가 있음을 인지했다. 미친, 이걸 왜 잊었지. 오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가고 있는 마나베의 뒤를 쫓았다. 발이 얼마나 빠른지 벌써 사라진 마나베에 어쩌지, 중얼거리다 결국 1층까지 오게 되었다. 마나베가 보이자마자 마나베를 불렀고, 에스칼레이터를 뛰듯이 내려와 숨을 고르던 중 자신의 앞에 서있는 남자를 발견하였다. 왜, 당신이 여기에.

사쿠라이였다. 모든 것이 걸렸다는 말에 반드시 연관되어져있을 남자. 오노는 자신도 모르게 오랜만에 오노 사토시가 되었다. 야노 켄타라면 어찌 굴었을까 라는 생각보다, 자신의 안에 있는 오노 사토시가 가장 먼저 튀어나올 수 밖에 없었다. 사쿠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붙잡힌 팔뚝에서 느껴지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오노 사토시, 그렇게 부르는 사쿠라이에 오노는 자신도 모르게 사쿠라이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자동반사인지, 아니면 습관인지. 그것도 아니면 …당신이 나를 알아차려 주었으면 좋겠는 것인지, 이제는 모르겠었다.


사쿠라이와 오노의 경우 ↓

“그래서?”

“……그게 다예요.”


사쿠라이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홀짝거렸다. 자신의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것 같은 오노가 보였다.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으면서 왜 몰랐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나베에게는 대강 이 친구랑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고 말한 뒤 오노를 데리고 방송국 주변 조용한 카페로 향했다. 조금만 물어보자 술술 말하는 오노에 사쿠라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자신의 탓도 있었다. 애를 얼마나 못살게 괴롭혔으면 모르는 술집에 가서 취해 그런 소원을 빌겠나 싶었다. 사쿠라이는 그저 한숨만 내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사쿠라이에 오노가 눈치를 보며 꼬물꼬물 입을 열었다.


“…피디님, 화, 나셨죠….”

“응.”

“…속이려고 속인게 아니라, 안, 믿어주실 것 같아서….”

“그게 화가 나.”


사쿠라이는 오노의 말에 고개를 들어 오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싫었다. 네가 정신을 놓았으니 나도 정신을 놓고 너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일그러진 방법이라도, 열기에 취해서라도 괜찮으니 너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근데, 나는 대체 누구에게 사랑을 고한 것인가.


“일단 일주일 정도라고 했지. 남은 시간.”

“……네. 확실하지는 않지만….”


사쿠라이는 절실하게 담배가 고팠다. 잘 피지도 않지만 그냥 이런 상황에는 한대 정도 피고 싶었다. 자신에게 답답한 것인데 쩔쩔거리는 오노에 화가 났다. 차라리 내 탓이라고 욕을 하지 왜 너는 또 내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인지. 사쿠라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얘 사랑한거 아니야. 병신새끼야.’


오노의 탈을 쓰고 있는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라 머리를 어지럽혔다. 몇년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잔인한 말. 그리고 그 말이 가지는 힘. 사쿠라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노는 그런 사쿠라이에 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사쿠라이는 그런 오노를 바라보았다. 전혀 다른 사람의 몸에 있어도, 지금은 네가 오노 사토시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는데. 그건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알아서 일까. 사쿠라이가 오노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잡았다. 아니, 굳이 정의하자면 다정하게.


“널 좋아해.”

“……네?”

“이 고백을 지금의 네가 아닌 사람한테 했는데, 그 사람이 그러더라. 난 너 사랑한거 아니라고.”

“…피디님 그게 무슨,”

“그러니까 찾을꺼야. 어떻게 해서든 정할거야. 그 말이 뭔지. 그 말이, 맞는지.”


사쿠라이의 말에 오노는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이렇게 들을 줄 몰랐다. 또한 켄타에게 이미 고백을 했다는 말을 듣는 것도, 켄타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오노가 어쩔줄 몰라하며 자신을 보자 사쿠라이는 다정한 눈길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도 알아둬. 그리고 준비해.”

“……어떤,”

“나를 받아들일건지, 찰건지. 그리고 그 말에 책임을 지는 나도 봐줘.”

“…….”

“그게 지금까지 나를 속인 벌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나를 생각해. 사쿠라이는 그렇게 말을 하곤 카페 밖으로 나갔다. 더이상 있다가는 자신의 가장 못난 부분까지 말할 것 같았다. 당당한 오노 사토시. 그게 좋았던걸까 나는. 그러니 그 모습에 반해 몇년을 참아왔던 감정들을 뱉어낸 것일까. 그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타이밍이 안좋았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때니까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인걸까. 사쿠라이가 앞머리를 거칠게 헝끄러뜨렸다. 정리가 되어지지 않는 마음을 표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켄타와 오노의 경우→←

켄타는 한숨을 쉬며 집으로 향했다. 안그래도 힘든 AD일을 하면서 신경쓸 것이 늘고 사쿠라이까지 피해다니려고 하니 힘든 것은 두세배가 되었다. 켄타는 오늘도 고생한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괜히 욱하는 성격 때문에, 그리고 사쿠라이 때문에 그런 짓을 벌였다. 주변에서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욕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자신에게 와서 지금까지 미안했다고 사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타케다는 거의 짤리듯 사쿠라이의 모든 일에서 내쫓아졌고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는 일에 괜히 감정이 앞섰다. 감정이 앞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쿠라이에게 화를 내었고 모든 것을 토해냈다. 현재 오노와 자신에게 일어난 일부터, 자신의 감정까지. 앞머리를 거칠게 헝끄러트린 켄타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자신의 무덤을 자신이 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노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연락을 해서 뭐라고 할건데. 그런 생각이 들 뿐이었다.


“…야노씨.”


집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켄타는 오랜만에 들리는 자신의 원래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놀라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자신이 있었으니까. 아니,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오노가 있었으니까.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지금 가장, 부러운 사람.


“……연락을 너무 안받으셔서 왔어요. 갑자기 죄송해요.”

“…니네 집 네가 온건데 뭐가 그렇게 미안해.”

“……피디님이 오셨었어요. 오늘.”


켄타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 사람이 너를 왜, 아니 나를 왜 만나. 켄타가 당황하자 오노는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자고 말했다.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오노의 말에 켄타는 그러자며 집 문을 열었고 둘은 집으로 들어갔다.


“…말씀 다하셨다고, 다 아시는 눈치로 오셨어요. 제가 켄타씨 몸에 들어가 있다는건 몰랐고…. 마나베씨 만나러 오셨다가 알아차리셨나봐요. 죄송해요. 제가 아닌 척 했어야 했는데….”

“…뭐 됐어. 먼저 걸려서 다 말한건 나니까. 내가 미안해.”

“……아니에요.”


둘 사이에 공백이 흘렀다. 오노는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었고 켄타도 마찬가지였다. 오노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를 좋아한다고 하셨어요. 켄타씨에게 고백했다고. 물론, 켄타씨가 아니라 저인줄 알고 고백한거였겠지만.”

“……어.”

“저한테 말 안한건 이해해요. 켄타씨도 당황스러우셨을 것 같고….”


뭘 이해해. 네가 뭔데 나를 이해해. 나의 이기심에 대해 뭘 알고. 켄타의 일그러진 감정이 툭하고 튀어나올 뻔 했지만 켄타는 그 말을 애써 삼켰다. 오노는 켄타의 눈치를 보았고 켄타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더라. 그러니까 이 빌어먹을 몸 바뀌는게 끝나면 그때 너 알아서 잘해봐.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켄타씨가 그랬다고 그랬어요. 저를, 사랑한게 아니라고.”

“…….”

“…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켄타는 오노를 바라보았다. 원망이 아니었다. 원망이 담긴 말이라기 보다는 궁금함에 물어보는 것 같았다. 켄타는 한숨을 쉬었다. 화가 나서 한 말이지만 진심이었으니까. 켄타는 애써 차분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그냥. 좋아한다는 새끼가 사람이 이렇게 변했는데도 모른다는게 웃겨서.”

“…….”

“내가 이상하게 군것도 그렇게 다 정리 됐으니까 너랑 그 피디 사이는 달라지는게 없겠지. 그러니까 안심해.”


켄타의 말에 오노는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말하는 켄타의 눈이 왜인지 슬퍼보였다.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있다고 해도 결국에는 자신의 얼굴이었다. 성격도 이제 알 수 있었다. 켄타의 쓸쓸한 표정을 짓는 그 감정을 오노는 알고있었다. 그러니 말을 더이상 할 수 없었다. 하고싶지 않았다. 당신은, 나의 몸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사쿠라이에게 그 말을 듣고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왜 당신은 그렇게 슬픈 얼굴로 나에게 그렇게 말을 꺼내는 것일까. 오노는 입술을 한번 꾹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사쿠라이 피디님이 좋아한건 저일까요 아니면 켄타씨일까요.”

“…뭐?”

“피디님을 본지도 벌써 3년 가까이 되어가요. 저를 처음부터 좋아하셨다고 하여도 고백을 한건 제가 저일때가 아니라 켄타씨일 때였어요. 답답한 제가 아니라, 누구보다 당당하고 말도 잘하고 유머있는 켄타씨일때요. 저랑 너무나도 다른, 제가 가진 단점이라고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켄타씨일때요.”

“…너,”

“…그래서 저는, 그래서 저는 모르겠어요. 막 기뻐할 수도, 그렇다고 슬퍼할 수 도 없어요. 저는, 저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


오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켄타로 오노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켄타는 고개를 돌리고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켄타는 일어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벽에 걸려있던 겉옷을 거칠게 입었다.


“어디가시는,”

“더이상 이야기 해봤자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너희 집이니까 내가 나가라고는 못하겠고. 내가 나갈게. 여기서 오늘은 자. 간다.”

“켄타씨!”


켄타는 오노의 불음에 뒤돌아보지도 않고 신발을 구겨신고서 문을 열었다. 꾸물거리던 날씨가 터진 듯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칠게 내리는 빗줄기가 소나기인 듯 했다. 소나기. 우리와 가장 잘 어울리는, 아니 지금 자신의 감정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갑자기 일어난 사건. 갑자기 일어난 감정. 조금 지나면 사라질 것. 그치지 않을 것 같지만, 언제 끝날지 모를 것 같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끝나는 이 소나기처럼. 찰나의 감정일 뿐인 그것. 켄타는 망설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우산을 쓸 필요도 없었다. 차라리 머리라도 식힐 겸 비를 잔뜩 맞아버리는 것이 나았다. 묵묵하게 걸어나가는 켄타를 오노가 뛰어나가 잡았다.


“왜 비를 맞아요. 제가 켄타씨 집으로 갈게요. 지금 나가서 어디를 가려고 그래요. 켄타씨 집에 가족분들도 계시잖아요. 우산 쓰고 들어가세요.”

“…치워. 괜찮으니까.”

“감기 걸려요. 고집 피우시지 말고,”

“하지 말라고!!”


켄타는 거칠게 오노가 건낸 우산을 뿌리쳤다. 우산은 쉽게 오노의 손에서 떠나 바닥에 떨어졌다. 쏴 하는 소리와 함께 두사람이 젖어들어갔다. 켄타씨? 오노가 작게 불렀다. 켄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게 달랐다. 우리는 달랐다. 틀린 것은 자신이었다. 네가 가진 이런 다정함은 나에게 없었다. 마음대로 굴고 결국에는 자신의 화에 못이겨 씩씩거리기만 하는 자신은 오노와 다른 사람이었다. 사쿠라이가 자신을 좋아한다 생각하는 저 마음이 웃겼다. 아니었다. 네가 둔해 몰랐을 뿐이었다. 말장난을 하고 괜히 덤비는 자신이 아닌, 켄타가 아닌 오노 사토시 너를 좋아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러면,


“내가 너무 비참하잖아.”

“…네?”

“내가, 시발 내가 너무 비참하다고.”


켄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오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이내 다시 달려가 우산을 집어들어 켄타에게 씌어주었다. 젖고 있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이면서 모든 우산을 켄타에게 건내주고 있는 오노가 보였다. 그런 모습에 켄타는 그저 웃음이 나왔다. 정말, 못이기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쿠라이가 네가 아니라 나를 좋아한다고 그랬지?”

“네? 아, 그게, 그럴게 당연한,”

“뭐가 당연한데.”

“…제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켄타씨는 가졌고, …그건 사쿠라이 피디님이 저한테 바랬었던 성격이니까요.”


켄타는 오노를 바라보았다. 오노의 눈은 진심이었다. 자신의 몸이기에 알았다. 저 눈은 진심이 담긴 눈이라는 것을. 왜 너만 모르는 것일까. 너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오히려 그런 말을 내뱉으면 더 작아지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라는 것을.


“아니. 아니야.”

“……네?”

“너만 몰라. 병신같이 너만 모른다고.”

“…….”

“너의 다정함이, 너의 신중함이, 너의 배려가 사람을 끌어당긴다는걸 너만 몰라. 반대야. 그딴거 하나 없는 나보다 네가 더 나아.”


켄타는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한번도 꺼내본 적없는 자존감이 낮은 자신이었다. 그게 싫어서, 결국 자존감이 낮다는 것을 드러내면 상처를 받는 것도, 무시를 받는 것도 자신이었다. 자신이 살아온 세상은 그러하였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을 숨겼다. 상처 따위 받지 않는 사람처럼. 그런건 모르는 사람인 것 처럼. 댓가 없는 친절은 결국 독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친절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성격은 이렇게 고착화 되었다. 굳이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쿠라이 쇼라는 남자를 만나고, 내가 너와 같았으면 어떠했을까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차라리 너처럼, 내 약한 모습을 다 드러내었다면. 내가 너였다면 어떠했을까. 내가 너와, 닮았다면. 그렇다면 사쿠라이가 주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이렇게 죄책감이 들지 않았을 것 같은데.


“네가 그렇게 말하면 더 비참해지는건 나야. 비참해서 디질 것 같다고! 누가봐도 사쿠라이 쇼가 사랑하는건 너라서. 근데 그런 너랑 나는 너무 달라서!! 그게 시발 비참하다고!!”

“케, 켄타씨,”

“그러니까 입닥쳐. 나한테 친절하지마. 제발, 제발 부탁이야.”


켄타는 그대로 오노를 뒤로하고 뛰었다. 비가 내렸다. 내리는 비에 몸을 맡기고 목적지 따위 없는 길을 갔다. 모든 상황이 자신과 너무 같았다. 내리는 소나기, 갈 곳 잃은 자신. 켄타는 눈을 꼭 감았다. 차가운 빗방울 사이에 뜨거운 물방울이 섞여 켄타의 얼굴을 뜨겁게 감쌌다. 괜찮을 것이다,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비가 그치는 것 처럼 모든 것도 그칠 것이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 지 않다.

사쿠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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