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이해하는 데는 딱 삼 초가 걸렸다. 일. 어, 씨발, 이게 뭐지? 이. 물이 와 쏟깃노. 삼. 아, 씨발……, 진짜 좆됐네.

장훈은 누구를 갈구는 데도, 갈굼받는 데도 익숙했지만 적어도 안상구에게만은 갈굼받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자존심이랄까, 적응 문제였다. 그렇다고 상구가 뻗대면서 장훈과 기싸움을 하려는 편인가 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장훈이 바락거리면 따라 뭐 씨벌! 하긴 했지만 금세 수그러들었고 싸가지가 바가지여, 하고 시키는 대로 순순히 굴었다. 깡패 치고서는 참 순박했다. 그러니까 형님한테 뒤통수나 맞지. 사사건건 똑바로 좀 하라고 잔소리를 달고 사는 장훈을 향해 상구는 느는 얼마나 잘한다고……, 하면서 소심한 짜증을 부리기 일쑤였다. ‘내는요, 니처럼 등신 같이 실수는 안 한다.’ 이렇게 대답한 게 딱 일주일 전이었다. 상구가 젓가락 한 짝을 잃어버렸을 때였다. 장훈은 그때만 해도 장담하고 있었다. 결코 서류에 물 쏟는 실수 같은 건 안 할 거라고.

 

근데 이 새끼는 왜 애먼 탁자에다가 서류를 올려놓고 지랄이야. 가만 생각해보면 이게 제 잘못이 아닌 것 같다가도 물에 젖어 번진 글씨를 보면 잘못이 아닐 수가 없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놀라서 당장에 컵을 치우고 물을 눌러 닦긴 했지만 이미 저지른 일을 돌이킬 수가 있겠는가. 누를수록 종이만 망가지는 것 같아 금방 그만뒀다. 암만 장훈이 행동한 후에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고 해도 이건 좀, 정도라는 게 있지. 똑같은 서류를 구해놓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고 이실장한테 잘못 연락했다가는 당장 안상구한테 연락이 갈 판이다. 장훈은 소파에 몸을 붙이고 양손으로 얼굴을 단단히 감쌌다. 생각을 하자. 생각. 장훈의 시선 끝에 천천히 흔들리는 시계침이 닿았다.

안상구가 돌아오기까지는 아직 두어 시간 정도 남았다.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임을 알았지만, 장훈은 상구의 업무와 제 상황의 경중을 따져보고서 전화 걸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큼, 큼. 목청을 가다듬고 장훈은 소파에 등을 깊이 파묻었다. 안상구에게 전화하는 일이 이렇게 긴장된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약간의 소음과 함께 익숙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웬일로 우리 싸가지가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혔나. 밥 묵었어?”

“아니, 뭐, 아직……, 깡패야. 니 퇴근 멀었나.”

“퇴근? 평소랑 뭐, 비슷할 거여. 와. 일찍 드가까?”

“뭐 일찍 오라카는 건 아이고……, 내가 지금 딴 게 아이고, 여 위에 청소하다가, 니 서류 있제. 거 탁자 위에 한 뭉탱이 있는 걸 봤는데.”

“그게 거 있었어?”

반색하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장훈이 입술을 구겼다. 어, 씨발. 이거 느낌이 싸한데. 휴대폰을 고쳐 쥐고 장훈이 푹 기댔던 몸을 앞으로 빼 바짝 세웠다. 영 불안한 기분에 손끝을 굴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게 뭔데?”

“겁내 중요헌 거.”

“어?”

“딱 묶어갖고 내 책상 위에다가 올려놔 줘야. 고게 우짜다가 탁자에 가부럿나……, 요상허네.”

“…….”

“우장훈이?”

“어어……, 어. 알아묵었다, 섀끼야. 내……, 끊어.”

대답도 안 듣고 통화를 끊어버린 장훈은 그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실감했다. 이럴 순 없다. 탁자 위를 돌아보니 회생 불가의 젖은 종이쪼가리랑 원흉이 된 유리컵 하나, 물 닦고 던져둔 걸레짝이 놓여 있었다. 처참했다. 변명의 여지도, 복구의 여지도 없는 현장이었다. 이걸 숨겨? 말어? 장훈은 일단 컵과 걸레까지는 치워두기로 했다. 종이는……, 쓰레기통에 넣기는 좀 그런데, 싶다가도 글씨가 안 보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아직 덜 젖은 부분만 빼고 모두 폐기처분했다. 그러고 나니 남은 종이쪼가리는 쓰레기 이상으론 보이지 않았다. 됐다. 이게 최선이다. 장훈은 유난히 빠르게 굴러가는 것 같은 시계침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 소파에 머리를 파묻었다. 좋다. 이제 기다릴 건…….

 

상구가 돌아온 건 정확히 아홉 시 반이 되어서였다. 도어락 소리와 함께 장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이구, 우리 싸가지. 자나?”

“뭘 씨, 벌써 자기는……, 니 그, 뭐, 일은 잘 끝냈으요?”

어물어물하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상구는 눈만 끔벅거렸다. 어디 아픈가? 했더니 아니라고 고개만 도리질 쳤다. 기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을 상구가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양손은 미적거리며 허공에서 허우적댔고 상구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가 놓기만 반복하며 뭐 마려운 개새끼마냥 굴었다. 상구가 미간을 가만 구기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혹시……,”

“……?”

“……뭐 갖구 싶은 거라두 생겼어? 사다 주까?”

“?”

“아녀?”

“뭔 소리야?”

“갑자기 이쁨 떨길래 혀본 말이여. 우장훈이가 존댓말이 웬말이냐. 나랑 내외헐라고? 아이믄 끼라도 부려? 답잖게……, 뭐허냐, 지금.”

영문 모르는 상구는 그저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실죽 웃기만 했다. 이유를 말하면 사다 준단 얘기 같은 건 못할 것 같은데. 장훈은 어물거리며 소맷자락 꽉 잡은 손을 못 놓고 어……, 했다. 시선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겨우 상구의 낯 위에서 우뚝 멈추었다. 새까맣고 순박한 눈동자가 장훈을 올곧게 담고 있는 것을 마주하는 순간, 장훈은 생각했다. 환장하겠네, 씨발.

“……내가요,”

“어어, 우장훈이가요.”

“니……, 니 서류.”

“서류?”

“아, 고거 말이야. 니가 탁자에다 고마 딱 나 보란 듯이 올려놓고 간 그거 있잖아, 그거!”

“실수로 두고 간 거래니깐 참 그른다, 씨벌. 그려, 그려. 해서 뭐?”

“……젖어뿟으요.”

상구가 빠르게 눈을 끔벅거렸다. 끔벅, 끔벅. 장훈은 말이 없었다. 대신 쥔 손을 놓지는 않았다. 미안함과 민망함에 꾹 다문 입술만 가볍게 들썩들썩했다. 시선 슬쩍 들어올리니 상구가 동그랗게 눈 뜬 채로 장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씨발. 장훈은 묻지도 않은 말에 반사적으로 변명하듯 빠르게 주절주절했다.

“아니, 씨바, 그, 어?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라. 그 탁자에 서류가 있을 줄 내 알았겠나. 해가 내는 별 생각도 읎이 그냥……, 물 대충 뒀다가 쏟아뿟는데, 씨바 이게 하필 또 거에 쏟깃네. 젖어뿟는데 그게 또 보니까 딱 니 서류야. 캐서 전화했드만 니는 중요하다 카지, 씨바 내는 뭐,”

“느 설마 고거 때문에 나헌테 존댓말 쓴 거여?”

“어?”

“나가 중요허대서 막 눈치 본 거여? 맞어? 그거여?”

“……아니, 씨바, 니가 중요하다고……!”

“아, 흐흐, 씨벌 진짜 미쳐불것네……,”

상구가 고개를 틀고 실실 웃기 시작하자 장훈의 표정이 민망함으로 팍 구겨졌다. 귀끝이 희미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뭐, 씨발! 왠지 열이 뻗쳐 제 잘못한 것도 잊고 팔을 내팽개치자 상구가 연신 어깨 달싹거리며 눈을 맞춰 왔다. 새까만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거 다시 뽑으믄 되는 거여. 농이여, 농. 나가 돌았다구 그릏게 중요헌 걸 탁자에 막 둘라고……, 느 그냥 넘길 줄 알었드만 그라도 사짜라구 기록에 막 예민헌갑다?”

“…….”

“아까 고거 함만 더 혀보믄 안 되냐. 어? 어이. 우장훈. 우장훈이. 아, 씨벌. 느 한 귀여움 헌다야. 진짜…….”

“……이……, 좆같은 섀끼가, 진짜, 마!! 이, 개 씨발럼아!!”

당장이라도 멱을 잡아 내동댕이칠 것 같은 장훈의 손길에 상구가 다시 실실 웃었다. 아이고, 변호사 양반 사람 잡는다……,

“야, 태도가 완전 낮밤이여. 쫌만 더 버팅길걸.”

“이 개노무 섀끼……,”

“뭐라도 혀달랄걸 그랬지.”

“시꺼!”

“염병. 매정헌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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