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등도 깜빡거리네요. 어떻게 여기까지 올 동안 버텨준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 정신사나워. 계기판에 쓸데없는 불빛 너무 많다고 생각 안 하세요? 비상등도 짜증날 지경이에요. 여기서 나가봤자 우주미아밖에 더 되나. 아 꺼졌다. 어둡네요. 비상전력이고 뭐고 중력 앞에선 다 무용지물이었나봐요. 와 진짜 덥다. 제가 좀 횡설수설하죠? 이게 다 더위 먹어서 그래요. 온도 조절 장치가 고장인 건지 이 거리에선 그것도 쓸모없어진 건지...... 원래 떠드는 것 하난 잘 하는 사람인데 말이죠 제가. 선배님. 선배님 주무세요? 전 그래도 선배님이랑 같이 눈을 감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비티 보셨나, 거기 나오는 장면 아시죠?  전 제가 죽기 전까지 등속으로 날아가 영영 미아가 돼버리는 죽음만 상상해왔거든요. 그건 너무 외롭잖아요.

 다음생에도 제 선배님 해주세요. 직종은 좀 바꾸고요. 조용히 하라고요? 죄송해요. 아... 환생은 지구에 묻혀야만 가능한 걸까요? 왜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여긴 흙도 없고 흙으로 돌아가게 해줄 미생물 한 마리 없는 척박한 곳인데. 아냐 뭐든 긍정적으로 살아야한댔어요 선배님. 운만 좋으면 이 자리에 또 다른 지구가 태어날 수도 있다구요. 저게 블랙홀로 변하면 안 되는데. 아무튼 한 50만 년만 기다려봐요 우리. 그땐 우리가 남겨준 아미노산 덕에 새 생명이 싹틀지 누가 알겠어요. 우리가 아담과 이브가 되는 거예요. 하하! 어쩌면 우리도 난파된 우주비행사의 후손일지 모르겠어요. 개소리하지 말라고요? 농담이었어요. 선배님. 

 선배님. 곧인 것 같죠? 우리 지구에선 몇 백 년 뒤에 우리의 죽음을 관측하겠어요. 초신성 하나, 한 달여간 깜빡이다가 빛을 잃음. 하하. 

 선배님. 저번에 선배님 개인 물품 중에 불빛나는 크리스마스 카드 있잖아요. 그거 깜빡거리기만 하고 예쁘지도 않다고 시비건 거 죄송해요. 다시 생각해보니 깜빡거리는 것도 꽤 낭만이 있을 것 같아요. 아 이제 숨이 막혀서 말을 더 못하겠어요. 용서해주세요. 선배님 말 없는 만큼 제가 더 해야 하는데. 와 저거 정말... 아름답네요. 이런 건 망원경으로만 보고 싶었는데. 점점 다가와요. 안녕히 주무세요 선배님. 눈 깜빡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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