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장의 끝에서 첼레스테스의 노성이 들려왔다. 아서는 공중타격대 대장과 함께 비행기에 탄 사람이 누군지 알고있었다. 불의 화살은 아직 그치지 않았는데도 조급해진 마음에 아서는 검과 발을 빠르게, 더 힘이 들어가게 했다.

방금 세 명의 기사를 전투불능 상태로 만든 3왕자는 신의 사자가 양 손에 쥐어 준 무구를 꾹 쥐고 한 번 심호흡을 한다. 그는 오른쪽에서 오는 검을 막는다. 숨을 들이키는 호흡과 동시에 후각은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이곳에선 언제나 피냄새가 난다. 피가 고이다 못해 썩는 냄새. 고여있는 공기.  그런 기분은 사람을 괜시리 불안하게 한다. 마치 나아갈 수 없는 장벽에 막혀있는 것처럼.

저 멀리서 클레이오의 피냄새가 난다.

그건 신경증인가? 그러나 클레이오는 틀림없이 피를 흘리고 있을 것이라고, 아서는 확신에 가까운 우려를 했다. 아서는 클레이오와 합을 맞춰 전투를 해온 경험이 셀 수 없이 많은 만큼 그의 에테르 유량을 가늠하는데 능숙했다. 다만 안다고 해서, 아서가 언제나 그의 마법사의 에테르가 바닥나기 전에 전투가 끝나기를 바란다고 해서, 일이 터지기 전에 전투를 끝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있든 없든 에테르가 바닥나기 직전까지 뽑아내야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전장이었다. 

한 번 시전할 때 다섯 개 정도 만들어지는 창은, 지상의 아서는 몇번인지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브룬넨 비행선의 동력부를 꿰뚫었다. 직후 '비탄의 정화'와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불의 화살이 있었다.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을 저 예언의 마법사는 당연한 과업이라는 듯이 해냈다. 하늘에서 대지를 향해 쏘아내리고, 중력을 거스르며 적만을 쫓는 불꽃은 아서가 기억하는 전장 가운데 최초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불꽃은 그쳤고 아서는 등 뒤의 고요햔 평야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아서는 3월 공세 첫날 새벽을 기억한다.

어떤 기억들은 감각으로 남았다. 미지근한 바람의 온도와 막사 밖에서 서성이던 발소리, 그리고 클레이오의 코트에 남아있던 피냄새. 

자다 깨서 오늘이 며칠인지 흐릿한 정신보다 레이의 발소리에 몸이 먼저 반응해 아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침대는 늘 그러하듯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그 애는 존재감이 옅었지만 알아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서는 그 존재감에 무심코 진주의 도시에서 나온 후 연금당한 클레이오와, 그 저택을 서성이던 자신을 떠올린다. 

아니, 그의 방 테라스 아래에 서있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언제나 커튼을 젖히며 창을 연 클레이오를 생각했다. 아서는 테라스 너머의 클레이오의 심정을 생각하며 막사의 문을 열어 젖혔다. 자기 눈 색을 닮은 끈으로 머리를 묶은 뒤통수를 보자마자 그걸 더 관찰할 새 없이 이름을 부른 건 거의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레이."


막사에서 등을 돌리고 담배를 피우던 클레이오는 몸을 돌리며 아서를 바라봤다. 담배를 든 오른손의 성흔이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흐릿해져가는 담배향과 푸른빛에 머리가 선명해져갔다. 성흔의 빛은 단 하나의 사실만을 암시한다는 것이 머리속을 스쳤다. 그 순간, 그 애의 입에서 나올 말이 뭔지 예상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브룬넨군이 쳐들어올거야." 레이가 말했다.

그러나 막상 말이 나오자 예상과 확신은 잊혀지고 입 밖과 인지에 남는 것은 대답 뿐이었다. "알고있어." 그가 그렇게 받아주자 마법사는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느리게 완전히 감았다 떴다. 순간인 동시에 영원같은 시간이 지났다. 성흔의 빛과 피냄새가 사라지고 담배향과 클레이오의 피로한 얼굴만이 남았다.




2.

아세르 대위는, 전투가 종결되었다고 말해도 될 즈음, 진 소위에게 [조혈][치유][경감] 마법으로 응급처치를 받은 후 제믈리 영지의 작은 의원으로 옮겨졌다. 에테르 그릇이 금방이라도 깨질듯 너무 불안정해 수도의 군사 병원로 이송할 수 조차 없었던 탓이다. 그 다음날 데왈리 상사의 전투기를 이송된 6레벨의 마법사의 에테르 쏟아붙기가 효과는 있었는 모양이었다. 다만 아직까지 의식을 되찾지는 못했다.

이 모든 건 멜빌 소위에게 보고받은 내용이었다. 아서는 전투가 끝나고 한 번도 그 작은 의원의 이층 끝 병실을 방문하지 못했다. 3월 공세에서 오스왈드 대령이 사망하고 니네베 연대장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그 자리를 지킨게 된 건 아서였고, 한 연대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써 전선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아서는 서류를 넘겼다. 클레이오는 소령으로 진급할 것이고, 라에티카 공국 기사단의 1/3을 무찌른 공으로 영예훈장 두 개를 수여받을 것이다. 그리고 멜키오르의 명령하에 그 공은 침묵될 것이다. 서류에 적힌 검은 글자부터 서류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오른손 위에 있는 성흔까지, 모두 한 사람을 향해 흐른다. 하지만 아서는 이런 통보 말고 마법사가 깨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싶었다.

답답함에서 탈피한 것은 막사 밖에서 들려온 발소리 때문이었다. 그는 공문 표지를 덮고 고개를 들어 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바람소리와 물냄새. 아서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틀림없는 클레이오의 발소리가 들렸다.

단련을 모르는 자들, 에테르를 몸에 운용할 수 없는 자들이 대개 내는 발소리였다. 걸음걸이에 힘은 없었지만 그 간격은 길었다. 아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막사의 문을 확 열어젖혔다. 4월이 끝나가는 미지근한 새벽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아서의 목에 살짝 맺힌 땀을 식혔다.

본래 이 시간에는 동쪽을 마주하고 불침번을 서는 병사들만이 있어야한다. 그것보다 가깝게 어떤 남자가 서있었다. 아서는 가만히 군복이 아닌 가벼운 옷을 입고 진지에 서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단단하지 않은 신발 바닥이 얕은 물과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아서는 이자가 물에 흠뻑 젖어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자는 아서의 시야가 닿음과 거의 동시에 에테르가 사라지듯이 순식간에 사그라진다. 아서는 남자가 사라진 자리를 조금 오래 바라보았다.

클레이오와 같이 있지 않은지 며칠이라고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환시에 아서는 오히려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환시를 레이와 착각했다는 민망함이 들었고, 이렇게 맑은 정신으로 환시를 보노라니 낯설었고, 레이가 보고싶었다.

그 후에도 종종 같은 환시를 보았으나 아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자는 아서를 바라보거나, 낡은 종이뭉치를 정리하거나, 에테르처럼 일렁이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는 정말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클레이오가 전선으로 복귀하며 환시는 사라졌고, 아서는 물에 흠뻑 젖은 그 남자를 잊었다. 그저 한때 전장에서 누구라도 볼법한 유령일 뿐이라고 치부하며.




3.

클레이오가 물에 빠진 건 한 순간이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그 남자가 보였다. '감히 저 마법사를 자신들이 구한답시고 나서도 되는 것일까? 그는 허공을 걷고 눈 앞의 사물에 세기의 시간이 작용하도록 만드는 존재인데?' 그는 책을 낭독하듯 가볍게 질문을 제시했다.

아서의 몸은 그 질문에 답하듯이 움직였다. 구해야해. 그렇게 고강한 마법을 쓰고 신의 권한을 위임받은, 저 애의 몸은 한낱 인간에 불과하니까.

몸과 물이 부딫히는 소리가 들렸고 귀에 물이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야 물 속의 레이가 보였다. 그의 어깨를 붙잡아 물위로 꺼냈다.

"레이, 레이! 정신 차려 봐!"

이렇게 가볍고 힘없는 몸이 그렇게 물에 잘 가라앉는단 말인가. 그를 더 부르려 했으나 에테르 고갈로 입 밖으로 나온 건 소리가 아닌 피였다. 온 몸이 무거웠다. 귀에 물이 찬것처럼 목소리가 웅웅 울리고 끊겼다. 다들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가 않았다. 그는 클레이오를 붙들고 힘겹게 제 고개를 들었다. 거부감과 두려움이 비치는 눈동자들이 그들을 훑었다. 그 사이, 그자가 서 있다.

클레이오와 두번째로 들어갔던 던전에서 보았던 연극이 이런 느낌이었던 기분이 든다. 관객을 향해 외치는, 투명한 베일을 쓴 것같은 배우들. 그 베일 너머로 비치는,

아서는 클레이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저 환시로 눈을 돌리면 끝장이다. 저 많은 이들에게 3왕자가 허공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일테니까.

그러나 눈을 돌려도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 피곤하고 다정한 기색이 비친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까닭은 애초에 그가 모르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중얼거림에 가까웠지만 동시에 이 곳에 있는 어떤 소리보다 가장 선명하게 들린다. 낯선 이의 입에서 나오는 낯선 언어. 그러나 그것은 늘 들어왔던것만같은 익숙한 어조이다. 어떤 말들은 해석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 아서는 그가 뭐라 말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누구도 저 낡은 종이에 쓰인 글을 읽는 남자를 보지 못한다. 그 남자를 스치고 니네베 연대의 군사들이 그들을 부축하러 다가온다.

아서는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 예언의 어조를. 허공을 보며 읊는 말과 똑같은 억양을. 목소리의 크기, 속도... 낭독의 그 모든 요소, 그 낯섬과 익숙함 사이에서 아서는 어떤 연결점을 찾는다.

그야 저 유령이 재와 강의 도시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잘 어울리지 않는가?

그러나 이렇게 알고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허락되는 순간에 도달했을 때, 그의 목소리로 온전히, 그 애가 말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기에 확 기절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하지만 불행히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회피는 눈을 감는 것이었다. 그를 부축하던 군사는 대위가 기절해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욱 불행하게도 소드 마스터의 감각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아서는 시각적 정보 대신 지독한 물비린내가 느낀다. 피가 썩는 냄새처럼 아주 지독한, 고여있는, 폐색을 아서는 느낀다. 

이것은 실재일까? 

아니면 환각일까? 

그래, 전장에 일 년쯤 있었다보니 코가 마비된 걸 지도 모르겠다. 

그럼 저 자는 실재인가?

감은 눈 너머로 새벽의 도래가 느껴진다. 엎지른 물이 퍼지듯 천천히, 그러나 피할 수 없이.

내가 잊은 기억은 클레이오의 울음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물비린내와 금속이 산화하는 냄새는 함께 흐려지지도 않고 강하게 서로의 존재를 피력한다. 보이지 않는 환시가 마치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닌다. 그 자취는 마치 빗방울에 패인 흙바닥처럼 다른 부분보다 짙고 질척거린다.

3월 공세에서 나는 한 번 죽었다. 깨달음은 번개처럼 소리없이 도달했다. 내 심장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닌 귀에서 들리는 이 약한 심장소리가 제가 껴안고 있는 클레이오의 것인지, 아니면 한 때 죽어갔던, 죽었던 내 심장의 환청인지 모르겠다.

피는 느리게 살과 갑주를 굴곡을 그리며 흐르고 레이가 흘린 눈물은 내 목을 따라 흘렀다. 이 넓은 전장에서 나를 어떻게 찾았는지, 내가 죽기 직전에 딱 때좋게 찾아낼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런 질문들을 이 애에게 물어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전생부터 지금까지 모든 걸 기억하는 이 애에게 정말이지 잔인한 일이 될테니까. 눈물은 곧 그쳤다.

그 때부터 클레이오는 어마어마한 양의 에테르를 내 몸에 쏟아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그리고 네가 지금까지 늘 착하고 선하고 상냥했다면, 죽음의 천사가 네게 자비를 베풀것이다*... 해가 실을 짓고 바람은 천을 짜는 동안 거대한 증기 베틀은 착착 돌아간다. 한 번 생각하고 철커덕, 한 번 생각하고 철커덕, 또 한 번 생각하고**...그림자 없는 햇빛이란 없기에 밤을 겪지 않으면 안 되리라***... ') 진언을 외어갈 수록 눈물이 멎고 말의 속도가 빨라졌다. 진언이 바뀔때마다 새로 발동되는 마법식이 마침점처럼 문장이 끊겼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에테르의 밀도가 너무 높아 질식사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마법은 나를 죽이지도 살리지 못했다. 나를 죽이고 있는 건 오로지 상부를 꿰뚫은 상처였다. 마지막에 클레이오는 내 몸에 기대 살려달라고 빌었다. 나는 레이가 울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살려줬을 때. 네가 나를 위해 최초로 외운 진언을 떠올린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나에게 기댄 네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지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피를 멎고, 상처를 치료하고, 감염을 막아줘. 이 녀석은 살아야 해.' 

그 투박한 말, 청원을.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뜻을. 나를 살려내고야 마는 너의 말, 목소리, 심장에서 손끝으로 도달하는 에테르. 네가 발언 할 수 있는 예언과 찬가와 네가 입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것들을 떠올린 이유는. 

그러므로 나는 클레이오에게도 자격을 주고싶었다. 이토록 나를 살리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입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자격, 영원하지 않은 죽음에도 오래도록 슬퍼할 수 있는 자격을, 하다못해 눈물을 흘려도 되는 자격일지라도. 아서는 언제나 그런 걸 바라왔다.

흥분된 감각에 지각되는 아군들, 민간인들의 반응들. 흐릿한 정신에 제 몸을 적신 것이 바닷물인지 피인지 확신하게 못하게 되었을 쯤, 기억 속의 클레이오는 제 몸을 바로 눕힌다. 아서는 레이를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저지할 새도 없이 감은 눈 너머로 청금빛 광채가 돌았고 낡아 바스러지는 종이를 붙잡는 손의 소리가 들린다. 아, 언제나 이랬다. 잔인하게도 나는 너의 성흔을 인식할 수 있는데 너의 성흔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 기이하도록 고요하게 울리는 클레이오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멎어가는 제 심장소리를 들으며, 아서는 무력감을 느낀다.

펜으로 종이를 긁는 소리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로, 눈물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는 다시 철이 산화하는 냄새로, 피의 냄새는 다시 무언가 썩어가는 내음으로 변한다. 사방이 막힌채, 고인채 썩어가는 것처럼.

그래, 바람 소리와 물 내음이 난다.

눈을 뜨면 뒤로 재와 강의 도시의 존재가, 한때의 클레이오가 보일 것같다.

다만 아서는 푸른 빛이 감은 눈 너머에서 일렁이는 환각을 느낀다. 푸른 빛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새벽빛이 도달하는 것같은 에테르가 아서의 몸을 감쌌다. 세상에 둘도 없이 가는 손이 아서의 손을 잡아았다. 레이가 정말로 울었던가? 그 일을 기억해낼 수 있었음에도 끝내 놓아준 이유는 그 때문이다.







*캔터빌의 유령, 오스카 와일드

**물의 아이들, 찰스 킹즐리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퇴고안함

논컾을 상정하고 썼으나 쉬핑글로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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